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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3-1. 선진사상의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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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5,905회 작성일 15-03-1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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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길림시절


1. 선진사상의 탐구


나는 집에서 한달가량 머무르다가 설까지 쇠고 이듬해 정월중순에 무송을 떠났다. 내가 길림에 도착한것은 행인들의 왕래가 번잡한 한낮이였다. 길을 물을 때마다 아버지친지들의 주소가 적혀있는 수첩을 꺼내들고 언손을 놀려가며 종이장을 번지는것이 거치장스러울것 같아서 나는 미리 내가 찾아야 할 거리와 번지들을 머리속에 다 외워두었다. 오랜 력사를 자랑하는 대도시의 번창한 풍경은 첫 순간부터 조용하고 한적한 농촌지대에서만 살아온 나를 위압하는상 싶었다.


나는 개찰구를 나선 다음에도 가슴을 치미는 흥분때문에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나를 새 생활에로 부르는 신천지의 약동하는 모습을 오래동안 바라보았다.

그날 내가 본 도시의 풍경가운데서 가장 인상적인것은 거리에 물장사군들이 많은것이였다. 물의 도시로 이름나 한때는 선창이라고도 불렀다는 고장인데 음료수가 부족하여 저렇게 물장사만 성행해가니 길림이라는 도회지의 생활이 점점 각박해질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지나가는 행인들까지 짜증스럽게 투덜거리였다. 물 한모금에도 수판알을 튀겨야 한다는 도시생활의 중압이 첫 걸음부터 심신에 육박해왔지만 나는 그 중압에 저항하는 심정으로 가슴을 쭉 펴고 활개를 치며 도심을 향해 씩씩하게 걸어갔다.


길림역에서 북산방향으로 뻗은 차루가를 따라 얼마쯤 걸어가니 도시를 성내와 성외로 구분하는 성벽이 보이고 조양문이라는 현판이 달려있는 성문이 보이였다. 조양문 가까이에는 신개문이라는 성문이 있었다. 길림에는 조양문과 신개문외에도 파호문, 림강문, 복수문, 덕승문, 북극문을 비롯하여 모두 10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그 매 성문을 장작상군대가 지키고있었다. 풍화작용으로 군데군데 허물어진 길림의 고색창연한 성벽은 이 도시가 오랜 력사를 가지고있는 성시라는 느낌을 주었다.


길림은 처음 와보는 생소한 고장이였으나 별로 낯이 설다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와보고싶던곳이고 아버지의 친구들이 많은곳이여서 그랬는지 모른다. 나의 수첩에는 내가 찾아가 인사를 드려야 할 아버지의 친구들과 친지들의 주소가 십여개나 적혀있었다. 오동진, 장철호, 손정도, 김사헌, 현묵관(현익철), 고원암, 박기백, 황백하와 같은 사람들은 모두 길림에 있는 아버지의 친구들이였으며 내가 만나보아야 할 사람들이였다.


나는 의례방문의 첫 순서로 오동진을 선정하고 차루가와 상부가사이에 있는 그의 집부터 찾아갔다. 사실 그때 나의 마음은 은근히 긴장되여있었다. 아버지의 친구들이 모처럼 주선해준 화성의숙을 중퇴한것때문에 오사령이 못마땅해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오동진은 이전과 다름없이 나를 반갑게 대해주었다. 내가 화성의숙을 그만두고 길림으로 온 사연을 말했더니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심중한 표정으로 머리만 끄덕이였다.

《소문도 없이 길림에 불쑥 나타난 너를 보니 너의 아버지생각이 떠오르는구나. 아버지도 숭실중학교를 그렇게 갑자기 중퇴하셨더랬지. 나는 그때 그 소식을 듣고 여간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퍽 이후에는 아버지가 결심을 옳게 하셨다고 생각하였다. 아무튼 여섯달만에 의숙을 포기하고 길림으로 온 그 결단성이 놀랍다. 길림이 리상에 맞는 고장이라면 여기서 너의 우물을 파거라.》


나의 길림행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날 오동진이 한 말은 이것이 전부였다. 역시 오동진다운 활달한 사고방식이라는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내가 길림에 와서 공부하게 된바에는 이번 걸음에 어머니와 동생까지 데리고 솔가이주하여 여기다 살림을 펼걸 그랬다고 하면서 서운해하였다. 아버지의 장례식에 왔을 때에도 오동진은 우리 어머니에게 김선생의 친구들이 많은 길림으로 이사하라고 여러번 권하였다. 어머니는 그 권고를 고맙게 여기면서도 무송에서 자리를 뜨지 않았다. 양지촌에 산소가 있는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고 어떻게 길림으로 훌쩍 이사를 가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날 오동진은 자기의 수하에서 서기로 일하는 최일천을 나에게 소개해주었다. 오동진이 서기자랑을 많이 하였기때문에 최일천에 대해서는 나도 일정한 예비지식을 가지고있었다. 그는 정의부내에서 문장가로 이름난 사람이였다. 이날의 상봉을 계기로 하여 나와 최일천은 그후 특별한 동지적뉴대로 이어지게 되였다.


그날 오후 오동진은 나를 삼풍잔에 데리고 가서 독립운동자들에게 인사시키였다. 그 독립운동자들속에 김시우가 소개신을 써주면서 만나라고 하던 김사헌도 있고 정의부 경호대장으로 활동하는 장철호도 있었다. 삼풍잔이란 삼풍려관이라는 뜻이다. 중국에서는 려관을 《잔》이라고도 한다. 김사헌과 장철호외에도 이 려관에는 이름모를 독립운동자들이 많이 와있었다.


삼풍려관은 태풍합정미소와 함께 길림에서 독립운동자들이 숙박소 겸 련락장소로 리용하는 2대거점이였다.

조선에서 들어오는 이주민들도 삼풍려관을 많이 리용하였다.


이 려관주인은 손정도목사의 동향인이였다. 그는 평안남도 증산에서 살다가 손목사의 권유로 길림에 들어와 삼풍려관을 운영하였다. 간판은 려관이지만 기숙사나 공회당과 같은 인상을 더 주는 그런 집이였다.


삼풍려관에서 일본령사관까지의 거리가 100메터가량밖에 되지 않았다. 길림지방 정탐활동의 총본영이라고도 할수 있는 일본령사관의 문전이나 다름없는 려관에 밀정들과 경찰들이 그처럼 촉수를 늘이고 찾지 못해 애를 쓰는 반일독립운동자들이 무시로 찾아드는것은 재미없을것 같았다. 그러나 독립운동자들은 《등잔밑이 어둡다.》고 하면서 그 려관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실지로 삼풍려관에서 애국자들이 붙잡혀가는 불상사는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도 조직들을 내온 다음에는 이 려관을 자주 리용하였다.


김사헌은 김시우의 소개신을 보고나서 나에게 자기가 잘 알고있는 김강이란 조선사람이 길림육문중학교에서 교원을 하는데 그 학교에 들어가는것이 어떤가고 물었다. 시내의 신흥사회계에서 세운 사립학교인데 길림에서는 그중 경향성이 좋다는것이였다.

길림육문중학교가 경향성이 좋은 학교라는것은 사회계에 널리 알려져있었다. 그것은 《길장일보》가 이 학교에 대한 보도를 여러번 하였기때문이였다. 《길장일보》는 벌써 1921년에 육문중학교를 경영은 참담하나 성적이 매우 훌륭하여 사회 각계의 찬조를 받는 학교라고 소개하였다.


자금문제와 교장의 직권람용문제를 둘러싼 분쟁으로 육문중학교에서는 교장이 자주 교체되였는데 내가 길림에 도착한 그 당시에는 남경금릉대학출신인 장음헌을 대신하여 리광한이 교장으로 부임된지 얼마 안된다고 하였다.

교장을 네번이나 갈아치운것만 보아도 육문중학교가 정의와 법도를 얼마나 중시하는 학원인가 하는것을 알수 있었다. 육문중학교의 이 혁신적인 교풍이 나의 마음을 끌어당기였다.


김사헌은 다음날 나를 육문중학교의 김강선생한테 소개해주었다. 김강은 영어를 잘하였다.

나는 그의 안내로 리광한교장을 만났다. 리광한은 중국민족주의좌파에 속한 사람으로서 주은래총리의 중학시절동창이였고 어려서부터 주총리의 영향을 받은 량심적인 지식인이였다. 내가 주총리와 리광한교장의 연고관계를 알게 된것은 수십년의 세월이 지난 뒤였다. 언젠가 나는 우리 나라를 방문한 주은래총리를 만나 청년시절을 회고하면서 나에게 많은 도움을 준 중국사람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다가 리광한교장의 이름을 들었다. 주총리는 그 말을 듣자 여간만 반가와하지 않으면서 자기가 천진에서 남개대학부속 중학교에 다닐 때 그와 같이 공부하였다고 하였다.


리광한교장은 그날 나에게 학교를 졸업하면 장차 어떤 일을 할 생각인가고 물었다. 내가 나라를 찾는 일에 한몸 바치고싶다고 서슴없이 대답했더니 그는 아주 좋은 포부라고 긍정해주었다.

흉금을 터친 담화의 덕이라고 할지 리광한교장은 1학년을 거치지 않고 2학년에서 공부하게 해달라는 나의 요구도 쾌히 들어주었다.


청년학생운동과 지하활동을 하던 시기 나는 이 선생한테서 여러번 도움을 받았다. 그는 내가 혁명사업때문에 자주 결석한다는것을 알면서도 눈을 감아주었으며 군벌당국에 매수된 반동교원들이 함부로 나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이모저모로 보호해주었다. 군벌이나 령사관경찰들이 나를 붙잡으러 올 때면 미리 련락하여 울타리밖으로 빼돌리기도 하였다. 교장이 량심적인 지식인이다보니 그밑에서 많은 사상가들이 발을 붙이고 일할수 있었다.


내가 육문중학교에 입학하고 돌아오자 오동진부부는 나에게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기숙사에 들어가지 말고 자기네 집에서 다니라고 하였다. 사실 그때 내 처지로서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였다.

나는 어머니의 뒤받침으로 공부를 해야 하였는데 우리 어머니는 병약한 몸이였다. 어머니는 겨울이나 여름이나 하루종일 쉬지 않고 삯빨래와 삯바느질로 품을 팔아서 한달에 3원 정도씩 나에게 보내주었다. 그 돈으로 월사금과 공책값, 교과서값을 대고나면 신 한컬레 사신기가 힘든 형편이였다.


이런 처지에서 나는 아버지의 친구들의 권고와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을수 없었다. 나는 길림에 가서 처음에는 오동진의 집에 있으면서 학교에 다니였고 그가 체포된 다음에는 장철호의 집에 한 1년, 현묵관네 집에도 몇달 그리고 오동진의 후임으로 정의부의 사령을 하던 리웅의 집에도 얼마간 가있었다.


당시 길림에 있던 명사들이 대체로 아버지하고 친분이 깊은 사람들이여서 여러모로 나를 돌봐주고 사랑해주었다. 나는 아버지의 친우들의 집에 자주 드나드는 과정에 독립군간부들과 독립운동지도자들을 많이 알게 되였으며 길림에 드나들던 각양각색의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게 되였다.


그 당시 정의부간부들은 거의다 길림에 상주하고있었다. 정의부는 행정, 재무, 사법, 군무, 학무, 외교, 검찰, 검독 등 어마어마한 중앙기구와 지방기관까지 꾸려놓고 관할구역의 조선동포들한테서 세금까지 받아내면서 한개 독립국가와 맞먹는 행세를 하였다. 이 방대한 기구를 보호하기 위해 정의부는 150여명의 군인들로 조직된 상비적인 중앙호위대까지 가지고있었다.


길림은 중국의 한개 성소재지로서 봉천, 장춘, 할빈과 더불어 만주지방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의 하나였다.


길림독군서에서는 장작림의 4촌동생 장작상이 우두머리노릇을 하였는데 그는 일본사람들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일본사람들이 누가 공산당원이고 누가 나쁜 사람이라고 고소하여도 그는 당신들은 상관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그들의 요구를 거절해버리군 하였다. 그가 이렇게 한것은 그에게 무슨 정치적견해가 있어서라기보다도 무식하고 자존심이 강하였기때문이였다. 그의 이러한 특징이 혁명가들과 사회운동자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지어주었다.

만주지방으로 이주해온 조선사람들의 대부분이 또한 이 길림성에서 살고있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하여 일본군경들에게 쫓겨다니는 조선독립운동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길림에 많이 모여들게 되였다. 그래서 이 도시는 자연히 조선사람들의 정치활동무대로 되였으며 그 중심지를 이루게 되였다. 《동 3성에서의 배일의 책원지는 길림》이라고 한 일본사람들의 평가가 우연한것이 아니였다.


길림은 1920년대 후반기 만주에서 조선민족주의운동의 기본세력이였던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의 수뇌들의 집결처로 되여있었다. 독립운동자들이 신문을 발간하고 학교를 세우는 일은 화전, 흥경, 룡정 같은데서 많이 하였지만 실지 그 수뇌들이 모여 활동한곳은 길림이였다.


엠엘파, 화요파, 서상파와 같은 종파분자들이 제각기 자기파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돌아치던곳도 바로 길림이였다. 공산주의운동자들가운데서도 제노라고 하는 명물들은 거의다 이 길림에 드나들었다.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종파분자, 망명자 등 별의별 사람들이 다 여기로 모여들었다.

새것을 지향하고 진리를 찾아 모대기는 청년학생들도 이 성시로 찾아왔다.


한마디로 말하여 길림은 형형색색의 사상조류가 집결된곳이라고 할수 있었다. 여기에서 내가 공산주의기치를 들고 혁명활동을 벌렸다.


내가 길림에 왔을 때 《ㅌ. ㄷ》의 몇몇 성원들은 화전에서 약속한대로 이 도시에 와서 문광중학교를 비롯한 시내 학교들과 기관구, 선창 등에 적을 붙이고있었다.

그들은 내가 길림에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기 바쁘게 오동진사령의 집으로 뛰여왔다. 《돈이 귀하고 마실 물이 귀하고 땔것이 귀하지만 책이 많아서 좋다.》는것이 그들의 길림인상이였다.

나는 책이 많으면 배고픈 고생과도 타협할수 있다고 롱을 하였다. 이것은 나의 진정이기도 하였다.

그들도 육문중학교에 대해서는 좋은 인상을 가지고있었다. 교직원들중에 국민당우파도 있지만 절대다수의 교원들은 공산당계렬이 아니면 삼민주의의 숭배자들이라는것이였다.

그런 말을 들으니 마음이 놓이였다.


후에 판명된데 의하면 상월선생도 공산당원이였고 마준선생도 공산당원이였다고 한다.

우리는 새로운 고장에서 혁명의 진리를 마음껏 배우며 《ㅌ. ㄷ》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 바쳐 싸워나가자고 결의하였다.

화전에 남아있던 《ㅌ. ㄷ》의 성원들도 활동무대를 찾아 무송현, 반석현, 흥경현, 류하현, 안도현, 장춘현, 이통현 등 만주일대의 조선인거주지역들로 떠나갔다. 그들가운데는 출신중대에 돌아가 다시 독립군의 모자를 쓴 동무들도 있었다.


길림과 같이 복잡한 도시에서 얼마 되지 않는 핵심들을 가지고 만사람이 우리의 목소리를 귀담아듣게 하며 《ㅌ. ㄷ》의 리념을 실현하기 위하여 싸운다는것은 헐한 일이 아니였다.

그러나 우리는 각자가 한점의 불씨가 되여 주변의 열사람, 백사람을 불러일으키고 그 백사람이 다시 천사람, 만사람의 심장을 달구어 세계를 변혁할 굳은 결심에 차넘치고있었다.


길림에서의 나의 활동은 맑스ㅡ레닌주의를 더 깊이 연구하는것으로부터 시작되였다. 나는 길림으로 올 때 화전에서 시작한 맑스ㅡ레닌주의에 대한 탐구를 본격적으로 더 깊이 해보자고 결심하였다. 길림의 사회정치적분위기는 새 사조를 깊이 파고들려는 나의 결심을 부채질해주었다. 나는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들보다도 맑스, 엥겔스, 레닌, 쓰딸린의 저작들을 탐독하는데 더 열중하였다.


당시의 중국은 대혁명시기여서 쏘련이나 일본에서 발간되는 좋은 책들을 많이 번역출판하였다. 베이징에서는 《번역월간》이라는 잡지도 찍어냈는데 거기에 청년학생들의 흥미를 끄는 진보적인 문학작품들이 자주 실리였다. 무송이나 화전에서 볼수 없었던 책도 길림에서는 얼마든지 구할수 있었다. 그런데 나한테는 책을 살만 한 돈이 없었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면 믿기 어렵겠지만 그때 나는 운동화도 학교에 갈 때에만 신고 집에 와서는 거의 맨발로 다니였다.


그때 우마항거리의 도서관에서는 한달에 열람료를 10전씩 받았는데 나는 그 열람권을 달마다 떼가지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 도서관에 들려 몇시간씩 책과 신문을 읽군 하였다. 그러면 적은 돈을 가지고서도 여러가지 출판물들을 볼수 있었다.

책방에 좋은 책이 들어온것을 보면서도 돈이 없어 못살 때에는 부자집학생들을 부추겨 사게 하고 그들이 사온 다음 그 책들을 빌려다보군 하였다. 돈많은 집 자식들가운데는 읽지는 않으면서도 멋을 부리기 위하여 책을 사다가 장식용으로 꽂아두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 시기 육문중학교에서는 학교관리를 민주주의적으로 하였다. 도서주임도 반년에 한번씩 학생총회에서 선출하였다. 선출된 도서주임은 학교도서관운영계획을 세우고 책을 사들일 권한을 가지였다.

나는 육문중학교시절에 두번이나 도서주임으로 선거되였다. 그 기회를 리용하여 맑스ㅡ레닌주의서적들을 많이 사들이였다.


책이 많고보니 시간이 모자라는것이 문제였다. 나는 독서시간을 1분1초라도 더 얻어내기 위하여 애를 쓰면서 차례진 시간안에 하나라도 더 많은 책을 읽고 그 본질을 깊이 알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우리 아버지는 나에게 어려서부터 책을 읽게 하고는 그 책에서 중심이 무엇이며 배운 점은 무엇인가 하는것을 꼭꼭 쓰는 습관을 키워주었다. 아버지가 키워준 이 습관이 크게 은을 내였다. 중심을 잡아쥐면서 책을 정독하게 되면 아무리 복잡하게 뒤엉킨 내용도 명확히 파악할수 있고 짧은 시간안에 많은 책들을 볼수 있다.


내가 중학시절에 밤을 새우며 책을 본것은 단순한 학구적취미나 탐구심때문만이 아니였다. 나는 학자가 되고 그 무슨 출세의 길을 톺으려고 책을 파고든것이 아니였다. 어떻게 하면 일제를 물리치고 나라를 찾겠는가? 어떻게 하면 사회의 불평등을 없애고 근로하는 인민들을 잘 살게 하겠는가? 내가 책에서 찾고싶었던것은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답이였다. 어디서 무슨 책을 보건 나는 항상 이 해답을 찾으려고 하였다.


맑스ㅡ레닌주의를 교조로가 아니라 실천의 무기로 대하게 되고 진리의 기준을 추상적인 리론에서가 아니라 항상 조선혁명이라는 구체적인 실천에서 찾으려는 나의 립장은 이런 과정을 통하여 싹텄다고 할수 있다. 나는 이 시기 《공산당선언》, 《자본론》, 《국가와 혁명》, 《임금로동과 자본》을 비롯한 맑스ㅡ레닌주의고전들과 그를 해설한 도서들을 손에 잡히는대로 읽었다.


정치서적들과 함께 혁명적인 문학작품들도 많이 읽었다. 내가 그때 제일 흥미를 가지고 읽은것은 고리끼와 로신의 작품들이였다. 무송이나 팔도구에 있을 때는 《춘향전》, 《심청전》, 《리순신전》, 《서유기》와 같이 옛날생활을 담은 책들을 많이 읽었다면 길림에 와서부터는 《어머니》, 《철의 흐름》, 《축복》, 《아큐정전》, 《압록강가에서》, 《소년방랑자》와 같은 혁명적인 소설들과 당시의 현실생활을 담은 진보적인 소설들을 많이 읽었다.


후날 항일무장투쟁을 하면서 고난의 행군과 같은 어려운 시련에 부닥쳤을 때에도 나는 길림시절에 본 《철의 흐름》과 같은 혁명적인 소설들의 내용을 회상하면서 힘과 용기를 얻군 하였다. 문학작품은 사람들의 세계관형성에서 중요한 작용을 한다. 그래서 나는 작가들을 만날 때마다 혁명적인 소설들을 많이 써내라고 말하군 한다. 지금은 우리 작가들도 혁명적인 대작들을 많이 써내고있다.


우리는 당시의 불합리한 사회현상과 인민들의 비참한 생활처지를 직접 목격하는 과정을 통해서도 정치적으로 각성되였다.

그때 조선에서 만주로 들어오는 이주민들가운데는 길림을 경유하여 다른 고장으로 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우리는 그들을 통하여 국내의 참상을 수시로 청취하였다.


압록강을 건너온 이주민들은 단동을 거쳐 남만철도로 장춘에까지 와가지고는 거기에서 동지철도를 리용하여 북만쪽으로 가든가, 길장선을 타고 길림을 경유하여 그 근방의 오지로 들어가기도 하고 봉천으로부터 봉해선, 길회선을 거쳐 돈화, 액목, 녕안 방면으로 가기도 하였다.


추운 겨울철과 이른 봄철이면 길림역과 려관들에서 조선이주민들을 많이 볼수 있었다. 이런 이주민들가운데는 별의별 곡절을 겪은 사람들이 다 있었다.

어느날 나는 동무들과 함께 극장에 《창시》구경을 갔다. 공연이 끝난 다음 《창시》를 하던 녀배우가 우리한테로 찾아와 자기 애인의 이름을 대면서 최 아무개라는 사람이 혹시 여기에 살지 않는가고 물었다. 그 녀배우가 조선말을 하는 바람에 우리는 모두 놀랐다. 조선에서는 《창시》라는것을 하지 않기때문이였다.


옥분이라는 그 녀배우는 경상도녀자였다. 그의 아버지는 어느날 뒤집에 있는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면서 너의 처가 아들을 낳으면 내 사위로 삼고 우리 처가 딸을 낳으면 네 며느리로 주마, 만약 다같이 아들이나 딸을 낳으면 결의형제를 맺어주자고 약속하였다.

얼마후 한집에서는 아들이 태여나고 다른 한집에서는 딸이 태여났다. 두집에서는 자식들을 서로 결혼시켰다는 표적으로 명주수건 하나를 둘로 갈라 각각 반쪽씩 나누어가지였다.


그후 두집은 살길을 찾아 제가끔 고향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였다. 아들을 본 집에서는 길림에 와 살았는데 그 아들이 커서 문광중학교에 다니였다. 그 집에서는 그래도 길림에 온 다음 집도 한채 얻고 자그마한 정미소도 하나 차려놓고 어렵지 않게 살았다. 그런데 녀자를 낳은 집에서는 단동까지 와서 려비가 떨어져 중국사람한테 어린 딸을 팔게 되였다. 옥분이는 매를 맞으며 《창시》를 배워가지고 배우가 되였는데 나이가 들면서부터 고향에서 살 때 결정해놓았다는 그 남자를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새 고장에 발을 들여놓을 때마다 조선사람들을 몰래 찾아다니며 그 남자의 행처를 탐문하군 하였다.


그날 옥분이란 그 녀배우는 문광중학교에 다니는 남편되는 사람과 극적인 상봉을 하였다.

옥분이가 《창시》를 그만두고 남편한테 떨어지겠다고 하자 그를 데리고다니던 흥행단 주인녀자는 굉장한 돈을 내라고 하였다. 그래서 옥분이는 자기 몫으로 나오는 돈을 몇해동안 모아서 몸값을 물어주고 길림으로 돌아오겠다고 하였다. 그때 이런 사연을 목격하면서 우리의 가슴에 피가 맺히고 분노가 생기였다. 학생들은 돈만 알고 인정을 모르는 흥행단 주인녀자를 《뱀같은 녀자》라고 욕질하였다.


수십만의 인생이 한데 모여 생존경쟁으로 비지땀을 흘리며 돌아가는 대도시의 생활은 계급사회가 내뿜는 악취를 감추지 못하였다.

뙤약볕이 내려쬐는 어느 여름날 동무들과 함께 북산에 갔다오던 나는 길가에서 인력거군이 부자와 다투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였다. 인력거를 타고온 부자가 인력거군한테 돈을 적게 준 모양이였다. 인력거군이 부자에게 지금은 《삼민주의》시대인데 《민생》문제를 좀 돌봐주어야 하지 않겠는가고 하면서 몇푼만 더 달라고 빌었다. 부자는 돈을 더 줄 대신에 도리여 《삼민주의》만 알고 《오권헌법》은 모르는가고 하며 단장을 들어 인력거군을 때리였다.


분격한 우리 학생들은 부자놈에게 달려들어 돈을 더 주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이런 체험을 통하여 우리는 세상에 왜 인력거를 타고다니는 사람들이 있고 인력거를 끌고다니는 사람이 있는가, 왜 어떤 사람들은 열두대문이 달린 으리으리한 집에서 호강을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거지가 되여 거리를 헤매야 하는가 하는 의문과 불만을 가지게 되였다.


혁명적세계관은 사람들이 자기의 계급적처지와 리해관계를 인식하는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착취계급을 증오하고 자기 계급의 리해관계를 옹호하는 사상을 가지며 나아가서는 새 사회를 건설하려는 각오를 가지고 혁명의 길에 나서게 되였을 때 형성된다고 볼수 있다.

나도 맑스ㅡ레닌주의고전을 비롯한 혁명적인 책들을 보고 계급적처지를 인식하기 시작했고 그다음에는 사회현상을 보고 불평등이 많다는것을 알게 되였으며 착취계급과 착취사회를 증오하는 사상이 자라서 결국 세계를 개조하고 변혁해야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투쟁의 길에 나서게 되였다.


맑스와 레닌의 저서들을 널리 탐독하고 거기에 깊이 심취될수록 나는 그 혁명학설을 청년학생들속에 한시바삐 보급해야겠다는 충동을 가지게 되였다.

육문중학교에서 내가 처음으로 사귄 동무는 권태석이라는 조선학생이였다. 초기에는 육문중학교에 조선학생이 모두 네명 있었는데 공산주의청년운동에 마음을 둔것은 권태석이와 나뿐이였고 그 나머지는 정치운동에 무관심했다. 그저 돈만 알고 졸업한 다음 장사나 해먹을 궁리만 하였다.


나와 권태석은 지향도 비슷하고 사회를 보는 눈도 비슷해서 처음부터 서로 배짱이 맞았다. 중국학생들가운데서는 장신민이라는 청년이 나하고 가까웠다. 그 사람이 늘 나와 같이 다니면서 정치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의견을 많이 나누었다. 사회의 불평등으로부터 시작하여 제국주의의 반동성과 일제의 만주침략기도, 국민당의 반역적죄행에 대한것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화제는 다양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길림에서는 맑스ㅡ레닌주의가 청년학생들속에서 동경의 대상으로만 되여있었다. 맑스가 대단한 사람이라니까 어떤 인물인지 좀 보자는 식으로 고전을 뒤적거리거나 맑스주의가 어떤것인지 모르면 추세에 뒤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정도였다.

나는 화전에서 얻은 경험을 참작하여 뜻이 통하는 몇몇 동무들로 먼저 육문중학교안에 비밀독서조를 조직하였다. 비밀독서조는 진보적인 청년학생들을 맑스ㅡ레닌주의사상과 리론으로 튼튼히 무장시키는것을 사명과 목적으로 하였다. 이 조직은 매우 빠르게 자라서 얼마후에는 문광중학교와 제1중학교, 제5중학교, 녀자중학교, 사범학교를 비롯한 길림시내의 여러 학교들에 확대되였다.


독서조성원들의 대렬이 늘어남에 따라 우리는 독립운동자들이 경영하는 정미소의 방 한칸을 얻어가지고 류길학우회 성원들을 내세워 자체로 도서실을 운영하였다.

지금은 어디에 가나 도서관이 있고 마음만 먹으면 인민대학습당과 같은 큰 도서관도 궁전같이 세우지만 사실 그때 맨주먹밖에 없는 우리 힘으로 도서실을 꾸린다는것이 쉬운 일이 아니였다. 책도 사오고 서가도 매고 책걸상도 갖추어놓아야 하겠는데 우리에게는 돈이 없었다. 그래서 일요일마다 철도공사장에 가서 침목을 메나르거나 강가에서 자갈을 져나르는것 같은 삯일을 하였다. 녀학생들도 정미소에 가서 쌀의 뉘를 골랐다. 이렇게 한푼두푼 힘들게 번 돈으로 책을 사들였다.


혁명적인 책들을 따로 보관할수 있는 비밀서가까지 갖추어 도서실을 꾸려놓은 다음 간단하면서도 구수하게 책소개를 써서 시내의 여러곳에 붙여놓았다. 그러자 학생들은 앞을 다투어 우리의 도서실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그때 학생들을 끌기 위하여 도서실에 련애소설도 가져다놓았다.

청년들은 련애소설들을 읽는 멋에 도서실출입을 많이 하였다. 그런 식으로 책에 맛을 붙이게 해놓고는 사회과학책을 조금씩 주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사회과학책들을 보면서 점차 각성되면 그때에는 비밀서고에서 맑스ㅡ레닌주의고전들과 혁명적인 소설책들을 꺼내주군 하였다.


우리는 그때 청년학생들에게 《재생》, 《무정》, 《개척자》와 같은 리광수의 소설책도 주었다. 리광수가 3.1운동전야에 일본 도꾜에서 《2.8독립선언서》도 작성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면서 진보적인 작품도 많이 썼기때문에 청년들이 그의 소설을 즐겨 읽었다. 그러나 후에는 변절하여 교양적가치가 있는 작품을 쓰지 못하였으며 나중에는 《혁명가의 안해》와 같은 반동적인 작품까지 써냈다. 나는 항일유격대를 창건한 다음 부대를 인솔하고 남만으로 가다가 무송에 잠간 들린 기회에 그 소설을 읽어보았다. 소설 《혁명가의 안해》는 한 공산주의자가 병치료를 하고있을 때 그의 안해가 남편의 병치료를 해주러 다니는 의학전문학교 학생과 치정관계를 맺는 추잡한 생활을 그린 작품으로서 공산주의자들을 모독하고 공산주의운동을 헐뜯는 사상으로 일관되여있었다.


토요일과 일요일이면 우리는 길림례배당이나 북산공원 같은데 모여 독서발표모임을 자주 하였다. 처음에는 더러 련애소설내용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러나 듣는 학생들이 그따위 시시껄렁한 이야기는 집어치우라고 들이대군 하였다. 이렇게 한번 망신을 당하면 련애소설에 빠졌던 학생들도 스스로 혁명적인 소설책들을 보게 되였다.


우리는 청년학생들과 대중들에게 혁명사상을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당수》라는 방법도 리용하였다.

어느날 나는 목이 아파서 찜질을 하느라고 수업에 참가하지 못한적이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북산에 들렸더니 소경주위에 숱한 사람들이 모여앉아 이야기를 듣고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소경이 넉두리 같은것을 해가며 《삼국지》의 한대목을 뜬금으로 엮어대고있었다. 그는 제갈량이 꾀를 써서 적진을 일격에 무찌르고 들어가는 장면 같은데서는 북까지 치면서 흥을 돋구었다. 그러다가 재미나는 대목에 이르러 이야기를 뚝 그치고는 구경하는 사람들한테 돈을 내라고 손을 내밀었다. 그때 중국사람들은 이런것을 《당수》라고 하였는데 군중을 끄는데서는 좋은 방법이였다.

그후부터 우리도 이런 식으로 혁명사상을 보급하였다.


우리 동무들가운데 우스개도 잘하고 말주변도 좋은 걸작이 한명 있었다. 우리한테서 과업을 받아가지고 종교인들과의 사업을 하던 동무였는데 기도를 드리고 성경책을 외우는것을 보면 목사들보다 나았다. 그 동무에게 《당수》를 해보라고 과업을 주었더니 성경책을 외울 때보다 더 잘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마실방이나 공원 같은데 가서 내용이 좋은 소설들을 뜬금으로 구수하게 엮어서 매번 호평을 받았다. 소경은 《당수》를 하고 돈을 받았지만 그는 돈을 받지 않았다. 그대신 재미나는 대목에 가서 끊고는 한바탕 선동연설을 한 다음 래일 어느 시간에 다음대목을 또 들어보라고 하였다. 그러면 다음날 사람들이 소설을 마저 들으려고 약속된 장소에 모이군 하였다.


그때 책을 통하여 사귄 사람들중에 인상깊은 사람은 박소심이다.

길림의 번화한 거리에는 《신문서사》라는 큰 책방이 하나 있었는데 나는 한주일에도 몇차례씩 그 책방에 들리군 하였다. 그 책방에 박소심도 단골손님으로 다니였다. 그는 매번 사회과학서적을 팔아주는 매대앞에서 무슨 책이 들어왔는가를 알아보려고 한참씩 서성거리군 하였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매대앞에서 마주치는 때가 많았다. 몸은 강말랐으나 키가 후리후리하고 지성미가 있는 사람이였다.


내가 학생들을 데리고 가서 학생도서관에 넣을 책을 한아름씩 사갈 때면 그는 자기 책이나 고르는것처럼 흐뭇해하면서 어느 책은 어떻고 어느 책은 꼭 볼 필요가 있으니 사가는것이 좋다는 식으로 조언을 주군 하였다. 이렇게 책이 인연이 되여 나는 박소심과 친하게 되였다. 내가 동대탄에서 학교를 다닐 때 그는 한동안 내가 거처하는 숙소에 와서 같이 생활하였다.


박소심은 서울에서 살다가 들어온 사람이였다. 몸이 약해서 공산주의운동 같은것은 하려고 하지 않고 신문과 잡지들에 짤막한 글들을 써내군 하였다. 그가 쓴 글이 아마 《해조신문》이나 《조선지광》같은데 나갔을것이다. 운동에는 크게 관계하지 않고있었지만 종파분자들에 대해서는 몹시 경멸하였다. 박소심이 대가 있고 식견이 높은 사람이기때문에 길림에 드나드는 운동자들은 제가끔씩 그를 쟁취해보려고 하였다.


박소심은 일본어로 번역된 《자본론》을 밤을 새워가며 읽군 했다. 돈이 떨어지면 입은 옷을 저당잡히면서라도 책을 사다 보는 지독한 독서가였다. 그는 통속입문서 몇권을 읽고 맑스ㅡ레닌주의리론가로 으시대는 행세군이 아니라 맑스나 레닌의 주요 저작들을 거의 통달하다싶이 한 사람이였다.


박소심은 나에게 《자본론》을 안내해주고 그것을 해설해준 잊지 못할 선생이였다. 맑스의 저작이 대체로 그러하듯이 《자본론》에도 난해한 대목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박소심이 우리에게 《자본론》에 대한 해설강의를 해주었다. 고전을 파악하는데서는 역시 입문서나 안내자가 필요하였다. 박소심은 그 안내자의 역할을 성실하게 감당하였다. 그는 참으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있었다.


한번은 내가 프로레타리아독재에 관한 맑스ㅡ레닌주의고전가들의 명제에 대하여 그에게 물은적이 있다.

박소심은 맑스ㅡ레닌주의고전가들이 력사발전의 여러 단계에서 프로레타리아독재에 대하여 각이한 측면으로 해석한 명제들을 한참이나 뜬금으로 쭈르르 외우는것이였다. 리론이나 지식으로 보면 그야말로 맑스주의대가라고 불리울만 한 사람이였다. 그런데 그런 박소심이한테도 모르는것이 있고 막히는데가 있었다.


내가 맑스ㅡ레닌주의고전들에서는 로동계급의 계급적해방이 선차이고 민족적해방이 후차라고 했지만 우리 나라는 우선 일제의 기반에서 벗어나야 로동자, 농민이 계급적으로도 해방될수 있지 않는가고 물은적이 있었다. 이것은 그 당시 우리 동무들속에서 많이 론의되고있던 문제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맑스ㅡ레닌주의고전들에는 로동계급의 계급적해방과 민족적해방의 호상관계에 대한 리론적해명이 적었다. 식민지나라들에서의 민족해방투쟁에 대해서는 과학적해명을 기다리는 문제가 많았다.

박소심은 나의 질문에 어정쩡한 대답을 하였다.


나는 맑스ㅡ레닌주의고전들에서는 일반적으로 종주국에서의 혁명과 식민지나라들에서의 혁명이 유기적으로 련결되여있다고 하면서 종주국에서의 혁명승리가 가지는 의의만을 강조하고있는데 그렇다면 우리 나라 경우에는 일본로동계급이 혁명에서 승리해야 나라가 독립될수 있단 말이 아닌가, 우리는 그들이 승리할 때까지 가만히 앉아있어야 한단 말인가고 또 물었다.


박소심도 그 질문에는 대답이 막히였다. 그는 놀란 눈으로 한참 나를 바라보았다. 박소심은 고전에 씌여있는것처럼 로동계급의 계급적해방을 민족적해방에 앞세우고 종주국로동계급의 투쟁을 식민지나라에서의 민족해방투쟁보다 중시하는것은 세계적으로 공인된 국제공산주의운동의 로선상의 문제라고 하였다.


내가 납득이 잘 안되여 머리를 기웃거리자 그는 그대로 안타까와서 자기는 맑스ㅡ레닌주의를 학술상으로만 연구해왔을뿐이지 조선의 독립과 조선에서의 공산주의건설이라는 구체적인 혁명실천과 결부시켜서는 생각해보지 못했다고 솔직하게 고백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자 어쩐지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말과 같이 실천과 유리되여 학문상으로만 공산주의학설을 연구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때 나와 우리 동무들이 맑스ㅡ레닌주의선진사상을 연구하면서 느낀 제일 큰 고충은 우리도 로씨야사람들처럼 혁명을 통해 사회를 변혁하고 나라를 해방해야겠는데 조선의 형편과 10월혁명이 일어나던 로씨야의 형편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였다.


락후한 반봉건국가인 조선과 같은 식민지나라에서 무산혁명을 어떻게 하겠는가, 일제의 가혹한 탄압때문에 자기 조국을 떠나 중국땅에서 싸우지 않으면 안되는 조건에서 중국을 비롯한 이웃나라 혁명과 어떻게 련계를 취하며 조선혁명앞에 지닌 민족적임무와 세계혁명앞에 지닌 국제적의무를 어떻게 수행하겠는가 하는 복잡한 문제들이 제기되였다.

우리가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옳은 대답을 찾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려야 했고 또 값비싼 대가를 치르어야 했다.


박소심은 맑스ㅡ레닌주의탐구의 나날에 나와 인간적으로 가까와졌고 우리의 혁명적지향에 깊이 끌려들었다.

그는 반제청년동맹과 공청에도 가입하였으며 우리와 함께 청소년들을 교양하고 계몽하는 사업에도 헌신적으로 참가하였다. 책속에만 파묻혀있던 사람이 한번 마음을 가다듬고 실천무대에 뛰여드니 그 정열이 대단하였다.

그후 우리는 페병치료때문에 그를 카륜지방에 보냈다.

박소심은 쟈쟈툰에서 5리가량 떨어져있는 무개하기슭에 초막을 짓고 제 손으로 밥을 지어먹으면서 외롭게 지내고있었다.


나는 카륜과 오가자일대에서 활동할 때 시간을 내여 그를 찾아갔던 일이 있었다. 나를 보자 박소심은 여간 반가와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동안의 회포를 나누면서 많은 문제를 토론했다.

그때 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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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나를 보자 박소심은 여간 반가와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동안의 회포를 나누면서 많은 문제를 토론했다.
그때 박소심은 처음으로 나에게 안해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안해가 죽었거나 리혼한줄로 알고있었던 나는 놀랐다. 사진만 보고서도 그의 안해가 매우 아름답고 교양있는 신식녀성이라는것을 알수 있었다.

박소심은 서울에 있는 그 안해가 얼마전에 편지를 보내왔더라고 하였다. 왜 안해를 데려오지 않는가고 물었더니 자기 처는 부자집 딸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의 대답을 듣고 그러면 부자집 딸이라는것을 모르고 결혼했는가고 물었다.
박소심은 한숨을 쉬면서 결혼을 한 후에 자기의 세계관이 달라졌다고 하였다.
나는 그 말이 너무도 괴이하게 들려 정말 안해를 완전히 잊어버렸는가고 다시 물었다.
박소심은 지금까지 잊어버렸다고 생각해왔는데 요즘 편지를 받고보니 자주 생각이 난다고 솔직하게 말하였다.
그래서 나는 안해를 사랑한다면 데려와야 한다고 진심으로 권했다. 자기 안해 하나 교양하지 못하면야 어떻게 낡은 세상을 뒤집어엎고 새 세계를 세우겠는가, 안해가 곁에 있으면 병치료에도 좋을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박소심은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서도 한숨을 쉬였다.

《내 성주동무 말이니 듣겠소. 하지만 내 인생은 이미 기울었소. 실패한 인생이란 말이요.》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후대들에게 넘겨줄 재산이나 정신적유산도 없었다. 자기는 맑스ㅡ레닌주의연구에 한생을 바쳐 로동계급의 리익에 이바지할수 있는 책을 꼭 쓰려고 했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였다는것이였다. 살아 펄펄 뛰던 때는 진리를 몰라서 못썼고 진리를 깨닫고보니 이제는 건강이 허락치 않는다고 한탄하였다.

박소심의 말을 들으니 나도 안타까왔다. 박소심은 학문앞에 성실하고 꾸준하였으며 탐구력이 있었다. 책속에만 묻혀있지 않고 실천속에 좀더 일찍 뛰여들었다면 로동계급의 혁명위업수행에 이바지할수 있는 가치있는 리론도 찾았을것이고 실천적인 업적도 쌓았을것이다. 실천속에서 리론이 나오고 그 리론의 정당성도 실천을 통하여 검증된다. 우리가 순간도 잊어서는 안될 실천은 조선의 독립이며 우리 인민의 행복이다. 아쉽게도 박소심은 이 진리를 깨닫기 바쁘게 우리곁을 떠나갔다.

박소심은 그후 서울에 있는 안해를 데려다가 병구완을 받으면서 마지막순간까지 소론문과 단상들을 기록하다가 카륜에서 숨이 졌다.
옛사람들이 말하기를 아침에 도리를 깨닫는다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다고 했지만 박소심과 같이 많은 일을 할수 있는 사람이 진리를 깨닫기만 하고 가버린것은 분한 일이였다.

나는 길림에서 3년 남짓한 세월을 보냈다. 내 일생에서 길림은 참으로 잊을수 없는 추억을 남긴 고장이라고 할수 있다.
이 길림에서 나는 과학적학설로서의 맑스ㅡ레닌주의를 리해하게 되였으며 그 학설의 도움으로 조선의 독립과 인민의 행복을 위한 실천적진리를 더 깊이 깨닫게 되였다.

내가 새 사조의 진수를 빨리 깨달을수 있었다면 그것은 나라잃은 민족의 아들로 태여난 슬픔과 분노때문이다. 우리 민족이 당하는 참을수 없는 불행과 고통은 나를 일찌기 철들게 하였다. 나는 수난당하는 조국과 겨레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감수하였다. 그것이 나에게 커다란 민족적의무감을 짊어놓았다.
길림시절에 나의 세계관이 확립되고 드팀없는것으로 굳어졌으며 그것이 내 한생의 사상정신적량식으로 되였다.

길림에서의 축적과 체험은 그후 나로 하여금 자주적인 혁명사상의 골격을 세울수 있게 하였다.
학습은 혁명가가 자신을 수양하기 위해 반드시 거치지 않으면 안되는 기초적공정이며 사회의 진보와 변혁에 이바지할 밑천을 마련하는데서 단 하루도 중단해서는 안되는 필수적정신로동이다. 선진사상의 탐구과정을 통하여 길림시절에 터득한 교훈으로부터 나는 오늘도 혁명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학습은 첫째가는 임무라고 강조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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