세기와 더불어 7-3. 쏘베트냐, 인민혁명정부냐? > 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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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7-3. 쏘베트냐, 인민혁명정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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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5,063회 작성일 15-04-21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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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쏘베트냐, 인민혁명정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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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격구에서 좌경바람이 제일 우심하게 나타난것은 정권건설분야였다.

정권건설에서의 좌경적편향은 교조주의, 사대주의, 모험주의에 중독된 사람들의 소부르죠아적조급성의 산물이라고 할수 있는 쏘베트건설로선과 쏘베트의 명의로 실시된 일부 시책들에서 집중적으로 발로되였다.


정권건설과 관련된 문제는 벌써 《ㅌ.ㄷ》시절부터 우리의 론의에 올라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는 중요한 화제거리가 되였다. 정권문제는 조선청년들에게 있어서 독립후에 상정해도 될 장래의것이고 또 국권수복이 이루어지는 조건에서만 그 건설에 착수할수 있는 리념상의 문제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우리는 그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정권형태에 대한 견해는 곧 그것이 어떤 성격의 혁명을 추구하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는것이 우리의 립장이였다.


정권문제가 우리의 정치생활에서 가장 격렬한 론의거리로 되였던것은 길림시절이였다. 길림의 정치무대에서 독립후의 국가형태에 대한 문제가 거론되지 않은 때란 거의 없었다. 3부계통의 독립군지도자들이 왕조정치나 부르죠아공화제를 주장하며 기염을 토할 때 김찬, 안광천, 신일용과 같은 구공산당계렬의 정객들은 즉시적인 사회주의의 실현과 프로레타리아독재를 부르짖었다.


박소심도 고전의 명제에 집착되여 로동자, 농민의 독재를 운운하였다.

그는 로농대중이 정권의 주인으로 되는것은 지지하면서도 독재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늘 머리를 내저었다.


길림청년들은 그 준비정도와 리해관계의 차이에 따라 왕조정치를 지지하기도 하고 부르죠아공화제에 미련을 가지는가 하면 쏘련식사회주의에 박수갈채를 보내기도 하였다.

김혁, 차광수, 계영춘, 신영근과 같은 새 세대의 공산주의자들은 독립군령감들이 왕조복귀를 운운하는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열을 내였다.

즉시적인 사회주의실현에 대해서는 반신반의의 태도를 취하였다.


이런 실정은 우리로 하여금 정치토론이 주되는 내용으로 되고있던 청년학생들의 연단에서 정권문제를 크게 상정시키고 치렬한 쟁론을 벌리지 않을수 없게 하였다.

그후 우리는 카륜회의에서 조선혁명의 성격을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으로 정식화한데 기초하여 공산주의자들이 광복된 조국에 수립해야 할 정권은 마땅히 왕조정치나 부르죠아의회제정치를 배제한 인민을 위한 정치제도, 다시말하여 로동자, 농민, 근로인테리, 민족자본가, 종교인을 비롯한 광범한 근로대중의 리익을 옹호하는 민주주의정권으로 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1931년 12월의 겨울명월구회의에서 정권문제가 론의될 때 우리가 표명한 주장도 본질상 이와 동일한것이였다.

간도지방에 유격근거지가 창설되면서부터 우리 혁명에서는 정권건설문제가 본격적인 론의의 대상이 되여 일정에 올랐다. 해방지구형태의 유격구를 유지하고 그것을 운영해나가자면 그 령역내의 인민들에 대한 경제조직자적, 문화교양자적 역할을 감당할수 있는 정권을 건설해야 하였다. 국가의 축소판이라고 할수 있는 유격구에 정권을 세우지 않으면 인민들을 먹여살릴수도 없었고 그들을 투쟁에로 조직동원할수도 없었다.


이런 필요성으로부터 출발하여 동만지방에서 활동하는 공산주의자들은 1932년 가을부터 유격구역들에서 정권수립을 위한 력사적인 로정에 들어섰다. 그해 10월혁명기념일을 계기로 왕청현 가야허에서는 군중대회를 열고 쏘베트정부수립을 온 세상에 선포하였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연길현 왕우구와 삼도만에서도 쏘베트가 수립되였다. 유격구역에 혁명정권이 선것은 의심할바없이 인민들의 세기적숙망을 실현시켜주는 의의있는 사변이였다.


처음에는 나도 유격근거지들에 쏘베트정권이 수립된것을 기쁘게 생각하였다. 명칭이야 어찌되였든 인민의 리익을 옹호하는 정권이라면 그만이라고 보았다.

당시는 《쏘베트열풍》이 온 동만땅을 휩쓸던 때였다. 쏘베트를 수립하는것은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세계 각국의 혁명투사들과 진보적인류에게 있어서 하나의 공인된 사조로 류행되고 전파되였다. 그 열풍은 구라파와 아세아를 가리지 않았다. 중국 서금의 중화쏘베트와 윁남의 느구엔-딘 쏘베트의 수립은 그 좋은 례증으로 된다.


조선혁명의 성격을 부르죠아민주주의혁명으로 본 사람들도 로농쏘베트정권을 론하였다.

국제당 본부에 가있던 조선의 최성우 등이 국제당집행위원회에서 동방부의 일을 맡아보던 일군들(꾸우씨넨, 마지야르, 오까노)과 함께 작성하였던 《조선공산당 행동강령》은 조선의 완전독립과 함께 《로동자, 농민의 쏘베트국가 수립》을 당면과업으로 제기하였다.


쏘베트로선을 지지하고 그를 혁명실천에 무조건 그대로 받아들이는것은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의문의 여지조차 가질수 없는 하나의 상식으로 되였으며 혁명적, 공산주의적립장과 기회주의적립장을 가르는 일종의 기준으로 되고있었다. 식민지, 반식민지 나라들은 말할것도 없고 자본주의나라의 공산당들과 공산주의조직들에서도 쏘베트정권건설을 지상의 과제로 내세웠다. 실로 쏘베트는 전세계 무산자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리상으로 되여있었다.


쏘베트가 그처럼 큰 영향력을 가지고있은것은 그것이 온갖 형태의 착취와 억압을 청산하고 근로인민대중의 리익을 절대화할 복지사회를 건설할수 있는 유일무이한 정권형태로 인정되고있었기때문이였다.

착취와 억압이 없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새 세상에 대한 동경은 인류가 세기를 두고 꿈꾸어온 념원이고 리상이였다.


로씨야에 수립된 청소한 쏘베트정권은 전복당한 착취계급의 반란을 분쇄하고 제국주의련합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수호하며 경제를 복구하고 사회주의건설을 추진시키는데서 실로 이 세상 그 어떤 정권도 이루어본적이 없는 미증유의 생활력을 발휘하였다. 쏘베트사회주의의 이러한 개선행진은 사람들의 머리속에서 쏘베트에 대한 숭상을 환상의 경지에까지 떠밀어가게 하였다.


인류가 쏘련을 등대로 바라보고 쏘베트를 모든 정권형태들가운데서 가장 우월하고 선진적인것으로 받아들인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무리가 아니였다. 쏘련과의 접경지대였고 또 신생쏘련의 영향을 이모저모로 많이 받고있던 간도지방에서 쏘베트에 대한 환상이 사람들의 머리를 지배하게 된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남북만원정을 마치고 왕청에 돌아온 나는 쏘베트의 시책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들이 유격구 도처에서 울려나오는 현실을 목격하고 아연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그 목소리들은 우리가 무심히 스치고 지나서는 안될 심각한 문제거리들을 안고있었다.

우리는 그들의 그 두서없는 뒤소리들에 진실이 담겨져있다는것을 곧 간파하게 되였다.

나는 유격구역을 돌아다니면서 인민들이 쏘베트에 대하여 어떤 립장을 가지고있는가에 대하여 더 깊이 료해하기 시작했다. 수십수백명의 인민들과의 부단한 접촉, 그들과의 진지하고도 허심탄회한 담화는 나로 하여금 쏘베트정권이 빚어놓은 좌경적시책의 후과를 전면적으로 파악할수 있게 하였다.


유격구사람들이 쏘베트를 시답지 않게 보기 시작한것은 정부가 즉시적인 사회주의의 실현이라는 극좌적인 구호밑에 사유재산철페를 선포하고 토지와 식량으로부터 낫, 호미, 걸이대와 같은 농쟁기에 이르기까지 개인들이 소유하고있던 모든 동산, 부동산들을 공동소유로 만들어버린 때부터였다. 쏘베트정부는 재산의 공유화를 일사천리로 강행한 다음 유격구안의 모든 주민들이 남녀로소를 막론하고 공동생활, 공동로동, 공동분배의 새로운 질서밑에서 움직이도록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쏘베트급진론자들이 념불처럼 외우고 다니던 《아르쩰리》생활이라는것이였다.


유치원생이 소학, 중학, 고등학교도 거치지 않고 대학으로 직행한셈이였다.

쏘베트정부는 또한 큰 지주, 작은 지주, 친일지주, 반일지주를 가리지 않고 유격구역안에 있는 모든 지주들과 부농의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하였으며 마소와 량식까지도 일률적으로 수탈하였다.

동만땅이 소위 《적색구역》과 《백색구역》으로 분리된후 적구로 내려가지 않고 유격구역에 남은 지주들은 대체로 반일감정이 강한 애국적인 지주들이였다.

공산주의자들이 왕청골안에서 무장대오를 꾸릴 때 그들은 유격대에 대한 후원도 잘하였다.


그런 지주들가운데 장시명이라는 이름을 가진 진보적인 중국인지주도 있었다. 1932년봄의 대《토벌》때 간도림시파견대는 그의 집 쌀창고까지 불태워버리였다. 《토벌대》가 총대를 휘두르며 강제철거령을 내리였지만 장시명은 그때 대두천으로 내려가지 않고 그냥 남아있었다. 일본사람들에 대한 장지주의 원한은 그 봄부터 더 깊어졌다. 그는 지주였지만 유격구사람들의 생활을 물심량면으로 잘 도와주었다.


《유격구어른들, 나는 왜놈들의 꼴이 보기 싫어서 이 골안에 그냥 남은 사람이웨다. 저 악귀같은 놈들을 대두천시내에서만이라도 좀 몰아내주시우다!》

유격대원들이 모연공작을 가면 장시명은 이런 부탁을 하였다.

유격구인민들은 그 지주와 아주 사이좋게 지냈다.

그런데 쏘베트정권은 이 지주마저 적구로 쫓아버리였다. 장시명이 유격구역에서 내려가지 않게 사정을 봐달라고 애걸하였지만 쏘베트는 그 요구를 외면해버리였다.


《쏘베트정권은 지주들의 재산을 다 몰수하게 되였다. 당신이 반일정신이 강한 사람이고 지난날 유격구사업을 잘 도와준것은 사실이지만 착취계급에 속하는 인물이기때문에 숙청하지 않을래야 않을수 없게 되였다.

그러니 이고장에서 속히 떠나라.》

이것이 반일지주에게 내린 쏘베트의 선고였다.


혁명을 성심성의로 원호하던 장시명의 재산은 즉석에서 수탈되여 쏘베트정부가 관할하는 창고로 모조리 들어갔다. 알몸이 된 장지주는 눈물을 흘리며 일본군이 주둔하고있는 대두천으로 내려갔다.

그 당시 숙청사업에 동원된 사람들은 지주들의 장궤속에 있는 아이들의 꽃신까지도 다 털어갔다. 중국사람들한테는 집에 녀자애가 태여나면 그 아이가 커서 시집간 다음 낳을 어린애에게 신길 신발까지 미리 다 만들어두는 재미나는 풍습이 있었다. 그런 신발을 꽃신이라고 하였다. 돌전애기것으로부터 시작하여 한살, 두살 올라가면서 문수가 다른 꽃신들을 연방 만들어 장궤속에 간수해두군하였는데 그런 신발가운데는 골무만치 작은것도 있었다.


이런 신들까지 다 수탈해갔으니 그것을 묵묵히 감수할수밖에 없었던 지주들이 유격구를 떠나면서 무슨 생각인들 안하였겠는가.

소왕청골안에는 유산자들한테서 몰수한 마소가 우글우글하였다. 어지간한 목장을 꾸리고도 남을만한 량이여서 근거지의 청년들은 누구나 다 말을 타고 다니였다. 쏘베트의 치하에서는 그것도 하나의 멋이라면 멋이였다.


좌경분자들은 중국녀자들이 전족을 하고 귀걸이를 하고 다니는것까지 투쟁대상으로 삼았다.

1930년대 전반기는 동만지방에서 좌경의 전성기였고 좌경의 전횡속에서 신성한 혁명적원칙들이 시련을 겪고있던 시기였다. 어떻게 되여 좌경바람이 이처럼 동만땅을 휩쓸수 있었던가. 간도의 유격구역에 모여있던 혁명가들이 모두 망종이였거나 리성을 잃은 미친사람들이였단 말인가.


아니다. 유격구를 다스리던 절대다수의 공산주의자들은 숭고한 혁명적리상과 따뜻한 의리를 지닌 훌륭한 인간들이였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인간을 뜨겁게 사랑하며 정의로운것을 열렬히 지향했다. 그런데 그처럼 인정에 무르고 분별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여 좌경로선의 제창자, 집행자가 되여 돌이킬수 없는 실책을 범하게 되였던가?


우리는 그 원인을 로선에서 찾았고 그 로선을 작성한 사람들의 사상적미숙성에서 찾았다. 실정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꼭대기에 앉아서 고전의 일반적원칙과 선행자들의 경험을 통채로 직수입한 현실성이 없는 지령들을 마구 만들어 내려보내다나니 실천상에서도 무리가 생기지 않을수 없었다.

무턱대고 배척하는것, 닥치는대로 청산하고 타도하고 매장하는것이 가장 철저한 계급성으로 인정되고 가장 선봉적인 혁명가의 표징으로 평가될 때였다.


좌경이 얼마나 신성시되였으면 왕청농민들이 한때 과부가 길쌈을 해서 벌어 얼마간 변돈을 놓은것까지 고리대라는 딱지를 붙여 그 채용증을 소각해버리고 본전마저 떼먹었겠는가. 지도자들의 배후조종이 없이는 순박한 농민들이 이런 강짜를 부리지 못한다.


나는 언제인가 왕청에서 리응만중대장이 무장대오에 가입한 경위를 듣고 깜짝 놀란적이 있다.

초기에 무장단에서는 자기 대오에 로동자출신들과 빈고농출신들만 받아들이였다. 그런데 리응만이네 집에는 1만평가량 되는 척박한 산전이 있었다. 이 1만평때문에 그는 빈고농으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가 무장대오에 받아달라고 여러번 간청하였으나 동무들은 성분이 나쁘다는 리유로 매번 퇴박을 놓았다. 1만평이면 중농이라는것이다.


리응만은 고심끝에 부모들 모르게 밭을 팔아 장만한 돈으로 브로닝권총 한상자를 사가지고 가서 무장대오에 넣어달라고 졸랐다. 그때에야 동무들은 그를 무장대오에 받아주었다. 리응만은 유격대원이 되였다고 기뻐하였지만 땅 1만평을 하루밤사이에 잃어버린 그의 가족들은 생존의 길이 막혀 하늘만 쳐다보게 되였다.


좌경을 경계하고 용납하지 말아야겠다는 나의 결심은 간도땅에 와서 더 굳어졌다. 나는 그때부터 일생동안 좌경과의 투쟁을 하여왔다. 간도시절의 체험은 해방후 우리가 좌경을 예방하고 관료주의를 청산하는 투쟁에서 큰 도움으로 되였다.


번지르르한 혁명적언사와 초당적인 구호의 뒤에서 좌경은 항상 대중을 우롱하고 억누르고 기만하며 공명과 출세를 꿈꾼다. 그 공명과 출세를 위하여 자기를 최전선에서 돌진하는 땅크나 장갑차로 묘사하는것이 좌경이다. 변장한 반혁명이 좌경의 모습으로 둔갑하는것은 그때문이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자들은 언제나 경각성을 높여 자기 진지에 좌경이 발붙일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


좌경적인 쏘베트시책이 빚어낸 후과로 하여 유격근거지에서는 수습하기 어려운 동요와 혼란이 생기였다. 많은 가정들이 쏘베트시책에 불만을 품고 적구로 떠나가버리였다.

어느날 밤 나는 대원들을 데리고 2중대 정치지도원 최춘국이 있는 셋째섬으로 가다가 유격구를 버리고 솔가도주하는 한 장년의 가족을 만났다. 대낮에 떠나가다가 붙잡히면 반혁명의 딱지를 쓸수 있으니 밤시간을 택한것이다. 식구는 다섯이나 되였는데 짐짝들은 얼마 없고 알몸에 가까운 차림새였다. 그 사람에게는 안해와 아이들 셋이 올망졸망 달려있었다.


50에 가까운 그 장년은 총멘 군인들을 알아보자 온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유격대지휘관한테 발각되였으니 이제는 다 죽었구나 하고 생각하는 모양이였다.

《댁에서는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나는 추위에 떨고있는 세아이를 한아이, 한아이 앞으로 끌어당기면서 부드럽게 물었다.

《아니, 아무 죄도 짓지 않았수다.》

《그러면 무엇때문에 유격구를 떠나려고 작정하셨습니까?》

《여기서는 숨이 막혀 더 살수가 없어서…》

《그럼 어디로 가실 생각이였습니까? 적구에 가면 여기보다 숨이 더 막힐텐데.》

《우리가 왜놈들의 등쌀에 못이겨 유격구에 들어왔는데 그 몹쓸놈들한테야 어찌 다시 발길질을 하겠습니까. 인적이 없는 깊은 산골에 찾아가서 화전이라도 일구어 연명을 해갈가 합니다. 그러면 마음만이라도 편할게 아닙니까.》


나는 그 말을 듣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 마촌보다 더 깊은 산골로 들어간다고 래일의 생계조차 기약할수 없는 그들에게 과연 마음편한 생활이 펼쳐지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해토도 되지 않고 풀도 돋지 않았는데 그때까지 끼니를 댈 차비새가 돼있습니까?》

《있기는 뭣이 있겠습니까. 가서 기력이 진할 때까지 살면 살고 죽으면 죽고… 그저 그런거지요. 이제는 목숨이 붙어있는것도 막 귀찮습니다.》


곁에서 그 말을 듣고있던 그 사람의 부인이 문득 어깨를 떨며 흐느끼였다. 그러자 내품에 안겼던 세아이도 참고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였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입술로 삼키면서 어둠속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이렇게 하나둘씩 다 떠나고나면 구경은 누구를 믿고 혁명을 한단 말인가? 우리 혁명이 어쩌면 이렇게도 처량한 막바지에 다달았을가? 쏘베트의 무모한 시책이 빚어낸 후과는 이처럼 파국적인것이였다.


《이제 얼마간 있으면 세월도 바로잡히게 될터이니 너무 락심하지 말고 우리와 함께 시국이 평정될 날을 기다려봅시다.》

나는 대원들을 시켜 로상에서 만난 그 가족을 집에 데려다주게 하고 2중대 병실에 가서 자려던 예정계획을 변경시켜 서대파에 있는 최자익로인을 찾아갔다. 이왕 가슴아픈 일을 당한바에는 유격구의 민심이 어떤지 더 속속들이 캐고들려는것이였다. 최자익은 왕청별동대의 대원으로 유격대생활을 시작한후 중대장을 거쳐 독립려단 련대장으로까지 승진되여 활동하다가 전사한 최인준의 아버지인데 내가 셋째섬에 올 때마다 꼭꼭 잊지 않고 만나군하는 로인이다.


이 로인이 서일이 이끌던 북로군정서에서 서기까지 하며 따라다닐 정도로 식견이 높은데다가 성미가 활달하고 솔직하여 만나기만 하면 참고가 될 이야기들을 많이 들을수 있었다.

《로인님, 요새 어떻게 지내십니까?》

나의 인사에 최자익은 《사니까 사는구나 하지요.》하는 말로 퉁명스럽게 대답하였다.

나는 그 퉁명스러운 어조가 유격구의 민심을 대변한다고 생각하면서 다시한번 말을 걸었다.

《로인님, 유격구생활이 그렇게도 힘듭니까?》

최자익은 그런 질문을 받자 어성을 높여 벌컥 화를 내였다.

《쏘베트정부에서 역축과 농쟁기를 거둬갈 때까지만 해도 난 참았댔네. 아라사에서도 농업집단화라는걸 할 때 그런 놀음을 했으니까 우리도 그걸 본받는다고 짐작했거든. 그런데 며칠전에 공동식당을 경영한다면서 숟가락, 저가락까지 다 거둬가는걸 보고서는 침을 뱉았네. 〈그래 우리 늙은이들이 공동식사때문에 하루 세번씩 자기 집 온돌방을 두고 한지로 왔다갔다 해야한단 말이냐? 이런 식으로는 더는 못살겠다. 꼼무나인지 아르쩰리인지 그런 귀신단지 같은 세상을 만들겠거든 젊은것들끼리나 해라. 우리는 숨이 차서 더 따라 못가겠다.〉구 말일세. 그랬더니 이번에는 봉건숙청이요 뭐요하고 로인들을 군중대회장에 내다놓고 며느리들한테 비판을 시키지 않겠나. 우리 나라 력사가 자그만치 5천년이라는데 어느 세월에 이런 해괴망측한 일이 있었는가? 우리 인준인 그래두 나보고 쏘베트를 비방하면 안된다구 야단질이 아니요. 그래서 내 그 녀석의 사등뼈를 꺾어놓으려구 했네.》


유격대지휘관의 아버지가 쏘베트의 시책에 침을 뱉고 돌아섰다면 다른 주민들의 동향은 더 알아볼 필요조차도 없는것이였다.

나는 그후 유격구에서 반《민생단》투쟁이 극좌적으로 벌어지던 공포시기와 유격구의 해산을 앞두고 군대와 인민이 눈물로 석별의 정을 나누던 그 쓸쓸한 나날에 이 로인을 만났을 때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두드리며 시국을 통탄하던 그의 하소연을 자주 회상하였다.


쏘베트정부가 수립된후 반년도 못되는 사이에 조중인민의 관계는 다시금 급격히 악화되였다. 청산된 지주들의 대부분이 중국인지주들이였던것만큼 5.30폭동때와 같은 갈등이 재연된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반일부대들은 이전날처럼 또다시 조선공산주의자들을 적대시하였다. 일본군대와 만주국군대는 물론, 구국군도 적이 되고 중국지주도 적이 되였다.


항일유격대는 소규모의 비밀유격대처럼 남의 집 뒤골방에 숨어있던 창건초기의 처지와 꼭같은 처지에 빠져 조선사람들이 사는 부락에 조심스레 배겨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별동대라는 간판을 부활시킬수도 없었다. 구국군은 우리를 만나기만 하면 《꼬리빵즈》라고 답새기였다. 유격대의 활동이란 반지하투쟁이나 다름없이 되였다.


우리가 1년 남짓하게 투쟁해서 쌓아올린 모든 공적들이 억울하게도 물거품처럼 사라지고있었다.

쏘베트의 시책을 놓고 우리 동무들가운데서도 분해작용이 시작되였다. 차라리 이럴바에는 로씨야에 가서 혁명을 어떻게 하는지 방법이나 배워가지고 와서 새 출발을 하자는 사람도 있었고 간도사람들식으로 하다가는 혁명이고 뭐고 다 망치겠는데 다시 돌아가서 우리끼리 투쟁을 하자는 사람도 있었고 같지도 않는 혁명을 할바엔 집에 돌아가서 부모들에게 효도나 하자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집에 가고싶어하는 중국동무 한명은 집으로 돌려보내고 쏘련에 가서 공부하고싶어하는 다른 중국동무 한명은 쏘련에 보내주었다.


이런 사태하에서도 유격구의 운명을 책임진 사람들은 정책전환을 단행할 결심을 내리지 못하고있었다. 동만특위가 지도기관으로 존재하였지만 국제당의 시정방침에 수정을 가할만한 로선을 가지고있지 못하였다.

누구든지 우경의 모자를 쓸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과감히 일어나 혼란된 시국을 평정하고 유격구를 붕괴의 위기에서 구원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자면 쏘베트좌경로선에 맞설수있는 결단과 새로운 테제가 필요하였다. 내가 종파주의를 청산하고 혁명대오의 통일단결을 강화할데 대한 론문을 소책자로 발표했던것이 바로 이무렵이였다.


나는 정권건설문제를 가지고 마촌에서 동장영과 론쟁을 하려고 결심하였다. 그런데 리용국 현당서기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그것을 만류하였다. 《쏘베트건설사업대강에 관한 동만특위의 결의》가 이미 하달되였고 또 사수평에 쏘베트정부도 수립된것만큼 아무리 론쟁을 해야 소용없다는것이였고 론쟁이 잘못 번지면 제재도 받을수 있다는것이였다. 리용국은 김백룡이 쏘베트를 잘못 건드렸다가 우경분자로 몰리던 사건을 간단히 말해주었다.


김백룡은 북만에서 한때 현위 위원으로 활동하던 사람이였다. 간도지방에서 쏘베트조직을 앞두고 선전사업이 한창 벌어지고있을 때 이 사람이 무슨 사유로 해서인지 동만특위를 거쳐 쏘베트정부수립의 첫 시범구역으로 선정된 왕청 5구에 나와있었다고 한다.

그는 5구에서 쏘베트정부를 내오게 된다는 말을 듣고 동만에서 쏘베트를 내오는것은 시기상조라고 하였는데 그 말 한마디때문에 우경기회주의자의 감투를 쓰고 투쟁의 대상으로 되였으며 나중에는 북만땅으로 쫓겨가게까지 되였다.


리용국이 나에게 김백룡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 때로부터 이태가 지난 1934년 겨울에 나는 녕안현 팔도하자에서 그를 만났다. 그때 김백룡은 거기서 구당서기로 공작하고 있었다.

나를 만난 자리에서 김백룡은 쏘베트시기상조론을 들고나왔다가 우경투항주의자의 감투를 쓰던 1932년 가을을 쓸쓸하게 회상하였다. 이미 동만에서 좌경적인 쏘베트로선이 시정되고 인민혁명정부들이 유격구의 정사를 다스리기 시작한지 오랜 때여서 그는 좌경망동적인 쏘베트로선의 제창자들에 대하여 서슴지 않고 비평하였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아주 똑똑하고 대가 바른 동무였다.


나는 그에게 어떻게 되여 쏘베트를 건설하는것이 시기상조라는 주장을 들고나오게 되였는가고 물었다.

김백룡은 《그 리유란 단순한겁니다. 가야허에 가있을 때 농민들과 담화를 많이 하였는데 그들이 쏘베트란 무엇인지 그 말뜻조차 모르지 않겠습니까. 인민이 알지도 못하는 쏘베트를 건설하겠다고 하니 무모한짓 같아서 시기상조라고 했지요.》하고 간단히 대답하였다.

인민들이 쏘베트란 무엇인지 몰랐다는 그의 말은 그 당시의 실태를 그대로 반영한 솔직한 대답이였다.


구쏘베트선거에 참가했던 가야허의 로인들은 쏘베트를 속새포와 혼돈하고있었다.

《쏘베트가 나온다 하기에 왜놈들을 많이 잡을수 있는 속새포가 나오는가부다 하고 책상만 쳐다보았더니 웬걸 속새포는 안나오고 붉은기가 나옵디다그려.》

그 로인들의 말이였다.

왕청 2구쏘베트창립행사에 참가한 마촌사람들가운데는 쏘베트를 쇠버치로 해석하는 유권자도 있었다. 어떤 고장 사람들은 쏘베트선거에 참가하러 가는 유권자들에게 《쏘베트가 어떻게 생긴겐지 잘 보고오게. 큰겐지 작은겐지.》 라는 부탁을 하였다고 하며 또 어떤 고장사람들은 《쏘베트란 어른이 온다는데 대접할것이 없어 야단났다.》고 하면서 광주리를 들고 나물캐러 떠났다고도 한다.


인민들이 이처럼 쏘베트에 대하여 제나름대로 리해하고 거기에 만사람의 웃음을 자아내는 희극적인 주석을 가하게 된것은 무식이 빚어낸 응당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군중을 지도하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선전사업을 잘 하지 못하였기때문이였다. 그 당시의 해설제강이라는것은 대체로 제목부터가 대중들이 잘 알아들을수 없는 외래어투성이로서 《쏘베트란 무엇인가?》, 《꼴호즈란 무엇인가?》, 《꼼무나란 무엇인가?》하는 따위의것들이였는데 쏘베트의 개념에 대해서는 선전원들자신도 잘 모르고있었다.

좌경의 독소에 중독된 급진분자들은 이처럼 인민이 잘 알지도 못하는 쏘베트를 도처에 세워놓고 로동자와 빈고농의 독재를 부르짖으며 혁명이 다된것처럼 허장성세하였다.


나는 왕청동무들의 권고를 무시하고 동장영을 정권형태문제에 대한 론쟁에로 끌어들이였다.

《간도일각에서 혁명정권이 태여나 온 세상에 자기 존재를 선포한것은 참으로 경사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동장영동지, 나는 이 쏘베트로선때문에 우리의 통일전선로선이 침해를 당하고있는데 대하여 보고만 있을수 없습니다.》

동장영은 놀라서 나를 쳐다보았다.

《통일전선로선이 침해를 당하다니 그건 무얼 념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까?》

《명월구에서도 말씀드린바있지만 우리는 우리 혁명에 리해관계를 가지는 모든 반일애국세력을 하나의 강력한 정치적력량으로 묶어세울데 대한 로선을 내세우고 그 로선을 관철하기 위해 몇년동안 국내와 만주지방에서 피어린 투쟁을 꾸준히 벌려왔습니다. 그 과정에 우리는 많은 군중을 묶어세웠습니다. 그 군중들속에는 애국적인 종교인도 있고 상공인도 있고 하급관리들도 있고 지어는 지주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쏘베트의 시책은 그들을 일률적으로 배척해버렸습니다. 어제까지 혁명을 지지하거나 동정하던 그들이 오늘은 혁명을 외면하거나 반대하는 립장에 서고있습니다. 조중인민들사이의 관계도 다시금 악화되였습니다.》


동장영은 웃으면서 내 팔목을 가볍게 두드리였다.

《그건 있을수 있는 일이고 또 본질적인 문제도 아닙니다. 중요한것은 쏘베트정권이 인민들이 바라던것을 죄다 해결해주었다는데 있습니다. 혁명도 승승장구하고있습니다. 로동자, 농민들을 위시한 절대다수의 군중은 쏘베트정권을 따르고있습니다. 무엇을 겁낼게 있습니까. 로동자와 농민만 있으면 어떤 혁명이든지 다할수 있다고 나는 주장합니다. 소수의 손실은 각오해야 하지 않을가요?》

《손실이 있을수 있다는걸 인정합니다. 하지만 전취할수 있는 사람들이야 왜 밀어던지겠습니까. 우리의 총적인 전략은 적을 최대한으로 고립시키고 절대다수의 대중은 모두 쟁취하자는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한해동안 위험을 무릅쓰고 반일부대와의 사업도 하였습니다. 5.30폭동을 계기로 저락되였던 공산주의자들의 체면도 가까스로 회복하고 조중 두 나라 인민들사이에 조성된 불화도 천신만고하여 제거해놓았는데 그렇게 공을 들여 쌓은 탑이 하루아침사이에 무너질수 있는 위기가 또 조성되였습니다.》

《김일성동지, 너무 비관적으로 문제를 고찰하는게 아닌가요?》

《아닙니다. 나는 원래 만사를 락관적으로 대하는데 버릇된 사람입니다. 혁명은 물론 앞으로도 승승장구해갈것입니다. 그렇지만 동장영동지, 동만에 조성된 좌경적시책의 후과에 대해서는 심심히 우려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동만당은 이 문제에 대해 응당 심사숙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시책을 검토하라는겁니까?》

《그렇습니다. 시책을 검토하고 그 시책을 낳고있는 정권형태에 대하여 검토해야 합니다.》

동장영은 그 말을 듣자 미간을 모으고 못마땅해하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김일성동지, 쏘베트정부의 시책에는 물론 오유도 있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권형태는 불가침입니다. 쏘베트를 건설하는것은 중앙의 로선입니다.》

론쟁은 계속되였다.


동장영은 자기의 주장을 고집하면서 쏘베트를 절대화하였다. 그는 성미가 온화하고 인정도 있는 사람이였으나 벽창호였다. 지식이 풍부한 반면에 사고와 실천에서는 교조를 많이 범하였다.

그후 나는 다시 동장영과 함께 정권문제에 대한 론의를 하였다. 그날의 론쟁에서 중점적으로 토의된것은 쏘베트를 유지하는가 포기하는가, 포기한다면 새로운 정권형태로 어떤것을 선택하는가 하는것이였다.


나는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과업을 수행해야 할 동만지방의 유격구들에서 쏘베트가 실정에 맞지 않는 정권형태라는것이 생활적으로 증시된 조건에서 조중 두 나라 공산주의자들은 결단을 내려 정권형태를 바꾸고 인민의 구미에 맞는 정책을 실시하여 혼란상태에 빠진 시국을 수습해야 한다고 동장영을 설복하였다.

《쏘베트가 동만의 실정에 맞지 않고 또 쏘베트의 일부 시책이 혁명에 손실을 주었다는것은 나도 인정합니다. 전번에 김일성동지는 쏘베트로선때문에 통일전선로선이 침해를 당한다고 걱정하였는데 왜 그런 걱정을 하였는지 이제는 리해가 됩니다. 최근 몇달동안 동만에서 벌어지고있는 심각한 사태는 나로 하여금 김일성동지의 그 경고를 심사숙고해보지 않을수 없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아직 쏘베트를 대신할만한 정권형태를 확정짓지 못하였습니다.》


특위서기의 견해에서 생긴 변화는 나를 기쁘게 해주었다. 그날의 동장영은 군중의 기세가 높은 혁명의 고조기에는 쏘베트만이 공산주의자들의 유일한 정권형태가 될수 있다고 주장하던 왕년의 그 고집스런 특위서기가 아니였다.

《인류가 지금까지 발견한 로동계급의 정권형태는 꼼뮨과 쏘베트라는것밖에 없지 않습니까.》

동장영은 여기까지 말하고나서 나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 눈길은 마치 당신이 나를 납득시킬만한 형태를 찾아낸다면 나도 구태여 반대하지 않겠다는 암시가 담겨있는것 같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실정에 맞는 형태를 우리 힘으로 만들어봅시다.》

《우리가 만든다구요? 슬프게도 나는 그럴만한 천재가 못됩니다. 맑스주의고전에도 없는것을 어떻게 만들겠습니까?》


그 어떤 문제를 고정불변의것으로 절대화하고 거기에 자기를 얽매려는 그런 부류의 견해와 립장에 나는 동감을 표시할수 없었다.

《동장영동지, 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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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동장영동지, 프랑스로동계급이 꼼뮨을 내올 때 그 무슨 고전을 참고 했던가요? 로씨야의 쏘베트가 맑스주의창시자들의 고전에서 명시된 정권형태였던가요? 쏘베트를 어찌 한 천재의 두뇌가 낳은 산물이라고만 하겠습니까? 인민이 요구하지 않고 로씨야 현실이 요구하지 않았다면 쏘베트는 력사무대에 등장하지도 못했을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동장영은 아무 응대도 하지 않고 주머니에서 큼직한 담배쌈지를 꺼내여 골통대에 담배를 담아물고 나에게도 권하였다. 그는 유격구를 돌아다닐 때에도 노상 손에 담배쌈지와 골통대를 들고 다니였는데 로상에서 농민들을 만나기만 하면 그 골통대에 담배를 담아 피우라고 권하는 특이한 성품을 가지고있었다. 이런 소박한 성품때문에 유격구인민들은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였다. 그는 겨울이면 농민들이 쓰고 다니는 개털모자를 쓰고 다니였다.

나는 동장영이 침묵을 지키는것은 답답한 일이지만 그가 내 말을 반박하지 않는것은 좋은 징조라고 생각하였다.
동장영을 만난후 나는 리용국, 김명균, 조창덕을 비롯한 몇몇 군정간부들과 함께 쏘베트를 대신하는 혁명정권을 세울데 대한 문제를 가지고 며칠동안 심각한 토의를 하였다.
토의의 효률성을 높이기 위하여 우리는 정권형태의 규정에서 그 기준을 무엇으로 삼는가 하는것이 중요하다는것을 강조하였다.
나는 그때 그 기준이라는것을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우리모두가 인민을 위한 투사들이고 인민을 위해 한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한 충복들인것만큼 우리가 수립하게 될 정권이 각계각층 인민의 리익을 옹호할수 있으며 인민의 지지환영을 받을수 있는가 하는데 기본을 두고 현단계에서 우리 혁명의 성격이 무엇인가 하는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될것이라고 력설하였다.

이 설명을 듣고나서 동무들은 모든것이 명백해진다, 각계각층 인민이라는 범주속에는 로동자와 빈고농만이 아닌 광범한 근로대중이 포괄되겠는데 그들의 리익을 옹호하는 정부는 통일전선적정부가 되여야 하지 않겠는가, 통일전선적정권이야말로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의 성격에 부합되는 정권으로 될것이다, 그런 정권이라면 쌍수를 들어 찬성한다고 하면서 환성을 올리였다.

나는 통일전선적정부를 세우되 로농동맹에 기초한 통일전선적인민혁명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다시금 력점을 찍어 말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력사책들에서 인민혁명정부로선이라고 불리워지고있는 정권건설로선이다.
가결결과는 더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것이다.

우리가 조선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만지방에 적합한 정권형태로 인민혁명정부를 선택한것은 그것이 반제반봉건민주주의를 목적으로 하는 조선혁명의 성격에도 알맞고 인민의 요구에도 부합되는 가장 리상적인 형태라고 생각하였기때문이였다. 우리는 정권형태의 기준을 인민의 요구에서 찾고 인민의 리익을 얼마나 옹호고수하며 철저히 대변하는가 하는데서 찾았다.

이처럼 정권형태를 인민혁명정부로 결정한 다음 우리는 어느 한 단위에서 먼저 시범을 창조해보고 그것이 좋다고 인정되면 다른 혁명조직들에도 일반화하자는데 합의를 보았다. 시범단위로는 5구가 결정되였다.
나는 왕청 5구에 내려가서 리용국, 김명균 등과 함께 인민혁명정부 제5구위원회 대표를 선출하는 모임에 참가하였다. 모임은 사수평으로부터 10리쯤 떨어진 하모다니촌에서 진행되였다. 그날은 모쁘르기념일이였다. 모쁘르란 국제혁명투사후원회의 략칭이다. 1923년에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는 희생된 혁명투사유가족들의 후원을 목적으로 이 조직을 내오기로 하였고 3월 18일을 국제적인 모쁘르기념의 날로 정하였다.

5구쏘베트정부 회장인 조창덕은 쏘베트정부사무실로 우리를 안내하였다. 나는 그 집에서 20명가량 되는 가야허지방 농민들과 담화를 하였다.
《우리는 쏘베트정부대신 새 정부를 세우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정부는 여러분들의 의사에 맞는 그런 정부로 되여야 합니다. 어떤 정부를 세우는것이 좋겠습니까?》
내가 이런 질문을 하자 한 로인이 일어나서 《백성들이 마음고생을 안하고 살수 있게 해주는 그런 정부만 세워주면 원이 없겠수다.》라고 대답하였다.
나는 쏘베트정부를 대신하게 될 정부로 인민혁명정부를 세우려고 한다는것과 이 정부는 세계정권사에서 처음으로 되는 진정한 인민의 정부로 될것이라는데 대하여 격정에 넘쳐 선언하였다.

《이 정부는 조국을 사랑하고 겨레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리익을 대변하고 옹호하며 그들의 숙망을 풀어줄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숙망이 무엇입니까? 땅을 가지는것, 로동의 권리를 가지는것, 자녀들을 교육시키는것, 만민이 평등하게 사는것… 인민혁명정부는 이 모든 소원을 죄다 풀어줄것입니다.》
가야허의 인민들은 인민혁명정부로선에 대한 우리의 설명을 듣고 그것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였다.
우리는 인민혁명정부의 탄생을 선포하는 의식에 앞서 쏘베트정부가 몰수했던 개인의 재산들을 본인들에게 모조리 되돌려주었다. 몰수후 파손되였거나 소비해버린 물건들을 보상하기 위하여 량성룡은 목재소를 치는 전투까지 조직하였다. 그 전투에서 로획한 소와 말로 농민들은 그해 봄 분여받은 땅에서 밭갈이를 하였다.

이날의 모임에서는 인민혁명정부는 참다운 인민의 정권이라는 내용의 나의 연설이 있었고 10개 조항에 달하는 정부정강내용에 대한 소개가 있었다.
그 정강내용은 후날 조국광복회10대강령에 거의 그대로 반영되였다.
사수평마을에 갔을 때의 인상가운데서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남아있는것은 현당서기 리용국의 모습이다. 모임이 끝나고 모두가 춤판에 뛰여들어 축제의 기분으로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있을 때 그는 한쪽구석에 앉아서 눈물을 흘리고있었다.

나는 춤판에서 슬그머니 떨어져나와 그의 곁에 가까이 다가갔다.
《서기동무, 모두가 춤을 추는데 이게 웬일이요?》
리용국은 두볼에 흘러내린 눈물자국을 씻을 념도 없이 한숨을 무겁게 내쉬였다.
《저 사람들이 어째서 나한테 침을 뱉지 않는지 모르겠소. 왕청사람들이 좌경때문에 고통을 받은게 다 나때문이 아니겠소. 그런데 이 고장사람들은 오늘 나를 보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더란 말이요. 사실 인사를 받아야 할 분이야 김대장이 아니요.》
《우리 인민은 인정에 무른 대범한 인민이요. 그들이 과거를 계산하지 않고 서기동무에게 감사를 드린것은 인민혁명정부로선을 달게 받아들이였다는것을 의미하는것이요. 이제는 우리 다같이 래일에 대해서만 생각합시다.》
《나는 지금껏 제정신으로 살지 못하고 남의 정신으로 살아왔소. 동무는 나에게 참으로 귀중한 진리를 깨우쳐주었소. 인민을 위해 살자! 평범한 이 한마디 말속에 얼마나 깊은 뜻이 담겨져있소. 나는 평생 이 구호를 잊지 않겠소.》
리용국은 내 손을 그러잡고 열정적으로 부르짖었다.

그는 이 맹세를 생활에서 만족스레 구현할수 없었다. 동만특위가 그를 현당서기의 직책에서 해임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던것이다. 특위에서는 리용국이 원래부터 엠엘파라고 하면서 왕청현당이 쏘베트로선집행에서 극도의 좌경을 범하였기때문에 그를 해임시켰는데 그에게는 《민생단》혐의도 있다고 하였다.

리용국이 엠엘파라는것은 사실과 맞지 않는 부당한 소리였다. 세린하에서 청년사업을 하고있던 그를 동만특위 공청서기로 추천한 사람이 과거 엠엘파에 관계했던 인물이였을뿐이다. 극좌적인 쏘베트로선의 집행으로 인하여 빚어진 모든 후과의 책임을 현당서기 한사람에게만 들씌운다는것도 무리하고 비도덕적인 처사였다. 리용국에게 철직책벌을 적용한다면 쏘베트로선을 내려먹인 사람들과 그 집행을 강요한 당사자들에게는 도대체 어떤 책벌을 주어야 하는가.

리용국이 《민생단》이라는것은 아무 근거도 없는 당치않은 소리였다.
나는 그가 종파도 아니고 《민생단》도 아니라는것을 루루이 보증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오의성과의 담판을 위하여 라자구에 가있을 때 리용국은 끝내 《반혁명분자》의 감투를 쓰고 처형당하였다. 그가 살아온 경력을 보면 《민생단》으로 될 근거가 하나도 없었다. 한때 체포의 선풍을 피하여 망명해간 연해주에서 리용국은 망명객으로 일생을 편안히 살아갈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혁명을 위하여 다시 간도땅에 돌아와 태풍속에 몸을 내던지였다.

이처럼 성실하고 량심적인 인간이 어떻게 되여 《민생단》모자를 쓰게 되였는지 나는 아직도 그 까닭을 모르겠다.
5구에 인민혁명정부가 수립된 얼마후 동장영은 나를 찾아와 웃는 얼굴로 쾌활하게 말했다.
《김일성동지, 오래지 않아 우리는 국제당파견원동지의 참석하에 로선전환문제를 토의하게 됩니다. 5구에서 인민혁명정부를 건설한 경험도 있으니 정권문제와 관련된 기본발언을 김일성동지에게 부탁합니다.》

그해 여름 로선전환을 토의하는 중요한 회의가 열리였다. 이 회의에는 로선전환에 관한 문건을 가지고 동만지방에 온 국제당파견원도 참가하였다.
나는 이 회의에서 로농동맹에 기초한 통일전선적정부로서의 인민혁명정부로선을 내놓고 정부의 시정방침에 관한 안을 다시금 천명하였다. 그안에는 토지개혁을 비롯하여 경제, 교육, 문화, 보건, 군사 등 여러 분야에서 정부가 수행해야 할 제반 민주주의적시책들이 명시되여있었다. 우리의 안은 국제당의 새로운 로선에도 부합되는것이였다. 국제당파견원은 우리가 제창한 인민혁명정부로선을 전적으로 지지찬동하였다.

심각한 론전과 사상투쟁의 분위기속에서 날자를 끌며 여러날동안 진행된 회의에서는 우리가 제시한 인민혁명정부로선에 기초하여 쏘베트를 인민혁명정부로 개편하고 유격구의 모든 지역들에서 쏘베트로선의 좌경적후과를 청산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할데 대한 결정을 채택하였다.

이 회의가 있은후 동만지방의 모든 쏘베트들은 인민혁명정부로 개편되였다. 조건이 성숙되지 못한곳에서는 과도적형태로 농민위원회를 내오고 점차 인민혁명정부로 개편하도록 하였다. 사유재산철페의 명목밑에 몰수하여 유격구인민들이 소비한 재산에 대해서는 인민혁명정부가 현금과 현물로 보상해주었다.

인민혁명정부는 인민이 주인이 되여 다스리는 정부로서 절대다수의 인민대중에게는 민주주의를 실시하고 원쑤들에게는 독재를 실시하였다.
가야허에서의 인민혁명정부수립과 로선전환회의를 계기로 하여 동만 각현의 혁명조직구들에는 구인민혁명정부가 나오고 마을마다에는 촌인민혁명정부가 출현하였다. 구인민혁명정부들에는 회장, 부회장, 9~11명의 집행위원을 두었으며 토지부, 군사부, 경제부, 식량부, 통신부, 의료부 등의 부서들을 두었다.

이것이 해방후 우리 인민정권을 탄생시킨 맹아였고 원형이였다.
인민혁명정부는 농민들에게 토지를 무상으로 분배하였으며 유격구안의 모든곳에서 8시간로동제를 실시하였다. 그 당시 소왕청유격근거지에는 1,000여명의 로동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채벌로동과 류벌로동, 숯구이로동에 종사하고있었다. 그중 500여명은 2구 소재지인 셋째섬에 있었고 나머지 500여명은 방초령에서 마촌으로 넘어가는 령밑에서 로동하였는데 8시간로동제의 혜택을 받았다.

인민혁명정부의 엄격한 요구에 따라 개인기업주들은 로동자들에게 종전의 2배나 되는 로임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인민혁명정부는 유격구주변의 산림도 자기의 관할하에 두고 통제하였으며 정부의 승인이 없이는 목재를 한대도 베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 조치가 발효를 보기 시작하자 대두천에 있는 친화목재소의 일본인소장과 중국인목재상은 유격구에 찾아와 채벌허가를 얻기 위한 담판을 요청하였다. 그 담판이 있은 다음부터 목재업자들과 목재상들은 나무 한대에 1원씩으로 환산하여 그에 해당되는 피복, 식량, 일용품들을 유격구에 납부하고 목재를 채벌해갔다.

인민혁명정부는 유격구부락들에 아동단학교를 세우고 무료교육을 실시하였으며 모든 주민들이 리수구와 십리평에 있는 유격구병원들에서 무상치료를 받도록 하였다. 남녀평등권의 실시로 하여 녀성들은 남성들과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사회사업에 참가하였다.

유격구에서는 출판소, 재봉소, 무기수리소도 운영하였다.
유격구의 문화는 우리 인민이 수천년을 두고 부를 명가요들을 수많이 창작해내였고 《피바다》, 《한 자위단원의 운명》에로 이어지는 연극예술의 개화기를 마련하였다.
몰인정과 수탈의 상징으로 되였던 쏘베트란 말은 과거를 추억케 하는 하나의 작은 파편으로만 남게 되였다. 좌경적인 쏘베트시책의 피해를 입지 않으려고 적구에 갔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유격구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로인들은 등에 대통을 꽂고 자유롭게 마을돌이를 다니였다. 유격구는 또다시 서로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는 웃음소리 랑랑한 하나의 화목한 대가정이 되였다.
엄혹한 겨울을 이겨낸 왕청의 골짜기와 산등성이들에서는 산천을 아름답게 단장하는 천만가지 꽃망울들의 속삭임과 함께 새로운 생활이 힘차게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 생활이 어찌나도 부러웠던지 채사령부대가 소왕청에 인질로 데려온 한 지주의 아들은 유격구에서 자기를 쫓아보내지 말아달라고 애원하기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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