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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11-2. 기이한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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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7,000회 작성일 15-05-26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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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이한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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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만의 액목지구는 우리가 길림시절부터 인연을 맺어온 고장이였다. 강명근과의 련계밑에 려신청년회라는 혁명조직을 내오고 그 조직에 망라된 청년들과의 사업을 해오던 교하와 신잔, 삼송도 당시까지는 액목현에 속해있었다. 이 현이 교하현으로 개칭된것은 1930년대말기부터였다고 한다.


우리는 2차 북만원정때 액목땅에서만도 수천리의 장정을 하였다. 청구자, 비파정자,남천문,삼도구,마록구,신흥툰,관지,류채구,삼과송,목단강촌, 흑석향,타요자 등은 다 우리가 그때 개척한 고장들이며 북만원정대의 무공이 새겨진 추억도 깊은 전적지들이다.


그 과정에 흥미있는 사건들도 많이 체험하고 인상깊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보았다.

2차 북만원정 당시까지만 하여도 이 지방에는 혁명바람이 전혀 미치지 못한 미개척지들이 많았다. 우리가 액목원정문제를 토의할 때 주보중이 걱정한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였다.

《김사령이야 벽창호 같은 오의성령감도 일조에 돌려세운 사람이니 어련하겠소만 우린 지난봄에 액목땅에 갔다가 〈홍호자〉라는 소리를 들으며 곳곳에서 문전거절을 당했소.》


주보중이 말하는 《홍호자》란 붉은 홍, 되 호, 아들자 자를 쓰는 중국말로서 비적을 가리키는 뜻이다. 한때 공산주의자들을 경원시하던 오의성이 《홍호자》라는 말로 주보중을 욕했는데 그후 언제부터인지 그 말은 공산주의자들의 군대 일반에게 붙이는 상욕으로 되였다.


과연 주보중의 말대로 우리는 원정부대를 이끌고 액목땅에 들어간 첫 순간부터 《홍호자》의 대접을 받았다. 액목사람들이 원정부대를 보자 《고려홍군》이 왔다고 하면서 마을을 비우고 도망친것은 우리를 《홍호자》못지 않게 경계하였다는것을 의미한다.

분명 그들에게 있어서 붉은 홍자는 패덕과 잔인성의 대명사처럼 되여 있었다.


이런 사정으로부터 출발하여 우리는 원정중의 많은 시간을 군중과의 사업에 바치였다. 군중공작을 위해 시간을 바치는것은 랑비가 아니다. 그런 노력으로 인민혁명군을 멀리하던 사람들이 친근한 벗으로, 방조자로 되고 우리와 적대관계에 있던 사람들이 련공, 친공의 길로 돌아설 때 우리는 참으로 일확천금에도 비길수 없는 무상의 희열을 느끼였다.


요영구회의후 울면서 유격근거지를 떠나가던 인민들의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얼른거리고 또 혁명에 대한 걱정이 천갈래만갈래로 겹쳐서 심신이 고달프던 때에 액목땅에서 얻은 그런 수확들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정녕 커다란 기쁨으로 되였다. 혁명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기쁨중의 기쁨은 동지와 벗을 얻는것이요, 슬픔중의 슬픔은 그것을 잃는것이다.


우리는 액목현경에 들어서기전에 벌써 경박호반의 소산저자에서 채화라는 중국어부를 사귀여 그 호수를 쉽게 건너올수 있었다. 채화도 우리를 만나기전까지는 혁명군을 멀리하던 사람이였다. 19살때부터 30년 가까이 경박호에서 고기잡이를 유일한 생업으로 삼아온 이 순박한 어부는 《고려홍군》을 《비적》이라고 묘사하던 일본사람들의 선전을 그대로 곧이 듣고있었다. 그러나 원정대의 위용과 질서정연한 모습을 직접 목격하고 우리 대원들의 소탈하고 겸허한 인품에 끌리기 시작한 순간부터는 그도 태도를 바꾸어 혁명군을 후덥게 대하였다.


격강이 천리란 말처럼 군대의 원정에서 앞길을 막는 강물은 천리길에 맞먹는 장애물이였다. 그러기에 적의 눈을 피해가며 원정대의 경박호도하를 전력을 다하여 보장해준 채화의 수고는 평생 잊지 말아야 할것이다.


1959년에 우리 답사단동무들이 중국에 갔다가 그의 사진을 가지고 돌아왔다. 사진속의 채화는 이미 70살고령에 이른 주름많은 로인이였다. 그러나 키가 크고 목이 성큼한 옛모습만은 그대로 남아있어 자못 감개가 무량했다.


청구자전투때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에게 후방물자를 공급해준 백가장 류영생과 흑석향부근에서 아들을 유격대에 입대시킨 유춘발로인을 비롯하여 우리는 액목땅에서 참으로 많은 벗을 얻었고 군중을 쟁취하였다.


인민들속에 들어가서 각계각층 군중과의 사업을 하는 과정에 우리는 한 위만군련대장과도 깊은 친교를 맺었다.

원정대가 돈화현쪽에 있는 목재소를 치려고 밤새껏 강행군을 하던 때였으니 아마 1936년초에 생긴 일이였을것이다. 날이 훤히 밝아올무렵에 우리는 행군을 중지하고 대도로옆의 어떤 지주집에 려장을 풀었다. 큰 토성을 둘러치고 포대까지 가지고있는 만만치 않은 집이였다. 위만군이 조직된후이고 또 일본사람들이 사설무력을 허용하지 않는때여서 그 집에 가병만은 없었다.


지주집은 두채로 되여있는데 한채에는 대원들이 들고 다른 한채에는 지휘부성원들과 후방부일군들이 들었다. 우리는 대문앞에 머슴군차림을 한 대원 3명을 교대로 파견하여 주변을 감시하게 하고 나머지 대원들은 쉬게 하였다.


오후 4시쯤 되였을 때 보초소로부터 마차 1대가 우리가 머무르고있는 지주집쪽으로 접근해오고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조금후 마차가 지주집앞에 멎어섰는데 그안에서 웬 귀부인이 병사 1명의 부축을 받으며 내려와 잠간 몸을 녹이다가 가겠다고 하면서 지주집으로 곧추 들어왔다.


문밖을 내다보니 눈보라가 날리는 마당에 여우털을 댄 외투를 두벌씩이나 껴입은 미모의 젊은 녀성이 서있었다. 그 호화로운 옷차림에 눈이 뒤집힌 우리 동무들이 벌써 마당에 쓸어나와 행색이 지나치게 현란한 정체불명의 녀인을 에워싸고 검문을 들이대고있었다.

웬 녀자냐고 내가 묻자 나어린 보초는 《사령관동지, 수상한 녀자입니다.》 하고 무슨 큼직한 고위급특무라도 잡은것 같은 기세로 우쭐해서 대답하였다. 보초는 그 녀자에게서 날카로운 시선을 떼지 않고있었다.

젊은 중국녀인은 사색이 되여 아무 말도 못하고 온몸을 와들와들 떨고만 있었다.


나는 그 녀자의 몸수색까지 하려 드는 보초병을 엄하게 꾸짖고나서 명령하였다.

《보초동무, 부인이 몸을 녹일수 있도록 방으로 들여보내시오.》

녀인은 방안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고개를 쳐들지 못하고 조심스레 떨고있었다.

나는 중국말로 그 녀자를 안심시키였다.

《부인, 무서워말고 몸을 푹 녹이시오. 어린 보초병이 잘못보고 좀 하대한것 같은데 량해하시오.》

나는 녀인에게 차를 권하고나서 그가 몸을 녹일수 있게 화로불도 가까이에 밀어놓았다.

《부인이 어떻게 보겠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고장사람들이 〈고려홍군〉이라고 부르는 인민혁명군입니다. 부인은 〈고려홍군〉이란 말을 들어본적이 있습니까?》

《좀 들어보았습니다.》

녀인은 고개를 숙인채 들릴락말락한 소리로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우리 〈고려홍군〉은 일본사람들이 소문을 내돌리고있는것처럼 인민의 생명재산을 침해하는 〈비적〉의 무리가 아닙니다. 우리 혁명군은 항일구국을 목적으로 하는 인민의 무장력입니다. 우리는 조중 량국을 침해한 일제와 그 앞잡이들을 반대하여 싸울뿐이지 인민들의 생명재산은 털끝만치도 해치지 않습니다. 그러니 부인도 마음을 푹 놓는것이 좋겠습니다.》

녀인은 감사의 표식으로 두손을 합장하였다. 그러나 그 표정에서는 아직도 불안과 공포, 반신반의의 감정이 복잡하게 교차되고있었다.


나는 부인이 긴장을 풀 때까지 말을 계속하였다.

《우리는 부인이 위만군병사를 데리고 다닌다고 해서 죄를 묻거나 처벌하지 않습니다. 부인이 어떻게 되여 병사의 호위를 받고있는가 하는데 대해서는 묻지도 않겠습니다. 인민을 해치지 않고 혁명군을 해치지 않는 이상에야 우리가 무엇때문에 지나가는 길손들을 모욕하고 학대하겠습니까. 우리도 주인장의 량해를 얻어가지고 이 집에 잠간 들려 피곤을 풀던 손님들이니 다른 생각일랑 말고 불이나 뜨뜻하게 쪼이다가 가시오.》


녀인은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내그으며 조심스레 고개를 쳐들었다. 나를 바라보던 그 녀자의 눈에 문득 경악에 가까운 빛이 어리였다. 녀인은 두손을 가슴에 포개여얹고 안타깝게 입술을 감빨고있었다.

《왜 그럽니까? 아직도 내 말이 채 믿어지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그런게 아니라…사실은 대장님의 얼굴이…전 대장님이 본래부터 인자한분이라는걸…》

녀인은 맥락이 닿지 않는 말을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또다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바로 그때 호송병을 심문하던 오백룡이 범잡은 포수상으로 문가에 나타나서 중국 귀부인이 전혀 알아들을수 없는 조선말로 넌지시 보고하였다.

《장군님, 호송병의 말에 의하면 저 녀자는 위만군 12련대장의 안해라고 합니다. 큰 고기가 저절로 그물에 걸려든셈이지요.》

《백룡동무, 너무 우쭐해서 그러지 마오. 큰 고기인가 작은 고기인가 하는건 이제 두고봐야지.》


말은 그렇게 하였으나 사실 나는 위만군련대장의 부인이라는 말에 퍼그나 놀랐다. 련대장이라면 간단한 자리가 아니였다. 위만군의 군사등급으로서는 우로부터 네번째이고 밑으로부터는 13개나 되는 사닥다리를 톺아올라야 따낼수 있는 벼슬이였다. 위만군 1개 련대의 관할구역이 몇개 현을 포괄하는 경우도 있었으니 그것을 총찰하는 지휘관의 권한이 얼마나 막강한가 하는것은 더 설명할 필요조차도 없을것이다. 그 당시 액목현에는 교하에 본부를 둔 위만군 혼성 제9려단산하의 12보병련대가 주둔하고있었다.


적군와해를 하나의 중요한 전략적과제로 내세우고있던 당시의 환경에서 위만군련대장의 부인을 만나게 된것은 흥미있는 일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었다. 나는 물론 련대장의 안해라고 하여 조금도 낯색을 달리하지 않았다.

《그러니 부인, 위만군련대장의 안해라고 해서 우리가 무슨 큰 형벌이라도 내릴줄 알았습니까?》

녀인은 몹시 민망스러워하는 낯빛으로 손을 비비였다.

《무슨 그런 말씀을…제가 잘못보지 않았는지…대장님, 실례이지만 성함을 김성주라고 하지 않는지?…》


이 뜻밖의 질문을 받고 이번에는 내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간도에서 수백리 떨어진 북만땅에서 우연히 만난 위만군련대장의 안해가 내 아명을 알고있다면 그것은 벌써 무심히 스쳐지날수 없는 비상사건이다. 어데서 본적도 없고 만난적도 없는 생면부지의 귀부인이 어떻게 내 이름을 알수 있단 말인가. 놀라움과 동시에 그 수수께끼를 파헤치고싶은 호기심이 부쩍 동하였다.


《참, 액목땅에 와서 아명을 들으니 신기한 생각이 듭니다. 나는 김성주이기도 하고 김일성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부인은 어떻게 나를 압니까?》

련대장의 안해는 모닥불이라도 뒤집어쓴것처럼 얼굴을 붉히였다. 나는 부인의 얼굴에서 말하고는싶어하면서도 터놓기 주저하는 그 무엇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성주선생님이 길림에서 청년학생운동을 지도할 때 저는 거기서 녀자중학교를 다녔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선생님을 알고있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이거 반갑습니다.》


얼굴을 쳐들고 처음으로 나를 쳐다볼 때 녀인의 눈동자에 비끼던 그 생동한 열정의 빛이 무엇을 뜻하는것이였는지 나는 비로소 리해하였다. 어쨌든 액목과 같은 백사지에서 길림시절의 녀자중학교 학생을 만난다는것은 얼마나 희한한 일인가. 길림이라는 그 한마디의 말은 불현듯 내 가슴속에서 향수에 가까운 짜릿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에도 나는 나를 몇해동안 비끄러매두었던 그 도시에 깊은 정을 두고있었다.


부인은 내 얼굴에 피여오르는 옛시절의 추억을 읽자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성주선생님도 길회선철도부설반대 깜빠니야가 벌어지던 1928년 가을을 잊지 않으셨겠지요? 그 가을에 길림은 얼마나 들끓었습니까. 잘 믿어지시지 않겠지만 저도 그때는 학생시위운동에 참가했습니다. 성의회마당에서 성주선생님의 연설을 듣던 일이 눈앞에 선합니다.…》


지난날 시위대렬에서 구호를 웨치던 길림녀자중학교 학생, 그러나 오늘은 여우털외투로 몸을 감싸고 호송병의 호위를 받으며 친정집나들이를 다니는 련대장부인의 눈에서는 눈물이 소리없이 흘러내리였다.

나는 심한 격세의 느낌을 받으며 련대장의 안해를 새삼스럽게 뜯어보았다. 어제까지 반일을 하던 녀성이 오늘은 친일의 렬차에 오른것이다. 무엇이 이 녀자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깊이 생각해보게 되였다. 자기 민족의 운명에 대한 절망으로 하여 생겨난 타락이겠는가. 그러나 나는 길림시절을 회고하는 그 녀성의 절절한 표정을 보고 그의 마음속에 반일을 하던 그전날에 대한 미련이 아직까지 남아있다고 생각하였다. 더구나 그는 우리앞에서 눈물로 자신을 회개했고 수치를 무릅쓰고 녀학생시절을 추억하였다. 이 녀자가 무엇때문에 나를 보는 순간 그리도 놀라고 전률을 일으켰겠는가. 그것은 량심앞에서 느낀 공포였을것이다.


《성주선생님, 왜 말씀이 없으세요? 저를 용서해주세요. 선생님이 연설을 하실 때 주먹을 들고 호응했던 그 소녀가 글쎄…이렇게 군복을 입고 고생하는 성주선생님을 보니…감개무량하고…저는 부끄럽습니다.》

부인의 눈에서는 다시금 눈물이 비오듯 흘러내리였다.

《부인, 진정하시오. 자기를 너무 비하하면 안됩니다. 그런 절망, 그런 자포자기의 세계에 빠지기에는 시국이 너무도 준엄합니다. 안팎의 정세는 조국을 사랑하고 인민을 사랑하는 중화의 모든 아들딸들과 지성인들을 항일구국의 광장으로 부르고있습니다. 련대장의 안해가 되였다고 해서 항일을 못한다는 법이야 없지 않습니까?》

내가 이런 말을 하자 녀인은 눈물을 닦고 고개를 쳐들었다.

《그렇다면 저의 처지에서도 항일을 할수 있는 출로가 있단말입니까?》

《있지요. 부인이 남편에게 좋은 영향을 주어 그가 혁명군을 〈토벌〉하지 않게만 하여도 그것은 곧 항일을 위해 공헌하는것으로 됩니다. 털어놓고 말해서 위만군련대장이면 작지 않은 벼슬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벼슬이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문제는 자기가 중국사람이라는것을 잊지 않는데 있습니다.》

《저의 남편도 련대장이기는 하지만 그 노릇을 하고싶어 하는것은 아닙니다. 그이도 민족적량심만은 깊이 간직하고있습니다. 그러니 성주선생님 말씀대로 남편을 잘 설복해서 유격대〈토벌〉에 부하들을 내몰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저의 말을 믿어주십시오.》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한 련대장이 친일로부터 반일로 방향전환을 한다는것은 그 수하의 부하들도 애국의 길을 걷는다는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여기에 부인과 부인 남편되는분의 재생의 길이 있습니다.》


나는 지난날 간도에서 위만군장교로 복무하던 사람들이 친일로부터 항일로 방향전환을 한 사실들에 대하여 이것저것 소개하면서 녀인에게 신심을 주었다.

녀인은 오늘 성주선생을 만나게 된것은 하늘이 나에게 준 복이다, 선생의 말을 듣고보니 생각되는바가 많다, 선생이 오늘 나에게 길림시절의 넋을 되찾아주고 우리 부부를 재생의 길로 인도해준셈이다, 내 평생 이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하면서 중화민족의 딸답게 살겠다는 결의를 다지였다.


나는 그에게 우리가 만든 선전물과 송경령, 장내기 등이 상해에서 발표한 항일구국 6대강령도 보여주었다. 1차 북만원정때 녕안에 있던 주보중의 산막에서 오평이 보여준 바로 그 6대강령이였다.

련대장의 안해는 시계를 들여다보고 품속을 뒤지더니 흰종이에 싼 물건을 내앞에 내놓았다. 그것은 중국지페였다. 아편을 팔아 마련한 돈이라면서 군자금으로 써달라고 하는것이였다.

우리는 그의 성의가 고마왔으나 받을수가 없었다.

《그 돈은 도로 간수하시오. 나는 오늘 잃었던 반일학우를 다시 얻었으니 그것만 해도 큰 재산을 받은것 같습니다.》

련대장의 안해는 그 말을 듣고 또 울었다.


우리는 헤여지기전에 저녁상을 푸짐히 차리여 위만군련대장의 부인에게 대접하였다. 그 녀인이 지주집을 떠나가면서 나에게 대준 성명가운데서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고 요행 남아있는것은 《지》라는 성뿐이다. 아쉽게도 나는 그 녀자의 이름을 잊어버리였다.


얼마후 우리는 위만군련대장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당신들은 세상에 더없이 고귀한 사람들이다, 나의 안해의 생명을 보호해주고 나를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내여 애국의 길을 걷게 한 당신들을 나는 결초보은의 각오를 가지고 도와줄 결심이다, 이러루한 내용을 담은 장문의 편지였는데 필치가 아주 비장하였다. 그 련대장의 이름도 《장》무엇이라고 하였는데 기억이 삭막하다.


그후 우리는 음력설준비를 하느라고 액목현성근처에 군수관을 파견하였다. 그는 언돼지고기를 비롯하여 설음식준비에 필요한 여러가지 물자들을 구입하느라고 시가지에까지 들어갔다가 과업을 채 수행하지 못한채 현경찰에 붙잡히였다. 이 소문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인지 위만군련대장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련대장은 경찰서에 인민혁명군은 군대가 관계하는것만큼 군수관을 넘겨달라고 하였다.


처음에 군수관은 위만군련대장이 자기를 데리고가서 죽일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련대장은 안해를 시켜 상다리가 부러지게 음식을 차려놓고 군수관을 귀빈으로 환대해주었다. 그는 김사령부대가 자기 안해를 잘 도와주어 감사하다고 하면서 앞으로 어떤 정황에 놓이든지 당신들을 《토벌》하지 않겠다, 목숨을 걸고 담보하는것이니 내 말을 믿어도 좋다, 당신네 부대를 만나면 공중에 대고 총을 세방 쏘겠으니 그럴 때에는 우리 부대인줄 알고 못본척하고 지나가라, 내 죽더라도 김사령의 은혜만은 잊을수 없다, 김사령한테 충심으로 되는 나의 인사를 전해달라고 하였다.

군수관에게 말한대로 위만군련대장은 그후 우리와의 약속을 잘 지켰다.


우리가 삼과송부락에 머물고있던 그 당시 관지부락쪽에는 일본군대가 주둔하고있었고 액목현쪽에는 위만군련대가 주둔하고있었다. 두 부대가 다 《토벌》을 다니기는 하였지만 12련대장이 지휘하는 위만군련대는 우리 부대와 마주칠 때마다 일부러 교전을 피하군하였다. 우리도 일본군대만 골라가면서 쏘았다.


그 당시 일본군과 위만군을 구별하는 중요한 표식의 하나는 철갑모였다. 철갑모를 쓰면 일본군이고 안쓰면 위만군이라는것이 빨찌산의 어느 부대에서나 다 통하는 공식이였다. 그런데 나중에는 위만군까지 철갑모를 쓰고 전투장으로 나오게 되였다. 그래서 우리는 철갑모를 쓴 사람은 일본군으로 알고 무조건 쏠테니 유격대와 싸우지 않으려거든 철갑모를 벗으라고 하였다. 그런 경고를 받은 다음부터 위만군은 우리한테 접근하면 철갑모를 벗고 자기네가 만주군이라는것을 알리였다.


빨찌산은 철갑모를 쓴자들이 대렬앞에 있으면 앞을 치고 뒤에 있으면 뒤를 치군하였다. 일본군은 《빨찌산이 신통히도 우리만을 골라 친다.》고 비명을 질렀다. 우리는 위만군이 《토벌》에 나올 때 오발 등의 방법으로 빨찌산들에게 신호를 보낼것을 요구하였는데 그들은 이 약속도 곧잘 지키였다. 오발도 못할 때에는 수십명씩, 수백명씩 한데 모여서서 《지지가가》, 《지지가가》하고 떠들어대는 방법으로 자기네 위치를 알려주군하였다.


장련대장은 우리에게 후방물자도 적지 않게 보내주었다. 그는 이따금씩 마차에 돼지고기와 언교즈를 가득 싣고 《토벌》을 간다고 하면서 주둔지역을 떠나서는 부하들을 시켜 우리 부대와의 접선장소에 가져다놓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빨찌산도 없는 왕청같은곳에 부대를 데리고 가서 몇시간씩 빙글빙글 돌아다니다가 병영으로 돌아가군하였다.


우리 부대가 관지부근의 어느 마을에 주둔해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지휘관들 몇명이 나한테 몰려와 설명절을 앞둔 대원들의 기분상태를 보고한 다음 부락에 나가서 메밀이나 감자가루를 구해다가 명절날 국수라도 누를수 있게끔 식량공작을 하게 승인해달라고 제기하였다.

나는 인민들에게 끼칠 부담을 고려하여 그 제기를 받아들이지 않았을뿐아니라 얼마후에는 부대에 철수명령까지 내리였다. 그때 그 마을인민들은 김사령부대와 함께 설을 쇠게 되였다고 하면서 명절준비를 굉장히 하였다. 자칫하다가는 우리 부대의 명절음식때문에 마을사람들의 몇달분 농량이 거덜날수 있었다. 우리가 부대를 이끌고 마을을 급작스레 떠난것도 그때문이였다. 인민들의 리익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그 명분때문에 정작 철수를 단행하기는 하였으나 대원들은 그때 사실 한사람처럼 볼이 부어있었다.


황니하자막바지에 거처를 옮긴 원정대는 목재소로동자들이 사용하던 산전막을 손질하고 거기서 설명절을 쇠였다. 명절이라고 하였지만 우리모두에게 차례진것은 한사람당 한그릇밖에 안되는 좁쌀밥뿐이였다. 대원들이 그 밥을 먹고 냠냠해할 때 위만군련대장이 보내준 돼지고기와 교즈가 도착하여 우리를 기쁘게 해주었다.


우리와의 친교가 깊어지게 되자 그 련대장은 나중에 원정대앞으로 무기도 보내주고 정보자료까지 제공해주었다. 한 녀인에게 비껴진 우리의 진정은 이처럼 진폭이 큰 결초보은의 메아리를 가져왔다. 위만군련대장은 만주국이 자기에게 준 련대장모자를 그냥 쓰고있으면서도 과감한 련공실천으로 력사와 인민 앞에서 장공속죄하였다.


위만군의 절대다수를 이루는 하층병사대중을 전취하는데 기본을 두면서 중하층장교들과 일부 량심적인 상층장교들까지도 전취하여 극소수의 악질장교들을 고립시키고 타격할데 대한 적군와해방침은 그 련대장과의 사업에서도 크게 은을 낸셈이였다.


이것은 예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소득이였다. 우리와 단 한차례의 접촉도 해보지 않은 련대장이 자기 안해의 교양을 받고 반혁명의 하수인으로부터 련공애국인사로 전환된것이다. 그러고보면 길림녀자중학교 출신의 련대장부인이 남편의 개심을 위해 적극적인 사상전을 벌린것 같다. 그 녀자가 아주 훌륭한 녀자였다.


위만군련대장은 얼마후 화전지방으로 이동되였다. 나는 그를 위증민에게 인계하였다. 그때부터 우리는 오래도록 련대장의 소식을 모르고 지냈다. 그러다가 1941년에 와서야 화전에서 위증민의 활동을 보좌하던 곽지산을 통하여 한토막의 소식을 들을수 있게 되였다.

곽지산은 화전에 있는 위만군 12련대와 13련대가 조만간 열하쪽으로 조동되게 되였다는것과 그 두 련대의 련대장들이 열하로 이동하기전에 항일혁명군에 편입할 의사를 표명해왔다는것을 전해주었다. 그러나 화전에는 그 당시 두 련대를 동시에 수용할만한 부대도 없었고 두 련대장의 용단을 두고 책임적인 답변을 할수 있는 간부들도 없었다. 곽지산이 우리를 찾아온것은 그 대답을 받아가기 위해서였다. 위증민이 전사한 다음부터 2군소속의 군정간부들은 부대의 활동에서 제기되는 크고작은 모든 문제처리와 관련된 결론을 우리한테서 받아가군하였다.


나는 위만군이 열하로 조동되여가기전에 그들을 조속히 의거시킬데 대한 긴급한 임무를 주어 곽지산을 화전으로 떠나보냈다. 그러나 아쉽게도 시간이 늦은탓으로 두 련대를 의거시키기 위한 거사를 실현하지 못하였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련대장은 화전에 있을 때 양가성을 가진 새 련대장에게 자기 련대를 인계하였다. 그는 후임련대장에게 부대를 인계하면서 반일의 길을 걷도록 교양하였으며 린접부대였던 13련대장에게도 친분관계를 리용하여 반일혁명을 도와나서도록 권고하였다.


그후 나는 열하쪽으로 조동된 위만군 제12련대와 13련대의 후일담과 관련된 자료는 어데서도 얻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최근에 대일작전시의 위만군의 붕괴에 대한 자료들을 보면서 그 부대들이 결정적인 시기에 일제에 반기를 들고 나선것을 알게 되였다.


적군속에 있는 한사람의 량심적인 벗은 수천수만의 벗을 얻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일무장투쟁 초시기부터 《적군속에 혁명의 포대를 쌓자!》라는 구호를 내들었다. 적군속에 포대를 쌓는다는것은 적군속에 우리의 진지를 쌓는다는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적군와해공작을 목적으로 적군속에 우리의 혁명력량을 조성한다는 뜻이다.


당시에는 적군와해공작을 대적정치사업이라는 말로 통용하였다. 총탄으로 적을 잡는것과 대적정치사업으로 적을 와해시키는 이 량자는 항일투쟁을 위한 두가지 전략적로선이였다고 말할수 있다. 어느 시대, 어느 싸움, 어느 편을 막론하고 적과의 투쟁은 항상 이 두가지 선상에서 진행되여왔다. 하나는 무력에 의한 싸움이요, 다른 하나는 정신과 사상선전에 의한 싸움이다.

일제의 소위 치안숙정에서도 치표공작, 사상공작,치본공작 등 세가지 방침을 내놓았는데 이것도 총체적으로 보면 무력을 전문으로 하는 이른바 《소비공작》과 선전선무를 전문으로 하는 《사상공작》의 두 측면인것이다. 적들도 우리의 혁명대오를 정신적으로 와해시키려고 발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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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대적정치사업을 위해 적군속에 혁명조직을 꾸리는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했을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에 잘 호응해나서지 않았다.
목숨이 아깝다고 적군와해공작방침을 반대하여나선 졸장부는 물론 한사람도 없었다. 일부 사람들이 이 방침에 흔연히 호응해나서지 못한 주되는 리유는 그들이 그것을 계급적선에서의 탈퇴로 본데 있었다.
우리는 로동자, 농민의 군대요, 상대는 부르죠아군대이니 적아는 수화상극이다, 물과 불이 서로 의좋게 이웃을 할수 없다는것은 삼척동자까지도 다 알수 있는 명백한 리치인데 적군속에 혁명조직을 꾸린다는게 될 말인가고 하면서 머리를 내저었다.

맑스주의고전들을 한배낭씩 지고 다니는 축들은 적군속에 혁명조직을 꾸린다는것은 일종의 계급협조와 비슷한 우경적인 탈선이라고 비평하였다. 그것은 불상용적모순관계에 있는 계급적원쑤들과의 제휴를 꾀한다는것이겠는데 고전에는 적군와해에 대한 명제가 없다고 우기였다. 지금 청년들이 들으면 코막고 답답한 사람들이라고 비난하겠지만 고전의 명제가 없이는 한발자국도 움직일수 없었던 당시로서는 이런 일면적인 립장이 상당한 정도로 득세하였다.

계급투쟁이 심했고 계급적원쑤에 대한 원한이 사무쳐있은 때여서 누가 그런 립장에 선다고 해도 그것을 무슨 큰 탈선으로 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계급적원쑤에 대한 증오의 감정으로부터 혁명을 시작하였고 만난을 극복하였으며 따라서 《계급》이라는 이 명사앞에서는 자그마한 양보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다가 맑스주의창시자들의 계급투쟁론에 대한 교조적인 해석의 후과로 하여 적지 않은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사랑하는 감정보다도 증오하는 감정이, 포섭하고 용서하는 도량보다도 징벌하고 규탄하는 비타협성이 더 강해졌다. 지어 행세식맑스주의자들은 무조건적인 비타협성을 혁명가의 특질로 보면서 사상정신적으로 미숙한 청년들을 협애한 인간으로, 문자그대로 인정사정없는 《홍호자》로 만들어놓았다. 사실상 맑스주의혁명은 이런 페단으로 하여 진통을 겪었고 공산주의자들의 영상에 검은 그을음이 끼게 하였다. 계급옹호와 계급적비타협성의 구호밑에서 계급의 리익 일면만을 고창해온 좌경분자들과 교조주의자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혁명에 등을 돌려대고 적의 진지로 가는것을 보면서도 그것을 막아내지 못하였다.

문제는 선행고전에 적군와해에 대한 명제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데 있는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혁명의 근본리익으로부터 출발하여 로선과 방침을 세우려고 하지 않은데 있었다.

자기 인민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혁명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 우리는 맑스주의고전을 연구하는데서도 먼저 비타협성을 찾으려고 노력한것이 아니라 사랑과 단결에 대한 사상부터 얻어내려고 애썼다.
우리가 적군속에 능히 혁명력량을 조성할수 있다고 생각한것은 로동자, 농민의 자제들인 절대다수의 병사들과 중하층장교들은 물론, 일부 상층장교들속에도 우리 혁명을 동조하고 착취사회의 수난자들을 불쌍히 생각하는 량심적인 인간들이 있을수 있다고 보았기때문이다. 그들을 모두 혁명의 편에 돌려세우고 우군으로 전취한다면 적들은 그만큼 와해되고 우리의 혁명력량은 수배로 장성하게 될것이다. 그것은 총포탄을 쏘지 않고 계급적원쑤들을 섬멸하는 대공격전으로 되며 공산주의자들이야말로 인류의 행복과 화목을 념원하는 고상한 리념의 소유자들이라는것을 인식시키는 일대 선전으로 된다.

우리는 적어도 이러한 리상과 뜻을 가지고 《적군속에 혁명의 포대를 쌓자!》라는 구호를 대적정치사업의 기본구호로 제기하였다.
적군속에 혁명의 포대를 쌓을수 있다고 본 우리의 사상은 사람의 본성에 대한 주체적인 립장에 그 기초를 두고있다. 사람은 자주성, 창조성,의식성을 가진 위대한 존재인 동시에 정의로운것을 옹호하고 지향하는 아름다운 존재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볼 때 착하고 고상한것을 추구하며 악하고 더러운것을 경멸한다. 이 고유한 본성이 바로 인간성이다.

극소수의 반동적인 상층을 제외한 다수의 중하층인간들과 상층의 일부 인물들은 우리가 넓은 도량을 가지고 좋은 영향을 주기만 하면 혁명의 지지자, 동조자,방조자로 만들수도 있는것이다. 아무리 지주, 자본가계급에 복무하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인간성이 있고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인간적인 향기가 있으면 그것은 우리가 쟁취할수 있는 기초로 되는것이다.
극소수의 반동들과 악한들을 제외한 민족의 모든 성원들을 민족대단결의 기치아래 묶어세울수 있다고 보는 우리의 정책은 바로 이런 립장으로부터 출발하는것이다.

해방후 우리 나라 사람들은 김구를 테로의 왕초라고 하면서 리승만과 동렬에 놓인 인간으로 반동시하였다. 그가 일생동안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적대시한것만은 사실이였다. 그들에 대한 증오가 오죽했으면 김구, 리승만이 호박을 쓰고 돼지우리로 들어가는 만화까지 나돌았겠는가. 강선제강소로동자들은 자기네 공장굴뚝에 《김구를 타도하라!》는 구호까지 써갈기였다. 그 당시까지만 하여도 우리 인민들중에는 김구를 개조할수 있다고본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김구자신은 4월남북련석회의때에 우리의 영향을 받고 반공분자로부터 련공, 친공 인사로 개조되였다. 그가 이런 개조과정을 거칠수 있은것은 우리의 영향도 영향이지만 공화국북반부의 현실을 목격하는 과정에 그가 일생을 바친 애국애족의 정신이 고도로 발동되고 그의 인간성이 최대한으로 계발되였기때문이다.

애국애족과 인간성에 대한 고려가 없다면 우리는 반공일선에서 우리를 겨누던 최덕신과도 손을 잡지 않았을것이며 오늘날의 남조선집권자들과도 대화의 마당을 마련하지 않았을것이다. 우리가 남조선의 통치자들과 함께 대화의 방법으로 조국을 통일하기 위한 협상탁에 마주앉는것은 비록 제한성은 있지만 그들이 지니고있는 민족적량심과 인간성에 기대를 걸고있기때문이며 그 량자가 어느때든지 민족화합의 대화원에서 꽃으로 만발하리라는것을 믿기때문이다.

우리는 적군전취의 대상과 방법문제를 놓고도 적지 않은 론쟁을 하였다. 일본군대를 상대로 하는 대적정치사업에 대한 론쟁은 더구나 합의를 이루지 못하였다. 대부분의 동무들은 위만군의 중하층은 전취할수 있는 대상으로 보면서도 어릴 때부터 《야마도 다마시》로 《천황》을 맹신하고 강압적인 규률에 길들여진 일본군인은 도저히 전취할수 없는 존재로, 원쑤로 보았다. 일본륙군사관학교 출신의 독립군두령에게서도 반공사상을 뽑아내기 어려운데 하물며 일본군장병들이야 더 말할나위가 있겠는가고 하면서 도리질을 하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하나의 사건이 이 견해를 쉽게 부정해버렸다.

어느해인가 간도의 농촌부락들에 열병이 돌아서 일본군대들이 앓는 사람들을 집에 걷어넣고 불을 질러 태워죽이는 살인만행을 감행한적이 있다. 동장영이 앓고있는 부락에도 《토벌대》가 달려들었다.

한 일본장교가 방안에 누워있는 동장영을 보자 대뜸 자기 부하에게 문을 걸고 불을 지르라고 명령하였다. 일본군인은 상관의 말대로 불을 달려고 서둘렀다. 최후의 순간이 닥쳐왔다고 생각한 동장영은 죽을바에는 마지막으로 선전이나 하다가 값있게 죽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주먹으로 방바닥을 두드리며 한바탕 선전을 하였다. 일본에서 대학까지 마친 그는 일본말을 아주 류창하게 하였다.
너도 로동자, 농민의 자식이겠는데 무엇때문에 여기 와서 가난한 사람들을 이렇게 마구 죽이는가? 죽여서 얻을것이 무엇이냐. 인사불성도 분수가 있지 앓는 사람을 이렇게 죽이는 법이 어디 있는가.
량심의 문을 두드리는 격렬한 절규에 마음이 움직여진 일본군인은 뒤문짝을 차던지고 상관이 눈치채지 못하게 동장영을 밖으로 내보낸 다음에야 불을 달았다.
동장영은 밭고랑에 숨어있다가 가까스로 사지에서 구원되였다.

이 일화는 일본군을 전취대상으로 할수 없다고 고집하던 사람들의 입을 봉해버리게 하였다.
이때부터 우리는 신심을 가지고 견결하고 용감하고 그리고 총명하고 지략에 능한 동무들을 선발하여 대담하게 적군속에 파견하였다.
적군속에 홀로 있는 고립무원한 상태에서도 지조를 굽히지 않고 대적정치사업을 훌륭히 수행한 유명무명의 많은 공작원들에 의하여 위만군과 자위단들 속에서는 매일과 같이 병변이 일어났다.

우리는 유격대원이라면 누구나 다 함화, 출판물보급, 여론류포,가요보급 등 여러가지 형식과 방법을 가지고 대적정치사업에 적극 참가할수 있도록 준비시키였다.
적군안에서도 하고 밖에서도 하고 개별적으로도 하고 집단적으로도 하는 우리의 열렬하고 감화력있는 선전공세로 하여 많은 위만군부대들이 유격대와 싸우기를 그만두고 충실한 《무기수송대》로 되였다.

위만군들은 편지 한장만 내도 무기, 탄약,식량을 실어다주었고 전투마당에서 《요창 부요밍(총을 요구하지 목숨은 필요없다.)》하고 입대포만 놓아도 총을 바치고 투항하였다.
적 《토벌대》들은 우리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하였지만 우리는 적군을 포로하면 위만군이건 일본군이건 차별하지 않고 인도주의적으로 잘 대우하고 친절히 교양하여 려비까지 주어 돌려보냈다.

이렇게 하니 심지어 우리 부대에 총을 메고 7차례나 포로되여온 위만군병사까지 있었다. 우리가 그 병사에게 롱조로 이 친구 또 왔구만 하면 그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혁명군에 총바치러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군 하였다.

우리는 동만에서 활동할 때 왕청현 라자구 문영장부대의 중대장들을 비롯해서 적의 중대장급이상의 장교들도 무수히 전취하였다.
1934년 남하마탕의 마굴령부대에 들어가 와해공작을 훌륭히 수행한 《첸렌장》도 원래는 위만군중대장이였는데 우리가 영향을 주어 공산주의자로 개조하였다.

일본군병사들속에도 우리를 잘 도와준 잊을수 없는 벗들이 있다.
소왕청방어전투때 전지수색을 하던 오백룡이 일제침략군 운전수의 시체에서 유격대에 보내는 쪽지편지 한장을 가져온 일이 있었다. 그 편지의 임자는 로동계급출신의 일본침략군 운전수였으며 일본공산당원이였다. 그는 탄알 10만발을 자동차에 싣고 우리를 찾아오다가 유격구 가까운 산기슭에서 발각되여 유서를 호주머니에 써넣고 자결하였다.

그가 지닌 고결한 프로레타리아국제주의혁명정신은 만사람을 감동시키였다.
사랑하는 부모처자를 일본에 남겨두고 망망한 창해와 험악한 산악을 넘고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다가 이국의 산기슭에 조용히 묻힌 일본공산당원의 형상은 지금도 우리의 가슴을 후덥게 해주고있다. 소왕청사람들은 자기네 고장 소학교에 이 국제주의전사의 이름을 달았다고 하는데 지금도 그 교명이 그대로 전해지고있는지 알수 없다.

액목땅에서 위만군련대장을 쟁취한 경험에 토대하여 우리는 후날 안도-돈화 현경에 있는 대포시하라는곳에서도 적군와해사업을 령활하게 하였다.
대포시하에는 유격대《토벌》에서 악명을 떨친 1개 대대의 위만군이 상주하고있었다. 이 대대는 전투경험도 풍부하였고 지휘체계와 대렬관리에서도 빈틈이라고는 전혀 없는 악질적인 부대였다. 공작원들을 파견하려고 하여도 우선 침투할수 없었다. 우리는 허점을 찾아내기 위하여 이 부대에 대한 립체적연구를 시작하였다. 그 과정에 잡아쥔것이 바로 이 대대의 대대장이 봉급이 낮아서 상급에 불만을 품고있는 사람이라는것과 그가 돈에 궁한 나머지 부관을 시켜 아편장사를 한다는 사실이였다. 이것은 우리가 그 부대에 대한 와해공작에 착수할수 있는 유력한 단서였다.

어느날 우리 공작조성원들은 길목에 매복하였다가 아편을 잔뜩 사가지고 돌아오는 부관을 체포하였다. 부관은 혁명군이 화페와 꼭같은 가치를 가지고 통용되는 대대장의 아편을 빼앗을것 같아서 몹시 걱정하였다. 그러나 우리 동무들은 아편따위는 다치지도 않고 부관을 잘 교양하여 대대로 돌려보냈다. 여기에 감동된 부관은 부대에 돌아가 자기 대대장에게 일본사람들의 선전을 듣고 공산군을 《비적》이라고만 생각해왔는데 만나고보니 다 점잖고 문명한 사람들이더라고 루루이 보고하였다. 대대장도 그 말을 듣고는 대단히 감개무량해하였다.

그후 우리는 부관을 통하여 그에게 나의 이름자가 찍혀있는 명함장과 편지를 보냈다. …유격대는 당신들과의 싸움을 원하지 않는다, 당신들이 비록 혁명군을 쫓아다니면서 나쁜짓을 많이 해왔지만 그것을 계산할 의사가 없다, 우리는 당신들에게 다른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인민을 해치지 말고 인민혁명군을 해치지 말라!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것이다, 당신들이 만일 지난날의 잘못을 속죄하고 혁명군과 우호적으로 지낼 의향이 있다면 《철군》과 같은 출판물이나 종종 보내달라.…

이 편지에 대한 반응으로 부관이 우리에게 《철군》잡지를 가지고 와서 출판물을 넘겨줄 비밀장소를 협의하고 돌아갔다. 그때부터 그들은 어떤 고목의 구새통속에 대내와 대외에서 발간되는 여러가지 신문, 잡지들과 중요한 정보자료들을 넣어두는 방법으로 그것을 우리에게 정기적으로 보내주었다. 우리가 돈을 주면서 부대생활에 필요한 필수품과 군수물자들을 사오라고 하면 그 부탁도 어김없이 들어주었다.

우리의 호의에 감심한 위만군대대장은 유격대부상병치료까지도 자진하여 해주었다. 병영안에 우리 부상병들을 숨겨두고 대접을 잘해가면서 총상자리가 아물 때까지 깨끗이 치료해주었다.
인민혁명군을 진정한 인민의 군대라고 본 그는 우리와의 우호관계가 깊어지게 되자 《산중에 있는 전우들에게 고함》이라는 격동적인 편지까지 써서 나에게 보내왔다.

진실을 따르고 사랑을 례찬하는것은 인간본연의 량심이다. 우리는 늘 동무들에게 적들은 기만과 허위, 위협과 공갈로써 우리 대오를 와해시키려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은 진실과 사랑을 가지고 적군의 심장을 움직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우리의 이 말을 소중히 생각하고 대적정치사업을 성실하게 수행한 공작원들중에는 임은하라는 나어린 처녀유격대원도 있었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연극 《해바라기》는 바로 그의 실재한 투쟁을 형상한 예술작품이다.
우리가 그를 처음 만난것은 1936년 봄 미혼진밀영에서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의 새 사단 편성과 조국광복회창건준비사업을 위한 일련의 주요한 문제들이 토의되고있던무렵에 그 처녀도 우리를 따라 장차 백두산지구로 나갈 생각에 몹시 들떠있었다.
그는 조용하면서도 강단이 있는 예쁘고 귀여운 처녀였다. 그의 나이는 그때 20살도 못되였고 소녀처럼 체구도 자그마했다.
《장군님, 이번엔 꼭 저를 데려가시지요?》
처녀는 나를 만날적마다 내가 데리고 다니는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에 자기를 넣어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우리는 병약한 위증민을 위하여 처녀를 그의 곁에 떼두었다.
우리를 따라 조국으로 가게 되리라던 기대가 무너지자 처녀는 삽시에 눈물이 가랑가랑해졌다.
나는 그를 위로하였다.
《너무 섭섭해하지 마오. 우리가 백두산쪽에 나가 자리를 잡으면 위증민동질 데려다 치료를 시키겠소. 그러면 동무도 같이 오게 될거요.》
《장군님, 알겠습니다. 저때문에 걱정하지 마십시오.》
처녀는 이렇게 우리를 안심시키면서도 맥이 풀린듯 하염없이 남쪽하늘을 바라보았다.

며칠후에 우리는 미혼진을 떠나 소푸르허부근 마을에서 숙영하게 되였는데 집이 네댓채밖에 안되는 이 외진 산간마을에서 뜻하지 않은 불상사를 당하였다. 새벽에 대포시하에 있던 적들이 마을에 달려들었던것이다.
우리는 신속히 유리한 지대를 차지하고 달려드는 적을 화력으로 타격하였으나 골짜기 건너편에서 따로 숙영하던 동무들이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였다. 그 집에는 위증민과 모스크바중산대학 출신으로서 우리에게 새로 파견되여온 리주임 그리고 조아범의 안해와 임은하가 있었다.
적을 격퇴하고 전지를 수색하던 우리는 집천정에서 위증민을 찾아냈다. 총상을 입은 그의 허벅다리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있었다.
이날따라 위증민은 병세가 악화되여 운신조차 못하였다고 한다. 임은하가 용케 그를 천정에 숨겨놓았다. 하지만 그자신은 적의 화력을 피해 산으로 내달리다가 적탄에 다리를 맞고 체포되였다.
그날 조아범의 안해와 리주임은 희생되였다.

적들은 임은하를 대포시하부근에 주둔해있는 위만군중대로 데리고 가서 빨래도 시키고 식모일도 시키였다. 일본지도관놈이 처음엔 모진 고문을 들이대며 비밀을 짜내려고 했으나 그것이 소용없게 되자 전술을 바꾸어 잡일을 시키면서 속을 뽑아보려고 하였다.
임은하는 적진속에 홀로 있는 조건에서도 어떻게 하면 혁명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수 있겠는가 하는 궁리를 거듭하던 끝에 위만군의 옹근 중대를 의거시킬 담대한 계획을 가지게 되였다.
임은하는 우선 자기의 아름다운 노래로써 고달픈 병사생활에 이지러진 사나이들의 가슴을 움직여보려고 결심하였다. 그는 위만군병사들과 접촉할 기회를 조성하기 위해 빨래줄을 일부러 병영마당에 치고 무시로 빨래를 손질하며 향수를 자아내는 슬픈 노래를 불렀다.

우리에게는 대적정치사업을 목적으로 하여 만들어낸 좋은 노래가 있었다. 그것은 만리장성을 쌓을 때 끌려가 죽은 남편의 무덤앞에서 부르던 슬픈 옛 노래의 곡에다 혁명적내용의 가사를 붙여 만든것이였다.
임은하는 장교들이 있는데서는 보통노래를 부르고 병사들앞에서는 그 노래를 불렀다.
원래 그가 시중을 들어주는 중대의 병사들은 과거 구국군에 있다가 우두머리의 변절로 위만군에 편입된 사람들이였는데 반일기분이 강했다.
아름답고 류창한 그의 노래는 병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장교들도 그의 애수에 찬 노래를 들을 때면 먼 하늘을 망연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군하였다.
포로로 잡힌 유격대처녀가 명창이라는 소문이 퍼져서 어떤 병사들은 일부러 찾아와서 노래를 청하기까지 했다.
《유격대아가씨, 노래 한번 불러주!》
그러면 임은하는 생글생글 웃으며 《그까짓 돈도 들지 않는 노래 100번인들 못부르겠어요.》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어가며 처량하게 노래를 불렀다. 그 구슬픈 노래속에는 일본사람들의 학대밑에 피흘리며 죽어가는 중국인들의 원한이 사무쳐있었다.

옛날엔 만리장성의 고역이 중국인의 무덤을 쌓았고 오늘엔 왜놈들의 총칼이 우리의 무덤을 쌓는다. 일어서라, 나가자,중국인의 원한을 씻으려…
이런 노래를 부르느라면 어느덧 처녀도 울게 되고 억대우같은 병사들도 눈물을 짓게 되는것이다.
임은하는 노래만 불러준것이 아니라 병사들을 도와 바느질도 해주고 그들이 좋아하는 음식들을 남겼다가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 임은하와 병사들사이에는 따뜻한 정이 흐르게 되였다. 그 병사들중에는 그를 친누나처럼 극진하게 따르는 애숭이사병들이 몇명 있었다. 그들은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류랑걸식하다가 밥술이나 얻어먹으려고 군대에 들어온 청년들이였다.
임은하는 이 외롭고 불쌍한 청년들을 극진히 보살펴주었다. 인정에 주렸던 어린 병사들에게 있어서 그는 어느덧 친누나나 어머니와 같은 귀중한 존재로 되였다.
하루는 어린 병사 3명이 그를 찾아와서 결의형제를 뭇자고 하였다.
《은하는 우리의 맏누님이요. 누나를 위해서라면 이 동생들은 목숨도 바치겠소.》
청년들의 맹세는 엄숙하고 절절하였다.

임은하는 물론 그들의 제의를 승낙했을뿐아니라 《이 누나도 동생들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아끼지 않겠어요!》라고 하면서 뜨겁게 청년들의 손을 잡았다.
임은하는 그들을 핵심으로 결의형제대렬을 더욱 확대하고 점차 그것을 반일회조직으로 발전시키는 한편 거사를 위해 위만군중대장에게도 접근하였다. 중대장 역시 구국군출신이였는데 일본지도관놈의 전횡으로 늘 울분속에서 지내고있었다.
이런 기분상태를 제때에 포착한 임은하는 어느날 중대장을 찾아가 일부러 품을 내여 유격대에 의거한 여러 위만군들의 생활에 대해 실감있게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대담하게 들이댔다.
《중대장님도 부하들을 데리고 의거하세요!》
처녀의 돌발적인 제기를 받고 처음에 중대장은 당황해하였다.
《당신들은 언제까지 마소처럼 천대받으며 살겠습니까. 어제도 중대장님이 제일 사랑하는 왕사병이 일본지도관놈한테 매를 맞아 인사불성이 됐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놈에게 말 한마디 못하더군요.》
임은하는 격분에 치를 떠는 중대장에게 연방 들이댔다.
《제가 도와드릴테니 의거하세요! 당신의 부하들은 모두 나의 결의형제들이며 반일회원들입니다.》
중대장은 불같이 타오르는 처녀의 눈을 경이에 차서 바라보았다. 과연 이 조그마한 유격대처녀가 지금까지 무슨 일을 했단 말인가. 작은 몸집에 비해 심장이 너무도 크다는 사실에 중대장은 강한 충격을 받았다.
《내 사내자식으로 태여나 부끄럽소!》
그는 그저 이 한마디를 내던지고 도망치듯이 처녀의 곁을 떠났다.

그 이튿날이였다.
임은하의 영향을 받고있던 병사들이 여섯달째나 체불된 임금을 요구하여 집단적인 항의투쟁에 나섰다. 일본지도관은 이날에도 병사대표를 마구 때리고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었다.
임은하는 바로 이때야말로 운명적인 시각이라고 판단하고 병사들앞에 분연히 나서서 반변을 호소하였다.
나의 형제들, 사랑하는 오빠들!
저 오만무례한 일본지도관놈을 처단하라!
치욕스러운 위만군생활을 버리고 나와 함께 항일유격대를 찾아가자!
위만군병사들은 그의 호소에 따라 일본지도관을 처단하고 신속히 대렬을 지어 항일유격대를 찾아 길을 떠났다.
그때 그들이 가지고 간 무장은 체스코제기관총 3정, 보총 19정, 권총 1정, 탄알 4,700여발이였다.
20살도 못되는 나어린 처녀가 적의 1개 중대를 의거시킨 이런 사건은 력사에 흔치 않은 일이다. 일제의 비밀문건도 녀대원이 일으킨 위만군중대의 반변사건을 미증유의 경이로운 사건으로 특기하였다.
임은하는 우리의 뜻대로 진심과 사랑과 공산주의자의 높은 도량을 가지고 위만군병사들을 옳은 길로 이끌어준 유격대의 꽃이였으며 큰 심장을 가진 조선의 딸이였다.

1930년대 후반기부터 우리의 대적정치사업은 더욱 활발해져서 지어 악질적인 정안군에까지 혁명조직이 뻗치였다. 자위단과 위만군경찰 같은데는 우리 조직이 판을 친것이 많았다. 그러므로 조국광복을 위한 대일작전시에 위만군들은 거의나 다 일제에게 총부리를 돌렸거나 와해상태에 있었다.
부정의의 군대였던 일제침략군과 위만군의 수치스러운 운명은 다르게 될수 없는 력사의 합법칙적귀결이였다.
어쨌든 인간은 직선으로 가든 에돌아가든 또는 오늘이 아니면 래일이라도 반드시 정의와 진리의 편으로 찾아가기마련이다.

나는 액목에서 사귄 위만군련대장의 생사안위에 대해 아직까지 모르고있다. 그러나 련대장자신은 물론이요, 그의 부인이나 후손들도 어디엔가 살아있다면 자기 조국과 중화민족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하고있으리라는것을 믿어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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