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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11-5. 백전로장 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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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6,672회 작성일 15-05-30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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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백전로장 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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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호두를 떠나 백두산으로 나올 때 우리가 선택했던 로정가운데서 중요한 행선지의 하나는 돈화-안도현경의 목단령산줄기에 있는 인민혁명군의 독립1사 후방밀영기지 미혼진이였다. 크고작은 밀영들이 천리수해속에 여기저기 널려있는 이 종심깊은 대밀영지구에서 우리는 왕덕태, 위증민을 비롯한 2군의 주요지휘관들과 함께 남호두회의방침을 관철하기 위한 일련의 대책적문제들을 토의하려고 계획하였다.


한두번 다녀간 사람도 향방을 잡지 못해 쩔쩔 맨다는 심심산골 미혼진, 산봉우리들과 골짜기들의 모양새가 하도 어슷비슷하여 초행자들은 누구나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할수 없는 혼미의 세계에 빠져든다고 하니 이 천고의 수림지대를 미혼진이라고 명명한 옛사람들의 통찰력에는 감탄하지 않을수가 없다.


우리도 처음에는 밀영을 제때에 찾아내지 못하고 갈팡질팡하였다. 다행히도 우심정자라는곳에서 박성철이 소속되여있던 독립1사 1련대 1중대 동무들을 만나 그들에게 미혼진까지의 길안내를 부탁할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미혼진골안이 온통 장티브스오염구역으로 되였다고 하면서 우리의 청탁을 잘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 골안에 열병환자들이 수십명이나 모여서 앓고있는데 그런곳에 간부들을 모시게 되면 신변안전을 담보할수 없다는것이였다.

《그 환자들가운데 시체가 되여 땅에 묻힌 사람들만 해도 몇이나 되는지 모릅니다. 그런곳에 장군님을 모시다니요. 우린 그런 모험을 할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길안내를 해줄수 없다고 딱 잡아떼였다. 그 당시 인민혁명군에서는 전염병때문에 많은 인명피해를 보았다. 유격구가 존재할 때부터 발생했던 발진티브스와 장티브스가 유격구를 해산한 다음에도 계속 그림자처럼 우리의 대오를 따라다니며 천금보다 귀중한 생명들을 사정없이 앗아갔다. 이것은 인민혁명군의 전투력을 약화시키는 가장 무서운 근원으로 되였다.

《장티브스도 사람의 몸에서 생기는것이니 사람이 능히 다스릴수도 있고 좌지우지할수도 있는거요. 아무렴 사람이 전염병을 이기겠지 전염병이 사람을 이기겠소. 그러니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소. 동무들은 지금 그 장티브스라는 병을 신비화하고있단 말이요.》


내가 이런 말로 전염병공포증을 비난하였으나 그들은 그냥 장티브스의 위험성을 력설하며 미혼진으로 가지 못한다고 고집하였다.

《사람이 전염병을 이긴다는게 다 뭡니까. 그 병앞에서는 강자와 약자가 따로 없습니다. 모두가 고양이앞의 쥐이지요. 최현중대장동지가 얼마나 강한 사람입니까. 그런데 그분도 장티브스때문에 몇주일째 미혼진에 누워있단 말입니다.》

《아니, 그 강쇠같은 싸움군도 전염병에 걸렸단 말이요? 그가 장티브스때문에 고생한다면 내 더더구나 미혼진에 가야겠소. 내가 우심정자에까지 왔다가 전염병이 무서워서 미혼진에 들리지 않고 그냥 백두산으로 나간다면 후날 그 사람이 얼마나 섭섭해하겠소. 동무들이 내 신변을 걱정하는데 나는 이미 왕청에서 열병을 앓고난 사람이요. 면역이 생겼으니 전염에 대해서는 안심해도 되오.》


1중대의 지휘관들은 그제서야 길안내 겸 호위로 우리에게 1개 소대가량의 대원들을 붙여주었다. 그들은 미혼진에 가더라도 열병환자들의 병실에는 절대로 출입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하였다.

털어놓고 말해서 나는 그때 최현이 열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대단히 실망하였다. 내가 비록 입으로는 장티브스를 사람이 능히 좌지우지할수 있는 병이라고 하였으나 실상 그것은 전률할만한 무서운 질병이였다. 그 저주로운 질병이 혁명군의 지휘관이라고 해서 특별히 에누리를 할리는 만무한것이였다. 최현과 같이 성급한 사나이들의 육체에서는 오히려 만병이 더 사납게 요동을 치고 기광을 부리는 법이다. 병은 만사람을 꼭같이 건드리면서도 성급하거나 인내력이 부족한 인간들에게 언제나 더 많은 불행을 가져다주군하였다. 나는 귀중한 전우의 생명이 경각에 이르고있다는 생각에서 잠시도 벗어날수 없었다.


《김사령, 무엇을 그렇게 골똘히 생각합니까? 혹시 최현동무에 대한 걱정을 하는게 아닙니까?》

내가 아무 말도 없이 침울하게 걸음을 옮기고있는것을 보자 왕덕태가 넌지시 물었다. 사교성이 부족하고 말수더구가 적은 무뚝뚝한 군사지휘관이였지만 그는 사람들의 심리를 정확하게 투시할줄 아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있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아맞혔습니까?》

나는 그가 정적을 깨뜨려준데 대하여 고맙게 생각하였다. 사람이 입을 다물고있는 순간에는 오만가지 잡념에서 해방될수 없으니 말이다.

《그걸 왜 알아맞히지 못하겠습니까. 김사령이 이 왕덕태와 같은 벗을 옆에 두고도 말을 걸지 않고 침묵을 지킨다면 그것은 사람들의 운명을 두고 심사숙고한다는 신호가 아니겠습니까.》

《판단이 정확합니다. 나는 아까부터 줄곧 최현에 대해서만 생각했습니다. 그가 무사했으면 좋겠는데 병세가 어느 정도인지 불안해서 견딜수 없습니다.》

《안심하십시오. 최현은 병을 이겨낼것입니다. 그는 의지가 강한 사람입니다.》

《그럴가요?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고보면 최현이란 사람이 참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남의 꿈속에 내가 나타난다는것, 남의 기억속에 내가 있다는것, 남의 관심속에 내가 산다는것…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왕덕태의 그 소박하면서도 심오한 지론은 나를 감동시키였다. 나는 왕군장의 견해에 전적인 공감을 표시하였다.

《그것 참,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나는 아직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아마 최현도 이 순간에는 김사령을 그리고있을것입니다. 그가 평소에 얼마나 김사령을 사모하는지 나는 시샘이 날 정도였습니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김사령과 최현사이에는 단 한번의 접촉밖에 없었던것 같은데 어떻게 되여 당신들은 그토록 열렬한 우정을 지니게 되였습니까?》

《그건 나자신도 잘 설명할수 없습니다. 이틀밤을 함께 자고나니 십년지기가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사이에 나는 그 사람에게 홀딱 반해버리고말았습니다. 이거 짝사랑에 빠지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하, 짝사랑이 다 뭡니까. 최현이란 사람도 마촌바람을 한번 쏘이고나서는 내내 김사령에 대한 말만 하였습니다.》


최현이 마촌바람을 쏘이였다는 말은 그가 소왕청 마촌에 와서 나를 만나보고 돌아갔다는 소리이다. 나와 최현과의 첫 상봉에 대한 이야기는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를 통해서도 이미 소개되였고 이 회고록의 3권을 통해서도 짤막하게 스치고 지나간바가 있다.

그 상봉을 마련해준 계기가 동녕현성전투였다는것은 세상이 다 아는바이다. 통신원의 불찰로 참전명령을 제때에 받지 못하여 행차뒤 나발격으로 때늦게 마촌에 도착한 최현은 그때 동녕현성전투가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분해하였다. 그는 통신원을 두고 오만가지 쌍욕질을 다하고나서 분이 좀 가라앉은 다음 나에게 물었다.


《왕청도 참가하고 훈춘도 참가하고 구국군패들까지 다 참전했는데 유독 연길의 시라소니들만은 동녕현성대문앞에 가보지도 못하고 엉덩방아만 찧고있었으니 이거야 어디 분통이 터져서 견디겠습니까. 김일성대장님, 또 다른곳을 칠 계획은 없습니까?》

《젊은 사람을 보고 〈님〉이라니요. 그저 김일성이라고만 불러주시오.》

내가 이런 말로 겸양의 뜻을 표시하자 온몸에서 화약내가 물씬물씬풍기는 이 로병은 큰일이라도 난것처럼 펄쩍 뛰였다.

《여기에 나이가 많고적고가 무슨 상관입니까. 나는 마음속으로 김대장을 조선군대의 상좌에 모신지 오랩니다. 그러니 함자를 높여 부르는것이 마땅합니다.》

《젊은 사람들을 그런 식으로 춰주면 인차 교만해지고 현훈증에 걸립니다. 동무가 계속 그런 식으로 나를 춰올린다면 나는 다시 동무를 상대하지도 않겠습니다.》

《이것 참, 나도 배짱이 센 사람인데 김대장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럼 김대장 소원대로 이제부터는 말을 낮추겠습니다.》


그때부터 최현은 말투를 고치였다. 그는 한다면 하고 안한다면 안하는 전형적인 무관기질의 사나이였다. 그가 나에 대해 경어를 사용한것은 다만 공식석상에서뿐이였다. 이것은 우리의 우정에서 거치장스러운 례의와 격식을 제껴놓고 오히려 그 우정에 진실성과 참신성을 부각시켜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바다물속에서 진주를 캐내듯이 한명한명 힘들게 채취해내는 동지가 우리 혁명의 《황금》으로 되고 혁명을 확대하고 상승시키는 필수불가결의 추진력으로 되고있던 그 시절에 최현과 같은 장부를 동행자로 얻게 된것은 분명 나의 생애에서 특기할만한 사변이요, 행운이였다.


마촌에서의 상봉은 처음부터 나에게 커다란 만족감을 주었다.

첫 상봉치고는 그 상봉이 일으킨 충격의 심도가 너무나도 깊었다. 그런데 이상한것은 초면손님인 최현이 자꾸만 구면인물처럼 느껴지는것이였다. 음성도 귀에 익었고 생김새나 몸가짐도 몹시 눈에 익어보이였다. 지어는 언제인가 이 름름한 대장부와 함께 항일을 론하고 구국을 운운한 일이 있었던것 같은 생각조차 들었다.


최현이 나에게 구면인물처럼 느껴지게 된것은 그가 지니고있는 모든것이 내가 그때까지 머리속에서 줄곧 그려보고 하나의 형상으로 완성시킨 전형적인 무관의 모델에 가까왔을뿐아니라 내가 간도땅에 와서 최현의 과거와 관련된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많이 들어온데서 생긴것이였다고 볼수 있다.

최현은 망국의 비운이 절정으로 치달아오르고있던 1907년 이국땅 간도의 황토대지우에서 인생의 노를 받아안았다. 1907년은 우리 민족사에 치욕의 기록을 무수히 남긴 비통하고 다사다난한 해였다. 리준이 헤그에서 할복자결한것도 이해이고 고종의 퇴위와 조선군대의 해산이 선포된것도 이해이며 《정미7조약》의 체결과 《차관정치》의 강행으로 우리 나라 내정권이 모두 일제의 수중으로 넘어간것도 이해였다.


미증유의 파괴력을 가진 경제공황의 파도가 사납게 밀려드는 땅에서 최현을 낳은 부모들은 새 생명의 장래를 걱정하며 불안에 떨었다. 《한일합병》과 3.1인민봉기, 경신년의 간도대《토벌》은 어린 최현의 피를 끓게 한 극적인 사변들이였다.


그 절망적인 암흑의 시대에 한가닥의 희망으로 된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간도일각에서 무력항쟁에 고심하고있던 독립군의 존재였다. 홍범도와 임병국은 그의 선배였고 스승이였다. 최현의 어린시절은 용감하고 굴할줄 모르는 이 로장들의 활동과 뗄래야 뗄수 없게 튼튼히 련결되여있었다. 그는 이 로장들에게서 사격법도 배우고 용마법도 배웠다. 홍범도의 수하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던 아버지 최화심은 최현이 11살 잡히던 해부터 어린 아들에게 통신련락을 시키였다. 최현은 그해에 아버지한테서 한자루의 권총을 선물로 받아안았다.


경신년대학살은 조선의 교포들이 할거하고있던 간도의 방방곡곡에 피비린내나는 흔적을 남겨놓았다. 최현도 그 《토벌》에서 어머니를 잃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임병국의 부대를 따라 연해주로 넘어갔다. 산천도 설고 사람도 설고 말도 설었으나 한생을 일제와의 싸움에 바치려는 최현의 결심에는 변함이 없었다. 임병국대장은 그를 련락병으로 임명하여 수하의 한지대에 파견하였다. 용마술이 남달리 뛰여난 최현은 말을 타고 지대와 본부사이를 왔다갔다하며 련락병의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당년 13살에 불과한 이 애되고 체소한 소년이 말을 타고 광야로 쏜살같이 달려갈 때면 로씨야사람들도 경탄과 선망에 찬 눈길로 그를 바라보군하였다.


한번은 그가 통신련락임무를 받고 말을 탄 3명의 동료들과 함께 비발치는 탄막을 헤치며 최전선으로 돌진한적이 있다. 일행중 3명은 적탄에 희생되고 최현은 팔에 부상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부상자리를 돌볼 사이도 없이 탄우속을 뚫고 과감하게 앞으로 달려 본부에 책임적으로 통신을 전달하였다. 임병국은 최현의 팔에 붕대를 감아주며 독립군의 장군감이라고 그를 치하해주었다.


그 독립군부대가 패전한후 간도로 돌아온 최현은 후날의 독립련대련대장인 윤창범의 안내를 받아 동만청총에 가입하였다. 동만청총시절은 최현이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공산주의운동에로 방향전환을 하던 시기였다고 말할수 있다. 이 방향전환과정은 그가 연길감옥에서 7여년의 옥중생활을 하던 시절에 촉진되였다. 반동군벌당국은 1925년에 갑자기 그를 체포하고 경제모연사건의 혐의로 그에게 무기징역이라는 어마어마한 중형을 언도하였다.

5.30폭동과 추수, 춘황 투쟁의 파도가 지나간뒤 연길감옥은 이 투쟁의 앞장에서 대중을 이끌던 간도혁명의 선각자들과 애국자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자유를 구속당하였으나 그 구속속에서도 머리를 쳐들고 도고하게 살아가는 생기발랄한 이 랑만가들의 소사회는 최현의 성장발전에서 결정적역할을 한 학교였고 용광로였다. 최현은 이 감옥에서 옥내지하조직인 반제동맹에도 가입하고 적위대에도 입대하였다. 옥중고초는 마침내 독립군시절의 옛 련락병을 민족주의자로부터 공산주의자로 완전히 개조시킨것이다.


군벌당국이 길림 제4감옥이라고 부르던 연길감옥에서 최현에 의해 빚어졌고 그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옥중일화들과 아슬아슬한 모험담들은 동만의 모든 유격구들에 널리 알려지였다.


최현의 옥중생활은 먼저 감방의 《제왕》인 《깡툴》과의 대결로부터 시작되였다. 그가 들어간 감방의 《깡툴》은 죄수들을 학대하는데 이골이 난 살인강도범이였다. 새 죄수들이 감방에 나타날 때마다 그자는 그들의 물건을 있는대로 강탈하여 자기의 소유로 만들군하였다. 음식이 들어오면 남들의 몫까지 빼앗아서 자기의 배를 채웠다.


《깡툴》에게 버릇을 가르쳐주기로 결심한 최현은 어느날 《칼》표 고급담배를 한대 물고 감방안의 다른 죄수들에게도 한대씩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깡툴》에게만은 일부러 권하지 않았다. 이것은 《깡툴》의 약을 올려주기 위한 무언의 도전이였다.

심사가 꼬인 《깡툴》은 최현이더러 가지고 들어온 물건을 자기한테 모조리 바치라고 을러메였다. 최현이 대답대신 한입가득 물고있던 담배연기를 구름처럼 내뿜자 참을성을 잃어버린 《깡툴》은 손찌검을 하려고 덤벼들었다. 최현은 몇사람의 머리우를 날아넘어 수갑을 찬 두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답새긴 다음 이렇게 호통쳤다.

《네 이놈, 내가 누구라고 감히 허튼수작질을 하는거냐? 네놈이 밖에서 살인을 치고 감옥에 들어와서도 불쌍한 형제들을 못살게 구니 너처럼 포악하고 죄많은놈이 어디 있겠느냐. 너도 우리들과 다름없는 평민의 자식이 아니란 말이냐? 이번만은 관대히 용서하니 앞으로는 처신을 잘해야겠다. 이제부터는 네가 저 아래목 변기통옆으로 내려가라. 이 웃자리는 내 자리다.》


최현을 당해낼수 없다고 자인한 《깡툴》은 그가 시키는대로 변기통옆에 가서 무릎을 곤두세우고 조심스레 자리를 잡았다.

《깡툴》의 억압에서 해방된 죄수들은 그후부터 모두 최현을 은인으로 섬기고 따르기 시작했다.

최현이 무기징역언도를 받은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에 군벌당국은 대성중학교, 동흥중학교, 영신중학교, 영신녀학교, 은진중학교를 비롯한 룡정시내의 여러 학교 학생들로 감방견학을 자주 조직하였다. 적들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사상단체와 반일반군벌단체들이 속출되여 맹렬한 활동을 벌리고있던 이 일대 청소년학생들의 혁명의식을 거세하고 투쟁기세를 압살하려고 꾀하였다.


최현은 각 감방들에 련락을 하여 미리 물총을 만들게 한 다음 때를 기다렸다가 학생들이 와서 감옥을 돌아볼 때 대렬을 인솔하는 반동교원들과 간수들에게 변기통의 구린내나는 물을 쏘면서 욕설을 퍼붓게 하였다.

《이놈들아, 무엇을 보여주자고 학생들을 여기까지 끌고왔느냐!》

불의의 봉변을 당한 반동교원들은 학생들을 데리고 감옥에서 황급히 달아나버리였다.

감옥측은 주모자를 색출하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모든 죄수들이 저마다 자기가 책임자라고 주장해나서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말았다.


최현은 연길감옥에 있을 때 옥내의 제화공장에서 제화공으로도 일하고 석판인쇄공장에서 식자공으로도 일하였으며 피복공장에서 고급양복을 짓는 재봉사로도 일하였다. 나중에는 목공장의 목수노릇도 하고 죄수들의 머리는 물론, 간수들과 간수장, 감옥장의 머리까지 깎는 리발사노릇도 하였는데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를 까닭없이 학대하고 구박하는 인간들에 대해서는 그가 누구건 절대로 용서하지 않고 맵짠 징벌을 가하군하였다. 어느날 최현은 책걸상제작에 쓰는 갈매나무로 장기쪽을 만들려다가 옥내공장감독에게 들켜 줄매를 맞은 일이 있다. 그 감독은 죄수들에게 매를 대는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였다. 분격한 최현은 조립중에 있던 의자다리로 그를 호되게 답새겼다. 감옥당국은 그에게 한주일동안의 영창처벌을 주었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감독은 죄수들에게 더는 폭행을 가하지 못하였다.

최현의 옥내투쟁가운데서 가장 이채를 띤것은 탈옥투쟁이였다. 그는 윤창범을 비롯한 여러 동지들과 함께 독립군시절의 옛 상관인 임병국을 비롯하여 그밖의 여러 혁명가들을 감옥밖으로 빼돌리는데 성공하였다. 정의로운것을 옹호하고 고수하기 위해서라면 분신도 할수 있고 천길낭떠러지에 뛰여내릴수도 있는것이 바로 최현의 타고난 배짱이며 풍랑속에서 길들여진 그의 성격이였다.


출옥후 최현은 태양모적위대에 입대하였으며 시련에 찬 투쟁을 통하여 공산당에도 입당하고 인민혁명군 연길유격대 중대정치지도원으로까지 발전하였다.

마촌에서 최현을 만나던 그때까지 이 유명한 배짱군에 대하여 내가 알고있은것이란 대체로 이런것이였다.

《일이 이왕 이렇게 된바에는 왕청에 이틀쯤 남아서 김대장의 이야기나 듣다가 가겠소. 방해가 되지 않겠지요!》

첫 상봉의 인사치레가 끝난후 최현이 나에게 한 말이였다.

나는 그의 제의에 쾌히 동의하였다.

우리는 긴긴밤이 지새는줄도 모르고 온밤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날 아침 보초대에서는 적들이 유격구로 쳐들어온다는 신호를 지휘부에 보내왔다. 나는 부대를 고지에 배치하고 산으로 오르면서 최현에게 량해를 구하였다.

《싸움을 좀 하고 돌아올테니 그때까지 숙소에서 좀 기다려주시오.》

최현은 그 말을 듣자 자리에서 고무공처럼 튕겨 일어났다.

《좋은 마수거리가 생겼는데 숙소에서 기다리다니. 최현이 김대장을 따라가지 않고 숙소에 우두커니 앉아있는다면 최현이 아니지요. 하늘도 오늘은 이 최현이를 알아줍니다. 김대장수하에서 한번만이라도 싸움을 해보고싶으니 나도 고지로 데리구 가주시우다.》

《소원이 정 그렇다면 같이 싸워봅시다.》

최현은 벙글벙글 웃으면서 나를 따라 고지에 오르기 시작했다.

적들은 유격대가 매복하고있는 계선으로 돌격해오지 않고 멀리서 눈먼총질만 하다가 유격구인민들의 피땀이 스며있는 곡식낟가리들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나는 유격대원들에게 원거리저격전으로 적들을 무자비하게 소멸하라고 명령한 다음 최현을 향해 《참, 최현동무가 사격명수라는 소문을 들었는데 한번 솜씨를 좀 구경해봅시다.》라고 말했다.


최현은 마레샹보총으로 불뭉치를 들고 곡식낟가리에 달려드는 적병 한놈을 단방에 쏘아눕히였다. 적과의 거리가 약 500메터나 되였으나 그는 매번 단발명중으로 적들을 쓸어눕히군하였다. 그의 사격솜씨는 실로 만사람을 감탄시킬만한것이였다.

《동녕현성전투에 참가하지 못한 한이 이제는 좀 풀렸습니까?》

전투가 끝난 다음 최현에게 이런 질문을 했더니 그는 입을 다시며 머리를 흔드는것이였다.

《좀 풀리긴 했지만 아직은 냠냠하우다.》


우리는 그날밤에도 잠을 뒤로 미루고 담화를 하였다. 화제의 중심을 이룬것은 조선혁명의 당면과업과 그 수행방도에 대한 문제였다. 나는 반일부대들과의 련합전선에 관한 문제, 반일민족통일전선문제, 새형의 주체적인 당창건에 대한 문제를 비롯한 몇가지의 중요한 로선상 문제를 설정하고 그와 함께 실천적인 론의를 거듭하였다.

그 담화의 결과를 두고 최현은 대단히 만족해하였다.

《이제는 동녕현성전투에 참가하지 못한 분이 좀 가라앉을사합니다. 동녕현에는 따라가지 못했지만 마촌에 와서 그 봉창을 단단히 하고 돌아갑니다.》

나는 최현을 바래줄 때 첫 상봉기념으로 그에게 동녕현성전투에서 로획해온 다태갈 4정과 호박물주리를 선물로 주었다. 그때부터 그 물주리는 그가 가장 애용하는 소지품으로 되였다.


전투와 전역의 국면을 좌우하는 긴장된 사색이 진행될 때마다 그의 호박물주리에서는 독한 담배연기가 구름처럼 피여오르군하였다. 최현의 주변에는 그 물주리에 눈독을 들이고 그것을 자기의 소유로 만들지 못해 안달아하는 애연가들이 적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완력으로, 어떤 사람들은 감언리설로, 또 어떤 사람들은 물물교환의 방법으로, 그보다 더 욕심사나운 사람들은 최현이 취중에 있을 때 주머니에서 슬쩍 꺼내는 방법으로 그것을 빼앗으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은 다 허사로 돌아갔다.


해방후 당과 정부의 요직에서 일하고있던 일부 애연가들중에는 《최현동무, 그 물주리만 물면 담배맛이 꿀맛이라는데 우리도 한모금 빨아봅시다. 〈세금〉은 후히 지불하겠소.》하는 따위의 흥정을 붙이는 사람들까지 나타났다. 벽창호같은 최현에게는 그런 흥정조차 통하지 않았다. 최현이 라진에서 휴양을 할 때 동기생으로 그와 친숙해진 김익선만이 그에게서 하루동안의 기한부로 호박물주리를 빌려내는데 성공하였을뿐이다.


지금 그 호박물주리는 조선혁명박물관에 진품 그대로 전시되여있다. 사적일군들은 처음에 최현에게서 한두마디의 설복으로 그 물주리를 손쉽게 수집할수 있을것이라고 타산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였다. 최현은 그 일군들이 노리는것이 자기가 수십년동안 진주보석이나 금덩어리보다도 더 끔찍하게 보존해온 물주리라는것을 알게 되자 노발대발하면서 그들을 쫓아버리였다.

《뭐, 어찌고 어째? 최현이 가지고있는 호박물주리를 박물관에 전시하려 한다구? 이 물주린 전인민적소유가 아니구 내 개인소유야. 우리 장군님께서 최현이더러 쓰라구 주신게지 누구나 보고 만질수 있는 공동소유는 아니란 말이야. 정 가지고 싶은게 있으면 차라리 내 수염이나 뽑아가라구.》


사적일군들은 최현의 호통과 삿대질에 얼이 빠질 지경이였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고 부지런히 그를 찾아다니였다. 그들은 다섯번째만에야 이 고집불통의 로장을 설복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며칠전만 해도 범처럼 으르렁거리던 로장군이 그날은 딴사람처럼 돌변하여 살갑게 손님들을 대해주었다.

《오늘부터 이 물주리는 최현의 소유가 아니라 전인민적소유야. 내 마지막으로 담배를 한대 피우고 줄테니 조금만 기다리게.》

최현은 물주리끝에 가치담배를 꽂고 성냥을 그어 불을 붙인 다음 한모금한모금씩 연기를 탐스럽게 빨아서는 허공중에 천천히 날려보내군하였다. 로장군의 가느스름한 눈은 먼 북방의 하늘을 하염없이 더듬고있었다. 그 하늘밑에는 우리의 첫 상봉의 력사가 새겨진 마촌도 있었고 그가 40이 다될 때까지 싸창을 차고 발목이 시게 걸어다닌 빨찌산시절의 초연에 절은 전장들도 있었다.


나와 최현을 하나의 뉴대로 이어주고 영원한 동행자로 되게 한 그 운명적인 2박 3일은 문자그대로 우리의 우정사에 그 어떤 힘이나 수단으로써도 깨뜨릴수 없는 철벽의 만리성을 쌓아놓았다.

최현이 첫 상봉을 통하여 나에게 남기고 간 인상가운데서 가장 큰것은 그가 매우 솔직하고 소탈한 사람이라는것이였다. 그는 보는대로 말하고 생각나는대로 표현하는 사나이였다. 그의 사상과 감정은 순간순간마다 얼굴에 그대로 다 드러나군하였다. 이런 사람들앞에서는 기만도 조작도 외교도 다 통하지 않는 법이다. 최현의 어린애와 같은 단순성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깨끗하게 정화시켜주는 이상한 매력을 가지고있었다. 그 매력에 끌린 나머지 나는 자기의 속마음을 최현에게 송두리채 퍼주지 않을수 없었다.


나는 미혼진밀영에 도착하자마자 50여명의 열병환자들을 수용하고있는 반토굴식병실부터 찾아갔다. 바로 그 50여명속에 내가 그처럼 만나보고 싶어하는 최현도 포함되여있었다.

밀영을 지키고있던 후방일군들이 병실문을 열어제끼고 김사령이 온다고 선통하자 최현은 누웠던 자리에서 가까스로 일어나 출입문쪽으로 벌렁벌렁 기여나왔다.

내가 첫눈에 마촌에서 새겨두었던 옛모습을 잘 알아볼수 없을 정도로 뼈만 앙상하게 남은 그의 얼굴은 참혹하게 변모되여있었다.


《김대장, 부탁입니다. 들어오지 마시오! 들어오면 안됩니다!》

최현이 두팔을 내저으며 불이 황황 이는것 같은 눈으로 나를 지켜보는 바람에 나는 한동안 출입문앞에서 주춤거리지 않을수 없었다.

《이거 미혼진 인심이 너무 야박한것 같다. 최현을 보고싶어 왔는데 문전축객을 하다니 이런 인사불성이 어디 있소.》

내가 이런 롱을 하였으나 최현은 막무가내였다.

《야박하다는 말을 들어두 할수 없수다. 그래 김사령도 여기가 염라국문앞이라는것을 모른단 말이요?》

《하하, 총알을 100가마니쯤 쏴봤다는 최현이 이런 엄살쟁이인줄은 정말 몰랐구만.》

최현은 자기의 말이 이가 들지 않는것을 보자 나를 병실까지 안내해 온 후방일군들에게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이 시라소니같은것들아, 여기가 어디라구 김사령을 함부로 데리고 와? 김사령을 그렇게 모시면 안돼!》

후방일군들은 혼비백산하여 문앞에서 모두 꽁무니를 뺐다.

최현이 욕을 퍼붓는 사이에 나는 병실한복판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박달방치 같이 단단하던 최현이가 장티브스라니 웬일이요?》

내가 머리맡에 다가앉으면서 악수를 청하자 최현은 모포밑으로 황황히 손을 움츠러뜨리였다.

《김사령, 내 몸엔 장티브스벌레가 씨글씨글하오. 제발 내 살에 손을 대지 마시오. 전염병창고 같은 이 잘난 미혼진에는 어쩌자구 오셨소?》

《어쩌자구 왔겠소. 최현일 보고싶어서 왔지. 세상에 별일도 다 있구만, 최현이 전염병에 다 걸리다니.》


나는 모포밑으로 손을 밀어넣어 화독처럼 달아오른 최현의 손을 덥석 잡아쥐고 오래동안 놓지 않았다.

최현의 눈에는 금시에 눈물이 핑 돌았다.

《김사령, 반갑소. 이 잘난 최현이가 뭐게… 난 김사령을 못보고 저승에 가는가 했소.》

방금전까지 곁에 오지 말라고 애원하던 그가 인제는 내 손을 집게처럼 꽉 잡아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때의 최현은 영낙없는 어린애였다.


그는 2차 북만원정과 관련한 질문을 몇가지 하고나서 장티브스로 인한 피해상황을 한참동안 설명하였다.

나는 최현의 운명과 관련된 일신상의 문제에로 화제를 돌리였다.

《그동안 〈민생단〉감투를 쓰고 마음고생을 퍼그나 했다는데 그게 사실이요?》

《사실이지요.》

최현은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나서 자기의 머리에 《민생단》감투가 떨어진 경위를 성급하게 엮어대기 시작했다.

《김대장이 마촌에서 통일전선에 대한 말씀을 얼마나 많이 했소. 그래 난 그 로선을 천하에 둘도 없는 명로선이라구 생각했댔지요. 연길에 돌아간 다음 우리 부대 동무들에게도 선전을 좀 했더니 왕덕태군장까지도 통일전선을 안하면 못산다지 않겠소. 그런데 난 그 통일전선을 하려다가 〈민생단〉감투를 쓰지 않았겠소.》


우리가 1차 북만원정을 떠나간 다음 최현은 중대를 데리고 돈화현과 화전현 접경지대에 진출하여 유격활동구역을 넓히기 위한 맹렬한 정치군사활동을 벌리고있었다. 이 일대에서 유격구역을 확대하기 위한 선결조건은 대황구막바지에 진을 치고있는 반일부대들과의 사업을 잘하는것이였다.


그 당시 대황구골안에는 80명, 100명 정도의 전투인원을 가진 2개의 산림부대가 주둔하고있었다. 80명짜리 산림부대는 경향이 매우 좋았다. 빨찌산공작원들이 이 부대에 침투하여 반일선전공작을 많이 한 덕이였다. 이 산림부대는 근처의 자위단들과도 좋은 관계를 가지고있었다. 친일로부터 반일로 돛을 바꾼 이고장 자위단들은 여러가지 형식과 방법으로 그 산림부대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그러나 100명짜리 산림부대는 인민들의 재물을 략탈하는것으로 세월을 보내고있었을뿐아니라 류수촌의 적군경들과 은밀히 내통하면서 집단적인 귀순준비까지 하고있었다. 항일과 투항변절을 지향하는 서로 다른 두 산림부대사이의 대립은 류혈적인 무장충돌로 번져갈수 있는 일촉즉발의 위험을 배태하고있었다. 투항을 시도하는 산림부대를 그대로 두고서는 다른 산림부대들을 항일의 길로 선도할수 없었고 그들과의 반일공동전선도 성사시킬수 없었다.


최현은 두 산림부대사이에 화의를 시킨다고 하면서 연회를 차리였다. 투항을 시도하던 100명짜리 산림부대의 지휘관들도 연회에 초대되였다. 그 지휘관들이 연회장에 나타나자 최현중대는 그들을 순식간에 무장해제시키였다. 그러면서도 80명짜리 산림부대는 건드리지 않았다. 그 부대와 우호관계에 놓여있던 자위단에 대해서도 물론 실력행사는 하지 않았다.

최현이 그 자위단을 치지 않은것은 통일전선로선의 요구에 부합되는 공명정대한 처사였다. 그러나 군부 정치주임을 비롯한 상급의 좌경분자들은 《적을 치지 않았으니 적에게 투항한것이나 다름없다.》는 식으로 최현의 정당한 처사를 범죄시하면서 그를 정치지도원자리에서 철직시키고 그가 애용하던 모젤권총까지 회수하였다. 그 처분이 얼마나 부당했으면 왕덕태까지도 《최현동무가 〈민생단〉이라면 우리 2군에 비〈민생단〉은 도대체 누구인가?》고 절규하였겠는가. 

최현은 철직책벌을 받은후 전사로 강직되였다가 왕덕태군장수하에서 1년동안 군부 군수처장으로 활동하였다. 1935년말에야 그는 중대장으로 되였다.

《이 최현이는 김사령덕으로 살아난셈이웨다. 다홍왜에서 김사령이 한목숨을 내대고 우리를 옹호해나서지 않았더라면 나는 영영 〈민생단〉대접을 받으면서 두더지같은 인생을 살았을것이요. 김사령이 말씀해보시오. 그래 그 자위단을 치지 않은게 과연 투항이란말이요?》

최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를 정면으로 주시하였다.

그의 근엄한 얼굴은 주홍빛으로 급작스레 달아올랐다.

나는 최현의 손을 두손으로 정답게 포개여잡고 머리를 저어보였다.

《그게 왜 투항이겠소. 반일전선을 위한 옳은 처사인데… 최현동무를 〈민생단〉으로 몰아서 강직시킨건 아무런 타당성도 없는 허무맹랑한짓이였소.》

《그러면 그렇겠지. 아무렴 이 최현이가 할짓이 없어 〈민생단〉을 한단 말이우? 쌍간나새끼같은것들, 분통이 치밀어 못견디겠거든.》

《최현동무처럼 〈민생단〉으로 몰려 처벌을 받았거나 애매하게 희생된 사람들이 수천명이나 되니 생각하면 기가 막힌 일이요.》

《다 새노란 개수작이지. 그래 윤창범이나 박동근 같은 혁명가들이 어떻게 〈민생단〉일수 있단 말이요. 그 자식들은 일 잘하고 싸움 잘하는 사람들만 골라가며 처형해놓고는 큰 공이라도 세운것처럼 우쭐렁거리며 돌아다니더구만. 이런게 공산주의라면 애당초 연해주에 갔다가 간도땅에 오지도 않았겠소.》

《반〈민생단〉투쟁은 우리의 항일투쟁사에 두번다시 되풀이 되여서는 안될 참혹한 수난이였소. 얼마나 많은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소. 다행히도 국제당에서는 우리가 다홍왜회의에서 표명한 립장이 정당하다는것과 지금까지 동만당이 지도해온 반〈민생단〉투쟁이 극좌적이였다는것을 정식으로 지적하고 그 수습책을 조속히 강구할데 대한 과업을 주었소.》

최현은 이 말을 듣자 눈물을 흘리였다.

《그게 사실이라면 난 이자리에서 만세 삼창을 부르고싶소. 김사령, 고맙소.》

《중요한것은 억울한 루명을 쓰고 죽은 전우들의 원한을 어떻게 풀어주고 우리 혁명이 당한 이 엄청난 손실을 어떻게 봉창하겠는가 하는것이요. 그렇지 않소?》

《옳습니다. 김사령, 우리가 노력해서 그 구멍을 메꿔야지요. 살아남은 사람들이 씨앗이 되여서 말입니다.》


나는 최현의 대답을 듣고 만족을 금치 못하였다. 그는 군사에만 밝은것이 아니라 정치에도 역시 밝은 지휘관이였다. 그후 수십년간의 사업과정을 통하여 나는 그가 군사작전의 능수일뿐아니라 자기 식의 일가견을 가진 무게있는 정치활동가라는것을 확고히 파악하게 되였다. 그는 유능한 군사작전가인 동시에 로숙한 정치일군이자 세련된 선동가이기도 하였다. 최현은 군사외교에도 능숙하였고 적군와해공작도 잘하였다. 그가 장악한 만주국의 군경들은 인민혁명군부대에 계통적으로 탄약과 무기를 공급해주고 적정도 수시로 통보해주었다.


최현을 싸움군으로만 본다면 그것은 근시안적인 평가라고 말할수밖에 없다. 언젠가 항일전쟁시기의 로병들이 《챠빠예브》란 쏘련영화를 보고 이런 소감을 나눈적이 있다.

《저 챠빠예브란 사람은 신통히도 우리 최현대장 같구만. 최현대장이 챠빠예브를 먹고 게운것 같애. 말투도 그렇고 거동도 그렇고 사고방식도 그렇고 싸움하는 본때도 그렇고…》

최현은 노기등등해서 그 말을 반박하였다.

《챠빠예브는 무슨 챠빠예브, 최현이면 최현이지!》

이 대답은 자기를 주먹구구식 군사지휘관으로만 보는데 습관된 동료들의 견해에 대한 로골적인 불만의 표시였다. 최현과 챠빠예브를 동류항으로 놓는것은 정확한 평가라고 할수 없다. 최현을 평가할 때에는 항상 그가 무관이기전에 유격대 정치지도원경력과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경력을 가진 유능한 정치일군의 한사람이였다는것을 명심해야 할것이다.


나는 정열과 신심에 끓는 최현의 눈동자를 미덥게 바라보며 그의 손등에 손을 얹고 대화를 이어갔다.

《…그 씨앗이 열, 백, 천사람을 얻고 천사람이 만사람을 얻는다면 우리는 조만간에 사람부자가 될수 있을것이요. 이것은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선차적으로 해결해야 할 대업이요. 이 대업을 위해서는 우리가 남호두회의에서 강조한것처럼 조국과의 접경지대인 장백지구, 백두산지구에 진출해서 새로운 형태의 근거지를 건설해야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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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최현은 새로운 형태의 근거지라는 말에 상체를 성급하게 일으켜세우고 눈섭을 여러번 씰룩거리였다.
《아니, 유격구를 방금 해산했는데 새 유격구를 또 건설한단 말입니까?》
나는 최현에게 새로운 형태의 근거지를 건설할 필요가 어디에 있고 그 근거지가 종전의 근거지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를 설명해주었다. 만사를 즉석에서 리해하고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최현의 정치적감수성은 참으로 놀랄만한것이였다. 최현은 조선혁명을 주체적으로 발전시키는데서 강력한 지레대로 되게 될 남호두회의의 방침들에 절대적인 지지를 표시하였다. 이 회의의 결정은 최현을 비롯한 미혼진밀영의 모든 열병환자들을 절망의 나락에서 건져주었다.

《열병을 앓는동안 나는 죽을 고비를 여러번 겪었소. 병이 심할 때면 죽고싶은 생각도 났소. 죽으면 만사가 끝장이고 이런 고통도 더는 겪지 않을텐데 하는 어처구니없는 망상에 잠길 때도 없지 않았소. 그런데 오늘 김사령을 만나는 바람에 그런 잡념이 다 달아나버리고말았소. 김사령얼굴을 보니 살고싶다는 생각이 들고 살아서 끝장을 봐야겠다는 배심이 생기오.》
최현이 나에게 한 말이였다.
그가 나와의 상봉에 요란한 주석을 가한것처럼 나도 그와의 상봉에 의미심장한 뜻을 부여하였다.
《동무는 내 얼굴을 보고 힘을 얻었다고 하지만 난 오히려 동무의 얼굴을 보고 힘을 얻었소. 〈민생단〉바람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최현이를 보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소. 지금의 정세에서는 살아남았다는 그자체가 하나의 공로로 되고있소.》

그날 나는 리동백과 함께 밀영을 낱낱이 돌아보았다.
밀영의 의료조건과 식량형편은 차마 눈을 뜨고 볼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였다. 미혼진가까이에 있는 1사 7중대 동무들이 가끔 식량을 공작해서 가져다주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수십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끼니를 이어대기가 무척 힘들었다. 낟알이 떨어지면 죽도 없어 썩은 옥수수겨를 비벼서 끓는 물에 타먹군하였는데 그 거치른 음식마저도 노상 차례지는것은 아니였다.

밀영관리를 담당한 사람이 한명 있기는 하였지만 그 김 아무개라는 사람은 자기 한몸의 안전밖에 돌볼줄 모르는 겁쟁이였다. 최현은 병원에 호송되여오자 그더러 밀영의 관리를 책임진 사무장이 되여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김가는 이구실저구실 붙여가면서 태공을 하였다. 밀영주변에는 1935년 가을 최현이 돈화지방에서 지주를 치고 로획해온 많은 식량과 부식물의 예비가 파묻혀있었지만 그는 쌀이 없다고 우는소리를 하면서 환자들에게 하루 한두끼의 콩죽마저도 제대로 공급해주지 않았으며 몇명 안되는 재봉대의 대원들에게 환자관리를 맡겨버리고는 병에 전염될가봐 10여리나 떨어진 다른 밀영에 가서 흰쌀밥에 고기반찬을 먹으며 호강을 하였다.

김가는 보초근무도 녀대원들에게만 맡겨두었다.
김철호, 허성숙, 최순산을 비롯한 미혼진의 녀대원들이 그때 환자들의 시중을 해주느라고 죽을 고생을 하였다. 밀영에 무슨 김푸관이요, 곽푸관이요, 류푸관이요 하는 후방일군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외부공작을 하느라고 환자들의 뒤치닥거리를 할 경황이 없었다. 녀대원들은 순번을 짜가지고 재봉일도 하고 보초근무도 서고 환자간호도 하였다.

주야로 고통에 시달리는 장티브스환자들은 신경을 칼날처럼 곤두세우고 시중군들을 들볶았다. 그들은 랭수를 마음대로 먹지 못해 모두 미칠 지경이 되였다. 어떻게 되여서인지 그 당시 인민혁명군대원들속에서는 장티브스환자들이 랭수를 마시는것은 독약을 삼키는것과 같은 자살행위라는 여론이 떠돌아 치료에까지 적용되였다. 최현이 밀영병원에 랭수금지령을 내리고 그 금지령을 위반하면 엄벌에 처하겠다고 위협한것도 따지고보면 이 여론을 절대시한데 있었다.

하지만 갈증때문에 리성을 잃어버린 열병환자들은 막무가내로 랭수를 찾았다. 어떤 사람들은 간호병들의 눈을 피해가며 처마끝에 달린 고드름을 따먹었다. 빨찌산의 규률앞에서 그처럼 공손하고 충실하던 사람들이 갈증앞에서는 참을성을 잃고 굴레벗은 망아지처럼 행동하였다. 녀대원들이 랭수대신 죽사발을 주면 내던지면서 입에 담지 못할 쌍욕질을 하였다. 그래도 녀대원들은 열병환자들의 요구를 단호하게 일축해버리군하였다. 환자들이 물독의 물을 마음대로 퍼마시지 못하게 두눈을 부릅뜨고 교대로 보초도 서고 이모저모로 감시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밤 맹손이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통신원이 갈증을 참다 못해 물독을 향해 네발걸음으로 정신없이 기여갔다. 그날밤의 당번보초는 녀대원 허성숙이였다. 허성숙은 맹손을 보자마자 허둥지둥 물독앞으로 뛰여가 그의 손에서 바가지를 나꿔챘다. 그리고는 온 병실이 떠나가게 큰소리로 그를 꾸짖었다.
《맹손동무, 벌써 명령을 잊었나요? 왜 죽고싶어서 그래요? 당장 자기 자리로 돌아가세요.》

극한점에 이른 맹손은 부뚜막앞에 놓여있던 장작개비로 허성숙의 종아리를 호되게 답새겨준 다음 물독의 물을 게걸스럽게 퍼마시였다. 그리고나서는 온밤 모포를 뒤집어쓰고 죽은듯이 누워있었다.
허성숙은 맹손이가 죽는것 같아서 보초교대를 한 다음에도 잠을 못이루고 그의 곁에 앉아 밤샘을 하였다. 다른 환자들도 그가 졸경을 치를것 같아 걱정하였다. 그러나 첫 새벽이 되자 저승에 갈줄로 알았던 맹손이는 모포를 밀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나 허성숙을 덥석 그러안았다.
《성숙동무 고맙소. 나는 살아났소. 내가 물을 먹을 때 동무가 눈을 감아준 덕으로 열이 다 내렸단 말이요. 그 많던 열이 다 어디로 갔을가?》
《땀구멍으로 새버렸지 어디로 갔겠나요. 이것 보세요. 모포에서 김이 문문 나지 않나.》
허성숙은 땀에 푹 절은 맹손의 모포를 높이 쳐들고 병실을 둘러보았다. 잠에서 깨여난 환자들이 모두 그 모포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되여 랭수금지령은 취소되고 사람들은 마음껏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미혼진의 수많은 열병환자들은 사경에서 벗어났다. 침상에서 일어난 장티브스환자들은 녀대원들과 함께 명절이라도 맞듯 음식준비를 하였다.

우리는 밀영주변에서 류푸관과 함께 최현이 돈화에서 로획해왔다는 다량의 쌀과 육류를 찾아냈다. 그때부터 밀영사람들의 식탁에는 기름기가 돌기 시작했다. 여러차례의 원정과 전투에서 단련된 전우들은 장기간의 원정에서 겹쌓인 로독을 풀사이도 없이 미혼진의 녀대원들을 대신하여 날마다 보초를 서주었다.

사람마다 병마에서 구원된 기쁨을 안고 대지를 활보하게 되였을 때 우리는 미혼진에서 왕덕태, 위증민과 함께 인민혁명군군정간부회의를 열고 남호두회의의 방침을 관철하기 위한 실천적인 대책을 세웠다. 이 회의에는 김산호, 박영순, 김명팔을 비롯하여 인민혁명군의 중대정치지도원급이상 간부들이 다수 참가하였다.

남호두회의결정은 고정된 해방지구형태의 유격근거지를 해산하고 활동무대를 만주일대와 조선반도전역에 확대하기 시작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이 1930년대 후반기에 튼튼히 틀어쥐고나가야 할 전략적과업들이였다. 이 과업들을 해결하자면 일련의 전술적대책이 필요하였다.
우리는 장차 백두산지구를 조선혁명의 중심적인 책원지로 삼고 남북만주와 국내깊이에까지 자유자재로 류동하면서 대부대에 의한 적극적인 군사공세와 정치활동으로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투쟁과 공산주의운동을 한계단 더 높이 승화시키려고 하였다. 한마디로 말하여 판을 크게 벌리려고 결심하였다. 이런 구상을 실현하자면 무엇보다도 세가지 고리에서 사람문제를 해결하여야 하였다. 당력량, 군사력량, 전민족적인 범위에서의 통일전선력량, 이 세가지 력량을 충분히 마련하여야 혁명을 새로운 높이에로 발전시킬수 있었다.

이와 같은 시대적요구에 대한 대답으로 우리는 미혼진회의에서 인민혁명군부대들의 개편문제를 토의하고 새로 조직되는 사단들과 려단의 활동지대를 결정하였다.
무엇보다먼저 1개 사단, 1개 독립려단을 새로 편성하여 인민혁명군의 전투력량을 종전의 2개 사단으로부터 3개 사단, 1개 독립려단으로 대폭 확대할것을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기초하여 부대별 활동구역을 분담하였는데 새로 조직될 3사(후에 6사)는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압록강국경연안 일대에서, 1사는 무송, 안도, 림강 일대에서, 2사는 간도와 북만일대에서 각각 활동하기로 하였으며 새로 편성되는 독립려단은 북만주지방에서 류동작전을 하다가 점차 압록강연안에 진출하여 국경일대에서 출몰하는 적들을 제압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실로 짧은 시일안에 전격적인 방법으로 인민혁명군의 전투력을 2배 정도 확대할것을 요구하는 전투적인 결정이였다.

회의에 참가한 군정간부들은 인민혁명군의 개편사업을 항일무장투쟁전반을 위한 진일보로 보고 이 조치를 열광적으로 지지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문제들이 다 순조롭게 해결된것은 아니였다. 집행대책을 토의하는 마당에서는 회의진행에 제동을 거는 잡음도 울리였다. 그 잡음의 기본주제는 간부부족에 대한 걱정이였다.

일부 사람들이 인민혁명군의 개편을 무조건적으로 환영하면서도 간부부족때문에 그 개편사업의 전도에 우려를 표시하는것은 일리가 있는 생각이였다. 반《민생단》투쟁과정에 인민혁명군대오에서는 수많은 군정간부들이 제거되였다. 극단적군사민주주의의 후과도 간부부족을 초래한 하나의 요인으로 되였다. 적지 않은 현직간부들에게는 그때까지도 《민생단》꼬리표가 달려있었다. 인민혁명군의 여러 부대들에서는 지휘관을 보내달라는 목소리가 무시로 울리였다.

우리는 대담하게 믿고 대담하게 등용하는 원칙에 따라 새로 편성되는 부대들에 보낼 간부배치안을 작성하였다. 이 안에 따라 3사는 우리의 직속부대로 되였다. 안봉학은 1사 사장으로 류임되고 최현은 중대장으로부터 1사 1련대장으로 등용되였다.

우리는 미혼진회의에서 조국광복회창립을 위한 준비위원회의 조직문제도 론의하였다.
남호두회의를 1930년대 전반기와 후반기를 구획짓는 하나의 분수령이라고 하면 미혼진회의는 동강회의, 서강회의, 남패자회의와 함께 조선혁명을 1940년대의 대사변으로 유도해간 징검다리라고 할수 있다. 남호두를 떠난 급행렬차는 미혼진, 서강, 남패자를 거쳐 소할바령을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하였다. 미혼진, 서강, 남패자는 남호두로부터 소할바령으로 통하는 력사적인 로정에서 우리의 우정과 심혼이 아낌없이 뿌려진 잊을수 없는 중간정류소들이다.

나는 련대장으로 승진된 최현을 축하해주고 그에게 작별인사를 남기였다.
《다음번에는 백두산지구에서 만납시다. 건투를 바라오!》
최현은 내 팔을 붙잡고 어린애처럼 강떼를 썼다.
《나를 데려가지 않으면 이 팔을 놓아주지 않겠소. 나도 백두산쪽에 나가 김사령수하에서 싸우고싶단 말이요!》
《최현동무, 낸들 왜 당신과 헤여지고싶겠소. 나도 욕심이 있는 사람이고 인정이 있는 사람이요. 그러나 다들 내옆에만 오면 다른 부대는 어떻게 하겠소. 최현이나 최용건, 리학만, 한흥권과 같은 지휘관들이 큼직큼직한 전선을 하나씩 맡아가지고 투쟁을 해야 우리 혁명이 넓은 판도에서 날개를 펴고 빠른 속도로 날아갈게 아니겠소. 나는 소꼬리가 된 최현이보다 범이 된 최현이를 보고싶단 말이요.》
《나 같은게 어떻게 범이 되겠소. 헛참!》
최현은 《헛참!》소리를 련발하고나서 눈을 가늘게 뜨고 어딘가 먼곳을 응시하였다.
《그럼 오늘은 내 더 떼를 쓰지 않겠소. 그렇지만 다음번에는 어림도 없소. 꿈속에서라도 이 최현이를 잊지 마시오. 나도 꿈을 꾸면 김일성사령관곁에 있는 꿈을 꾸겠소.》

나와 최현과의 세번째 상봉은 무송현 서강 양목정자밀영에서 이루어졌다. 물론 최현은 미혼진에서 매듭짓지 못한 흥정을 계속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소원을 성취할수 없었다. 나를 만나기 바쁘게 주력부대에 넘겨달라고 뿔질을 하였지만 구경은 나를 설복시키지 못하였다.

최현은 일생동안 내곁에 있고싶어하였으며 그것을 실현시키려고 할수 있는 노력을 다하였다. 하지만 그의 그런 시도는 그보다 훨씬 더 절박하고 현실적인 다른 유혹에 매번 자리를 내주군하였다. 그 유혹이란 바로 내가 걱정하고 관심하는 가장 준엄한 최전선에 자기를 세우고싶어하는 수정처럼 깨끗한 량심의 충동이였으며 헌신적인 복무정신이였다.

우리를 측근에서 받들어주고싶어하면서도 우리가 부르는 가장 어려운 초소에 자기가 선참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남다른 일욕심, 여기에 바로 최현의 충신다운 면모가 있었고 그의 인간미를 장식하는 특출한 매력이 있었다. 그 두가지 욕망은 한평생 그의 마음속에 쌍둥이처럼 동거하면서 끝없는 힘내기를 해왔다. 최현은 두 욕망을 다같이 지지하면서도 어려운 일이 제기되면 매번 내곁을 떠나 내가 중시하는 초소로 주먹을 부르쥐고 달려가군하였다.

이것은 분명 최현의 일생을 관통해온 유쾌한 모순이였다. 인민무력부와 정무원의 부장직에서 나의 사업을 보좌한 말년을 제외한다면 그의 온 생애는 초연이 자욱한 최전방에서 흘러갔다고 말할수 있다. 그는 1930년대 후반기에만 하여도 수백번의 전투를 하였다. 삼도구전투, 5도구전투, 소탕하전투, 황구령전투, 금창전투, 붉은바위전투, 곰의자리전투, 간삼봉전투, 나루훈전투, 로금창전투, 무치허전투, 푸르허전투, 위탕거우전투, 천보산전투, 대사하, 대장강전투, 요차전투, 한총구전투 등 수백회의 대소전투들은 모두 최현의 이름과 련결되여있으며 탁월한 군사지휘관으로서의 그의 재능과 무비의 용감성을 남김없이 보여주고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남긴 비밀자료들중에서 종종 볼수 있는 《감때사나운 사나이》란 바로 그들자신이 최현에게 붙인 말이다. 일본군경들은 《사이껜부대》가 왔다는 말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 《사이껜》이란 말은 적들을 공포에 몰아넣는 무적장군의 대명사가 되였다.

건국의 그날에도 최현은 38도선 패말이 지척에 바라보이는 최전연에서 무력으로 새 조국 건설을 보위하였다. 미제를 격멸하는 전화의 나날에는 전선동부에서 군단을 이끌었다. 조국이 지켜보고 인민이 지켜보는 격전장에서는 언제나 전사들을 돌격에로 부르는 최현의 자신만만한 구령소리가 울리였다.

최현이 멀리에 있을수록 그는 나의 마음속에서 더욱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로 되였다. 천리비린이라고 마음이 지척이면 천리도 지척이고 마음이 천리면 지척도 천리라는 격언이 있지만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고 존경하는데서는 시공간의 크기가 문제로 되지 않는것 같다. 최현은 남보다 특별히 먼곳에 있으면서 나를 가장 가깝게 받들어온 충신이였다.

그는 벌써 건국운동을 할 때부터 수첩속에 내 사진을 끼워가지고 다니였다. 크기로 보면 보통성냥갑만치나 된다고 할가. 우스운것은 사진임자인 나자신도 그 사진의 출처를 잘 모르고있은것이다. 아마 그가 려단장이 되여 38연선으로 떠날 때 정숙이를 구슬려서 얻어낸것 같은데 사실여부에 대해서는 미지수라고 할수밖에 없다. 최현은 적구에서 2전선을 만들어놓고 빨찌산식으로 활동할 때에도 내가 그리워지면 그 사진을 꺼내보군하였다.

한번은 최현이 적구활동에서 큰 공을 세운 분대장에게 자신의 명의로 되는 표창을 주려고 결심한적이 있었다. 그 분대장의 이름은 김만성이였다. 김만성분대는 적구활동기간 22대의 스리쿼타와 28대의 포차를 포함하여 도합 50대에 달하는 자동차를 로획하고 150여명의 적을 살상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리였다. 전과를 보면 가장 높은 급의 훈장도 받을수 있는 군공이였다.
그런데 최고사령부와의 련계가 단절된 군단지휘부에는 훈장도 없었고 표창장도 없었다. 그러나 일단 결심만 하면 잠시도 우물쭈물할줄 모르는 최현은 김만성을 호출하여 그에게 해방직후부터 가지고 다니던 나의 초상사진을 수여해주었다.
《이건 훈장보다 더 쎈 표창이야. 너 알겠지? 김일성장군님이 우리 나라 책임자라는걸. 간도에서 빨찌산투쟁을 할 때에도 장군님은 우리의 수령이였어. 그때 우리는 그분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이 사진을 간수하고 다니면 총알이 네 심장을 뚫지 못해.》
이것이 내 사진을 주면서 최현이 한 전달사라고 할가.

그후 최현은 최고사령부에 와서 나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슬며시 최현의 약을 올려주었다.
《하여튼 최현은 어쩔수 없는 최현이구만. 그런데 김만성이란 그 분대장은 톡톡히 손해를 봤소. 아무렴 성냥곽만한 사진이 훈장을 탄것만치야 하겠소.》
《그건 너무 야박한 말씀입니다. 이 최현이 아니고야 누가 그런 표창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장군님, 사진은 사진이고 장군님도 한턱 내셔야겠습니다. 최고사령관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불의적인 역습이였다. 나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유인전의 명수에게 걸려든것이다.
병사들을 끝없이 사랑하는 《군단장아바이》의 그 느슨한 도량은 눈물이 날 지경으로 나를 감동케 하였다.
《옳소. 그렇게 합시다. 사진이야 최현동무 몫인데…최고사령관의 명의로 감사도 보내고 훈장도 줍시다.》

이 하나의 물방울 같은 세부를 통해 우리는 최현을 더 깊이 파악하게 된다. 이 일화에는 그의 고결한 세계관이 응축되여있다.
최현은 대체로 이런 사람이였다.
그가 지니고있던 인간적매력을 더 충실하게 전달하자면 무슨 이야기를 더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수 없다. 초연에 절고 비바람에 고삭은 그의 자서전은 너무나도 많은 사연들과 사변들로 가득차있다.
최현은 일평생 비관을 모르고 살아온 락천가였으며 어떤 폭풍속에서도 드놀지 않고 곧추 앞으로만 돌진해온 땅크와 같은 사나이였다.

그가 사랑한 사람들은 어떤 형의 인물들이였던가? 솔직한 사람, 단순한 사람, 근면한 사람, 대담한 사람, 성실한 사람, 통이 큰 사람, 뒤소리를 하지 않는 사람, 필요한 결심을 내릴줄 아는 사람…그는 이런 사람들을 사랑하였다.

그가 제일 싫어한것은 아첨쟁이, 비겁쟁이, 건달뱅이, 수다쟁이였다. 그는 주머니를 12개씩이나 가지고있는 사람들과 꺼풀을 12개씩이나 쓰고 사는 사람들을 항상 경계하였다.
그가 이름난 장기광이라는것은 온 나라가 다 아는 사실이다. 최현은 장기경기에서 한번 지고나면 밥맛을 잃을 정도로 분해하였다. 그러나 그 누가 그의 기분을 좋게 해주느라고 슬쩍 지거나 비겨주면 그보다 더 불쾌해하였다. 최현은 전국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영화애호가이기도 하였다. 그가 영화를 얼마나 좋아하였던지 김정일동지는 그에게 영사기까지 보내주었다. 최현이 제일 좋아하는 영화는 전쟁영화였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 너무 많이 죽는 전쟁영화는 싫어하였다.

최현이 병석에서 림종을 가까이 하고있을 때 나는 여러번 그를 찾아 갔다. 병마와의 싸움에서 지칠대로 지친 그의 몸집은 10대전반의 어린 소년들을 련상시킬 정도로 체소하고 볼품없이 보이였다.
저 자그마한 사람이 과연 두 대전의 파도를 헤가르며 적들을 쩔쩔매게 하던 《감때사나운 사나이》, 백전로장 최현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나무판대기처럼 꽛꽛하던 손마저 힘살이 풀리고 장알이 빠져서 어린아이들의것처럼 노곤노곤해졌다. 내가 그 손을 붙잡고 《이것보 최현이, 그 호랑이 같던 〈사이껜〉이 이렇게 쓰러질수가 있소?》 하고 말하자 최현은 갑자기 입술을 씰룩거리며 오열을 터뜨리였다.
나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씻어주면서 그를 진정시키였다.
《최현동무, 울지 마오. 울면 기운이 빠지오.》
《수령님, 제 미혼진생각이 나서 그랬습니다. 그때두 수령님께서는 이렇게 제 손을 잡아주시지 않았습니까.》
《미혼진. 그래, 어쩐지 그때가 그리워지는구만. 고생스러운 때였지만 우린 다들 혈기왕성한 20대의 젊은이들이 아니였소. 가만, 최현동무의 그때 나이가 서른이였던가?》
《네, 지금의 계산법으로 하면 29살이였지요. 그때 수령님과 함께 손을 잡고 맹세를 다지던 생각이 납니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 수령님, 그때 일이 생각나십니까?》
《생각나오. 왜 생각나지 않겠소.》
《그런데 난 그 맹세를 지키지 못하고 이렇게 먼저… 수령님, 죄송스럽습니다.》
《아니요. 도리여 내가 죄송스럽소. 내가 동무를 더 잘 돌봐주었더라면 동무가 이 지경이 되지 않는건데 내내 일만 시켰거든. 그것도 힘든 일만 골라가면서 말이요. 난 그것이 후회되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일평생 수령님께 페만 끼쳤습니다. 우리가 죽더라도 수령님께서만은 건재하셔서 조국을 통일하여야 합니다. 수령님, 몸을 좀 돌보십시오. 최현의 마지막 부탁입니다. 수령님은 자신을 너무 돌보시지 않는게 탈입니다.》

최현은 서거직전까지 줄곧 나에 대한 말만 하였다고 한다.
나를 보좌하는 일군들이 문병을 갈 때마다 그는 《수령님께서 건강하시오? 김정일동지께서 건강하시오?》 하고 묻군하였다.
나는 일생동안 힘든 일만 시키다가 최현을 보낸것이 너무도 가슴아파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예술영화를 하나 만들어 전국에 보급하도록 하였다. 그렇게 되여 나온 영화가 바로 예술영화 《혁명가》이다.

가정에서의 최현의 공적은 처자들을 모두 당과 수령밖에 모르는 충신으로 키워낸것이다.
최현의 안해 김철호는 일생을 혁명으로 살아온 백절불굴의 투사였다. 그는 적구에서 지하공작도 하고 우리와 함께 무장투쟁도 하였다. 녀성의 몸으로 령하 40도를 오르내리는 만주의 준령과 림해설원에서 손에 총을 잡고 10년동안이나 적들과 겨불내나는 싸움을 한다는것은 북극탐험을 하는것보다 더 힘든 일이였다. 김철호는 적의 《토벌》을 받는 순간 총소리에 놀라 눈무지속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산파도 없이 제손으로 태줄을 끊고는 그 몸으로 다시 추격해오는 놈들과 총격전을 벌린 불사조 같은 녀성이였다. 빨찌산시절의 그 모진 고초를 얼마나 값높게 여기였던지 그는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한달에 한두번씩 자식들에게 꼭꼭 통강냉이죽을 해먹이군하였다.

최현이 김철호를 광명의 길로 이끌어온 충실한 발동기라면 김철호는 최현의 다사다난한 한평생을 백화로 뒤덮이게 해준 따뜻한 빛이였다.
그는 남편과 함께 자식들을 백두산의 눈무지우에서 굴리는 심정으로 엄하게 키워냈다. 그가 낳아 기른 아들들은 지금 김정일동지가 세워준 초소에서 인민대중을 하늘로 보는 우리 식 사회주의를 빛내이며 혁명의 3세, 4세들을 충신으로 키우기 위해 적극적인 활약을 하고있다.

청년총대장인 최룡해는 우리 나라 공산주의운동력사에서 위대한 기념비로 남게 될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치르는데서 큰 공로를 세웠다. 그는 자기 어머니 김철호가 서거한 그날도 장례식에 잠간 참가하고는 인민문화궁전에 나가 축전을 성사시키기 위한 국제준비위원회 회의에 참석하였다. 나는 그 보고를 받고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열리고 배나무에서 배가 열리는것은 움직일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다. 사회의 법칙도 이와 다를바가 없다. 백두산밑에서는 백두의 정기를 타고난 후대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1세들이 눈보라와 강풍속에서 심혼을 다 바쳐 개척하고 발전시켜온 조선혁명을 2세, 3세, 4세들이 김정일동지의 령도밑에 충효일심의 정신으로 부단히 계승완성시켜나가는것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나는 우리의 후대들이 선렬들의 그 리념에 끝까지 충실하리라고 확신한다. 훌륭한 선렬들의 품에서는 훌륭한 후대들이 자라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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