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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16-3. 경위대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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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6,307회 작성일 15-08-27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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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경위대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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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애의 많은 부분을 전장에서 보냈다. 항일전쟁 15년에 반미대전 3년을 합치면 스무해 가까운 세월을 포연탄우속에서 보낸것으로 된다.

그런데 기적이라고 해야 할지, 천행이라고 해야 할지 나는 단 한번의 상해도 입지 않았다. 항일전쟁시기 유격부대들에서는 이신작칙을 몹시 강조하였다. 어렵고 힘든 일의 앞장에는 언제나 지휘관들이 서있었는데 그들은 이신작칙을 하는데서 보람을 찾았다. 공격할 때에는 대오의 앞장에 서고 퇴각할 때에는 대오의 뒤에 서서 전우들을 돌보는것이 인민혁명군지휘관, 정치일군들의 기풍이고 도덕으로 되여 있었다. 나도 역시 그 기풍과 도덕에 충실하려고 최선을 다하였다. 어떤 때에는 대원들을 구원하려고 탄막속에 뛰여들기도 하였으며 어떤 때에는 동무들의 권고를 마다하고 목숨을 내거는 모험도 서슴지 않았다. 기관총을 직접 틀어 잡고 1선에서 적들과 치렬한 화력전을 전개한적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하건만 나는 이상하게도 매번 무사하였다.

극단적군사민주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과정에 유격대지휘부는 중대장급이상의 지휘관들이 돌격로의 앞장에 서는것을 삼가한것은 사실이지만 위험한 고비에 맞다 들 때마다 가슴을 내대고 위기를 타개하려는 공산주의자들의 그 본성이야 어디에 가겠는가.

조선전쟁때 미국사람들은 우리를 해치려고 무척 많은 화약을 소비하였다. 가령 우리 당 지도부에 앉아있던 박헌영이나 리승엽과 같은 사람들이 우리가 아무날 몇시에 어디로 간다는 무전을 날리면 그 길목에 비행기를 보내여 꼭꼭 줄폭탄을 퍼붓군 하였다. 어떤 날은 최고사령부옆에도 폭탄이 떨어졌다. 그래도 나는 변함없이 건재하였다.

우리가 사민복을 입고 길림이요, 장춘이요, 할빈이요, 카륜이요 하고 돌아다니면서 지하활동을 하던 시기에는 권총과 곤봉으로 무장한 <ㅌ.ㄷ>성원들, 조선혁명군 대원들, 공청원들, 반제청년동맹원들, 소년탐험대원들이 나를 보호해주었다.

나를 친자식이나 친형제처럼 살뜰히 도와주고 보살펴주는 인민이라는 보호자는 어디에 가나 있었으며 어느 고장에 가나 무수한 <교하의 아주머니>들이 있었다.

상월, 장울화, 진한장의 실례가 보여주는바와 같이 중국인민들과 중국공산주의자들도 나의 신변안전에 각별한 주의를 돌리였다. 상월선생은 공안국경찰들이 학교에 나타날 때마다 나를 담장너머로 빼돌리였고 진한장은 군벌의 추격을 피해다니던 나를 먹여주고 재워주고 숨겨주었다. 장울화가 내 신변의 안전을 위해 사진현상약을 먹고 자결한데 대하여 나는 이미 국제주의의 모범으로 높이 평가하였다. 주보중은 우리 부대의 지휘관들을 만날 때마다 나의 신변호위를 잘하라고 거듭 당부하였다.

2군 군장 왕덕태와 1군 2사 사장 조국안이 희생된 다음부터 동만의 항일무장부대들에서도 지휘관들의 신변안전문제가 심각하게 론의되기 시작하였다.

왕덕태는 싸창을 빼들고 1선에서 돌격하다가 아깝게도 전사하였다.

왕군장은 연길현의 조선인부락에서 성장하였고 조선에 나가 로동을 한 경력을 가지고있는 중국사람이였다. 그는 유격대생활의 첫걸음도 조선인부락에서 떼였다. 그래서인지 왕덕태를 조선사람이라고 하는 일제관헌기록도 있다고 한다. 왕덕태는 초기에 최현과 같은 분대에서 평대원으로 싸웠다. 그는 평대원으로부터 군장으로까지 성장한 로동계급출신의 소탈하고 군중성이 풍부한 군사지휘관이였다.

왕덕태와 조국안을 비롯한 주요군정간부들의 희생은 항일련군의 모든 지휘관들과 대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그들속에서 경위사업과 관련된 활발한 론의를 불러일으키였다. 적지 않은 단위들에서 경위사업을 전문으로 맡아보는 부대들이 속속 조직되였다.

이런 흐름을 타고 우리의 측근에 있던 전우들도 사령부호위를 전문으로 하는 부대를 조직할데 대한 문제를 가지고 많은 론의를 하였다. 처음에는 자기네끼리 론의하다가 분위기가 일단 성숙되자 나한테까지 찾아와서 경위부대를 내오자고 정식으로 제기하였다.

하지만 나는 전우들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문적인 호위대가 없이도 우리 부대의 지휘관들과 대원들이 사령부호위를 잘하고있었기때문이였다.

그러나 1937년 봄에 와서는 나 자신도 전우들의 의사를 더는 거역할수 없게 되였다. 우리가 백두산지구에 밀영을 꾸리고 활동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적들은 우리의 내부와 주변에 많은 밀정들과 암해분자들을 박아넣었다. 그런 특무들중에는 도끼를 가진자도 있었고 비수를 가진자도 있었으며 눅거리춘화나 독약을 가진자도 있었다.

적들은 우리가 밀영에 있을 때에도 자객들을 들이밀었고 원정을 할 때에도 자객들을 침투시키였다. 어떤 간첩들은 지하조직에 망라되여 가짜열성을 내는 방법으로 신용을 얻은 다음 조직의 추천까지 받아가지고 유격대에 입대하여 사령부를 해칠기회를 노리였다.

일본의 특무기관들에서는 위증민은 몇천원, 전광, 진학장은 몇천원, 최현, 안길, 한인화는 또 얼마 하는 식으로 이름있는 지휘관들에게 현상금까지 걸고 그들을 사로잡으려고 하였다. 자료에 의하면 나에게는 그보다 더 많은 현상금이 붙어있었다고 한다.

적들이 사령부지휘성원들을 소멸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하는 조건에서 우리도 부득불 그것을 격파할만한 대응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되였다.

우리 부대 지휘관들은 또다시 사령부호위문제를 가지고 떠들었다. 위증민까지도 이에 합세해 나섰다.

<김사령은 몸을 아끼지 않는게 탈입니다. 공격의 초점이 김일성동지에게 집중되고 있다는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적들이 괜히 김사령의 몸값을 높이 매긴줄 압니까. 경위부대조직을 서둘러야 합니다.>

나는 그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을수 없었다. 만사람이 다하자는 일을 나 혼자서 굳이 반대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무의미한 고집으로 될수 있었다.

우리 사령부산하에서 경위대가 정식으로 발족한것은 1937년 봄이였다고 기억된다. 그때 이 사업을 선두에서 주관한 사람은 사령부 조직과장 김평이였다. 내가 중대규모에서 경위대를 조직해보라고 하자 그는 신바람이 나서 뛰여다니였다. 하루밤사이에 인원선발도 끝내고 지어는 경위중대가 갖추어야 할 무기명세까지 다 짜놓았다.

나는 조직과장이 만든 경위중대원명단을 보고 그것을 반대하였다. 그 명단대로 하면 각 중대들에서 핵심이라고 할만한 쫄쫄한 사람들은 다 경위중대에 망라되게 되여있었다. 시난차 전투에서 용맹을 떨친 김택환, 이름난 기관총수들인 오백룡, 강흥석, 힘장사인 강위룡, 녀장군으로 소문난 김확실을 비롯하여 한다 하는 싸움군들은 다 그 명단에 포함되여있었다. 그들을 경위중대에 모조리 끌어오면 다른 중대들의 골간이 완전히 허물어질수 있었다.

경위중대에 배당하기로 한 무장장비 또한 이만저만 요란하지 않았다. 조직과장은 이 중대에다가 기관총도 여러정이나 주는것으로 타산하고있었다. 그 당시 우리 주력부대가 가지고있는 기관총의 대부분을 경위중대에 주고 나면 전투련대들에는 각각 1정씩의 기관총도 차례지지 못하는것으로 되였다.

나는 이 구상에 동의할수 없었다.

<인원선발도 잘하지 못했고 무장장비에 대한 타산도 잘하지 못했소. 다른 중대들의 전투력을 약화시킬바에야 경위중대를 꾸려선 뭘하겠소. 기본전투단위인 중대가 허술해지면 련대가 약화되고 련대가 맥을 추지 못하면 사령부자체의 안전도풍전등화의 신세가 되는 법이요.>

<사령관동지, 이것은 제 개인의 의사가 아니라 군정간부들의 의사를 종합한것입니다. 대중의 소망을 한데 묶은것이니 부결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김평은 대중이란 말에 력점을 찍으면서 어떻게 하나 나의 동의를 받아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의 제안을 기각해버리고 내가 짠 명단을 강다짐으로 내리먹이였다. 그러지 않고는 지휘관들의 성화를 막아낼 길이 없었다. 그 명단에 의하면 경위중대의 대부분 력량은 전투경험이 미숙한 신입대원들을 기본으로 하여 꾸리는것으로 되여있었다. 그 초년병들중에는 심지어 총알을 한되박도 쏴보지 못한 마안산아동단출신의 애숭이들도 있었다.

이 안은 발표되기 바쁘게 지휘관들의 완강한 반대를 불러 일으키였다. 그들은 리동백을 부추겨서 나한테로 보냈다. 내가 <대통령감>의 조언만은 무시하지 못할것이라고 타산한 모양이였다. 사령관이 잘 받아들이지 않는 문제를 재삼 들고나올 때마다 그들이 리동백을 자기네 대변인으로 내세우군 한다는것은 나도 잘 알고있었다. <대통령감>은 그 대변인역을 매번 훌륭하게 수행하군 하였다. 늘 하던 버릇대로 그는 이번에도 사령부에 나타나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였다.

<장군님, 겸양도 분수가 있지, 어떻게 그런 애숭이들한테 사령부호위를 맡긴단 말입니까. 그 애숭이들이 짐이나 되지 않으면 오히려 다행이겠습니다. 자칫하다가는 이제 사령부가 그 애들의 보모노릇을 하느라고 욕을 볼수 있습니다. 애당초 단념하시는게 좋겠습니다.>

나는 <대통령감>에게 말하였다.

…경위대의 기본력량이 초년병들로 꾸려진다고 해서 겁낼것은 하나도 없다. 잠간이면 그들도 싸움에 익숙해지게 될것이다. 지난번 <동기대토벌>때 우리의 신입대원들이 싸움을 얼마나 잘하였는가. 또 그들이 생소한 유격대생활에 얼마나 빠른 속도로 적응되고있는가. 이제 무송원정까지 하고나면 우리의 신입대원들이 모두 구대원들과 다름없는 강자가 될것이다. 내가 신입대원들을 기본으로 하여 경위중대를 꾸리자고 하는 리유는 그들을 옆에 바싹 끼고다니면서 똑똑한 싸움군들로 키우자는데 있다. 그들이 모두 끌끌한 전투원으로 자라나게 되면 사령부는 하나의 믿음직한 예비대를 가지게 되는셈이니 이게 얼마나 좋은 일인가. 유격대생활에 아무리 미숙한 사람들인지라도 우리가 잘 키우면 다 강병으로 될수 있다. 인재를 키우는 사업을 떠나서는 혁명승리에 대하여 상상조차 할수 없다. …

이런 내용으로 일장 해설을 하였더니 <대통령감>은 아무 반박고 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다음부터는 오히려 그가 나의 대변인이 되여 지휘관들을 설복하였다. 리동백마저 태도를 바꾸어 나의 안을 지지해나서게 되자 지휘관들도 더는 자기네 주장을 고집할수 없게 되였다.

우리 나라 혁명무력건설력사에서 처음으로 되는 경위중대는 이런 곡절을 거쳐 탄생하였다. 경위중대가 탄생한 고장을 그 당시는 수피창자밀영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경위중대에 3개의 소대와 기관총반을 두었다. 사령부 전령병들과 작식대원들도 조직생활을 경위중대에서 하였다. 첫 중대장으로는 리동학이 임명되였다. 과오를 범하고 평대원으로 생활하던 <보따지>는 중대장으로 복직되자 여간만 사기가 나하지 않았다. 리동학의 과오란 수하의 신대원들이 군중공작조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것이였다. 잘못은 대원들이 저질렀지만 그는 부하들을 잘 교양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중대장자리에서 철직되였었다.

경위중대가 조직된 날 리동학은 대원들앞에서 기관총련발사격을 해대는것과 같은 빠른 말씨로 훈시를 하였다.

<우리 중대의 기본임무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령부를 잘 호위하는것이요. 우리의 혁명선배들은 유격구시절부터 장군님을 잘 호위하였소. 그들이 오늘은 우리에게 계주봉을 넘겨준셈이요. 그런데 우리 형편은 어떤가. 다 신대원들이 아니면 애숭이들이요. 나는 우리가 사령부를 호위하는것이 아니라 사령부가 도리여 우리를 호위하게 될가봐 걱정이요. 내가 호소하고 싶은것은 이 한가지뿐이요. 사령부가 우리를 호위하게 하지 말고 명실공히 우리가 사령부를 호위하자는것이요.>

<보따지>의 이 연설이 경위대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 대원들은 중대장이 대원들을 너무 얕잡아보는것 같아서 기분이 좀 언짢아지더라는 말도 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리동학이 연설을 너무 과격하게 하였다고 탓할수는 없었다. <보따지>의 걱정은 공연한것이 아니였다. 초기의 경위중대실태를 그대로 말한다면 얼마동안은 우리가 그들을 호위했다고 말하는것이 옳을것이다. 경위중대는 사령부를 호위하는 기본임무와 함께 한 개 전투단위로서의 임무도 동시에 수행하였고 그 과정에 경위대원들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였다.

경위중대의 애숭이들은 우리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매사에 처신을 어른스럽게 하였다. 그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인격 상으로 자기들에게 성인대접을 해주지 않는것이였다.

언제인가 리동학이 공식석상에서 자기 중대에 소속되여있는 마안산출신의 아동단원들을 보고 햇병아리들이라고 말한적이 있었다. 그 말을 들은 경위중대의 애숭이들은 모두 실망을 금치 못하였다. 김정덕은 저녁밥도 먹지 않고 시무룩해있었다. 그는 마안산에서 데리고 온 수십명의 소년들중에서도 제일 어른티가 나고 행동거지가 숙성한 대원이였다.

나는 그가 저녁도 먹지 않고 덤덤히 앉아있는것을 보고 이렇게 물었다.

<너 왜 밥도 먹지 않고 그러고있느냐? 혹시 누구하고 말다툼이라도 한게 아니냐?>

<아닙니다. 중대장동지가 우리를 햇병아리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김정덕은 말끝을 흐리면서 얼굴을 붉히였다.

나는 그의 천진스러운 대답에 그만 소리를 내여 크게 웃고 말았다.

<햇병아리란 소리가 그렇게도 듣기 싫더냐? 그거야 너희들이 귀여워서 하는 말인데.>

<중대장동진 귀여워서만 그러는게 아닙니다. 사실 병아리들은 병아리들이니까요. 이런 풋병아리들이 어떻게 사령부를 보위해드립니까. 저두 정말 야단났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김정덕이 우울해한것은 리동학의 말대로 자기네가 사령부호위중책을 훌륭히 수행해내지 못할것 같은 위구심때문이였다.

나는 김정덕을 바라보면서 네가 벌써 어른이 다 되였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하기는 그의 나이가 17살이였으니 어리다고만 보아서는 안되였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사실 취침시간이 될 때마다 경위중대의 애숭이들은 정말 병아리들처럼 내곁에 모여들어 저마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싱갱이질을 하군 하였다. 그들이 노리는 제일 좋은 자리란 나의 량쪽옆구리에 붙어서 잘수 있는곳이였다. 그 당시 나에게는 모포가 한장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애숭이들이 량옆으로 몰려와서 다가붙으면 잠자리가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부담으로 된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무엇에도 비길데없는 즐거움으로 되였다.

나는 잠자리에 들 때면 두팔을 벌리며 <얘들아, 어서 오너라!>하고 어린 경위대원들을 찾군 하였다. 그러면 그들은 환성을 지르며 내옆으로 모여들어 저마다 더 가까이에 눕겠다고 승벽내기를 하였다.

나의 옆자리는 대체로 리오송과 같은 여라문살짜리 경위대원들에게 차례졌다. 나는 리오송이네 또래에게 그런 특전을 베풀면서도 모든 아이들이 누구나 다 한번씩은 내 곁에서 잘수 있도록 매일 잠자리를 바꾸게 하였다. 내가 혹시 순서를 헛갈려서 어느 한 아이에게 공평치 못한 <혜택>을 베풀면 항의를 하느라고 야단들이였다.

한번은 김평이 무슨 일로 해서인지 밤중에 나를 찾아왔다가 잠자리 때문에 싱갱이질하는 경위대원들을 보고 대단히 못마땅해한적이 있다.

<사령관동지, 저것 보십시오. 저런 철부지들이 어떻게 경위사업을 감당한단 말입니까. 저 애들이 사령관동지앞에서 저렇게 버르장머리없이 행동하는것을 보면 경위사업을 고사하고 아무짝에도 쓰지 못할것 같습니다. 욕을 많이 해서 좀 버릇을 떼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는 곱지 않은 눈으로 경위대원들을 쏘아보았다. 원래 아동단출신들이 경위중대에 들어오는것을 한사코 반대하던 김평이다보니 비판도 이만저만 호되게 하지 않았다.

나는 김평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부모형제의 사랑이 그리워 밤이면 잠자리다툼을 하는것인데 꾸중을 해서는 뭘하겠는가고 꼬마들을 두둔해주었다.

한장의 모포를 놓고 여럿이 한덩어리가 되여 자는것을 그때 우리는 <따바리잠>이라고 하였다. 10여명이 발을 모포속에 밀어넣고 따바리모양으로 빙 둘러누워서 자는 잠이였다. 덮을것이 늘 모자라고 한지에서 자야 하는 유격대생활에서는 경위중대의 애숭이들이 고안해낸 이 <따바리잠>이 매우 실용적이였다.

해방직후 혜산쪽에 나가서 지방공작을 하던 리오송이 사업보고를 하려고 나를 찾아온 일이 있었다. 그 당시의 우리 숙소는 지금의 당창건사적관이 자리잡고있는 해방산기슭에 있었다. 나는 그 숙소에서 얼마동안 우리 동무들과 함께 산에서처럼 공동숙식을 하였다. 지방공작을 하는 동무들이 평양에 오면 그 숙소를 꼭꼭 찾아오군 하였는데 리오송도 상례대로 내앞에 나타났다.

취침시간이 되자 투사들은 이불을 펴기 시작했다. 그러자 리오송이 <장군님과 같이 잘 때에야 <따바리잠>을 자야지.>라고 하면서 그 이불들을 와락와락 밀어제끼였다. 그날 숙소에 있던 북만출신의 동무들은 <따바리잠>이 어떤것인지를 잘 몰랐다.

리오송은 내 팔을 잡아 끌며 <장군님, 오늘밤만은 백두산시절처럼 <따바리잠>을 자보시지 않겠습니까?>하고 물었다.

하지만 나는 그 청에 인차 응할수가 없었다. <따바리잠>을 자자면 부득불 숙소의 모든 투사들을 <따바리>속에 다 끌어들여야 하는데 그들이 그런 노죽을 달가와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내가 주저하는 눈치를 보이자 리오송은 다짜고짜로 나를 자리에 눕히며 <자, 누워주십시오. 다리를 좀 구부리십시오. 장군님의 오른쪽에 김책동지가 누우시고 그옆에 최현동지, 장군님의 왼쪽 옆자리는 내 자리입니다.>하면서 잠자리들을 억지로 잡아주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지령 때문에 김책도 옴짝달싹 못하고 <따바리>속에 끌려들어갔다.

나는 경위중대의 애숭이들을 몹시 사랑해주면서도 그들을 무원칙하게 어루만지지는 않았다.

잘못을 저지르면 눈물이 나게 꾸중도 하였고 어려운 일거리를 많이 맡겨 단련도 시키였다. 기온이 령하 40도를 오르내리는 겨울날에도 우리는 그들에게 보초임무를 주어 눈보라치는 한지에 내보냈다. 때로는 구대원들과 꼭같이 혈전의 길에도 내세웠다. 규률을 위반하였을 때에는 중대들을 돌아다니면서 자기비판도 하게 하였고 1평방메터도 되나마나한 동그라미안에 서서 2시간이고 3시간이고 자기 잘못을 돌이켜보게도 하였다. 그러다보니 가슴아픈 때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내가 다행이라고 생각한것은 아무리 엄한 비판을 하고 모진 단련을 시켜도 그들이 나를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는것이였다. 한번은 리오송이 련락을 가다가 길을 헛갈려 시간을 어긴 일이 있었다. 내가 정해준 길로 가지 않고 제멋대로 로정을 바꾼탓이였다. 나는 그때 리오송이 사령부의 지시를 제때에 집행하지 못한 사실을 알면서도 그를 책망하지 않았다. 이 전례없는 처사는 리오송을 자못 서운하게 하였다.

(나는 사령관동지한테서 비판을 받을 자격도 없단 말인가. 사령관동지는 지금도 나를 코흘리개로 알고계시는게 아닌가.)

이런 옥생각으로 자신을 괴롭히던 그는 나를 찾아와 다른 사람한테는 책벌을 주면서도 왜 자기한테는 책벌을 주지 않는가고 하면서 규률을 위반했으니 자기한테도 처벌을 달라고 졸라댔다.

참다운 사랑과 믿음이 있는곳에서 처벌은 오히려 하나의 믿음의 표시로 된다. 우리가 비판을 하고 처벌을 주어도 경위대원들이 그것을 조금도 탓하지 않고 달게 받아들인것은 가식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을 주고 믿음을 준데 대한 보답이였다.

경위대원들의 성장을 위하여 우리가 특별히 힘을 기울인것은 학습이였다. 나는 보통날이나 밀영에서 집중적인 군정학습을 하는 날이나 그 어느때를 막론하고 경위대원들의 교사가 되여주었다. 그 당시 사령부에는 <동아일보>, <만선일보>, <조선일보>를 비롯한 국내외의 신문들과 <레닌주의제문제>, <사회주의대의>, <국가와 혁명> 같은 책자들을 비롯하여 식견을 넓히는데 도움이 되는 출판물이 수두룩하였다. 우리는 경위대원들에게 이 모든 자료들을 읽을수 있는 특혜를 주었다. 그대신 그들에게서 구두나 서면으로 된 독후감을 어김없이 받아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경위중대는 학습에서 인민혁명군의 모든 부대들이 따라배우는 모범단위가 되였다. 가는 정이 있어야 오는 정이 있다고 주는 정이 있으면 받는 정이 있기마련이다. 우리는 경위대원들에게 정을 준것만큼 그들에게서 또한 정을 받기도 하였다.

경위대원들은 사상적으로나 군사실무적으로 빨리 발전하였다. 그들은 사령부호위도 본때 있게 하였다. 솔직히 말하여 나는 그들의 도움으로 위험한 고비를 여러번 모면하였다.

어느때인가 우리는 안도현의 한 밀영에서 림수산이 끌고 온 적 <특수부대>의 포위에 들었던 일이 있다. 림수산은 우리 주력부대에서 참모장으로 있다가 변절하여 유격대<토벌>을 전업으로 하는 <특수부대>대장이 된자였다. 그는 서간도일대를 돌아치며 우리가 꾸려놓은 후방밀영들을 닥치는대로 파괴하였다.

그날아침 우리는 밀영을 뜨려고 조반을 일찍 지었다. 짧은 시간에 식사를 끝내고 출발을 서둘러야겠는데 보초를 교대해줄 사람이 없었다. 당번 보초는 리을설이였다. 그래서 내가 보초를 대신하였다. 리을설이 식사를 하고있는 동안 나는 인적기가 나지 않는가를 주의깊이 살피였다. 안개가 자욱한 날이여서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다를가 보초소근방에서는 수상한 인적기가 났다. 그것은 삭정이가 부러지는 소리였다. <적이다!>하는 순간적인 판단과 함께 나는 진대나무밑에 엎드리면서 무작정 싸창을 꺼내 갈기였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10여메터 앞에서 적의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그날아침 내가 인적기를 느끼고 진대나무밑에 엎드리면서 싸창을 갈긴 순간은 눈깜박할 사이였다. 그처럼 짧은 순간 식사중에 있던 강위룡과 리을설은 나의 안전을 념려하여 보초소로 뛰여나왔다. 먼저 강위룡이 나를 완력으로 진대나무밑에서 끌어내였다. 그러는 사이에 리을설이 경기관총을 휘둘러댔다. 솔직한 고백이지만 나는 그 순간 우리의 운명이 여기에서 결판나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였다. 그래서 곰이라는 별명을 가지고있는 강위룡이 나를 진대나무밑에서 끌어내려고 모지름을 쓸 때에도 그들이 죽으면 나도 함께 죽으리라는 비장한 생각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 불사신같은 경위대원들은 탄막속에 몸을 통채로 내대고 천신만고하여 나를 사경에서 구원하였다. 적들이 포위환을 좁히며 다가들자 리을설은 수류탄을 뽑아 들고 우뚝 일어서서 <이놈들아, 덤빌테면 덤벼들라. 너 죽고 나 죽고 해보자!>고 부르짖었다.

그 기세가 어찌나 서슬푸르고 도고했던지 적들은 비실비실 뒤로 물러섰다.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강위룡은 나를 탄막속에서 완전히 뽑아내였다.

림수산은 우리가 철수한 다음 밀영을 몽땅 털어갔다. 그 바람에 우리는 아깝게도 문건, 사진, 소책자, 의약품이 들어있는 배낭을 잃어버리고말았다.

<특수부대>가 철수한 다음 밀영에 되돌아가 내가 대리보초를 서던 자리를 보니 한아름이나 되던 싸리나무떨기가 칼로 후려친것처럼 중둥이 일매지게 끊어져있었다. <특수부대>의 기관총화력이 이만저만 세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보고 <동무들이 아니였더라면 내 오늘 저세상에 갈번 했소.>하고 말하였다.

우리 부대 경위대원들이 자기 사령관을 얼마나 충실하게 호위했던지 그 소문이 린접부대의 중국인지휘관들한테까지 퍼져갔다. 그들은 늘 우리가 똑똑한 전령병들과 경위대원들을 두고있는데 대하여 부러워하였다. 만나면 롱담 삼아 적선을 하는 셈치고 좋은 전령병을 한병만 달라고 하든가 김사령이 데리고 다니는 경위대원들중에서 아무 사람이라도 좋으니 중국말을 좀 아는 대원을 몇 명만 달라고 하였다. 우리 주력부대의 경위대원이나 전령병들을 탐내는데서는 양정우나 위증민이나 주보중이나 조아범이나 할것없이 다 체면을 가리지 않았다.

무송원정직후 조아범은 나에게 조선사람들가운데서 전령병감을 골라달라고 하였다. 나는 우리 부대의 전령병들중에서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김택만을 조아범에게 보내면서 그를 잘 보호해주라고 하였다. 조아범이 반 <민생단>투쟁때 조선사람들에게 원한을 많이 끼치고 또 그가 내 개인의 활동에도 제동을 많이 건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를 배척하거나 그가 모처럼 한 부탁을 외면할수 없었다. 우리가 새 사단을 조직하였을 때 조아범이 우리 주력부대의 정치위원으로 오게 되여 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의 신변안전을 담보할수 없었기때문이였다. 우리 부대에는 반<민생단>투쟁때 조아범한테서 피해를 본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 사람들이 모두 조아범을 좋지 않게 보고있었다. 내가 부대의 정치위원을 겸하게 된것은 그때문이였다.

김택만은 나의 부탁대로 조아범을 잘 보호해주었다.

조아범은 김택만을 총명하고 충직한 청년이라고 하면서 훌륭한 전령병을 보내준데 대하여 여러번 감사를 표시해왔다.

양정우도 우리에게 여러번 좋은 사람을 달라고 하였다. 양사령이 1군, 2군의 군정간부들이 모이는 회의에 참가하려고 남패자에 나타났을 때 나는 그에게 내가 데리고 다니던 전령병들을 여러명 넘겨주었다. 그리고 수백명의 대원들과 지휘관들을 떼내여 그에게 독립려단을 잘 꾸려주었다.

위증민도 양정우나 조아범처럼 우리가 키워낸 사람들을 곁에 두고싶어하였다. 그가 너무도 간절하게 조선인경위대원들을 요구하기에 나는 황정해와 백학림을 보내주었다. 김철호, 전문욱, 임은하, 김득수 등도 한동안 위증민과 함께 있었다. 그들은 모두 위증민을 충실히 도와주고 호위하여주었다. 한때 주보중은 조선사람인 박락권을 경위대장으로 두었다. 3방면군 군장 진한장도 마안산아동단출신인 손명직을 전달장으로 두었다.

나는 우리가 보내준 동무들이 항일련군의 각 부대들에서 국제주의적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희생적으로 싸우고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흐뭇한 심정을 금할수 없었다.

경위중대에 망라된 대원들은 모두 나의 생명의 은인들이였고 친위전사들이였다. 우에서 지적한 동무들외에도 나를 지켜준 전우들은 수없이 많다. 김운신, 최원일, 김학송, 한익수, 전문섭, 김홍수, 최인덕, 최금산, 조명선, 지봉손, 김봉석, 리학송, 리두익, 오재원…그들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외우면 수천수만갈래도 뒤엉킨 지난날의 사연들이 추억속에 저절로 어려온다.

첫 경위중대장 리동학은 련대장으로 승진된 후 1938년말경에 전장에서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리동학의 후임으로 경위중대장이 된 리달경은 원래 4사에서 기관총수로 있던 사람이였다. 그는 백발백중의 명사수였다. 어찌나도 총을 잘 쏘았던지 리달경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경위중대의 정치지도원으로 얼마간 있다가 리동학이 련대장으로 소환되여 간 다음 중대장으로 임명되였으나 한달도 못되여 전사하였다.

리달경 다음으로 경위중대장을 한 박수만도 참으로 용감한 사람이였다. 그는 쌍산자전투에서 나에게로 집중되는 적의 화력을 다른데로 돌리기 위하여 기관총사수를 데리고 이곳 저곳 자리를 옮겨가며 싸우다가 흉탄을 맞고 그 후과로 운명하였다.

경위중대의 초대중대장인 리동학으로부터 4대중대장인 오백룡에 이르기까지 사령부호위를 위해 복무한 모든 중대장들이 다 나를 위한 일이라면 그 어떤 고행도 마다하지 않은 사람들이였으며 나의 명령, 지시를 관철하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은 충실한 전우들이였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생명의 은인들중에는 리권행이라는 10대의 애젊은 경위대원도 있었다. 그는 나를 친형처럼 따르고 존경하였다.

어느해 겨울이였던지 추격해오는 적들을 꼬리에 달고 강행군을 할 때에 있었던 일이다. 겨울치고는 아주 지독하게 추운 날이였다. 그런데 아무리 눈속을 헤치며 행군을 계속해도 발이 얼어들지 않았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신발을 벗어보았더니 바닥에 솜처럼 보드랍게 다져진 울로초가 차분히 깔려있는것이였다. 전령병들은 리권행의 소행이라고 나에게 가만히 귀띔해주었다.

중국사람들은 인삼, 록용, 초피(돈피)를 <관동(동북)3보>로 이르는데 어떤 강추위에도 발을 얼지 않게 해주는 울로초도 <동북3보>에 넣고있었다. 진펄에만 돋는 이 풀이 어떻게 되여 내 신발바닥에까지 깔리게 되였는가. 아마도 리권행은 나를 위해 울로초를 발견할 때마다 한줌 두줌 뜯어 배낭속에 간수해주었던것 같다.

그가 장백현 15도구전투때 몸으로 나를 막아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세상에 살아 남지 못하였을것이다. 적들은 그날 사령부가 있는 지휘처에 집중사격을 가해왔다. 리권행이 몇번이고 지휘처를 안전한 장소로 옮기자고 하였으나 나는 그의 권고를 받아들일수 없었다. 그 자리는 적아를 한눈에 바라볼수 있는 좋은곳이였다.

그런데 적탄이 불시에 나에게로 쏠리기 시작하였다. 이 위급한 순간에 리권행은 두팔을 벌리고 몸으로 나를 막아섰다. 그가 방패처럼 나에게 안긴 순간 적탄이 그의 다리뼈를 부수어놓았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리권행을 품에 안고 총상자리를 살펴보는 나의 심정이 과연 어떠했겠는가.

나는 담가를 따라가며 리권행에게 <넌 죽지 않아!>, <넌 죽지 않아!>하고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고무해주었다.

리권행은 오히려 <사령관동지, 저는 죽지 않습니다. 제 걱정은 말고…다시 만날 때까지 아무쪼록 건강하십시오.>하고 나를 위로하였다. 그때 내 표정이 몹시 비장했던 모양이다. 그것이 그가 나에게 남긴 마지막말이였다. 그가 후방병원에 후송된후 편지를 썼다는데 나는 그것을 받아보지 못하였다. 내가 입수한것은 리권행이 후방밀영에서 치료를 받다가 적들에게 체포되였다는것과 그가 장백현경찰서에서 매일같이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사령부위치를 대지 않고 절개를 지키다가 최후를 마쳤다는 소식뿐이였다.

사령부경위대원들중에는 <륙크사크>라는 별명을 가진 동무도 있었다. 륙크사크란 등산용배낭을 말한다. 그에게 <륙크사크>라는 괴이한 별명이 달린것은 그가 언제나 류달리 큰 배낭을 지고다녔기때문이였다. 그가 왜 그처럼 부피가 큰 배낭을 지고 다니는지 그것은 누구도 몰랐다.

그 배낭의 비밀이 드러난것은 림강의 어느 전투에서였다. 적아간에는 맹렬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그날따라 <륙크사크>동무는 내곁에서 한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전호의 흉벽에 적탄이 배길 때마다 혹시 상처라도 생길것 같아 그를 끄당겨 안아 흉벽밖으로 얼굴을 내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면 그는 어느새 내 품에서 빠져나가 적들이 오른쪽으로 달려들면 내 오른쪽 옆구리에 다가붙고 적들이 왼쪽으로 달려들면 내 왼쪽옆구리에 다가붙군 하였다.

싸움이 끝난 다음 진지에서 솜타는 냄새가 몹시 나기에 전호를 돌아보았더니 놀랍게도 총알구멍이 두개나 난 <륙크사크>동무의 배낭에서 연기가 새여나오고있었다. 그러나 주인은 그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도리여 옷이 탄다고 고함을 치면서 동료들을 들볶고있었다. 대원들이 달라붙어 그의 배낭을 헤쳐보았는데 차곡차곡 개여넣은 명주솜갈피에서 뜨끈한 적탄알이 두알이나 굴러나왔다. 그때에야 나는 그가 왜 배낭을 메고 줄곧 내곁에서 감돌았는가 하는것을 깨닫게 되였다. 결국은 <륙크사크>동무의 그 명주솜이 나를 위험에서 구원해준셈이였다.

나는 <륙크사크> 동무에게 어떻게 되여 그처럼 기발한 생각을 하게 되였는가고 물었다. 그는 김정숙동무가 나의 동복을 만들 때 명주솜을 두면서 이런 솜을 두면 총알이 뚫지 못한다고 말하는것을 들었는데 그때부터 자기도 나를 위하여 방탄용 배낭을 만들 작정을 했다고 대답하였다.

항일전쟁에서 경위전사들이 쌓아올린 공로를 한두마디로 다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강조할수 있는것은 조선혁명의 명맥을 지켜가는데서 이룩한 공적만으로도 그들은 마땅히 후손들의 찬양과 절을 받을만하다는것이다. 그들이 혁명의 사령부를 위해 바친 그 숭고한 동지적의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시대의 꽃으로 피여 나고 있는 충효일심의 시원으로 되고있다.

나는 항일혁명시절의 경험에 기초하여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에도 10대의 혁명가유자녀들로 친위중대를 무어 최고사령부를 호위하게 하였다.

친위중대원들은 나의 신변을 호위하느라고 수고도 많이 하고 위험한 고비도 많이 겪었다. 어느해 겨울인가 나는 련합작전을 위해 성천에 있는 중국인민지원군 부대에 갔다오다가 적폭격기편대의 기습을 받은 일이 있다. 그때 그들은 나를 밭고랑에 넉지로 넘어뜨리고 모두가 방탄벽이 되여 두겹, 세겹, 네겹으로 내우에 엎드리였다. 이와 비슷한 일은 그 후에도 여러 번 있었다.

1950년 가을의 그 간고한 일시적전략적후퇴시기에도 나와 함께 마지막까지 평양에 남아 최고사령부를 호위한것은 바로 그 용감무쌍한 친위중대 대원들이였다.

노도와 같은 남진으로부터 후퇴에로의 전쟁국면의 급격한 변화는 수도시민들을 의기소침하게 하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최고사령부를 바라보고있었으며 최고사령관이 전쟁의 전망을 두고 무슨 말을 해주는가를 기다리고있었다.

나는 방송연설을 통하여 후퇴는 일시적인것이다, 도처에서 빨찌산투쟁을 하라, 승리는 우리 인민의 편에 있다고 언명하였다. 그런 다음 친위중대원들을 시켜 시내를 한바퀴 돌면서 가창행진을 하라고 하였다. 이 뜻밖의 명령을 받고 친위중대원들은 아연해하였다. 대동강 건너편에서 벌써 적의 포소리가 꽝꽝 들려오는데 태연하게 가창행진은 왜 하라고 할가 하는 표정들이였다. 그러나 다음순간 그들은 최고사령관이 가창행진을 하라고 하는것을 보면 이 전쟁은 이긴 전쟁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씩씩하게 거리로 행진해나갔다.

후퇴를 앞둔 음산한 수도의 거리에서는 갑자기 친위중대원들이 부르는 <조국보위의 노래>가 우렁차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 노래소리를 듣고 수천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달려나왔다. <친위중대다!>, <친위중대다!>, 도처에서 이런 목소리가 날아왔다.

(친위중대가 우리 곁에 있다, 친위중대가 남아있으니 최고사령관도 지금 우리 가까이에 있을것이다.)

그때 평양시민들은 친위중대의 가창행진을 구경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였다고 한다.

친위중대는 평양시내의 모든 기관들이 후퇴를 개시한 그때에야 비로소 나와 함께 수도를 떠났다.

항일전쟁시절의 경위중대원들이 지금은 어느덧 환갑이 훨씬 넘은 늙은이들이 되였다.

그들을 대신하여 지금은 혁명의 3세, 4세들이 당중앙위원회와 최고사령부를 호위하고있다. 세대는 바뀌고있으나 새로운 경위중대, 친위전사들은 끊임없이 자라나고있다. 그것이 몇만, 몇십만인가를 구태여 헤아릴 필요가 있겠는가. 온 나라 군대와 인민이 모두가 경위대원이 되고 친위전사가 되여 당과 혁명을 보위하고있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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