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와 더불어 22-2. 미래에 대한 락관 > 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22-2. 미래에 대한 락관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066회 작성일 16-04-07 23:27

본문



2. 미래에 대한 락관



57074E9C4D44760006


57074E9D4D0C550032





1940년 봄에 있은 일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는 안도와 화룡을 비롯한 백두산동북부일대에서 맹렬한 군사정치활동을 벌리고있었습니다.

말이 났으니말이지 그해 봄에 우리는 참으로 어려운 시련을 겪었습니다. 적은 력량으로 주동을 쥐자니 고생을 많이 할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일 힘에 부치는 시련은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를 겨냥하고 달려드는 적의 파도식《토벌》이였습니다. 수백명씩 또는 수천명씩 무리를 지어 사면팔방에서 악, 악 하고 달려드는데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였습니다.

노조에도 그때는 사생결단을 하고 덤벼들었습니다. 정마를 백두로 몰아 비화를 근절한다고 장담하고 나섰다가 오히려 한해 겨울 인민혁명군의 대부대선회작전앞에서 골탕만 먹어온 그로서는 사실 우리때문에 분통이 터질만도 하였습니다. 관동군사령관은 물론, 일본군부의 추궁도 이만저만이 아니였을것입니다.

싸움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쩔쩔매던 노조에는 약이 오를대로 올라 봉천, 통화 지구로부터 증원대도 끌어들이고 지어는 쏘만국경의 국경경비대까지 불러다가 《토벌》에 내몰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림수산과 같은 투항분자들이 적들을 끌고다니며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를 찾아내려고 날치는 바람에 우리는 더 심한 곤경에 처하였습니다.

그런데다가 산간오지에 있는 사냥군막, 버섯막, 아편밀재배자들의 막 같은데까지 수많은 밀정들이 들이배겨 유격대의 동정을 살피고있었습니다. 그 무슨 《공작대》라는 주구집단들도 우리의 활동구역에 나타나 정세는 일본제국의 편에 유리하다, 전도가 없는 혁명을 하느라고 헛되게 피를 흘리지 말고 귀순하라고 공개적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제일 어려운 시련은 식량난이였습니다.

적들은 우리에게 한되박의 식량이라도 흘러들어가지 못하게 하려고 무진 애를 다 썼습니다. 우리가 산에다가 식량을 매몰해놓으면 어떻게나 빨리 냄새를 맡는지 그것을 다 찾아내여 없애버리군하였습니다.

적들은 집단부락들에서 주민식량에 대한 통제를 무섭게 하였습니다. 농민들이 밭으로 갈 때면 성문보초들이 달려들어 밥그릇까지 뒤져보는판이였습니다. 적지 않은 집단부락들에서는 군경들이 소모하는 식량과 피복, 탄약을 토성밖에 비밀창고를 따로 짓고 보관해두었는데 그 위치는 취급자만 알고있었습니다. 그 취급자가 열쇠를 가지고 다니다가 필요한 때에 창고문을 열고 비밀리에 물자들을 졸금졸금 집단부락에 실어들이였습니다. 우리가 성시를 자주 들이쳐서 후방물자들을 보는족족 다 실어갔기때문에 적들도 그런 대응책을 찾아낸것입니다.

광산과 탄광, 목재채벌장들의 실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서도 식량은 하루나 이틀, 고작해서 사나흘분 정도밖에 가지고있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처창즈부근에 있을 때는 식량도 다 떨어지고 소금도 없었습니다. 7련대와 8련대가 안도지구를 부단히 류동하면서 식량공작을 하느라고 했지만 별로 큰 소득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나니 온 부대가 끼니를 번지며 배를 곯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오죽하면 그해 5.1절을 개구리료리로 쇴겠습니까. 어떤 나라에서는 개구리료리가 고급료정의 식탁에도 오르는 인기있는 식품으로 되고있다지만 우리 나라 식당들에서는 개구리료리를 만들지 않습니다. 간혹 아이들이 논두렁이나 개천에서 개구리를 잡아가지고 꼬챙이에 꿰여 불에 구워먹는 풍경을 볼수는 있지만 그것도 대부분은 장난이나 심심풀이로 하는것이지 맛에 혹해서 그러는것은 아닙니다.

빨찌산생활이 아무리 간고하다 하지만 우리는 5.1절날만은 끼니를 번져본 일이 없었습니다. 소덕수등판에서 맞은 1939년 5.1절에는 대원들에게 술도 내주었습니다.

그런데 1940년 5.1절에는 술이 다 뭡니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개도랑의 개구리를 잡아 끼니를 굼땠습니다. 명절날을 그렇게 보냈으니 명절도 아닌 보통날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우리는 처창즈부근에 있을 때에도 식량고생을 몹시 했지만 양초구치기에서 활동할 때에도 배고픈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온 부대가 풀을 우려먹으면서 구차스럽게 하루하루를 연명해갔습니다. 너무나도 극심한 식량난을 겪다나니 양초구란 지명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것 같습니다.

어느날 나는 기관총소대 동무들이 식사하는 장소에 찾아갔다가 그들을 나무람한 일이 있습니다. 해토가 된지도 오랜데 산채를 뜯어다 나물국이라도 끓여먹으면 맛도 있고 식량보탬도 되지 않는가고 했더니 강위룡소대장은 보초설 인원이 모자라서 나물뜯으러 보내지 못했다고 대답하는것이였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노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물 같은것이야 보초를 서러 나갈 때에도 뜯을수 있고 보초를 서고 돌아올 때에도 뜯어올수 있는것이 아닙니까. 조직사업만 잘하면 하루 국거리 같은것은 잠간사이에 장만할수 있었을것입니다.

나는 강위룡소대장에게 지휘관이란 언제나 자기 대원들의 생활을 책임질줄 알아야 한다고 따끔히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이 모자라면 전령병들까지 데리고가서 산나물을 뜯어오도록 하라고 일렀습니다.

다음날 강위룡은 전령병인 전문섭과 리을설 그리고 한창봉을 데리고 산나물을 뜯으러 갔습니다. 네사람은 저녁녘에야 돌아왔는데 나물은 한바구니도 채 못되였습니다. 사연을 알아본즉 풀밭에서 장시간 씨름을 하느라고 나물을 많이 뜯지 못했다는것이였습니다. 어떻게 되여 뜯으라는 나물은 뜯지 않고 씨름판을 펼쳐놓게 됐는가고 물으니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고 꽃향기가 진동하는데다가 폭신폭신한 잔디밭을 보니 고향생각이 절로 나고 봄동산에서 즐겁게 뛰놀던 어릴적생각이 나서 저도 모르게 씨름으로 한나절을 보내게 되였다는것이였습니다.

전문섭과 한창봉은 나이도 힘도 어슷비슷했습니다. 그러다나니 승부도 쉽게 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체통이 엄청나게 큰 강위룡은 심판이 되여 시합이 한번씩 끝날 때마다 《잘한다. 잘한다. 해봐라. 또 해봐라…》하고 손벽을 치면서 그들을 부추겼습니다. 소대장이란 사람이 손벽까지 쳐가며 자꾸 부추기는통에 두 대원도 신바람이 나서 씨름에 열을 올리였습니다.

사연을 듣고보니 어이가 없었습니다. 전령병들까지 달아서 산나물뜯으러 보냈는데 넷이서 한바구니도 채우지 못하고 오다니, 그것도 부대의 식량사정이 어려운 때에 씨름으로 아까운 시간을 다 보냈다고 하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였습니다.

나는 네사람을 엄하게 비판한 다음 그들에게 각각 주의처분을 주었습니다.

과오의 엄중성으로 말하면 그들에게 그보다 엄한 처벌도 줄수 있었습니다. 우리 대오에는 사령관이 준 임무를 그렇게 허술히 집행한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이상한것은 그 네사람이 다 책임성이 강하고 임무수행에 남달리 충실한 사람들이라는것입니다. 무슨 일거리든지 맡기면 경중을 가리지 않고 척척 해제끼는것이 그들의 한결같은 일본새였습니다. 솔직히 말하여 그들은 우리 부대에서 모범적인 유격대원의 전형으로 내세울수 있는 사람들이였습니다.

밤에 잠자리에 누우니 그들이 들고왔던 골막한 나물바구니가 그냥 눈앞에 얼른거리였습니다. 그 바구니를 보고 주의처분도 주었지만 어째서인지 씨름에 옴해 돌아갔다는 네 대원의 모습을 눈앞에 그려보느라니 이 험한 판국에서도 우리 대원들이 비관을 모르고 배포유하게 씨름까지 해가며 락천적으로 살아가는구나 하는 깊은 생각을 하게 되고 흐뭇한 웃음이 저절로 피여오르는것이였습니다.

사람이 정신적여유가 없거나 생활에 대한 락관이 없으면 그때의 어려운 정황속에서 씨름 같은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우리 빨찌산대원들과 같은 신념의 강자, 의지의 강자들만이 적의 포위속에서 미래에 대한 꿈도 꾸고 노래도 부르고 씨름놀이도 해가며 락천적으로 살아갈수 있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동서고금에 없는 락천가들의 집단이였습니다. 세계에 이름난 군대도 많고 빨찌산도 많았지만 조선인민혁명군만큼 혁명적 랑만과 열정으로 약동하는 생기발랄하고 전도가 양양한 군대는 없었을것입니다. 역경을 웃음으로 다스리고 화를 복으로 전환시키는 사람들, 이 세상이 통채로 꺼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믿는 락천가들의 집단이 바로 조선인민혁명군이였습니다.

전문섭이도 외형을 보면 조용하고 얌전해보이지만 실상은 락천가입니다. 그는 혁명군에 입대할 때 자기 부모앞에서 아버지, 어머니 나를 기다려주십시오, 무산혁명이 승리하고 조국이 독립되는 날 이 아들은 자동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일제를 쳐부신 다음 자동차를 타고 부모님들의 품으로 돌아오겠다고 한 전문섭의 결의야말로 얼마나 엉뚱하고 랑만적인것입니까.

안길이도 락천가였습니다. 내가 그를 특별히 총애한것은 혁명에 대한 충실성도 충실성이지만 그가 소유하고있는 락천적성격을 귀중하게 여겼기때문입니다. 안길은 비관을 모르는 랑만적인 혁명가였습니다.

우리 항일빨찌산들속에는 이들뿐아니라 수많은 락천가들이 있었습니다. 사실상 총을 잡고 일제와의 판가리싸움에 나선 투사들모두가 다 언제나 비관을 모르며 혁명적락관으로 사는 락천가들이였습니다.

내가 강위룡, 리을설, 전문섭, 한창봉 네 대원이 저지른 잘못을 엄중하다고 보면서도 그들에게 《주의》이상의 처벌을 주지 않은것은 그 소행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구김살없는 락천성과 배짱을 귀중하게 여겼기때문입니다.

그때 나는 그 자그마한 사건을 겪고나서 설사 우리가 고난의 행군과 같은 행군을 열백번 한다고 해도 그들은 끝까지 우리를 따를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나의 체험에 의하면 신념을 가지고 혁명하는 락천가들은 옆에서 무슨 바람이 불든 흔들리지 않습니다. 래일 당장 교수대에 오른다고 해도 요지부동입니다. 하지만 뚜렷한 신념도 없이 모두가 혁명을 하니까 나도 한번 해보자는 식으로 혁명에 뛰여든 사람들은 아무때든지 아늑한곳으로 달아나버립니다.

동무들도 아마 행군도상에서 있은 가재잡이에 대하여 쓴 회상기를 다 읽어보았을것입니다. 그 가재잡이는 혁명가들의 일상생활과 투쟁에서 락천성이 얼마나 중요한 작용을 하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생동한 실례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1939년 가을의 돈화원정을 대부대선회작전의 1단계작전이라고 하는데 행군도상에서 있은 가재잡이란 바로 그 원정과정에 있은 일입니다.

그때도 우리는 식량의 부족으로 심한 곤난을 겪었습니다. 적들을 떼던져야 식량공작을 할 길도 열리겠는데 《토벌대》들이 그냥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움쩍할수 없었습니다. 왜 그런지 그때에는 메토끼 한마리도 얼씬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그림자도 볼수 없는 무인지경으로 내처 행군해가다나니 어데 가서 식량을 구해달라고 부탁할데도 없었습니다.

대원들은 진대나무를 타고넘을 힘도 없어서 매번 그것을 에돌아가군했습니다. 어쩌다가 휴식구령이 내리면 땅바닥에 노그라지든가 아무데나 드러누워 피곤을 풀군했습니다. 출발구령이 떨어진 다음에도 잠에 취해서 일어나지 못하는 대원들도 있었습니다. 두도백하니, 이도백하니, 삼도백하니, 사도백하니 하는 송화강상류일대는 원래 진펄과 원시림이 많아서 포수들도 잘 다니지 않는 지대입니다. 그러다나니 행군속도가 떠질수밖에 없었습니다.

《자, 동무들, 용기를 내오. 이런 때일수록 기력을 잃지 말아야 하오. 량강구에 가면 휴식도 하고 식사도 푸짐하게 합시다!》

나는 주저앉은 동무들을 일으켜세우며 이렇게 고무해주군했습니다. 나라고 왜 배고프고 피곤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배고프고 피곤해도 그것을 내색할수 없는것이 사령관입니다.

어느날 점심참에 나는 약간 경사가 진 펑퍼짐한 릉선에서 휴식을 선포한 다음 경위대원들을 시켜 그 릉선 아래쪽에 가서 정황을 살피고 오라는 과업을 주었습니다. 경위대원들은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골짜기에서 개울물이 흐르고있을뿐 별다른 정황은 없다고 보고하였습니다.

대원 몇사람을 데리고 개울가에 내려간 나는 군복바지를 무릎까지 걷어올리고 물속에 들어갔습니다. 가만가만 돌을 들추면서 그 밑을 더듬기 시작했는데 큼직한 가재 한마리가 손에 걸려들었습니다. 내가 그 가재를 물가에 내던지자 경위대원들이 《가재다!》하고 일제히 환성을 올렸습니다.

대원들은 앞을 다투어 개울물에 들어섰습니다. 며칠씩 굶은 사람들 같지 않게 다들 신바람이 나서 가재잡이를 하였습니다. 발이 정 시리면 잠간씩 물에서 나왔다가 다시 물속에 들어가 첨벙대며 돌아갔습니다. 온 대오가 가재잡이로 흥성거리였습니다. 발을 질질 끌면서 힘들게 대렬을 따르던 동무들까지 승벽내기로 개울물에 뛰여들었습니다.

우리는 휴식하던 자리에 돌아와 불을 피우고 가재를 구웠습니다. 고소한 냄새가 나는 새빨갛게 익은 가재를 놓고 여기저기서 웃음소리와 롱지거리소리가 터져올랐습니다. 잠간동안의 가재잡이가 대오의 분위기를 일신시켜놓았습니다.

물론 몇마리의 가재를 먹었다고 단번에 배가 부를수는 없을것입니다. 그러나 가재를 잡느라고 첨버덩거리는 사이에 대원들은 시장기도 피곤도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 가재잡이가 있은 다음부터 행군속도는 곱절이나 빨라졌습니다.

그날 나는 대원들의 명랑한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방금전까지 진대나무를 타고넘을 맥도 없어 그것을 에돌아가군하던 사람들, 휴식구령이 떨어지면 피곤에 못이겨 아무데나 퍽퍽 쓰러지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갑자기 저처럼 명랑해질수 있을가.

나는 가재잡이가 대원들의 락천성을 계발시켰다고 생각합니다. 가재를 잡느라고 벅작 떠들어대며 돌아가는 사이에 피곤도 풀리고 기분도 전환되고 … 그래서 힘도 나고 며칠 굶은 사람들 같지 않게 명랑해진것입니다.

가재잡이가 대오에 명랑한 분위기를 조성할수 있은것은 대원들의 랑만적인 정서를 부추겼기때문입니다.

내가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1939년 오월단오날 옥돌골이라는 마을에서 군민합동 오락회와 운동회를 마련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군민이 한데 어울려서 축구경기도 했는데 볼만했습니다. 오래간만에 뽈을 차다나니 헛다리질을 어떻게나 많이 하는지 우스워서 배꼽이 빠질 지경이였습니다.

선수들이 실수를 많이 했지만 구경군들은 그것을 조금도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실수가 사람들한테서 더 큰 웃음을 자아냈습니다.

무산지구전투가 끝난 다음 적들이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를 소멸해보겠다고 사방에서 새까맣게 달려들고있을 때 《토벌대》들이 끊임없이 나돌아치는 화룡땅 한복판에서 배포유하게 단오명절놀이를 벌려놓고 축구경기까지 한다는게 말은 쉽지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림기응변의 전법과 혁명적랑만으로 끓는 담대한 심장을 지닌 조선인민혁명군의 병사, 지휘관들만이 할수 있는 일입니다.

혁명가는 미래를 락관하는 사람들입니다. 혁명 그자체가 원래 미래에 대한 꿈이나 새 생활에 대한 동경으로부터 시작되는것입니다. 미래의 세계에 대한 숭고한 리상을 가지고 그 리상을 실현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꾸준하게 투쟁해나가는 사람이 혁명가입니다. 미래에 대한 락관이나 혁명승리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사람들은 애당초 투쟁의 길에 나서지도 않을것이며 설사 혁명에 뛰여들었다 하더라도 전진도상에 가로놓인 엄혹한 시련과 난관을 도저히 이겨내지도 못할것입니다.

혁명가의 인생관이나 인간적품격, 그들의 생활 신조와 방식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점은 신념이나 의지, 불굴성에만 있는것이 아닙니다. 중요한것은 그들이 그 누구보다도 리상과 포부가 웅대하고 어떤 환경에서나 그 리상과 포부가 꽃피게 될 미래를 확고하게 락관한다는데 있습니다. 혁명적 신념과 의지와 락관은 혁명가가 지녀야 할 3대특질, 혁명가의 사상정신적품격을 이루고있는 3대요소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언젠가 외국기자들이 나에게 주석께서 80에 50대의 건강을 지니시였는데 그 비결은 무엇인가고 물은적이 있습니다.

그때 나는 그 질문을 받고 내 장수의 비결은 락천적으로 사는데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일제히 박수를 치는것이였습니다. 한 인간의 생리적년령이 생활을 얼마나 락천적으로 하는가 하는데 따라 좌우되는것처럼 한 나라 혁명의 성패나 생명력은 혁명적락관주의에 의해 좌우된다는것이 나의 견해입니다.

사람은 락천적으로 살아야 하루를 살아도 사는 보람을 느낄수 있습니다. 사기가 없이 우울하게 생활하는 군대는 단결도 안되며 싸움도 잘할수 없습니다.

혁명적 신념과 의지는 미래에 대한 락관에 기초할 때 더욱더 강한것으로 되고 혁명의 최후승리가 이룩될 때까지 확고히 견지되는것입니다.

혁명가가 된다는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감옥과 교수대와 죽음을 각오하고 투쟁의 길에 나선다는것을 의미합니다. 다시말하여 미래에 대한 드팀없는 락관을 가지고 일편단심 혁명승리를 위해 한몸 다 바칠 결의와 각오 밑에 민족해방, 계급해방, 인간해방 위업에 뛰여든다는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혁명적으로 산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것은 혁명가들처럼 산다는것을 말합니다. 미래를 위해 남들이 걸어보지 못한 초행길도 서슴지 않고 걷는것이 혁명가들이며 설사 그 길에서 어떤 어려운 시련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락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한 투쟁의 길에서는 살아도 영광, 죽어도 영광이라는 높은 각오를 가지고 물과 불 속에도 서슴없이 뛰여드는 사람들이 혁명가들입니다.

바로 여기에 혁명가들의 인생이 값있고 보람있는것으로 되는 리유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 대오에서 도주한자들을 보면 례외없이 미래에 대한 신념을 잃어버린 비관주의자들이였습니다. 그들은 혁명이 상승할 때 그 기류를 타고 우연히 혁명대오에 뛰여들었다가 고난이 중첩되고 정세가 불리해지자 옛다, 모르겠다, 혁명이고 뭐고 나만이라도 살고보자 하고 달아나버린 의지박약자 들이였습니다.

1940년대는 우리 대오에서 혁명적 랑만과 락관주의가 무엇보다도 소중한 때였습니다. 그것은 매개 대원들의 진가와 혁명에 대한 충실성을 검증하는 시금석으로 되여있었습니다. 우리가 이긴다고 믿은 사람은 나와 함께 끝까지 혁명의 길을 걸었고 우리가 이길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혁명을 중도반단하고 대오를 떠나가버렸습니다.

혁명적락관주의는 저절로 생기는것이 아닙니다. 부단한 교양, 부단한 사상단련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것이 혁명적락관주의입니다. 적이 아직은 강하고 혁명이 언제 승리한다고 기약하기 어려운 때에 미래를 락관한다는것은 솔직히 말해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쉽지 않은 일이기때문에 사상교양, 사상단련을 부단히 해야 하는것입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이 그 어떤 폭풍속에서도 휘여들지 않는 강한 군대로 될수 있은것은 우리가 초기부터 사상교양에 큰 힘을 넣어온데 있습니다.

우리는 시종일관 유격대원들을 혁명에 대한 무한한 충실성으로, 불요불굴의 투쟁정신과 혁명적락관주의로, 우리 위업의 정당성과 승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교양하였습니다.

나는 짬만 있으면 대원들을 락천적으로 교양했습니다. 대원들에게 《독립이 되면 평양에 가서 숭어국도 먹고 랭면도 한그릇씩 먹고 모란봉에 올라가 대동강구경을 하자!》고 하면 그들이 다 《야, 빨리 그날을 앞당겨와야지!》하면서 주먹을 부르쥐였습니다. 그리고는 용기백배해서 싸움판에 뛰여들었습니다.

개구리료리로 명절음식을 대신한 1940년 5.1절날도 나는 대원들을 혁명적락관주의와 필승의 신념으로 교양하였습니다.

그날저녁 우리는 모두 우등불두리에 모여앉아 밤이 지새는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혁명에 대한 이야기, 조국에 대한 이야기, 고향의 부모형제들에 대한 이야기, 승리할 래일에 대한 이야기로 흥겹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나는 전우들에게 동무들, 오늘은 우리 비록 개구리료리로 5.1절을 쇠였지만 일제를 타도한 다음에는 평양에 가서 대동강의 숭어료리로 조국광복을 경축하자, 적들이 지금 우리를 어째보겠다고 발악하고있지만 우리는 절대로 굴하지도 않고 주저앉지도 않을것이다, 우리모두가 래일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조선민족의 자부심, 조선공산주의자의 자부심도 드높이 일제침략자들을 때려부시고 조국을 해방하기 위해 더 굳세게 싸워나가자고 하였습니다.

우등불에 비쳐진 대원들의 얼굴을 보니 하나같이 명랑하고 생기발랄한 모습들이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중첩되는 곤난을 락관과 용기로 이겨내고 빼앗긴 조국을 기어이 되찾고야말겠다는 결의와 신심에 넘쳐있었습니다.

내가 만일 그때 곤난앞에서 팔짱을 지르고 먼산만 쳐다보았거나 대원들에게 개구리료리를 먹인 다음 그들에게 자, 이제는 시장기도 덜었으니 모두 천막으로 헤쳐가라고 말했더라면 대오의 분위기가 그렇게까지 명랑하고 활달하지 못했을것입니다. 적지 않은 대원들은 오늘은 겨우 개구리를 잡아먹었는데 래일은 또 뭘 먹고 끼니를 굼때겠는가 하는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을것입니다.

개구리를 잡아 명절음식을 마련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을 때 전우들이 모두 환성을 지르며 두팔을 걷고 떨쳐나선것이라든가 내가 우등불앞에서 밤새도록 혁명의 전도와 관련된 말을 할 때 그들이 그 말에 심취되여 내곁을 떠나지 않은것은 자기 사령관의 모습에서 혁명승리에 대한 굳은 신념과 그 어떤 고난앞에서도 드놀지 않는 배짱을 느꼈기때문입니다.

너희들이 지금 우리를 자지도 먹지도 쉬지도 못하게 하면서 진드기처럼 따라다니지만 조선인민혁명군은 절대로 굴하지도 않고 패하지도 않는다 하는것이 나의 배짱이였습니다.

지휘관의 정신상태란 그래서 중요하다고 하는것입니다. 지휘관이 배짱군이면 전사들도 배짱꾸러기가 되고 지휘관이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있으면 전사들의 신념과 의지도 흔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전사들의 랑만이 지휘관의 신념에 따라 좌우되는것처럼 인민대중의 락관주의는 지도자의 신념과 배짱에 따라 결정됩니다. 어려운 때 대중이 지휘성원들의 얼굴부터 쳐다보는것은 그때문입니다.

우리 빨찌산들은 내가 이긴다면 이긴다고 믿었고 내가 웃음을 지으면 혁명의 전도가 밝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내가 낚시질을 하거나 코노래로 조금 흥얼거리기만 해도 그들은 다음작전은 다 이긴 작전이라고 판단하군하였습니다.

나뿐아니라 모든 지휘관들이 대원들을 락천적으로 교양하였습니다. 최경화와 강돈은 행군을 하면서도 대원들에게 신심을 북돋아주는 담화를 많이 하였습니다.

대원들에 대한 신념교양, 락관주의교양에서 중요한 수단으로 된것은 문예활동이였습니다. 혁명적인 문화오락을 떠나서는 항일유격대의 생활을 론할수가 없고 혁명적인 노래와 춤을 떠나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이 걸어온 승리의 로정에 대해 말할수가 없습니다.

김정일동무가 조선혁명은 노래로부터 시작되였고 노래속에서 전진하여왔으며 노래와 함께 승리한 혁명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옳은 말입니다. 조선혁명처럼 노래와 밀착된 혁명, 노래로 엮어진 혁명은 아마 세상에 없을것입니다.

혁명 그자체가 하나의 장중한 교향곡이고 노래를 낳는 터전입니다. 노래를 떠난 혁명이란 있을수 없습니다. 《인터나쇼날》의 노래를 떠나서 국제로동운동의 발전력사를 생각할수 있습니까.

북만원정때 우리에게 곁을 주지 않던 군중을 쟁취한것도 노래였고 우리를 피해 달아났던 중국사람들을 끌어당길수 있었던것도 그들이 사랑하는 《소무가》였습니다.

노래는 나의 인생행로에서도 많은 작용을 하였습니다. 나의 인생이 《자장가》로 시작되였다면 나의 혁명투쟁은 《압록강의 노래》로 시작되였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나는 포평나루터를 떠나 압록강을 건늘 때 그 노래를 부르면서 조국을 찾을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후날 그 노래를 부를 때마다 압록강가에서 다진 그 맹세를 생각하며 싸움의 길을 다그치군했습니다.

중학시절부터는 자체로 가사도 쓰고 곡도 붙이였습니다. 그렇게 되여 《조선의 노래》가 나오고 《반일전가》가 나오고 《조국광복회 10대강령가》가 나왔습니다. 나는 어려울 때마다 노래를 부르면서 힘을 얻군했습니다. 식량이 없어 맹물로 끼니를 이어갈 때에도 노래를 부르며 힘든 고비를 넘기군했습니다. 그러는사이에 나도 성장하고 혁명도 발전하였습니다.

배고플 때 노래소리를 들으면 배고프지 않았고 힘이 진했을 때 노래를 불러주면 기운이 났습니다.

고난의 행군때 경위대원들이 눈속에 파묻혀 일어나지 못한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일어나려고 모지름을 써도 사지를 움직일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날 아무것도 먹지 못한데다가 지칠대로 지쳐서 힘이 진했기때문입니다. 그때는 나도 몸을 가눌수 없는 형편이였습니다. 나는 눈속에 미이라처럼 누워있는 대원들에게 다가가 조용히 《적기가》를 불렀습니다. 대원들은 그 노래를 듣고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리고는 쓰러졌던 자리에서 일어나 행군을 계속하였습니다.

적들이 한때 수천명의 병력으로 처창즈유격구를 봉쇄한 일이 있는데 그때 그고장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기아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혹심한 식량난과 적의 거듭되는 《토벌》로 사경에 이른 처창즈인민들을 결사전에로 불러일으킨것이 아동단원들이 부른 혁명가요였습니다.

지금과 달리 그때에는 우리에게 전문예술단체도 없었고 직업적인 창작가나 배우들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항일유격대원들은 스스로 가사도 쓰고 곡도 붙이면서 《유격대행진곡》과 같은 훌륭한 혁명가요들과 혁명적인 연극, 가극, 춤들을 수없이 만들어냈습니다.

청년학생운동시절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유격구시절에도 연예공연을 자주 조직하였으며 유격구를 해산하고 광활한 지대에서 대부대류동전을 하던 시절에도 문화정서생활을 생활화하였습니다. 연예공연은 산에서도 하고 주민부락에서도 했습니다.

연예공연을 할 때에는 주변에 기관총을 걸어놓고 엄호하였습니다. 그렇게 해놓으니 적들이 달려들어도 마음놓고 공연을 계속할수 있었습니다.

공연은 명절날에도 하였고 큰 전투를 치른 다음에도 하였으며 부대에 신입대원들을 많이 받아들였을 때에도 하였습니다. 어디서 무슨 공연을 하든지 우리가 추구한 종국적인 목적은 군대와 인민을 억천만번 죽더라도 원쑤를 치자는 강의한 혁명정신으로 무장시키고 그들모두를 불굴의 혁명투사로 만들자는데 있었습니다.

이 목적에 맞게 우리는 공연소개도 락천적인 맛이 나게 하였습니다.

7련대 2중대 동무들은 도천리에 가서 군민련환오락회형식으로 연예공연을 조직했는데 《깔깔웃음대회》라고 광고를 냈습니다. 깔깔웃음대회를 다음과 같이 개최하오니 참가하여주시기 바랍니다 하는 식으로 광고를 써붙였더니 농촌집마당과 그 주변에 사람사태가 날 지경으로 많은 구경군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깔깔웃음대회》, 얼마나 기지있고 익살스런 표현입니까. 이 광고만 보고서도 사람들은 입가에 웃음을 그리였습니다.

빨찌산의 연예공연은 경사로운 일이 있을 때에만 하는것이 아니였습니다. 항일유격대원들은 슬픈 일이 있을 때에도 문화오락과 공연활동으로 기분전환을 하군하였습니다.

우리는 오중흡과 강흥석이 희생된 다음에도 연거퍼 두번이나 큰 규모의 연예공연을 조직하였습니다. 우리 부대의 병사, 지휘관들이 그들이 전사한 때만큼 그렇게 슬퍼하고 분해한적은 없었습니다. 오중흡의 장례를 한 그날밤 숙영지에서는 흰밥에 절인 고등어를 구워 저녁식사를 마련했으나 누구도 숟가락을 들지 않았습니다. 해방후 김정숙은 고등어만 보면 오중흡의 생각이 나서 눈물을 짓군했는데 그를 잃고난 다음 우리 대원들의 기분상태가 얼마나 침통했겠는가를 짐작할수 있을것입니다.

그래서 행군도중 우정 시간을 내여 오락회를 열었는데 대오를 지배하고있던 비감을 춤과 노래와 요술로써 어느 정도 가실수 있었습니다.

며칠후 쟈신즈를 친 다음에도 송화강가 수림속에서 큰 규모의 연예공연을 했습니다. 지금 투사들과 력사가들이 그 공연을 신입대원들을 위한 환영공연이라고 서술하고있는데 사실을 말한다면 공연을 조직한 목적이 거기에만 있은것이 아닙니다. 오중흡의 희생으로부터 오는 커다란 비애와 상실감을 털어버리고 대오에 락천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자는데도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 공연이 굉장한 공연이였습니다.

황철나무를 베여다 가설무대를 만들고 천막을 여러개 모아 풍도 쳤습니다. 언 나무여서 바닥이 미끄러웠습니다. 그래서 무대에 모포를 깔았습니다. 공연을 시작하기전에 공연종목을 써붙였는데 합창이 없겠는가, 독창이 없겠는가, 무용이 없겠는가, 요술도 있고 하모니카합주도 있고 없는것이 없었습니다. 막은 호각을 불어 여닫게 하였습니다.

저녁식사후 신대원들과 구대원들, 짐을 지고온 로동자들이 다 모여 공연을 구경했습니다.

그날밤 김정숙이 《녀성해방가》를 부르고나서 춤을 추던 생각도 납니다. 춤을 출 때에는 면막뒤에서 무용곡을 불러주었습니다.

막간희극도 인기가 있었습니다.

지양개에서 입대한 키다리대원과 연길에서 입대한 동무가 활동사진변사처럼 영화해설을 해서 관중들을 울리였습니다.

배뱅이굿도 굉장한 인기를 끌었는데 그것을 누가 했던지는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한 중국인대원은 오늘날의 막간교예배우들처럼 긴 나무다리를 타고 춤을 추었습니다. 그것도 역시 매우 이채로운 종목이였습니다. 그 대원은 행군때마다 나무다리를 타고다니며 대오가 지나간 다음 발자국을 메우군했습니다.

공연종목가운데는 조도언의 요술도 있었고 호궁을 들고나와 이채를 띤 신입대원들의 노래도 있었습니다.

마지막종목은 유격대생활을 보여주는 단막극이였습니다. 그것은 내가 행군도중에 짬짬이 구상하여 대본을 만든것이였습니다.

그날밤의 공연은 네댓시간이나 걸리였습니다. 그래도 관중들은 지루해하지 않았습니다. 연예공연뒤끝에 추가로 참군을 탄원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을 락천적으로 교양하는데서 문학예술이 얼마나 큰 은을 내는가 하는것은 항일혁명시절의 연예공연이 잘 말해주고있습니다.

혁명이란 사상의지나 규률만을 가지고 하는것이 아닙니다. 사상의지, 도덕의리와 함께 랑만적인 감정정서를 가지고 하는것이 혁명입니다. 나서자란 고향산천과 부모처자들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의 감정을 떠나서 애국주의가 싹터날수 없습니다. 자기 집단에 대한 애착과 헌신의 감정도 없이 공산주의사상과 같은 심원한 사상을 영원한 진리로 받아들일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단순한 생각입니다.

항일혁명의 전로정은 풍부한 감정정서를 가진 락천적인 유격대원들이야말로 자기의 지도자와 그 지도자의 사상에 끝까지 충실하며 혁명승리에 대한 철석같은 신념을 가지고 한몸을 바쳐 조국이 기억하고 인민이 기억하는 위훈의 창조자로 될수 있었다는것을 실증해주고있습니다.

박길송이 최후의 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조국이여! 나는 그대를 자랑한다, … 공산주의! 이것은 바로 세계의 청춘이다, … 조국의 광명한 미래를 키워내는 요람이다, … 우리는 이것을 너무나 똑똑히 알고있기때문에 이처럼 웃으면서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원쑤의 고문에 두눈을 잃은 최희숙이 최후를 앞두고 무엇이라고 절규했습니까. 혁명의 승리가 보인다고 했습니다. 우리 인민이 만세를 부르며 해방을 알리는 그날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일본교형리들은 철쇄에 묶인 리계순에게 반성연설을 한마디만 하면 목숨도 살려주고 한평생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리계순은 이 원쑤놈들아, 내 귀가 더러워진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을 아직도 몰랐느냐고 하면서 적들을 호되게 꾸짖은 다음 단두대에 올라 조국광복의 날은 멀지 않아 온다고 부르짖었습니다.

항일혁명의 길에서 희생된 모든 투사들은 다 혁명승리에 대한 불변의 신념과 풍부한 감정정서를 지닌 락관주의자들이였습니다.

혁명가는 미래를 락관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보다 래일을 더 귀중하게 여기는 사람들, 그 래일을 위해서는 꽃나이에 목숨까지도 서슴없이 바치는 피끓는 투사들입니다.

내가 오늘 여기서 동무들에게 혁명적락관주의에 대해 특별히 강조하는것은 내외의 현실이 그 어느때보다도 그것을 절박하게 요구하고있기때문입니다.

많은 나라들에서 사회주의가 좌절된후 제국주의자들의 제재소동으로 하여 우리 인민은 지금 여러모로 심각한 곤난을 겪고있습니다. 정치도 군사도 경제도 문화도 모두 엄중한 도전을 받고있습니다. 전쟁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팽팽한 대결상태에 놓여있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난국이 100년이고 200년이고 무한정 지속될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겪고있는 난관은 일시적인것이며 이것은 어느때든지 꼭 극복되기마련입니다.

동무들은 모두 미래에 대한 락관을 가지고 자력갱생, 간고분투하여 오늘의 난국을 하루속히 해소시키고 조국을 멀리 앞으로 전진시켜야 합니다.

오늘의 락관주의에서 핵을 이루는것은 김정일동무와 같은 혁명의 새 세대들이 있으면 우리는 이긴다는 배심입니다. 김정일동무가 혁명을 령도하기때문에 우리는 얼마든지 미래를 락관할수 있습니다.

나는 동무들에게 김정일동무만 믿으라, 그러면 만사가 다 잘돼나갈것이라는것을 다시한번 강조하고싶습니다. 김정일동무의 기상속에 조선의 미래도 있고 21세기의 미래도 있습니다. 력사가 반드시 이것을 증명해줄것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서비스이용약관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상단으로


Copyright © 2010 - 2023 www.hanseattle1.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