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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17-2. 보천보의 불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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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16,431회 작성일 15-10-05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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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보천보의 불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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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장백현 19도구 지양개에서 국내진공대렬을 편성하고 대원들에게 일제히 여름군복을 갈아입히였다. 장사진을 이룬 대오가 일매지게 새 군복을 입고 지양개를 떠났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차림새가 그때처럼 좋은적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걸음은 작전상의 단순한 위치이동이 아니였다. 그것은 망국의 한을 품고 이국의 하늘밑에서 나라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조국땅에 큰 총성을 울리기 위해 여러해동안 피흘려 준비해온 길이였다. 그래서 우리는 오랜 리별끝에 몹시 그리웠던 부모를 찾아가는 심정으로 조국인민들에게 혁명군의 위용을 보여줄수 있도록 옷차림과 행장구를 최상의것으로 갖추었다.


이전의 군복들가운데는 제나름으로 지은것들도 없지 않았다. 혁명군의 군복은 재봉대가 맡아가지고 제작하는것이 통례였으나 일손이 딸릴 때에는 주민지구의 아낙네들까지 동원시키였다. 그러다나니 모양새가 어설픈것들도 더러 있었다. 군복과 사복이 혼탕을 이루어서 차림새가 얼럭덜럭한 경우도 간혹 있었다.

나는 국내진공작전을 결심한 때부터 사령부가 작성한 도안에 따라 부대 전체 성원들에게 새로운 형태의 군복을 지어 입히기로 하였다.


새로 작성한 군복도안에서는 모자에 붉은별모표를, 군복저고리에는 령장을 달았다. 그리고 남대원들의 바지는 유격활동에 편리하게 약간 개조한 승마복형태였고 녀대원들에게는 주름치마나 바지를 입히는것으로 하였다. 남녀대원들의 저고리는 종전처럼 닫긴깃형태였다.


우리가 600벌의 군복을 만들기로 하고 재봉대를 포함한 후방부성원들을 장백으로 파견한것은 양목정자에서였다.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천신만고의 무송원정길을 톺아가던 그 당시의 우리 형편으로 보면 군복 같은데 신경을 쓸 경황이 못되였다. 그때에는 군복보다도 당장 먹을 한두끼의 식량이 더 절박했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조국진군의 장래를 내다보면서 예견성있게 수백벌의 군복제작을 포치하였다.


600벌의 군복제작과업을 수행하느라고 오중흡과 김주현이 참으로 많은 고생을 하였다.

오중흡이 인솔하는 후방공작조가 서강에서 장백으로 나갈 때 겪은 고초에 대해서 여러 투사들이 회고도 하고 증언도 하였으나 그 전모는 아직 완전히 알려지지 못하였다. 우리가 무송으로 북상행군을 할 때에는 그래도 리명수전투에서 얻은 식량을 가지고 떠났다. 그런데 오중흡이 장백으로 데리고가는 후방공작조에는 한되박의 식량도 없었다. 대원들은 허기가 나고 기력이 진해서 걸음을 옮기지 못하였다. 맹물로 끼니를 에운다는것도 하루이틀이지 노상 시장기를 달랠수는 없었다. 그들은 굶다 못해 단두산쪽으로 발길을 돌리였다. 거기에 가면 단두산전투후에 파묻었던 소대가리를 우려먹을수 있다는 타산을 했던것이다.


그러나 막상 소대가리를 파묻었던 현장에 가보니 살은 산짐승들이 다 뜯어먹고 뼈만 댕그렇게 남아있었다. 그래도 오중흡이네는 그 뼈를 우려먹고 얼마쯤 기력을 회복하였다.

기아는 또다시 그들을 위협하였다. 일행은 아사의 위협과 함께 동사의 위협도 동시에 받았다. 모두가 칼날같은 눈얼음에 옷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맨살이 드러나서 얼어죽을 지경이였다.

만일 조국진군이라는 목전의 대망을 단 한순간만이라도 잊었더라면 후방공작조성원들은 무송이나 장백의 어느 설령에서 더는 일어나지 못하고 주저앉아 영영 눈속에 묻히였을지도 모른다.


김주현의 말에 의하면 오중흡이네 후방공작조가 소덕수에 도착하였을 때 그들의 모습은 너무도 참혹하고 끔찍해서 눈물이 없이는 볼수 없더라는것이였다. 겨우 숨이 붙어있는 그들을 소덕수인민들이 맞아들여다가 형체만 남아있는 누데기같은 옷을 가위로 째내고 새 옷을 갈아입혔는데 온몸에 피얼음들이 엉켜붙어있어 상처자리부터 소금물로 소독하고 언독을 빼지 않으면 안되였다는것이다. 오중흡이하 전원이 동상을 입었다.


그런데 놀라운것은 후방공작조성원들이 의식을 차리기가 바쁘게 일어나 재봉기앞에 마주앉더라는것이였다. 이 소식을 들은 소덕수의 조국광복회원들과 인민들은 앞을 다투어 그들의 치료를 도와나섰다. 유격대원들과 인민들은 일심일체가 되여 600벌의 군복을 짓는데 필요한 천도 해결하고 제작도 끝내였다.


언제인가 박영순은 나보고 항일혁명투쟁시기 군대와 인민이 처창즈에서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는가 하는것을 사실 그대로 말하게 되면 후대들이 잘 믿지 않을수 있기때문에 정 험한것은 생략하고 줄여서 말한다고 했는데 그 말에 일리가 있는것 같다. 항일혁명당시의 고난을 직접적으로 체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상상력을 아무리 발동하여도 그때의 실상을 제대로 리해하기가 어려울것이다.


언제인가 쏘련에서 발행하는 군사잡지를 보니 쏘련군사사상의 핵을 쏘베트애국주의라고 규정하고있었다. 나는 사회주의적애국주의를 쏘련군사사상의 핵으로 본 쏘련사람들의 관점을 정당한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의 성격과 활동을 관통하고있던 군사사상도 그 핵은 애국애민에 두고있었다. 우리는 항일유격대의 모든 대원들이 언제 어디서나 조국과 인민의 참다운 해방자, 성실한 수호자가 되도록 부단히 교양하였다. 조국을 위해서라면 죽어서 한줌의 흙으로 사라지는것도 마다하지 않는 거기에 항일유격대의 생활을 지배하고있던 애국주의의 본질이 있었다.


오중흡이 새로 지은 600벌의 군복을 가지고 지양개에 나타난것은 5월말이였다.

전우들의 피땀이 스며있는 새 군복으로 옷차림을 일신한 행군대오는 1937년 6월초에 19도구를 떠나 20도구, 21도구, 22도구를 거쳐 구시산이 지척에 바라보이는곳에 와닿았다. 그때 우리의 길안내는 19도구사람인 천봉순이 하였다. 천봉순은 앞쪽에 바라보이는 등판이 제비등판인데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조국땅 곤장덕과 마주서있다고 하였다.

부대는 구시산마을에서 얼마간 머무르다가 제비등판에 올랐다. 6월 3일새벽이였다. 조국의 높고낮은 산봉우리들이 키돋움을 하며 우리를 반기는것 같았다.


그날 부대는 제비등판에서 로독을 풀었다. 김운신을 비롯한 선발대성원들은 구시물동에 가서 떼목다리를 마련하였다.

우리는 6월 3일밤 압록강을 건넜다.


전원이 강을 도하할 때까지 자신도 모를 긴장감이 온몸을 엄습하였다. 적들이 1선, 2선, 3선도 모자라 4선으로 경계진을 치고있다는 삼엄하고 조밀한 국경경비였다. 300여개를 헤아린다는 북부국경지대의 경찰서와 경찰관주재소들, 거기에만도 수천명의 폭압무력이 배치되여있었다. 기동성도 여간 아니였다. 혜산경찰서에서는 국경특설경비대라는것까지 무어 조선인민혁명군의 국내진출에 대비하였다. 유격대의 《토벌》을 기본목적으로 삼는 정예부대였다고 후날 이 경비대의 대장이였던 오가와 슈이찌도 솔직하게 고백하였다.


국경지대의 경찰관주재소와 출장소 건물들의 주변에는 참호를 굴설하고 토벽, 철조망, 나무울타리 등 인공적인 장애물들로 보루를 축성하였으며 필요한 장소에는 감시대를 설치하거나 교통호를 파놓았다. 평안북도경찰수비대에는 비행기도 있고 기관총을 갖춘 두척의 발동선도 있고 탐조등도 배치하여 사람은 물론, 쥐와 새의 움직임까지도 죄다 통찰할듯한 기세였다. 함경북도수비대에도 발동선이 한척 배비되여있다고 하였다. 강안의 경찰기관들에는 어디에나 기관총과 탐조등, 망원경, 철갑모를 분배하고있다는 소식도 있어 대부대에 의한 국내침투는 거의나 불가능할것 같은 형세였다.


하지만 아무리 삼엄한 국경경비도 우리를 주저하게 하지는 못하였다.

구시물동은 소연한 물소리로 우리의 도하를 감싸주었다. 근대조선의 소란스러운 민족사가 그 물소리속에 응축되여 만단사연을 속삭여주는듯하였다.

우리는 지체없이 곤장덕에 올랐다. 곤장덕은 울창한 수림으로 덮여있는 평평한 야산이였다. 여기서 부대는 보초를 세우고 하루밤을 숙영하였다.


다음날은 아침부터 곤장덕숲속에서 전투준비를 하였다. 포고, 삐라, 격문도 준비하고 지휘관회의도 열고 정찰도 조직하였다. 중요한것은 이미 장악한 적정자료를 현지에서 다시 확인해보는것이였다. 마동희와 김확실에게 정찰임무를 주어 보천보거리로 내려보냈다. 그들은 어리무던한 농민부부로 가장하였다. 적당한 구실을 붙여가면서 여러 기관들에 들어가 수작을 붙이고는 정보를 수집하였다. 어찌나 정찰을 실속있게 했던지 그날밤에 다른데로 부임되여가는 산림보호구 주임의 송별연회가 있다는 정보까지 걷어가지고 돌아왔다.


우리는 이미 여러 갈래의 선을 통하여 보천보에 대한 정찰을 충분히 해두었었다. 권영벽이나 리제순의 선도 동원하고 박달의 선을 통해서도 적정을 립체적으로 파악하였다.

우리는 날이 어두워진 다음에 곤장덕을 내리였다. 거리에 들어서자 대오는 여러 단위로 분산되여 소정된 위치를 차지하였다.


나는 거리초입에 있는 황철나무아래에 지휘처를 정하였다. 거기에서 주요공격목표인 경찰관주재소까지의 거리는 불과 100메터 안팎이였다. 시가전을 하는 경우 지휘처와 시가와의 거리가 이처럼 가까운 실례는 거의 없다고 한다. 이것이 보천보전투가 가지고있는 하나의 중요한 특징이라고도 말할수 있다. 지휘관들은 나에게 지휘처를 시내에서 좀더 멀리 떨어진곳에 정할것을 권고하였으나 나는 그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가전의 움직임을 순간마다 포착할수 있는곳에 지휘처를 정하고 내자신을 전투의 도가니속에 밀어넣으려는것이 나의 소망이였다.


전투전야의 정경가운데서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것은 지휘처근방의 농가앞마당에서 장기를 두고있던 사람들의 모습이였다. 지하활동을 할 때 같으면 그 사람들에게 말도 걸어보고 훈수도 하였을것이다.


정각 10시, 나는 권총을 높이 쳐들고 방아쇠를 당기였다.

10여년세월 조국의 동포들에게 말하고싶었던 모든 사연들이 그 한방의 총성에 담겨 밤거리에 울려퍼졌다. 그 총소리는 우리 시인들이 노래하듯이 어머니조국앞에 드리는 상봉의 인사였고 강도 일제를 징벌의 마당으로 불러내는 호출신호였다.


나의 총성을 신호로 하여 사방에서 적기관들을 들부시는 사격소리가 자지러지게 들려왔다. 먼저 이고장 경찰들의 소굴이며 온갖 폭압과 만행의 아성인 경찰관주재소에 주되는 타격을 안기였다. 오백룡의 기관총이 주재소창문을 향해 사정없이 불을 뿜었다. 그때 우리는 산림보호구에 적들이 많이 모이게 되여있다는 정보에 기초하여 거기도 드세게 공격하게 하였다. 순식간에 온 거리가 발칵 뒤집히였다. 전령병들은 련이어 황철나무곁으로 달려와 전투정황을 보고하였다. 나는 그들이 왔다갈 때마다 인민들을 절대로 다치지 않게 하라고 강조하군하였다.


얼마후에는 여기저기서 불길이 타래쳐오르기 시작했다. 면사무소, 우편국, 산림보호구, 소방회관을 비롯한 여러개의 적통치기관들이 일시에 화염에 휩싸였다. 거리전체가 여러개의 대형조명등을 설치한 무대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우리 대원들은 우편국을 수색하다가 철궤속에서 일본각전을 많이 발견하였다. 그들은 보천보에서 철수할 때 그 각전들을 시내 여기저기에 다 줴던지였다. 주재소에 쳐들어가 《애국부인회》의 이름으로 된 기관총을 로획해가지고 나온 오백룡이 기뻐 어쩔줄 모르던 모습도 꽤 인상적이였다.


나는 김주현을 앞세우고 거리 한복판으로 들어섰다.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총소리를 듣고 움쩍도 못했는데 우리 선동원들이 부르는 구호를 듣고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막 쓸어나왔다. 시인 조기천은 그때의 정경을 그리면서 《밤바다같이 웅실거리는 군중》이라고 하였는데 그 표현이 참으로 적중한것이였다.

군중이 우리를 둘러싸고 끓어대자 권영벽이 내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아무래도 조국동포들에게 인사 겸 연설을 한마디 해야겠다는것이였다.


운집한 사람들을 둘러보니 별빛같은 시선들이 일제히 나한테로 쏠리였다.

나는 모자를 벗어쥔 다음 팔을 높이 들어 흔들면서 만장을 향해 필승의 사상으로 일관된 반일연설을 하였다.

《여러분, 나라가 해방되는 날 다시 만납시다!》

연설을 마친 다음 이런 말을 남기고 화광이 충천하는 면사무소앞을 떠났으나 가슴이 그냥 저려들었다. 칼로 살을 도려낸것처럼 몹시도 아파났다. 우리는 저마다 이 자그마한 국경의 거리에 심장의 한부분을 떼두고 가는것이였다. 가는 심장과 남는 심장이 리별앞에서 소리없이 통곡하였다.


부대가 곤장덕에 올랐을 때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구령도 없이 갑자기 대렬이 흩어지는것이였다. 대원들이 저마끔 흙을 움켜서 배낭속에 넣고있었다.

지휘관들도 뒤질세라 조국의 흙을 간수하였다. 22만평방키로메터라는 나라의 땅덩어리에 비하면 한줌의 흙이라는것은 너무도 작은것이였다. 그러나 그 한줌의 흙에는 삼천리가 담겨있고 2천 300만이 담겨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옹근 조국과도 같이 귀하고 소중한것이였다.


오늘은 우리 비록 한 거리를 치고 가지만 래일은 100개의 거리, 1,000개의 거리를 치리라. 지금은 우리 비록 한줌의 흙을 안고 가지만 래일은 온 나라를 다 해방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리라!

우리는 이런 맹세를 다지면서 압록강을 다시 건넜다.


보천보전투는 대포도 비행기도 땅크도 없이 진행한 자그마한 싸움이였다. 보총과 기관총에 선동연설이 배합된 평범한 습격전투였다. 사상자도 많지 않았다. 우리측으로 볼 때에도 전사자는 없었다.


너무나도 일방적으로 진행된 기습전이여서 어떤 대원들은 오히려 아쉬워할 지경이였다. 그러나 이 전투는 유격전의 요구를 최상의 수준에서 구현한 전투였다. 전투목표의 설정과 시간의 선택, 불의의 공격, 방화를 통한 충격적인 선동, 활발한 선전활동의 배합 등 모든 과정이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립체적으로 맞물린 빈틈없는 작전이였다.


전쟁이나 전투의 가치는 군사적의의에 의해서만 규정되는것이 아니라 그 정치적의의에 의해서도 규정된다. 전쟁이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장이라는것을 알고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것을 어렵지 않게 리해하리라고 믿는다. 이런 리치로 볼 때 우리는 대단히 큰 싸움을 치르었다고 말할수 있다.


보천보전투는 조선과 만주대륙에서 아세아의 제왕처럼 행세하던 일본제국주의자들을 보기 좋게 후려친 통쾌한 전투였다. 인민혁명군은 조선총독부당국이 치안유지가 잘된다고 장담하던 국내에 들어가 한개 면소재지의 통치기관들을 일격에 소탕해버림으로써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커다란 공포를 주었다. 일본인들로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타격을 받은셈이였다. 《후두부를 꽝 하고 강타를 당한것 같다.》느니, 《천날동안 베여들인 새초를 한순간에 태워버린듯한 한을 남겼다.》느니 하는 당시의 군경 당사자들의 고백자체가 그것을 반증하고있었다.


만국평화회의장 문전에 나타나 일본의 죄악을 고발하며 렬강들에게 독립을 구걸하던 조선이라는 약소국에 세계 5대강국의 일원임을 자랑하는 일본군을 사정없이 쳐갈기는 혁명군대가 있으며 그 군사들이 일제가 축성한 《금성철벽》을 바람처럼 넘어들어가 침략자들을 호되게 징벌하였다는 사실은 세계적인 판도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않을수 없었다.


우리는 보천보전투를 통하여 일제란 칼로 내려치면 동강이 나고 불을 지르면 짚검불이나 북데기처럼 타번지는 일종의 페기물같은 존재라는것을 보여주었다. 해와 달도 빛을 잃어가던 조국땅에 있어서 보천보 밤하늘에 타오른 불길은 민족의 재생을 예고하는 서광이였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경성일보》를 비롯한 국내의 주요신문들은 일제히 인상적인 표제를 달고 보천보전투소식을 전하였다.

《도메이》통신, 《도꾜니찌니찌신붕》, 《오사까아사히신붕》 등 일본의 출판보도물들과 《만주일일신문》, 《만주보》, 《대만일일신보》를 비롯한 중국의 신문들도 이 전투를 광범히 취급하였다. 쏘련의 따쓰통신은 물론, 《쁘라우다》와 《크라스노예 즈나먀》도 이 전투를 위해 지면을 아끼지 않았다. 동방식민지 약소국의 변강에서 울린 한방의 총소리에 온 세계가 놀라움과 흥분을 금치 못하였다. 바로 이무렵 쏘련에서 발간되는 잡지 《태평양》에 《북부조선지역에서의 빨찌산투쟁》이라는 제목으로 된 글이 실렸는데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우리의 투쟁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히 언급하였다. 쏘련출판물에 우리의 이름과 투쟁소식이 크게 소개된것이 이때부터였던 생각이 든다.


보천보전투에 대한 글은 에스페란트어잡지 《동방사자》에도 실리였다.

《동방사자》의 발행취지는 일제의 야수성과 략탈상을 폭로하고 항일전쟁을 소개하며 동방문화를 선전하는데 있었다. 잡지에 게재된 모든 기사들은 대상국들에서 번역하여 다시 출판할수 있었다. 《동방사자》의 이런 특징으로 하여 보천보전투 소식은 이 잡지가 배포되는 많은 나라들에 광범히 전파되였다.


보천보전투는 일본제국주의식민지통치를 끝장내고 민족적독립과 자주권을 부활시키려는 우리 인민의 혁명적의지와 불굴의 투쟁정신을 내외에 널리 보여주었다. 이 전투를 통하여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자기 활동의 전로정에서 시종일관하게 견지해온 투철한 반제적립장과 자주적립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으며 철저한 실행력과 유력한 전투력을 시위하였다.


우리는 또한 이 전투를 통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하고있는 공산주의자들이야말로 조국과 민족을 가장 열렬히 사랑하는 진실하고 참된 애국자들이며 민족해방위업을 승리적으로 완수해나갈수 있는 가장 헌신적이고 책임적인 투사들이라는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조국인민들로 하여금 무장투쟁을 주축으로 하는 항일혁명의 마당에 거족적으로 달려나올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으며 국내에서의 당조직건설과 조국광복회 조직건설을 일사천리로 내밀수 있는 분위기를 지어주었다.


보천보전투가 가지는 가장 주요한 의의는 조선이 다 죽었다고 생각하던 우리 인민들에게 조선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것을 보여주었을뿐아니라 싸우면 반드시 민족적 독립과 해방을 이룩할수 있다는 신심을 안겨준데 있다.

이 전투가 국내인민들에게 참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이 보천보를 들이쳤다는 소식을 듣고 려운형은 전투현장에 달려갔다고 한다. 그가 이 전투소식을 접하고 몹시 흥분했던것만은 사실인것 같다.

그는 해방후 평양에서 나를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

《유격대가 보천보를 쳤다는 소식을 듣고보니 20여년세월 왜놈들치하에서 수모를 당해온 망국민의 설음이 순간에 다 녹아버리는것 같았습니다. 내 그때 보천보에 가보고 무릎을 쳤지요. 이제는 됐구나, 단군조선이 살아있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절로 나지 않겠습니까.》


안우생의 말에 의하면 김구도 보천보전투에서 이만저만 큰 충격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안우생은 오래동안 상해림시정부를 따라다니면서 김구의 서기로 있었다.

어느날 김구는 신문을 뒤적이다가 보천보전투소식을 읽게 되였는데 어찌나 흥분했던지 창문을 열어제끼고 배달민족은 살아있다고 몇번이나 고함을 질렀다는것이다.

김구는 그때 안우생에게 지금은 시국이 험한 때이다, 중일전쟁이 림박하니 운동을 한다던 사람들은 뒤골목으로 다 자취를 감추었다, 이런 판국에 김일성이 군사를 거느리고 조선에까지 쳐들어가서 왜놈들을 정면으로 후려친것은 얼마나 장쾌한 일인가, 이제는 우리 림시정부가 김일성장군을 후원해야겠다, 수일내에 백두산쪽으로 사람을 보내자고 하였다고 한다.


이 일화는 김구를 비롯한 해내외의 명망높은 인사들이 보천보전투를 계기로 하여 항일무장투쟁에 직접적으로 참가하고있던 공산주의자들을 얼마나 신뢰하였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실례로 된다. 이런 풍조는 반일민족통일전선에 각계각층의 애국적인 인사들을 결속시킬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지어주었다. 보천보전투가 있은 다음 적지 않은 민족운동자들이 우리에 대해서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되였다. 그때에 받은 인상이 해방된 다음에도 계속 유지되여 새 조선 건설을 위한 합작에서 크게 은을 내였다. 그러고보면 우리가 보천보전투의 덕을 많이 본셈이였다.


나의 팔도구시절의 잊을수 없는 친구 김종항은 일본 도꾜에서 신문배달을 하며 고학을 할 때 《아사히신붕》지면을 통해 보천보전투 소식을 알게 되였다고 한다.

어느날 새벽 《아사히신붕》지국에 나간 그는 주인으로부터 오늘은 책임량외에 100부의 신문을 더 배달해야겠다는 지령을 받았다. 무엇때문에 지국이 그런 지령을 내리는지 알수 없어 신문을 펼쳐보니 거기에 김일성부대가 보천보를 쳤다는 놀라운 기사가 실려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종항은 보천보를 친 김일성이 팔도구시절의 김성주라는것을 몰랐다고 한다.

지식인으로서의 김종항의 고민은 보천보전투 소식을 들은 다음부터 시작되였다고 한다. 애국청년들은 무장을 들고 왜놈들과 싸우는데 나는 지금 도대체 이 일본땅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밥벌이를 하려고 대학을 다니는게 과연 옳은 인생인가 하는 고민이였다.


김종항의 이런 자아반성은 유격대에 찾아가 무장을 잡으려는 심각한 결심으로까지 발전하였다. 그는 참군결심이 서자 지체없이 일본땅을 떠나 조국으로 돌아왔다. 귀국후의 그의 행로는 항일유격대를 찾는데 전적으로 바쳐졌다. 김종항은 조국에 돌아와서야 보천보를 친 김일성이 소년시절의 김성주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렇게 되자 백두산으로 찾아가려는 열의도 더 커질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참군시도는 끝내 실현되지 못하였다. 우리의 상봉은 해방후에야 실현되였다.


김종항의 실례가 보여주는것처럼 보천보전투는 조선의 량심적인 지성인들의 인생에서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보천보의 밤하늘에 타오른 홰불은 조선의 모든 량심인들과 애국지사들에게 참된 인생의 좌표를 밝혀주는 등불로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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