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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17-6. 총을 쥔 소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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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8,153회 작성일 15-10-29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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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총을 쥔 소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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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혁명군의 백두산지구 진출이 일으킨 여파가운데서 특기할만한 또하나의 사변은 청소년들속에서 일어난 참군열풍이였다. 압록강연안의 수림과 골짜기들에서 총소리가 한번씩 울릴 때마다 우리 밀영으로는 입대를 탄원하는 청년들이 끝없이 밀려들었다.


입대지망자들이 늘어나는 과정에 재미나는 일도 많이 생기였다.

한번은 얼굴이 가마잡잡한 더벅머리소년이 물에 푹젖은 바지를 입고 우리한테 찾아와 형의 원쑤를 갚겠다고 하면서 부대에 받아달라고 떼를 썼다. 상풍덕마을에서 온 소년이였다. 소년은 자기 맏형이 거기서 청소년야학을 지도하다가 유격대에 밥을 해준것이 탄로되여 경찰놈들에게 학살되였고 둘째형은 보천보전투직전에 장군님부대에 입대하여 싸운다고 하였다. 그래서 자기도 혁명군을 찾아왔다는것이다. 입대를 탄원한 그 더벅머리소년의 이름은 전문섭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에게 롱으로 마른 옷을 입고오는 청년들도 미처 다 입대시키지 못하는데 너처럼 젖은 옷을 입고온 장난꾸러기들이야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고 하였다. 그러자 전문섭은 자기가 젖은 바지를 입고온건 어머니탓이라고 하면서 그 사연을 설명하였다.


전문섭이 상풍덕마을에 온 유격대를 따라가겠다고 하자 그의 어머니는 너는 아직 어려서 못간다고 잡아떼였다. 그리고는 아들이 잠든 사이에 그의 바지를 물함지에 집어넣었다. 단벌바지가 물에 젖어 입을것이 없게 되면 아들이 유격대를 따라가지 못하리라고 타산했던것이다.


전문섭은 조바심이 났다. 그가 혁명군에 입대하는 문제는 소년회조직에서 이미 결정한것이였다.

혁명군에 입대할수만 있다면 벌거숭이가 되여서라도 백두산까지 한달음에 뛰여갈 마음의 준비가 되여있던 전문섭은 어뜩새벽에 물함지에서 바지를 건져내여 대충 물기를 짠다음 그것을 걸치고 집을 떠나려 했다. 그제서야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유격대입대를 허락했다고 한다.


이것은 압록강연안을 중심으로 조선의 북부국경일대와 서간도의 넓은 지역을 휩쓸고있던 참군운동이 어느 정도의 열도를 가지고 진행되였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이다. 전문섭의 실례가 보여주는바와 같이 이 운동에는 20대, 30대의 청년들뿐아니라 10대의 소년들도 참가하였다.


처음에 대렬보충사업을 맡아보던 지휘관들은 그런 소년들이 찾아오면 의논도 하지 않고 덮어놓고 집으로 돌려보내였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우리 부대의 병사, 지휘관들은 열네댓살밖에 안되는 소년들이 손에 총을 잡고 무장대오에서 싸울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였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김평조차도 그런 소년들이 오면 머리를 내흔들었다.


부대가 지양개등판에 머물러있던 1937년 여름 어느날 그는 총기장보다 더 작은 애숭이들이 한 20명 또 달려들어 입대를 시켜달라고 성화를 먹이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나의 결론을 요구하였다.

《좀더 큰 다음에 다시 오라고 암만 타일러도 말이 통해야지요. 나중엔 장군님까지 만나게 해달라고…장군님을 만나보기전에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생떼를 씁니다.》


나는 소년들이 대기하고있다는곳에 찾아가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을 진대나무에 앉히고 이름은 무엇이냐, 나이는 몇살이냐, 아버지는 무엇을 하느냐, 어느 동네에서 사느냐 하고 차례로 물어보았다. 내가 질문을 한가지씩 할 때마다 아이들은 고무공처럼 튕겨일어나서 묻는 말에 대답하군하였는데 그들의 행동거지에서 공통적인것은 어른티를 내느라고 몹시 애쓰는것이였다. 그들은 모두다 원쑤들의 《토벌》에 부모형제를 잃었거나 가까운 일가친척들이 참살당하는 치떨리는 참변을 목격하고 그 복수를 위해 손에 총을 잡으려고 결심한 소년들이였다. 흉금을 터놓고 말을 나누어보니 속에 대감이 한둘씩은 다 들어앉아있었다.


세상이 험하면 아이들도 조숙한다는 말이 옳았다. 보이는것은 불행뿐이고 겪는것이 고생살이뿐이니 조선의 아이들은 나이가 어려도 벌써 이 세상 내막을 환히 꿰들고있었다. 혁명은 비상한 힘과 속도로 사람을 격동시키고 각성시킨다. 혁명을 가리켜 새것을 낳는 학교라고 한 어느 명인의 말에는 사실 심오한 진리가 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그때 참군의 꿈을 안고 우리 숙영지로 찾아온 20여명의 소년들은 누구라 할것없이 파란많은 우리 민족사의 한페지를 체현하고있던 가장 참혹한 수난자들이였다. 그 어린것들이 사회개조의 중임을 스스로 걸머지고 어른들도 감당하기 어려워하는 무장투쟁에 나서겠다고 절절하게 탄원해나설 때 나는 감동을 금할수 없었다.


그날 내가 만난 소년들속에는 리을설과 김익현도 있었고 김철만과 조명선도 있었던것으로 기억된다. 지금은 그들이 다 조선인민군 차수로도 되고 대장이나 상장과 같은 장령들로 되였지만 그때만 해도 그들은 총대를 쥘만한 자격이 있는가 없는가를 가늠하는 검열대우에 서있던 애숭이들이였다.


이 소년들을 어떻게 할것인가?

물불을 모르는 어린 매들을 무슨 말로 어떻게 달래서 집으로 돌려보내야 할지 나로서는 대단히 난감하였다. 억대우같은 장정들도 힘에 부쳐서 부단한 훈련과 수양을 하지 않으면 락오자가 될수 있는것이 바로 혁명군생활이다.

나는 이런 말로 소년들을 달래였다.

…나는 너희들이 부모형제들의 피값을 받아내기 위해 손에 총을 잡으려고 결심한것은 아주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애국심의 표현이다. 그런데 아직 나이들이 어려서 혁명군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것 같다. 유격대의 형님, 누나들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는지 아마 너희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것이다. 혁명군은 한겨울에도 산속에서 눈을 깔고 잠을 자야 한다. 며칠씩 비를 맞으며 행군할 때도 있다. 식량이 떨어지면 풀뿌리나 나무껍질을 우려먹든가 맹물로 끼니를 에우는것이 혁명군생활이다. 내 보기엔 너희들이 이런 고생을 견뎌내지 못할것 같은데 집에들 가있다가 좀더 큰 다음에 총을 메는게 어떠냐?…


그래도 소년들은 마이동풍이였다. 그들은 어떤 고생도 감당해낼 자신이 있다, 어른들이 눈우에서 자면 자기들도 눈우에서 잘수 있고 어른들이 전투를 할 때에는 자기들도 전투를 할수 있다고 하면서 유격대에 받아달라고 그냥 졸라대였다.

나는 이때처럼 우리에게 군사학교가 있었으면 하는 소원을 통절하게 느껴본적이 없었다.

(이 사랑스러운 소년들을 모두 군사학교에 넣어 훈련도 시키고 몸도 단련시킨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독립군들도 한때 만주의 여러곳에 군사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사관학교들을 설립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것은 만주가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강점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였다. 일제의 대군으로 뒤덮인 1930년대 후반기의 만주는 우리에게 독립군들처럼 군사학교를 세울만한 여유를 주지 않았다. 밀영에다가 양성소 같은것을 꾸려놓고 군사훈련을 줄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으나 그것도 실정에 부합되지 않았다. 왜놈들이 새로운 발화점을 찾아내여 중국땅에서 또하나의 9.18사변을 도발하리라는것은 세계의 모든 《청우계》들이 다 시사하고있는 문제였다. 우리는 여기에 대처하여 대기동전을 준비하고있었다. 이런 때에 10대의 소년들을 무장대오에 받아들인다는것은 어려운 행군을 앞에 두고 배낭을 하나 더 지는것과 흡사한 일이였다.


그렇다고 하여 불리한 점만 앞세우면서 그들을 덮어놓고 집으로 돌아가라고만 할수는 없었다. 솔직한 심정을 말한다면 그 소년들은 하나같이 내 마음에 들었다. 계급적각오만 보더라도 어른들보다 못하지 않았다. 어른들이 굶을 때 자기들도 굶을수 있다고 한 소년들의 말에서 그날 나는 특별히 강한 인상을 받았다.


말로만 애국을 하는 우국지사들이나 초로인생을 운운하며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혁명의 배신자들과 타락분자들에 비해볼 때 참군소망이 이루어지기전에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이 소년들이야말로 얼마나 고결하고 열렬한 넋을 지닌 애국자들인가. 소년들이 어린 나이에 입대를 탄원해나선것은 사실 그 가부를 결정하기에 앞서 꽃다발을 안겨주어야 할 일이였다.


나는 이 투지만만한 소년들을 투사로 키우고싶었다. 당장 전투대오에는 세울수 없겠지만 방도만 잘 찾아내면 1∼2년사이에 끌끌한 후비군으로 키워낼수 있을것 같았다. 한해나 두해사이에 이 소년들이 모두 구대원들에게 짝지지 않는 전투원으로 자라난다면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큰 수확인가.

구대원들이 잠을 덜 자고 밥을 덜 먹는 한이 있더라도 강심을 먹고 애를 쓴다면 소년들을 짧은 기간에 날파람있는 싸움군들로 키워낼수 있을것 같았다. 나는 소년들만으로 따로 중대를 조직하여 조건이 허락할 때에는 밀영에서 훈련을 주고 부대가 기동할 때에는 같이 데리고 다니면서 실전을 통하여 교육하고 단련시키자는 생각을 하였다. 이를테면 군사학교나 군정간부양성소의 사명을 동시에 감당하면서도 거기에 실천교육을 결합시키는 특수중대를 조직하자는것이였다. 나는 소년들을 부대에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그들에게 맹세문을 쓸 과업을 주었다. 너희들이 정말로 유격대에 입대하고싶다면 오늘밤중으로 맹세문을 다 써내라, 왜 혁명군에 들어와 총을 메려고 하는가, 입대한 다음에는 어떻게 살며 싸우겠는가 하는걸 글로 써내라, 그러면 그 글을 보고 결정하겠다고 하였다.


김평을 비롯한 대부분의 지휘관들은 내 말을 듣고 몹시 불안해하였다. 마안산에서 데리고온 아이들도 적지 않아 부담이 큰데 저 소년들까지 더 받으면 난사라고 하였다.

다음날 소년들이 써온 맹세문을 보니 결의들이 다 좋았다. 글을 몰라서 딴 아이들에게 대필을 시킨 맹세문도 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탓하지 않았다. 학교를 다니지 못해 글을 모르는것은 허물이 아니다. 모두가 맹세문을 다 잘 썼다고 했더니 소년들은 발을 구르며 환성을 터치였다.


나는 중대정치지도원이상의 지휘관들을 사령부에 모이게 한 다음 마안산출신의 아동단원들과 서간도에서 새로 우리를 찾아온 아이들로 소년중대를 따로 조직한다는것을 정식으로 선포하였다. 소년중대 중대장으로는 오일남을, 사무장으로는 녀대원인 전희를 임명하였다.


오일남은 사령부직속 기관총소대장으로 있던 사람이였다. 사격솜씨도 좋고 대오관리에서도 빈틈이 없었다. 그는 비상한 인내력과 투지를 가진 사람이였다. 그가 얼마나 인내력이 강한 사람인가 하는것은 구시산전투때의 일화가 잘 말해주고있다. 오일남은 그 전투에서 총상을 당한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걸 전혀 내색하지 않아서 누구도 몰랐다. 지양개에 도착해서야 그의 군복에 배여있는 피를 보고 모두가 중상이라고 떠들었다. 웃옷을 벗겨보니 살에 탄알이 박혀있었는데 그 끄트머리가 보일락말락하였다. 그런데도 그는 웃고만 있었다.


군의가 없어 힘꼴이나 쓰는 강위룡에게 그의 몸을 붙잡게 하고 내가 핀세트로 탄알을 뽑아내였는데 뜻대로 잘되지 않아 어지간히 땀을 뽑았다. 마취제도 없이 강짜로 하는 수술이였지만 오일남은 신음소리 한마디 내지 않았다. 살에 박힌 탄알을 뽑아내고 상처에 총기름으로 쓰는 와셀린을 발라준 다음 후송명령을 내리니 오일남은 《그쯤한 부상을 가지고 왜들 이러십니까. 적들이 당장 우리를 추격해오겠는데 기관총소대장이 자리를 뜨다니요.》하면서 종시 가지 않았다. 나는 오일남의 이런 투지가 소년병사들에게 분명 좋은 영향을 주게 되리라고 믿었다.


사무장 전희도 투지로 보면 간단치 않았다. 나이는 소년중대원들과 엇비슷하였지만 속대는 가을콩알처럼 땅땅 영글은 처녀였다. 전희의 가정내막을 잘 아는 김철호는 그가 10살적에 할아버지의 침통을 깨뜨린 난돌이라고 하였다.

전희는 10살때 어머니를 잃었다. 전희의 할아버지는 침깨나 놓을줄 알아서 마을사람들의 병구완을 잘해주었다. 그런데 며느리의 병만은 고치지 못하였다. 어린 전희는 어머니를 살려내지 못한 책임이 할아버지의 침통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돌로 그 침통을 박살냈다. 할아버지가 이년, 이년 하면서 야단을 하자 그는 《어머니의 병도 고치지 못하는 침통은 두어서 뭘하나요.》하면서 엉엉 소리를 내여 울었다. 그 바람에 할아버지도 전희를 붙안고 함께 서글피 울었다.


다음해에 전희는 오빠마저 잃었다. 그의 오빠는 유격대원이였는데 적구공작을 하다가 두 동료와 함께 체포되였다. 적들은 그들을 국자가 뒤산에 끌어내다가 처형하였다. 세 투사는 피가 터지고 뼈가 부서지는 참혹한 악형을 당하면서도 적들의 죄상을 고발하고 《혁명 만세!》를 부르며 용감하게 최후를 마치였다.


어린 전희도 마을사람들과 함께 그 광경을 목격하였다. 오빠의 영웅적인 최후는 그를 감동시키였다. 적들은 군중들을 향해 《자, 보라. 일본을 반대하는놈들은 다 저 꼴이 된다. 그래도 혁명을 하겠는가?》하고 지껄여댔다. 군중은 잠잠하였다. 하지만 어린 전희의 입에서는 《혁명 만세!》라는 챙챙한 웨침소리가 터져나왔다. 깜짝 놀란 적들은 그에게 달려들어 뭇매질을 하였다. 그후 전희가 유격구에 들어왔을 때 어른들은 《너 어쩌자고 그때 만세를 불렀니?》하고 물었다. 전희는 《나도 오빠처럼 죽고싶었어요. 죽을바엔 〈혁명 만세!〉를 부르고 죽고싶었어요.》라고 대답하였다.


이 단순한 고백에는 벌써 자기의 목숨보다 혁명을 우위에 놓을줄 아는 담력이 자리잡고있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전희의 담차고 용맹스러운 성미는 소년중대원들에게 훌륭한 시범으로 될수 있었다.

나는 전희도 오일남과 마찬가지로 소년중대원들의 생활을 책임적으로 돌봐줄수 있는 적임자라고 확신하였다. 사무장이란 오늘의 인민군대에서 사관장과 같은 임무를 수행하는 직책이다.


내가 그 조직을 선포한후에도 적지 않은 지휘관들은 소년중대를 내온 사령부의 조치를 두고 아연해하였다. 저 어린애들이 우리의 활동에 지장을 주지는 않겠는가, 저 애들때문에 우리가 발목을 묶일수도 있지 않겠는가, 저 꼬마들이 과연 어른들도 감당해내기 힘들어하는 시련을 이겨낼수 있겠는가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내가 사령관의 권한을 가지고 소년중대를 조직한것은 소년들의 청원을 가급적으로 빨리 해결하려는데 있었다.


소년들이 품고있는 혁명에 대한 열렬한 동경심과 부모형제들의 원쑤를 갚으려는 불타는 적개심이 우선 나를 감동시켰다고 할수 있다. 그 소년들을 만나는 과정에 유격대의 후비군육성문제에 신경을 써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였고 소년들로 특수한 군사조직을 뭇게 되면 그것이 곧 후비군육성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될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타산을 하게 되였다.


나는 소년중대에 망라된 아이들과 비슷한 나이에 유격대에 입대한 조왈남, 리성림, 최금산, 김택만, 백학림을 비롯한 력대전령병들이 걸어온 행적으로 보아 14~17살이면 능히 어른구실을 할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였다.

우리는 소년중대의 대렬을 편성하자 곧 그들에게 군복을 해입히고 무기를 수여하였다. 무기의 대부분은 아이들의 키에 어울리는 38식기병총이였다. 새 군복에 무기까지 받아안고 기뻐서 어쩔줄 모르던 소년중대원들의 모습을 돌이켜보면 지금도 내 마음이 후련해진다.


우리는 오일남과 전희에게 소년들을 지양개등판에서 당분간 훈련시키다가 7도구의 부후물밀영으로 들어가서 집중적으로 훈련시킬데 대한 임무를 주었다. 유격대생활에 필요한 기초지식과 기초동작을 한두달사이에 주기 위한 속성훈련강령은 내가 직접 만들어서 오일남에게 주었다. 오일남은 그 강령을 보고나서 강도가 너무 높아 아이들이 다 소화해내겠는지는 모르겠지만 해보겠다고 하였다.


소년중대는 그 이튿날부터 지양개등판에서 곧 훈련에 착수하였다. 그당시 나는 중일전쟁에 대처한 방침을 구상하느라고 긴장한 나날을 보내고있었지만 시간을 내여 소년중대의 훈련을 자주 지도하였다. 훈련장에 나가면 시범동작도 해보이고 군대물이 빨리 들려면 정보훈련을 잘해야 한다느니, 조준련습을 할 때에는 과녁을 원쑤의 가슴팍으로 여겨야 한다느니 하고 훈계도 많이 하였다.


소년중대가 지양개에서 두주일쯤 훈련하였을 때 우리는 회의를 소집하려고 소백수밀영으로 떠났다. 나는 출발에 앞서 오일남에게 소년중대원들을 데리고 부후물밀영에 들어가서 훈련을 계속하라는 지령을 주었다.

애숭이들을 막상 행군서렬에 세우고보니 불안한 점도 없지 않았다. 사실 그때의 행군이 간단치 않았다. 고생속에서 자라난 아이들이라고는 하지만 마음을 놓을수 없었다.


부후물밀영은 비교적 안전한 후방밀영이였다. 훈련기지로서는 리상적인 곳이였다. 이 밀영에는 소년중대원들이 2~3개월동안 먹을수 있는 식량이 충분히 저장되여있었다. 우리는 사전에 김평에게 과업을 주어 부후물에 밀영을 꾸리고 식량을 마련하게 하였다. 소년중대가 그 덕을 단단히 보았다.


우리가 부후물근처의 6도구밀영에서 적배후타격전을 지휘하고있을 때 소년중대원들은 부후물밀영에서 맹훈련을 진행하였다. 초수탄과 소백수에서 회의를 끝낸 다음 밀영에 찾아가 그들의 훈련과정을 직접 보았는데 지양개에 있을 때보다는 몰라보게 발전했다는것을 인차 실감할수 있었다. 소년중대를 조직한것이 정당한 조치였다는것은 그 훈련모습만을 보고서도 잘알수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나는 그들의 놀라운 발전속도는 나를 흐뭇하게 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전희가 사령부에 나타나 나에게 귀속말로 《장군님, 야단났습니다.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하고 밑도끝도 없는 하소연을 하였다. 소년중대에서 그중 키가 작은 한 꼬마가 밤마다 집생각을 하면서 운다는것이였다.

나는 운다는 말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유격대원들도 가정을 가진 인간들인것만큼 소년중대원들이 집생각을 하는것은 례사롭게 볼 일이였지만 울면서 집생각을 한다면 문제가 달랐다.


전희의 말에 의하면 꼬마는 중대가 팔도구하를 지나면서부터 시무룩해지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왜 우는가고 물으면 집이 자꾸 멀어지기때문에 서운해서 그런다는것이였다. 입대할 때에는 부대가 자기 집 근처에서만 활동할줄로 알았는데 행군길이 자꾸만 멀어지게 되자 마음이 약해진 모양이였다.


나는 전희에게 귀한 자식 매로 키운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좀 세게 다불리라고 권고하였다. 전희는 꼬마를 세워놓고 짭짤하게 책망하였다. 그런데 이 책망이 그만 부작용을 일으켰다. 꼬마는 더 엇서면서 이번에는 집으로 보내달라고 하였다.

나는 그 꼬마를 사령부에 불러다놓고 정말로 집에 가고싶은가고 물었다. 꼬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기만 하였다.

나는 꼬마에게 말했다.

《정 그렇다면 집에 가거라. 그런데 여기서 19도구까지는 아마 몇백리가 되겠는데 꽤 가내겠느냐?》

《오던 길로 졸졸 가면 갈수 있어요.》

대답하는 기세로 보아서는 단순한 투정질 같지 않고 제나름으로 타산까지 다해본 모양이였다.

나는 전희를 시켜 소년중대의 비상미가 몇되박 들어있는 배낭을 가져오게 한 다음 그것을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럼 소원대로 집에 가거라. 집까지 가자면 먹을것이 있어야겠으니 이걸 가지고 가거라.》

그것이 중대의 비상미라는것을 잘 알고있는 꼬마는 두눈이 휘둥그래져서 말하였다.

《싫어요. 그걸 가지고가면 중대는 뭘 먹고 사나요? 난 혼자니까 아무렇게나 먹을수 있어요. 강낭밭에 들어가 한두이삭 따먹으면 되거든요.》

《그거야 도적질이나 같지. 그런짓을 할가봐 이 쌀을 가져가라는거다. 유격대의 밥을 며칠 먹어봤으면 그런것쯤이야 알고있어야지. 그렇지 않니? 어서 이 배낭을 가지고가거라.》

《동무들을 다 굶기면서 나만 먹을순 없어요.》

꼬마는 기를 쓰고 내가 메워주는 배낭을 벗어놓았다.

《그런 도리를 다 아는 네가 어쩌면 피흘리며 싸우는 동무들을 산중에 두고 혼자서 집으로 가는것이 수치라는걸 모른단말이냐. 나는 너희들이 똑똑한 소년들이라고 믿었는데 알고보니 그렇지 못하구나.》

일이 이 지경으로까지 번지자 꼬마는 울음을 터뜨리였다.

사실 이 애들은 아직 부모들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나이들이였다. 나는 여기서도 일제가 강요하고있는 민족수난의 일단을 보는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그가 집으로 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소년중대원들속에서는 동요가 일어날것이다.

나는 꼬마가 입대할 때 쓴 맹세문의 내용을 상기시키고나서 그를 타일렀다.

…대장부의 말 한마디는 천금같이 무겁다는 속담이 있다. 그런데 넌 자기가 다진 맹세를 길가의 막돌처럼 집어던지려고 했다. 사람이 그렇게 약속을 허술히 여기면 되겠느냐. 한번 총을 잡았으면 끝까지 싸워서 이기고 집에 가야지. 그래야 부모들도 더 반가와할게 아니냐.…

꼬마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더는 하지 않겠다고 결의하였다.


이런 곡절이 있었던 까닭이라고 할가. 나는 그후 그를 각별히 돌보아주고 사랑해주었다. 내가 그의 품성가운데서 좋은 점이라고 본것은 동지애였다. 자기는 굶더라도 중대의 비상미만은 축낼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 우애심이야말로 숫눈이나 나리꽃처럼 정결하고 아름다운 동지애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동지애를 혁명가의 자질을 검증하는 시금석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공산주의자들을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인간으로 되게 하는 인격의 핵이고 도덕적기초이며 공산주의자들을 다른 인간들과 구별하게 하는 하나의 뚜렷한 징표이다. 만일 인간에게 동지애라는것이 없다면 그 인생은 기초가 없는 구조물처럼 허물어지고만다. 동지애가 강한 인간은 설사 부족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쉽게 고칠수 있는 힘을 가진다. 내가 19도구출신의 그 꼬마에게서 발견한것은 바로 이 점이였다.


온 부대가 소년중대원들을 친동생처럼 살뜰히 도와주고 보살펴주었다. 구대원들은 그들을 한명씩 맡아서 진지하게 교양하였다. 매개 소년중대원들에게는 믿음직한 후원자가 한명씩 생기였다.

가장 성실하고 적극적인 후원자는 역시 중대를 책임진 오일남이였다. 그는 소년들속에서 락오자가 생길가봐 항상 마음을 썼다. 언제인가 그가 상풍덕에서 입대한 《꼬마신랑》 김홍수의 발싸개를 싸주는 모습을 보고 나는 크게 감동되였다. 그때 오일남은 김홍수더러 홍수, 네가 장가를 가는데서는 나의 선배이지만 발싸개를 감는데서는 후배야, 그러니 창피스럽게 생각지 말구 허심하게 배워야 해, 그러나 내가 장가를 갈 땐 문제가 달라, 그땐 네가 선생노릇을 해야지 하고 말하였다. 《꼬마신랑》인 김홍수는 오일남에게 발을 완전히 내맡기고 중대장의 손동작을 유심히 지켜보고있었다. 오일남이 김홍수의 생활을 남보다 특별히 잘 돌보아준것은 그가 장가를 간 사람으로서 남의 말밥에 오르지 않게 하려는데 있었던것 같다.


소년중대원들을 위해서는 녀대원들도 각별한 사랑과 노력을 기울이였다. 그들도 소년중대원들을 두세명씩 다 맡아보았다. 녀대원들은 소년들을 위해 배낭속의 물건들을 정돈하는 방법으로부터 시작하여 밥짓는 방법, 우등불을 피우는 방법, 바느질하는 방법, 발바닥의 물집을 없애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에서 제기되는 모든것을 하나하나 가르쳐주고 따뜻이 보살펴주었다.


소년들을 돕는데서 중대장 다음으로 꼽을수 있는 열성분자는 김운신이였다. 그는 당조직에서 리을설을 담당하라는 과업을 받았던것 같다. 짬이 생길 때마다 리을설을 옆구리에 달고 다니면서 조준련습을 시키는 김운신의 모습은 다른 구대원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주었다. 그 덕으로 리을설은 명사수가 될수 있었다. 후날 리을설이 공산당에 입당할 때 김운신은 보증인으로 나섰다.


구대원들은 행군을 하면서도 소년중대원들을 이끌어주었다. 야간행군을 할 때에는 앞사람을 바투 따라가야 하며 주위에서 나타나는 정황을 잘 살피고 이상이 있으면 제때에 지휘관에게 보고해야 하며 휴식을 하다가 떠날 때에는 종이쪼박 하나라도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등의 상식들은 모두 구대원들이 행군을 하면서 그들에게 가르쳐준것이다.


나도 소년중대를 위해서는 있는 성의를 다하였다.

나는 물살이 센 강을 건늘 때마다 소년중대의 꼬마들을 업어서 건네주군하였다. 《꼬마신랑》 김홍수도 내 등에 업혀 강을 건는적이 있다. 장가를 간 새서방이 어린애들처럼 그게 무슨 꼴인가고 놀려주어도 이 천진란만한 신랑은 꿈만해하였다. 나는 소년중대원들과 함께 행군할 때마다 《앞에 나무가 있으니 주의하여라.》, 《웅뎅이가 있으니 건너뛰여라.》, 《조심해서 강을 건너라.》는 식으로 일일이 잔소리를 많이 하였다.


소년중대원들은 늘 시장기를 느끼면서 살았다. 유격대식사가 집에서 하는 식사보다 나을리가 만무한것이다. 어느때인가 장백에서 림강으로 그들과 함께 행군하게 되였을 때 우리는 식량이 부족하여 죽을 많이 쑤어먹었다. 죽을 먹는 날이면 그들은 배가 고파서 헐헐하였다. 작식대원들이 매번 나에게 식사를 따로 차려왔지만 나는 끼니때마다 죽그릇을 들고 소년중대원들의 식탁에 찾아가 그들에게 죽을 덜어주군하였다.

성미가 깔끔한 사무장 전희는 어느날 울상이 되여 나를 찾아와 제발 그러지 말라면서 죽을 자꾸 덜어주면 사령관동지의 건강이 어떻게 되겠는가, 정 그러면 자기들도 식사를 하지 않겠다고 푸념하였다.

나는 이런 말로 그를 달래였다.

《전희동무, 너무 걱정하지 마오. 좀 굶는다고 해서 큰 변이 나겠소. 그러나 소년중대원들은 다르오. 아직 단련이 부족해서 무척 힘들어한단 말이요. 돌을 삼켜도 삭일 나이들인데 죽만 먹으니 얼마나 배고프겠소. 이런 때에 우리가 돌봐주지 않으면 누가 돌봐주겠소.》


내가 소년중대원들의 발전을 위해서 제일 관심을 돌린것은 사상교양이였다. 나는 짬만 있으면 그들의 강사가 되여주었다. 처음에는 글을 모르는 소년들에게 글부터 가르쳤다. 소년들은 명인들의 전기에 대하여 매우 흥미를 가지였다. 그래서 그들에게 명인전을 많이 소개하였다. 그다음은 우리 나라 망국사를 강의하였다. 소년중대원들중에는 안중근, 윤봉길, 리봉창과 같이 권총이나 수류탄을 차고다니면서 일본천황이나 조선총독을 제껴버릴 꿈을 꾸는 공상가들도 있었다. 그런 아이들에게는 테로로써는 나라를 독립하지 못한다, 무장투쟁을 축으로 하여 전민항쟁을 벌려야 조국을 광복할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이런 소년들에게 우리의 혁명로선을 인식시키자면 인내성있는 노력이 필요하였다.


장백에서 림강으로 행군할 때 우리는 수십차례의 전투를 하였다. 그러나 나는 소년중대원들을 한번도 전투에 참가시키지 않았다. 그저 먼발치에서 구대원들이 적과 싸우는 광경을 보게 하였다. 언제인가 한 소년중대원이 전장에 있다가 눈먼 총알에 맞아 부상을 당한적이 있었다. 상처자리가 쑤셔날 때마다 그 소년은 아버지를 찾았다. 나는 그때 그 모습을 보면서 저 애의 부모들이 총알을 맞은 자식의 상처를 본다면 얼마나 가슴아파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오일남을 보고 혁명위업을 계승할 보배들인데 대원들을 아끼고 잘 보살펴주라고 하였다. 우리는 금이야 옥이야 하고 소년중대원들을 보살펴주었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을 귀공자처럼 어루만지기만 한것은 아니였다. 잘못한 일이 있으면 엄하게 비판도 하고 구대원들과 생활을 같이하게 하여 단련도 시키였다.


어느날밤 나는 숙영지를 돌아보다가 소년중대원들이 신을 벗고 자는것을 보았다. 그것은 규률위반이였다. 우리는 숙영규정을 만들 때 전투원들이 신발을 벗고 자는것을 금한다는 조항을 하나 만들어넣었다. 적들의 불의습격을 무시로 받게 되는 유격대생활에서 일시적인 불편을 참지 못해 신발이나 옷을 벗고 잔다는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병들은 숙영지에서 언제나 옷을 입고 신발을 신은채 총을 가슴에 안고 자군하였다. 유사시 행동의 민첩성을 보장하기 위해 배낭은 머리에 베고 잤다.


그날밤 나는 전희를 호되게 비판하였다.

…그런 얕은 인정으로는 소년들을 투사로 키워내지 못한다. 만일 이 순간에라도 적들이 달려든다면 신발을 벗고 자는 저 소년들이 어떻게 되겠는가? 그들은 발을 상할수도 있고 얼굴수도 있다. 저 소년들의 부모들은 자식들을 우리에게 맡긴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친부모나 친형, 친누이의 심정으로 저 어린것들을 돌봐주어야 한다. 당장은 가슴이 아프고 인정에 그늘이 지더라도 장래를 위해서 소년들을 원칙적으로 키워야 한다.…


전희는 그날밤 내가 준 비판에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던지 수십년세월이 지나 우리 군대의 부총참모장의 중책을 지닌 조명선을 만난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한다.

《그때 동무의 발때문에 내가 비판을 받던 일이 생각나요?》

조명선은 옛 사무장의 말뜻을 인차 깨닫고 감격에 겨워 말하였다.

《기억나구말구요. 제가 숙영지에서 신발을 벗고 자는 바람에 전희동지가 그만…혁명의 첫걸음을 떼던 소년중대시절이였지요. 고생은 많았지만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누구나 어린 시절에 겪은 고생과 그 시절에 받은 사랑은 한생토록 잊지 못한다. 그 추억은 꺼지지 않는 불빛처럼 따뜻이 인생을 비쳐준다. 반세기도 더되는 오랜 세월이 흘러 그때 14살, 15살이던 소년들이 이제는 어언 70고개를 넘어섰지만 그들은 자기들을 친동생처럼 아끼고 사랑해주던 동지들을 잊지 못한다.


구대원들의 따뜻한 방조와 보살핌 속에서 우리의 소년중대원들은 빨리 성장하였다. 그들은 자기들도 구대원들과 같이 전투에 참가할수 있게 해달라고 조르기 시작하였다. 소년중대원들이 처음으로 참가한 전투가 신방자전투이다. 그때부터 그들은 구대원들과 꼭같이 무수한 격전을 치르었다. 그 과정에는 별의별 일이 다 있었다.


우리가 사전에 아무리 타이르고 열백가지로 주의를 주어도 싸움만 시작되면 소년중대원들은 어른들로서는 전혀 상상할수 없는 엉뚱한 행동을 하여 손에 땀을 쥐게 하거나 웃음을 터뜨리게 하였다. 평소에는 아주 침착해보이는 소년들도 전투에 돌입하면 어느새 열에 떠서 마구 헤덤비였다. 어떤 소년은 은페물에 의지하는것이 성차지 않아 웃도리를 다 드러내고 총을 쏘다가 구대원들에게 덜미를 잡혀 엉덩방아를 찧기도 하였다.


우등불에 새 군모를 태우고 얼마동안 맨머리바람으로 다니던 한 소년중대원은 어찌나 모자생각에 옴했던지 적과 맞다들자 그놈을 쏴눕히기전에 모자부터 벗기려고 하다가 하마트면 죽을번하였다. 보초임무수행중에 노루가 나타나자 참지 못하고 총을 쏜바람에 온 부대가 비상소집을 하게 만든 소년중대원도 있었다.


어려운 싸움의 나날들에 소년중대원들은 전공도 많이 세웠다. 유격대생활의 비상한 정황은 그들로 하여금 보통생활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비범한 지혜와 용감성을 발휘하게 하였다.

한번은 전문섭, 리두익, 김익현이 련락을 가다가 위만군소부대와 맞다들린적이 있다. 적아가 동시에 상대를 발견한것만큼 미리 선손을 쓰지 않으면 적에게 포위될수도 있고 전부 사로잡힐수도 있는 그런 정황이였다. 이 위기일발의 순간에 소년중대원들은 덤불속에 엎드려 일부러 어른의 굵은 목소리로 《제1중대는 좌측으로, 제2중대는 우측으로!》하고 구령을 내리면서 조준사격으로 적을 타격하였다. 그바람에 적들은 싸울 생각도 못하고 도망치고말았다. 소년중대원들은 련락임무를 성과적으로 수행하고 부대로 돌아왔다.


그런데 중요한것은 그들이 이런 공을 세우고 돌아와서도 그것을 대수롭지 않은것으로 여기였다는데 있었다. 그런 리유로 하여 그 군공은 부대에 인차 알려지지 않았다. 나도 오일남중대장의 말을 듣고서야 세 소년들이 얼마나 장한 일을 했는가를 알게 되였다.


소년중대원들은 사상의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도 몰라보게 성장하였다. 그들은 만사를 자기 힘으로 하려고 하였으며 구대원들에게 될수록 부담을 끼치지 않으려고 여러모로 애를 썼다.

소년중대가 조직된 그해 가을 김익현은 우등불곁에서 자다가 종다리에 화상을 당한 일이 있다. 게다가 눈병까지 만나 고생을 많이 하였다. 그가 앞을 잘 보지 못하기때문에 구대원들은 행군할 때마다 그를 부축해가지고 다니였다. 김익현은 종다리가 몹시 쑤셔났으나 나나 구대원들에게 시름을 끼치지 않으려고 아프다는 내색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다리의 화상때문에 고생한다는것을 인차 간파하고 그에게 약을 보내주었다. 김익현의 화상자리를 보고 나는 그의 의지와 참을성에 감탄하였다.


항일전쟁의 전기간 우리의 소년중대원들은 나이나 체력의 제한을 받지않고 구대원들 못지 않게 잘 싸워 무장투쟁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일본군경들은 소년중대를 거친 유격대원들과는 말도 말라고 하였다. 소년중대출신과는 맞서지 말라는것이였다.


김일의 도움으로 어린 나이에 입대한 김성국의 실례를 들어보자.

김일은 오래동안 간삼봉아래부락에 들어가 지하공작을 하였는데 그곳 조국광복회원인 김상현의 방조를 받으면서 많은 일을 하였다. 김상현은 김일을 자기의 농막에 3개월동안이나 숨겨주면서 그의 일을 성실하게 도와주었다. 그런데 그 농민은 홀아비였다. 안해가 죽은 다음 셋이나 되는 자식건사를 할수 없어서 그들을 남의 집 머슴으로 주었다. 그 세 아들중의 맏이가 바로 김성국이였다.


김일은 이 불쌍한 일가를 도와줄 방도가 서지 않아 고심하던 끝에 김성국을 유격대에 추천해보내기로 결심하였다. 어느날 그는 김성국이 김을 매고있는 밭에 찾아가 나에게 보내는 소개신을 주면서 나를 찾아가라고 하였다. 그렇게 되여 소년 김성국은 호미를 던지고 토스레옷차림으로 나를 찾아와 유격대에 입대하게 되였다.


어려서 남달리 고생을 많이 해온 김성국은 눈썰미가 빠른데다가 담차고 이악해서 사격술도 빨리 익히고 유격대의 행동규범도 빨리 터득하였다. 몇달후에는 기관총사수인 오백룡의 부사수로 뽑히였다. 김일은 깊은 애정을 가지고 그를 늘 보살펴주었다.

송화강변에서 추운 겨울을 지내던 때의 일이였다. 그때 김성국은 한동안 방차대에 나가있었다. 한번은 그가 우등불에 발을 쪼이다가 발바닥이 따가와서 신을 벗은적이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순간에 적들이 달려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사수인 오백룡마저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김성국은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급히 송화강얼음판에 나가 기관총을 걸어놓고 적들에게 몰사격을 퍼부었다. 그는 자기가 신도 신지 않고 맨발바람으로 달려나와 싸움판에 뛰여들었다는것을 모르고있었다.


그가 총을 쏘는데만 몰두해있을 때 등뒤에서 누구인가 그의 발을 잡아당기였다.

김성국은 벌컥 화를 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뜻밖에도 김일이 내의를 찢어 자기의 발을 싸매주고있지 않는가. 그때에야 김성국은 자기가 맨발로 싸움판에 뛰여들었다는것을 깨달았다. 적들이 퇴각해간 다음 김일은 이게 무슨 꼴이냐, 발을 잘리고싶어 그러느냐고 하면서 그를 책망하였다.


김일이 전투를 끝내고 돌아와서 나에게 하는 말이 김성국이 기관총을 메고 송화강얼음판을 내달리는데 뒤에서 보니까 발이 얼음에 붙었다가 떨어질 때마다 짜작짜작 하는 소리가 나더라는것이였다. 추운 겨울날 맨발바람으로 얼음판에서 기관총을 냅다갈기는 김성국도 보통내기가 아니였지만 탄우를 무릅쓰고 전장에까지 뒤쫓아가서 내의를 찢어 어린 사수의 발을 싸매준 김일 역시 보통사람이 아니였다. 그때 김일이 그렇게 해주지 않았더라면 김성국은 틀림없이 발에 큰 동상을 입고 날개없는 새가 되고말았을것이다.


그는 후에 나와 김일의 보증으로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가 얼마나 혁명에 충실한 투사였는가 하는것은 소부대활동시기의 여러가지 일화들이 잘 말해주고있다. 1940년대 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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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1940년대 전반기는 매개 유격대원들의 혁명성을 검열하는 시련의 시기였다. 이 준엄한 시기에 김성국은 추호의 동요도 없이 잘 싸웠다. 지하공작임무를 받고 국내에 드나들던 김성국이 한번은 혼자서 라진시내에 들어갔다가 별치않은 실수로 경찰들에게 단속된 일이 있었다. 거리에서 비를 만난 그는 상점에 들어가 우산을 샀는데 그것이 그만 녀자용양산이였다. 가재수라는 산골에서 어려서부터 고역에 시달려온 김성국은 우산과 양산이 다르다는것을 몰랐다. 그가 상점에서 쓰고나온 녀자용양산은 대뜸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얼마나 수상스럽게 보였던지 지나가던 경관이 그 양산을 가리키며 어디서 훔쳤는가고 물었다. 김성국은 사실대로 상점에서 산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왜 녀자용을 샀는가라는 경관의 물음에 그는 이웃집 아주머니가 부탁해서 사가는 길이라고 슬쩍 둘러대였다.

그러나 경관은 김성국을 경찰관주재소까지 끌고가서 지꿎게 심문하였다. 김성국은 의자를 들어 경관을 때려눕히고 뛸 궁리도 해보았으나 단념하였다. 그렇게 하면 시내에서 지하공작을 더 할수 없게 될것이고 자기를 대신하여 다른 공작원이 또 사선을 넘어 라진에 침투해야 하였다.
김성국을 붙잡아온 경관이 시내순찰을 하려고 밖으로 나가자 이번에는 딴 경관이 그를 심문하였다. 순사는 심문중에 책상서랍을 열어보다가 동료순사가 김성국한테서 압수한 수백원의 공작비를 발견하고는 돈이 탐나서 얼른 그를 놓아주었다.

다음해 여름에도 김성국은 소부대공작을 나갔다가 아슬아슬한 고비를 겪었다. 공작임무를 마치고 기지로 돌아가던 그는 적들과 맞다들어 총격전을 벌리던 끝에 여러군데나 부상을 당하였다. 김성국이 골짜기로 내려와 풀숲에 숨어있었기때문에 적들은 그를 찾아내지 못하였다. 나는 임철을 책임자로 하는 소조를 파견하여 김성국을 찾게 하였다. 그 소조가 골짜기에서 빈사상태에 빠진 그를 발견하였다. 상처를 여러군데나 입은 김성국이 그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은것은 기적이였다. 그는 의식을 잃는 순간까지 풀을 뜯어 먹었다고 하였다.

김성국이 훈련기지로 돌아온 다음 우리는 해당 기관과의 련계밑에 그를 쏘련의 한 야전병원에 후송하였다. 김성국은 그 병원에서 1년동안 치료를 받고 건강을 회복하였다. 병원의 의료일군들과 환자들은 모두 그를 극진히 돌봐주었다. 특히 담당간호원처녀는 김성국을 조선빨찌산의 불사조라고 하면서 수혈도 해주고 낮에 밤을 이어 헌신적으로 간호해주었다.

그 간호원은 독일처녀였다. 반파쑈투사인 아버지가 히틀러도당에게 총살당한후 어머니와 함께 쏘련에 온 망명자였다. 처녀는 김성국을 동방약소민족의 투사로 존대하면서 온갖 정성을 다 쏟아부었다. 그의 치료를 위한 일이라면 마른일궂은일 가리지 않고 도와나섰다. 위생실출입을 거들어주고 세수를 시켜주었으며 식사시간에는 밥을 먹여주었다. 환자가 회복기에 들어서자 처녀는 그의 식욕을 돋구어주려고 집에서 닭을 잡아 구미에 맞는 음식을 지어왔다.

퇴원하는 날 처녀의 어머니가 병원에 찾아와서 그를 자기 집으로 초청하였다. 환자가 병원생활을 끝내면 료양을 하는것이 상례인데 자기 집에서 며칠동안 영양보충을 하다가 가라고 하였다. 김성국은 초청을 쾌히 받아들이였다.
처녀의 어머니는 그 거리의 미술학교 교원이였다. 그 녀자는 씨비리의 사나운 기후조건에서도 닭을 수십마리나 기르고있었으며 다년생 고추나무도 재배하였다. 모녀는 하루에 한마리씩 닭을 잡아 여러가지 료리를 하여 김성국의 밥상에 놓아주었다. 그들은 짬만 있으면 김성국에게 조선빨찌산의 투쟁이야기를 들려달라고 간청하였다. 처녀와 그의 어머니를 제일 감동시킨것은 10대의 어린 나이로 혁명의 폭풍우속에 몸을 내던진 소년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들은 나어린 소년들이 유격투쟁을 하는데 대하여 매우 신비롭게 생각하였다. 처녀의 어머니는 조선의 투사영웅을 그려 구라파에 소개하겠다고 하면서 화판에 김성국의 얼굴모습을 자주 옮기였다.

김성국이 료양생활을 하는 기간 처녀는 그를 통하여 조선을 리해하였고 조선의 력사를 리해하였으며 조선의 혁명가들과 인민들을 리해하였다. 김성국을 알게 된 때로부터 처녀는 조선을 사랑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소년대원들에 대한 말만 듣고도 당신네 나라가 일본과의 싸움에서 이기게 되리라는것을 확신하게 되였습니다. 당신들은 반드시 일본을 타승하고야말것입니다.》
처녀는 이 말을 몇번이고 곱씹었다.

김성국이 부대로 돌아올 때 모녀는 쏘련의사들과 함께 멀리까지 따라 나와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모녀는 김성국에게 작별기념으로 많은 저금액이 기입되여있는 저금통장을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김성국은 그 호의를 굳이 사양하였다.
처녀의 어머니는 리별의 마당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당신은 아직 더 쉬여야 할 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상 붙잡아두지 않겠다. 우리가 아무리 만류한들 당신이 우리 집에 남아있겠는가. 당신 같은 투사들을 가지고있는 조선혁명은 반드시 승리하게 될것이다.…

나는 김성국의 귀환담을 듣고 그에게 기울인 독일처녀와 그 어머니의 국제주의적소행에 크게 감동되였다. 그래서 김성국에게 돈과 돼지고기를 주어보내여 조선인민혁명군의 이름으로 감사를 표시하게 하였다.

소년중대가 얼마나 훌륭한 사상단련의 용광로이며 쓸모있는 군사정치학교였는가 하는것은 김철만의 실례를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김철만은 지양개일대에 소부대공작을 나갔던 《대통령감》을 따라 우리를 찾아와 소년중대에 입대한 사람이였다.그가 처음으로 내앞에 나타났을 때 나는 《대통령감》을 나무랐다.《장총키보다 더 작은 애숭이를 부대에 데리고오면 처리는 어떻게 하랍니까?》하고 답답한 소리를 했더니 리동백은 펄쩍 뛰면서 애숭이라니요, 그 애 나이가 자그만치 17살이나 됩니다, 키는 작아도 속은 령감이 다된걸요 하면서 김철만을 두둔해주었다.

나는 처음에 김철만이 《대통령감》앞에서 자기의 나이를 속였다고 생각하였다. 내 눈에는 그가 12살 아니면 13살쯤 되는 아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보고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하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설복하였다.
그러나 김철만은 씨물씨물 웃으면서 《장군님, 키가 작다구 얕보지 마십시오. 이래뵈두 못해본 농사가 없습니다.》하면서 팔뚝을 흔들어보이였다. 그의 팔뚝은 과연 다른 아이들보다 힘살이 더 있어보이였다.
김철만은 소년중대에 입대한후 무슨 일에서나 앞자리를 차지하였다. 소년중대가 해산된후에는 7련대에 가서 오중흡련대장의 전령병으로 임무를 책임적으로 수행하였다. 오중흡이 전사하였을 때 제일 눈물을 많이 흘린 대원이 바로 이 김철만이였다. 그는 오중흡의 후임으로 련대장이 된 오백룡의 신변호위를 위해 각별히 마음을 썼다.

김철만은 소부대활동기간에도 줄곧 오백룡이 인솔하는 소조에 망라되여 쏘만국경과 두만강을 뻔질나게 넘나들며 반일항쟁력량을 묶어세우기 위한 정치공작과 적의 군사요충지들에 대한 정찰활동을 과감히 벌리였다.

항일의 불바다속에서 단련된 군사지휘관으로서의 김철만의 담력과 재능은 반미대전시기에 남김없이 발휘되였다. 그는 1차남진의 길에서도 잘 싸웠지만 적후투쟁도 잘하였다. 그가 지휘하는 련대는 양구, 춘천, 가평, 통천, 포항, 청송, 군위를 비롯한 강원도일대와 경상북도일대의 천여리에 달하는 광활한 지역을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적들을 배후에서 련속적으로 타격하였다.
적아간에 밀고밀리는 싸움이 얼마나 격렬하게 벌어졌던지 그 당시 양구지방 인민들은 가을걷이도 하지 못하고있었다. 그래서 김철만은 양구를 해방하자 군내 간부들을 다 불러다놓고 배포유하게 가을걷이조직부터 하였다. 양구군의 인민들은 그의 련대와 함께 며칠사이에 밭에 서있는 곡식을 다 베여들이였다.

김철만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기가 당의 신임과 사랑을 받는 군사정치일군으로 자라날수 있은것은 수령님의 덕이다, 수령님께서 나를 소년중대에 받아들여 친부모의 사랑으로 키워주고 돌보아주시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름도 없는 초부나 농사군으로 남아있었을것이라고 말한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을 그의 진심의 고백이라고 생각한다.

소년중대에는 망라되지 않았으나 그들과 비슷한 나이에 무장을 잡고 유격대에서 싸운 꼬마대원들도 항일전쟁의 승리에 당당하게 기여하였다.
김병식은 15살때 차굴공사장에서 로동을 하다가 단신으로 유격대에 찾아와 입대한 당돌한 소년이였다. 참군후 한동안 문붕상과 최춘국의 전령병으로 활동하였는데 지휘관들이 그를 날파람있는 싸움군이라고 하면서 몹시 총애하였다.

김병식은 적후공작에 자주 파견되여 많은 공을 세웠다. 그는 경계가 삼엄한 두만강을 휘파람을 불며 마음대로 넘나들었고 웅기(선봉), 라진, 회령을 비롯한 조선의 북부국경도시들을 이웃마을 다니듯하였다. 그가 목숨을 내대고 국내에 들어가서 수집해가지고온 적정자료들은 우리의 조국해방작전준비에 큰 도움을 주었다. 해방전야에 김병식은 불행하게도 적들에게 체포되였다. 일본의 교형리들은 그가 한 모든 일이 자기네 제국의 밑뿌리에 시한탄을 파묻는것과 같은 엄청난것임을 알고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 사형은 후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였다. 적들도 아마 그가 미성년이라는것을 고려한것 같다.

김병식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제일 나어린 《죄수》로 되였다. 그는 잡역로동에 끌려나갈 때마다 그 감옥에서 복역중이던 권영벽, 리제순, 리동걸, 지태환, 박달, 서응진 등의 감방을 오가면서 련락원의 역할을 잘 수행하였다. 적들은 그를 귀순시켜보려고 고문도 하고 위협도 하고 구슬려도 보았지만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하였다. 그는 절개가 강한 투사였다.

항일혁명투사들가운데서 제일 어린 나이에 입대한 사람은 리종산과 리오송이였다. 리종산은 11살때 항일련군 3군에 입대하여 유격대원이 되였다.
리종산이 혁명군에 찾아갔을 때 그의 입대심의를 한 사람은 3군 정치주임이였던 풍중운이였다. 풍중운은 처음에 리종산을 보고 나이가 어리기때문에 받을수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고하였다. 11살 나이에 군인생활을 한다는것은 사실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였다. 게다가 리종산은 키도 작았다. 나이는 한두살 속인다 해도 키를 속이는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리종산은 찰거마리처럼 달라붙어 끝끝내 풍중운의 허락을 받아내고야말았다.

그는 입대후 만사람의 기대에 어그러지지 않게 군인생활을 잘하였다. 부대의 지휘관들과 대원들은 눈썰미가 빠르고 동작이 민첩하고 일욕심이 많은 그를 친동생처럼 한결같이 아끼고 사랑하였다. 리종산은 3군에서 주로 전령병생활을 하였다. 한때는 김책과 박길송의 수하에서 전령병으로 복무하였다.

김책이 좋은 부관감이라고 하면서 리종산을 나에게 처음으로 소개한것이 1943년경이라고 기억된다. 그때로부터 리종산은 나의 측근에서 많은 세월을 보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것은 김책이 그의 출생과 관련하여 나에게 여담삼아 들려준 이야기이다. 리종산네 가정은 원래 평양 팔동교에서 살았는데 내가 창덕학교를 다니던무렵에 만주로 들어갔다고 한다. 만삭이 된 어머니가 심양행렬차에서 낳은 새 생명이 바로 리종산이였던것이다. 산모에게는 포단도 없고 기저귀도 없었다. 그래서 승객들이 한잎두잎 돈을 모아서 그에게 주었다. 리종산의 어머니는 그 돈으로 갓난애의 옷을 가까스로 마련하였다.

해방후 리종산은 손종준 등과 함께 나의 부관으로 여러해동안 사업하였다. 그는 부관으로 임명되자마자 담배부터 끊었다. 나의 건강을 생각해서였다. 10년이상이나 붙여온 습관을 일조일석에 떼버린다는것이 말처럼 간단하게 해결되는 일은 아니다.

우리가 청구자에서 군정간부들을 3군에 파견할 때 그 성원들중에는 왕청유격대에서 분대장으로 복무하던 오중흡의 동생 오중선(오세영)도 포함되여있었다. 오중선은 3군에 가서 대대정치위원을 하다가 어느 전투에서 적탄에 오른쪽 지시손가락을 잃어버리였다. 그가 마라초를 피울 때면 리종산이 대신해서 담배를 말아주고 다른 대원들한테 뛰여가서 불도 붙여오군하였다. 불을 붙이자면 상대방의 담배대에 담배대를 대고 한두모금씩 연기를 빨아들여야 하는데 그러는 사이에 자기도 모르게 애연가가 되고말았다는것이다.
내가 이따금씩 담배를 권해도 리종산은 받지 않았다. 나는 그가 금연의 도리를 지키는것을 보고 감탄하였다.

우리와 함께 항일혁명의 험난한 고개들을 수없이 넘어온 나어린 유격대원들가운데는 1936년 봄에 녀성소대를 인솔하고 미혼진에 나타났던 태병렬도 포함되여있다. 그가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처음으로 총을 멘것이 15살인가 16살 때였다고 한다.
그에게는 《고추알》이라는 별명이 늘 붙어다니였다. 키도 작고 몸집도 작지만 속은 다 영글었다는 뜻이다. 태병렬은 싸움도 맵짜게 하였고 생활도 모가 나게 하였다. 그는 항일유격대에 입대한후 묘령전투, 금창전투, 간삼봉전투, 무치허전투, 대포시하전투, 대사하, 대장강전투, 액목현성전투를 비롯한 수많은 전투들에 참가하여 로병들에게 짝지지 않는 자랑할만한 무공을 세웠다. 그가 소유하고있는 백발백중의 사격술은 이런 무공을 세우는 과정에 실전을 통하여 련마한것이였다. 태병렬이 리룡운련대장과 함께 돈화현의 어느 집단부락에 들어가 30여명의 위만군을 눈깜짝할 사이에 녹여낸 무훈담은 지금도 항일투사들속에서 흥미있는 이야기거리로 전해지고있다. 그가 솜씨있는 싸움군이였기때문에 한다하는 로병들도 그를 나이가 어리다고 감히 얕보지 못하였다.

항일전쟁의 나날에 태병렬은 주로 안길, 전동규, 리룡운을 비롯한 군정간부들의 전령병으로 활약하였다. 많은 군정간부들이 눈썰미가 빠르고 책임성이 높고 일욕심이 많은 그를 제가끔 자기의 수하에 두고싶어하였다.
태병렬은 전령병으로 있을 때 지휘관들의 신변안전에 각별한 관심을 돌렸다.
지휘관들이 위험한 모퉁이에 뛰여들려고 할 때마다 태병렬은 그러지 못하게 두팔을 벌리고 막아나섰다. 모험을 하지 말라는건 장군님의 요구인데 그 요구를 어기면 되겠는가고 총알같이 내쏘군하였다. 대사하, 대장강 전투때 전동규련대장이 전사한것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탄막속에 몸을 내대는 모험을 했기때문이였다.

안길은 태병렬이 자기 옷섶에 매달리면서 모험을 하지 말아달라고 애걸할 때 그의 말을 들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더라면 자기도 전동규처럼 죽었을것이라고 하였다.
소할바령회의후 소부대활동에 참가하였던 태병렬은 왕청현의 어느 깊은 수림속에서 적대부대와 불의에 맞다들어 치렬한 전투를 벌리다가 허벅다리에 중상을 당하였다. 뼈짬에 총알이 들어가 박혔는데 그것을 끄집어낼 도리가 없었다. 출혈이 얼마나 심했던지 그는 이따금씩 실신상태에 빠지기도 하였다. 총상자리에서는 구데기까지 우글우글해서 소름이 끼칠 지경이였다. 제때에 처치를 하지 않는다면 밸이나 방광까지 곪아들어갈수 있는 위험한 상태였다. 그런데 간호병의 임무를 받고 밀림에 떨어진 왕가대원은 수술은커녕 아무런 의학상식도 없는 사람이였다.

태병렬은 막돌에 손칼을 선뜩선뜩하게 갈아가지고 그 칼로 총상자리를 수술하였다. 상처속에 칼을 집어넣고 힘있게 잡아돌리자 싯누런 농즙과 함께 썩어문드러진 살과 뼈짬에 박혔던 총알이 섞여나왔다. 이런 모험의 덕으로 그는 자기자신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해낼수 있었다.
이듬해에 왕청의 공작지에서 나를 만난 태병렬의 전우들은 그가 스스로 자기 다리를 수술하던 전말을 이야기하면서 《저 친구는 독종입니다.》하고 말하였다. 독종이라는것은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는 뜻일것이다. 나는 태병렬에 대한 전우들의 평가가 지나친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 상처를 치료한다는것은 사실 아무나 할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뛰여난 담과 용기를 필요로 하는 모험이다.

나는 오랜 기간의 공동생활을 통하여 그가 실지로 독하고 담이 큰 사람이며 혁명의 리익을 위해서라면 맹호가 되여 투쟁하는 충직하고 결패가 있고 원칙적인 인간이라는 견해를 가지게 되였다. 그는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간에 항상 원칙을 견지하였고 부정과 타협하지 않았다. 그가 제일 증오한것은 종파분자들과 군벌주의자들이였다. 태병렬이 대가 세고 당성이 강한 사람이였기때문에 김창봉과 같은 군벌주의자도 그에게 함부로 이래라저래라 하지 못하였다.

태병렬은 항일전쟁때에도 잘 싸웠지만 조국해방전쟁때에도 많은 공로를 세웠다. 전후에는 부관이 되여 측근에서 나의 사업을 성실하게 뒤받침해주었다.
초년고생은 금을 주고도 못산다는 속담도 있지만 태병렬이 이처럼 온갖 풍상고초를 다 이겨낸 혁명가로 성장할수 있은것은 어린 시절에 잡은 총대의 덕분이였다. 사람이 어려서부터 무장투쟁을 하게 되면 쇠소리가 나는 혁명가가 된다. 그리고 물불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철같은 인간이 된다.

반년사이에 소년중대원들은 구대원들 못지 않은 전투원들로 성장하였다. 그들의 발전은 실로 놀랄만한것이였다.
우리는 그들이 군인다운 틀거리를 갖추게 되자 1937년말경에 소년중대를 해산하고 그 성원들을 다른 중대들에 배속시키였다. 그 조치로 하여 소년중대원들은 예비군으로부터 기본부대전투원으로 될수 있었다.

소년중대출신의 유격대원들가운데는 배신자나 락오자가 한명도 생기지 않았다. 이것은 그들이 당과 혁명, 조국과 인민 앞에 얼마나 충실하였는가를 실증해준다. 지구의 동쪽과 서쪽에서 파쑈가 최후의 광태를 부리던 해방전야의 그 엄혹한 세월에도 그들은 나와 함께 소부대활동을 충실하게 하였다. 새 조선 건설의 나날에는 그들이 사단장도 되고 련대장도 되여 혁명선배들과 함께 이 나라의 무력을 건설하였으며 미국의 장군들과 땅크들을 함정골에 몰아넣고 족쳐버리였다.

인민군대의 초대총참모장이였던 강건도 16살에 혁명군에 참가한 사람이였다. 그는 30살에 총참모장이 되였다. 강건은 1948년말에 쏘련을 방문한적이 있는데 그를 영접하기 위해 비행장에 나온 상대국의 대장, 원수급의 고위군사간부들은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이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라는것을 알게 되자 놀라움을 숨기지 않았다.
강건이 조국에 돌아와 그 이야기를 하였을 때 나는 웃으면서 말하였다.
《내가 그자리에 있었더라면 동무가 아이적에 벌써 소문난 군인이였다는걸 이야기해주었을거요.》

나는 소년중대를 조직한후부터 사람의 생리적년령과 정신적년령을 완전히 갈라보기 시작했다. 그 두 년령가운데서 내가 기본으로 본것은 정신적년령이였다. 청소년기의 정신적년령은 한해에 두살, 세살, 지어는 다섯살씩 늘어날수도 있다.
청소년교양은 나라의 운명을 개척하는데서 또하나의 천하지대본이다. 소년중대의 경험이 보여주고있는바와 같이 혁명의 계승자, 후비군의 준비는 이를수록 좋고 잘할수록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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