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와 더불어 22-5. 위증민에 대한 회상 > 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22-5. 위증민에 대한 회상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5,367회 작성일 16-04-26 23:07

본문

5. 위증민에 대한 회상


572056534B0C630028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생전에 동북항일련군의 주요정치군사지휘관이였던 위증민에 대하여 여러차례 회상하시였다.

그 회상교시들에서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과 위증민의 남다른 우정, 혁명가로서의 위증민의 인간상과 그의 비장한 최후, 위증민이 생의 마지막순간에 무엇을 두고 고민했고 무엇을 원하였는가에 대하여 많은것을 알게 된다.

 

내가 위증민을 처음으로 만난것은 그가 만주성당 파견원의 자격으로 간도에 와서 다홍왜회의에 참가했을 때입니다. 그때부터 나와 위증민은 줄창 항일의 길에서 뜨거운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위증민은 어릴 때부터 줄곧 항일애국의 길을 걸어온 직업적인 혁명가였습니다. 그는 안양에서 군사학교에도 다녔고 베이징에서 공부할 때에는 항일시위에도 참가하였습니다.

혁명가로서의 위증민의 활동은 9.18사변후 만주로 투쟁무대를 옮기면서부터 새로운 시기에 들어섰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가 만주에 와서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곳이 할빈도외입니다. 위증민은 거기서 당서기로 활동하였습니다.

용모로 보면 위증민은 대학교수를 방불케 하는 사람이였습니다. 무관형이 아니라 문관형이였습니다. 혁명만 아니면 과학탐구나 저술활동에 한생을 바칠수도 있는 사색형의 인간이였습니다.

위증민은 인간으로서는 소박하면서도 붙임성이 좋았고 진지하고 원만하고 겸손하고 허심한것이 특징이였습니다.

 

국제당문고에 보관되여있던 《만주에 있는 유격부대지휘성원들에 대한 평정서》에는 위증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씌여있다.

《위증민

남부그루빠 부지휘관, 중국공산당원, 남만당위원회 서기…

정치적으로 잘 준비된 지휘관이다.

유격대원들의 반영에 의하면 권위가 높은 사람이다. 경력자료는 없다.

정찰국과 내무성에 그에 대한 부정적인 자료는 없다.》

 

위증민은 중국의 혁명가였지만 조선혁명가들을 지지해주고 조선혁명을 위해 왼심을 많이 쓴 사람입니다. 다홍왜회의가 얼마나 심각한 회의였습니까. 그때 당파견원의 자격으로 회의에 참가한 위증민이 처신을 공정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참으로 불리한 처지에 떨어졌을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래도 내 주장을 귀담아듣고 긍정할것은 긍정하고 참작할것은 참작하였습니다. 요영구회의가 끝난 다음에는 우리가 제소한 문제들에 대한 결론을 받기 위해 모스크바에 있는 국제당본부에까지 갔다왔습니다.

그가 국제당에 갔다온것이 조선혁명을 위해서는 좋은 방조로 되였습니다. 사선을 헤치고 남호두에 찾아온 위증민을 얼싸안고 서로 볼을 비비던 그날을 지금도 잊을수 없습니다.

위증민이 조선혁명가들은 조선혁명의 기치를 들고 싸워야 한다는 나의 주장이 국제주의와 모순되지 않으며 반《민생단》투쟁이 극좌적으로 진행되였다고 한 나의 발언도 정당하다는 국제당의 견해와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조선의 민족군대를 가지고 국내와 압록강연안에서 싸워야 한다는 국제당의 결론을 전달하면서 내 어깨를 부둥켜안았을 때 나는 조선혁명을 위해 바친 그의 로고를 잊지 말자고 생각하였습니다.

남호두회의를 계기로 나와 위증민의 우정은 몇곱절 더 깊어졌습니다. 거기서 한 보름쯤 그와 함께 지냈는데 뜻이 잘 통했습니다. 그때 그를 더 깊이 리해하게 되였습니다.

위증민은 미혼진회의에서 부대개편과 관련된 우리의 의사를 지지해주었고 그후 조국광복회의 창립도 열렬히 환영해주었습니다.

위증민은 그무렵부터 조선동지들과의 공동투쟁을 위해서는 의사소통이 잘되여야 한다고 하면서 조선말을 익히려고 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조선인대원들을 몹시 사랑해주었습니다. 이것이 다 조선혁명에 대한 국제주의적인 지지와 성원의 표시였습니다.

우리도 위증민을 위하여 최선을 다했습니다. 정은 정으로 갚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위증민은 미혼진회의직후 우리와 함께 백두산쪽으로 나오다가 푸르허근방에서 부상을 당하였습니다. 그때 우리 수중에는 적을 치고 로획해온 군마가 몇필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군마들중에서 제일 좋은놈을 골라 위증민에게 주었습니다. 위증민은 그 말을 타고 우리와 함께 마안산까지 갔습니다.

나는 박영순을 시켜 대첨창에 병원을 꾸리게 하고 위증민이 거기서 치료를 받게 하였습니다.

그후 위증민은 열하원정과 관련된 국제당의 지시를 전달하려고 양정우한테 갔다가 우리가 서간도에 진출해서 백두산밀영건설을 마감하고있을 때 나를 찾아왔습니다.

남만에 다녀온 위증민을 보니 건강상태가 말이 아니였습니다. 그에게 무슨 고질병이 있었는가 하면 심장병과 위병이였습니다. 원래 체질이 허약한 사람인데다가 무슨 일에서나 몸을 아끼지 않는 성미이다보니 건강이 나빠질수밖에 없었습니다.

언제인가 그는 대원들의 앞장에서 산을 톺아오르고 령을 넘다가 심장병이 발작하여 혼수상태에 빠진적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치료를 받아야겠다고 말하면 육체가 병든건 무섭지 않지만 사상이 병들면 무섭지요 하고 웃어 넘기군하였습니다.

나는 박영순과 강위룡에게 과업을 주어 횡산쪽에 가서 위증민이 거처할수 있게 료양소 비슷한것을 하나 짓게 하였습니다. 곰의골밀영은 전방이여서 위증민과 같은 허약자가 치료를 받으면서 지내기에는 적당치 못하였습니다.

위증민은 횡산밀영에서 얼마간 료양생활을 하였습니다.

나는 강위룡과 김운신을 장백에 보내여 인조자라혈을 비롯하여 위증민의 몸보신에 필요한 약과 영양제를 구해오게 하였습니다. 우리 동무들은 그때 200여원의 모연금으로 인조자라혈은 물론, 흰쌀, 밀가루, 통졸임, 우유, 전병까지도 사가지고 돌아와 위증민에게 보장해주었습니다. 위증민은 가루음식을 특별히 좋아하였습니다.

그해 음력설을 나는 횡산밀영에 가서 위증민과 같이 쇠였습니다. 박영순이 통졸임통에 구멍을 내서 국수분통을 만들었기때문에 그해 설에는 위증민과 함께 농마국수도 먹고 술도 몇잔 나누었습니다.

그날 8련대장 전영림도 우리하고 같이 설을 쇴습니다. 그 사람의 료리솜씨가 대단했습니다. 그는 고기를 썰 때 쓰는 칼과 채소를 썰 때 쓰는 칼까지 가지고와서 여러가지 찬을 만들었습니다. 고기를 실오래기처럼 썰어서 이그릇저그릇에 옮겨놓고 벼락같이 양념을 치군했는데 솜씨가 보통이 아니였습니다.

우리는 위증민이 사람을 달라면 사람도 주었습니다. 황정해와 백학림은 내가 아끼고 사랑하던 사람들이였지만 그가 이름을 찍어서 달라고 하기에 보내주었습니다.

황정해는 중대장이나 련대장 같은 직무도 감당할수 있는 총명한 대원이였습니다. 무엇이든지 빠지는데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중국말까지 잘하였습니다. 군중과의 사업에도 아주 적합한 인물이였습니다.

백학림도 내곁에서 여러해동안이나 전령병으로 일하던 사람입니다.

백학림이 성실하고 소박하면서도 몸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였기때문에 나는 그 어데로 가든지 늘쌍 그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보천보를 칠 때에도 그를 데리고갔습니다. 내가 가림천기슭의 황철나무밑에서 전투를 지휘할 때 백학림은 여기저기로 뛰여다니면서 내 명령을 전달하였습니다.

간삼봉에서 최현이네 4사동무들이 포위에 들었을 때 나는 그들을 돕기 위해 7련대와 경위중대에 돌격명령을 내렸는데 그 명령을 전달한 사람도 백학림입니다.

그가 얼마동안 전투부대에 가서 싸우게 해달라고 하기에 한 련대에 보낸적이 있습니다. 전투부대에 가있으니 어떤가고 백학림에게 물었더니 그는 성수는 나는데 장군님곁을 떠나서는 못살겠다고 하면서 다시 전령병을 시켜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를 다시 사령부로 데려왔습니다.

백학림은 우리와 함께 고난의 행군에도 참가하였습니다. 그때 나와 함께 한홉의 미시가루를 나누어먹은 사람들중 한사람이 바로 백학림입니다.

상하간의 관계가 그런 정도로 밀접해지면 상하가 다 상대를 친혈육이상으로 아끼고 사랑하게 되는 법입니다. 이런 사람을 남에게 주자니 나도 사실은 속이 좀 알찌근했습니다.

그러나 중병으로 시달리는 위증민이 욕심내기때문에 미련을 버리고 보내주었습니다.

양정우가 희생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제일 슬퍼한 사람이 위증민이였습니다. 얼마나 슬퍼했던지 식사도 전페했다고 합니다.

양정우가 희생된후 1로군의 지휘를 맡은 위증민은 싸움도 잘하였습니다.

그해 가을 위증민은 전투에서 두번째로 되는 부상을 당하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페병까지 겹치다나니 그는 부대를 더 이끌고 다닐수 없게 되였습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양정우를 살해한 다음 거리에 그의 머리를 내걸고 마치도 남만에서 활동하던 항일련군부대들을 다 소멸한것처럼 선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조만간에 동북지방 항일무장투쟁이 종말을 고하게 될것이라고 떠들어댔습니다.

사실 이 시기에 동북항일련군은 안팎으로 큰 시련을 겪고있었습니다. 일제의 《토벌》은 날이 갈수록 횡포해지고 대오안에서는 배신자들과 동요분자들이 꼬리를 물고 나타났습니다. 한때 려단장을 한 방진성이도 양정우의 죽음을 전후하여 적들에게 체포되여 변절하였습니다. 게다가 남만 1로군의 군중적토대도 매우 약화되였습니다.

이러한 사태는 1로군 정치위원이며 남만성위 서기인 위증민에게 큰 충격을 주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 사업에 빈구석이 있으며 그대로 묵여두어서는 안될 심중한 결함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위증민은 자기자신에 대한 요구성이 높고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장점을 겸허하게 받아들일줄도 아는 군사정치일군이였습니다. 그는 나에게 조선동지들이 유격구가 해산된 다음에도 동만과 국내, 서간도의 광활한 지역에서 당조직건설과 대중단체건설에 많은 품을 들였는데 그 경험을 듣고싶다고 하였습니다.

유격구시절에는 간도의 모든 현들에서 혁명조직들이 천하를 움직였습니다. 예닐곱살나는 어린이들도 곤봉을 차고 다니면서 아동단이다 뭐다 하고 왁작 떠들어댔습니다. 녀자들도 봉건의 울타리를 박차고 부녀회조직에 뭉쳤습니다. 조직이 군중을 동원시키고 군중이 궐기하여 군대와 함께 뚱땅뚱땅 하면서 싸움도 하고 농사도 짓고 인민혁명정부도 건설하였습니다.

그러나 남만부대들은 유격구를 떠난 다음 군사활동일면에만 치중하면서 대중공작을 차요시하였습니다. 유격구역에서 와글와글 하던 인민들을 적통치구역에 내려보내고는 그들을 별로 돌아보지도 않고 또 새로운 군중토대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인민과의 련계가 저절로 끊어지게 되였습니다.

그 부대들에서 군사제일주의경향이 제일 우심하게 나타난것은 열하원정때였습니다. 군사제일주의란 군사활동과 군사적대결로써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무장투쟁이라고 하여 군사만 군사라고 해서도 안됩니다. 군대를 지지하고 도와주며 그 인적후비를 충당시켜주는 대중이 없고 대중적지반이 없으면 유격투쟁을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항일유격대를 조직하던 초기에는 총도 몇자루밖에 없었고 력량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때 주저없이 항일대전을 선포하였습니다. 우리는 싸워서 이길수 있다는 신심과 배짱을 가지고 항일전쟁에 뛰여들었습니다. 강력한 경제력에 바탕을 두고있던 일본의 군사력과 우리 유격대의 군사력이라는것은 사실 대비할 여지조차 없는것이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믿고 항일대전을 시작했겠습니까. 우리는 혁명적민중관에 바탕을 둔 정치사상적, 도덕적, 전술적 위력으로 일제를 타승하려고 하였습니다.

열하원정의 무모성은 인민과의 련계에 대한 고려나 전술적타산을 앞세우지 않고 주관주의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그전날의 전장을 떠나 일본군대와 정면으로 대결하려 한데 있습니다.

우리가 유격구를 해산한후 남호두회의와 동강회의에서 당건설도 해야겠다, 통일전선조직체도 내와야겠다, 공청을 반일청년동맹으로 개편해야겠다, 압록강연안과 국내에까지 나가서 무장투쟁을 확대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백두산지구에 떡 틀고앉아 조국광복회 조직들을 내오고 그것을 국내의 넓은 지역에로 급속히 확대해나간것은 다 군사를 뒤받침해줄수 있는 민중공작을 중시하였기때문입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이 그 조직들의 덕을 많이 보았습니다. 적들이 집단부락이다 뭐다 하면서 유격대와 인민을 토성으로 분리시키고 한되박의 쌀, 한오리의 실도 토성밖으로 흘러나가지 못하게 하느라고 발악하고있을 때 그런 조직들이 없으면 우리가 아무리 승천입지하는 재간을 가졌다 하더라도 맥을 추지 못합니다.

군과 민은 서로가 바늘과 실처럼 따라다니는 존재로서 어떤 환경에서나 일심동체가 되여야 합니다.

위증민이 남만성위가 소집한 회의에서 준비된 유격대간부들을 만주각지에 파견하기로 한것은 종래의 결함을 고치기 위한것이였습니다.

그가 때늦게나마 실책을 깨닫고 군사일변도경향을 퇴치하려고 결심한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였습니다.

밀영에서 병마와 싸우고있던 위증민이 제일 고심한것은 어떻게 하면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당한 1로군의 병력을 수습하고 재정비하겠는가, 어떻게 하면 실패와 좌절의 쓴맛을 본 남만혁명을 다시금 앙양에로 이끌어올리겠는가 하는것이였습니다.

위증민은 도래할 대사변을 앞두고 신축성있는 전략을 세우고 그 전략에 맞게 전술상 변화를 일으켜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조성된 정황에 맞는 결단을 내릴수가 없어 몹시 안타까와하였습니다.

그는 하나의 해결방도로 관내에 있는 8로군과의 군사적련합을 실현해볼수 없을가 하는 궁리도 하면서 그해 4월 국제당에 보낸 편지의 회신이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있었습니다.

 

위증민이 국제당에 보낸 편지에는 당시 그의 고충을 엿볼수 있게 하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1935년 가을 … 이후 … 중앙과의 련계가 일체 단절되여 중앙의 구체적인 지시를 받지 못하고 또한 중앙에서 발행하는 문건, 통신도 받지 못하는 형편에서 교활한 적들의 사면공격을 받고있다.

…우리들은 실로 망망대해에서 사공을 잃은 쪽배와도 같고 또한 어린아이가 두눈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는것과도 같다. 위대한 혁명의 물결이 세차게 사품치는데 우리들은 남의 집에 들어가박힌 신세이고 공기라고는 하나도 통하지 않는 큰 북속에 갇혀있는 꼴과도 같아서 … 상급기관과의 련계가 끊어진 다음부터 활동상에서 예견치 못하던 엄중한 손실을 당하고있다.》

 

위증민이 편지를 쓴 목적은 국제당과 중공중앙으로 하여금 1로군의 어려운 형편을 더 잘 알게 하자는데 있고 1로군을 추켜세우는데서 국제당과 중공중앙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자는데 있었습니다.

그가 국제당이나 중공중앙에 이처럼 기대를 건것은 현실성이 매우 희박하였습니다.

국제당이나 쏘련은 그 당시 자기의 안전으로부터 만주에서 일제를 자극하지 않기를 바라는 유화정책으로 나갔으며 중공중앙은 수천리밖에서 일본제국주의자들과 싸우느라고 동북혁명을 도와줄수 있는 형편이 못되였습니다.

이런 때에 위증민이 국제당이나 중공중앙의 지원을 바라고있은것은 얼마동안 군사정치활동에서 떨어져있었고 정세를 정확하게 평가할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들을 제때에 입수하지 못한데다가 병으로 심신이 매우 허약해진 사정과도 관련되여있었습니다.

위증민이 국제당의 답신을 그렇게도 안타깝게 기다린것은 1로군의 부족되는 간부들과 군사물자에 대한 보충을 강력하게 호소했기때문입니다.

위증민은 국제당의 지원이야말로 1로군을 추켜세울수 있는 유일한 방도로 된다고 생각하고있었습니다.

그런데 국제당이 련락원 한명을 파견하는것조차 힘들어하는 때에 간부는 어디서 어떻게 충당하며 군수물자는 무슨 통로로 어떻게 보내는가 하는것이 문제였습니다. 실현될수도 없는 국제당의 지원에 기대를 거는것보다는 파괴된 지하조직들을 다시 꾸리고 군중지반을 강화한 다음 그들에게서 인적, 물적지원을 받는것이 더 합당한 방도가 아니겠는가 하는것이 나의 견해였습니다.

나는 소할바령회의를 마친 다음 한총구밀영에서 병치료를 하고있는 위증민을 찾아갔습니다. 병고로 얼굴이 창백해진 그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우리 동무들은 위증민의 총상자리는 그럭저럭 아물어가나 본래의 고질병이 도져서 건강이 호전되지 않는다고 걱정하였습니다. 밀영의 악조건에서는 현상유지도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증민은 나에게 가슴에서 돌덩이 같은것이 자꾸 치민다고 호소하였습니다. 그런 말을 듣고나니 가슴이 섬찍해졌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가슴앓이를 하면서 그런 하소연을 종종 하였기때문입니다.

그래도 위증민은 화제를 유격운동의 당면과제와 전략전술과 관련한 문제에로 자꾸만 끌어갔습니다. 우리가 조성된 정세의 요구에 맞게 혁명력량을 보존축적하며 대부대활동으로부터 소부대활동에로 넘어갈데 대한 방침을 채택하고 그에 따르는 실천적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통보하자 위증민은 조선동지들이 정세도 옳게 판단하고 전략도 옳게 세웠다고 하면서 우리의 방침을 지지해주었습니다.

그밖에도 우리는 조성된 정세와 앞으로의 활동문제를 놓고 많은 담화를 하였습니다. 그날 우리는 부상자들과 병약자들을 쏘련으로 들여보내는 문제와 그리고 소부대활동에 필요한 겨울철 량식을 미리 확보할데 대한 문제 등을 협의하였습니다.

그날 나는 위증민에게 쏘련에 들어가서 병치료를 할것을 권고하였습니다. 그러나 1로군의 실태를 두고 병상에서 몹시 고민하고있던 위증민은 아직 바로잡아야 할 일들도 많아 그렇게 할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오히려 나에게 쏘련으로 들어가게 되면 국제당에 1로군의 실태를 자세히 보고해주며 국제당에 보낸 자기의 편지가 정확히 가닿았는가를 알아봐달라고 하였습니다.

자기자신의 병보다 1로군의 운명을 두고 더 고민하는 위증민을 보니 나도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양정우가 희생된후부터 1로군은 시련을 겪고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로서는 아직 당장은 쏘련으로 들어갈 형편이 못되였고 또 그럴 생각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통신원들을 통해 앞으로도 서로 필요한 련계를 짓기로 하였습니다.

《김사령, 부탁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밀영을 떠날 때 그가 나에게 한 마지막말이였습니다. 그후 위증민을 다시 만나보지 못한 나한테는 유언이나 다름없는 말이였습니다.

사실이야 얼마나 단순하고 평범한 말입니까.

그러나 그날 위증민이 나를 전송하면서 한 《부탁합니다.》라는 말을 나는 매우 무거운 마음으로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이였습니다. 물론 그것은 자기가 온 생애를 바쳐 가꾸고 사랑해온 혁명을 끝까지 성공시켜달라는 뜻이였을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로군사업을 부탁한다는 뜻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위증민이 그 말을 하고나서 나를 쳐다보던 눈빛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매우 서글픈 눈길이였습니다.

밀영을 떠날 때 위증민을 위해 식량도 남겨놓고 후방물자들도 떨궈두었지만 내 마음은 가볍지 못했습니다. 쌀이나 솜동복 같은것을 두고간다고 해서 그것이 그에게 무슨 큰 활력을 주겠습니까. 그에게 필요한것은 혁명을 계속해나갈수 있는 건강한 육체였습니다.

나는 황정해와 곽지산을 붙들고 어떻게 하든지 그를 살려내야 한다고 재삼 당부하였습니다.

황정해와 곽지산은 위증민을 잘 돌볼테니 념려말고 어서 떠나라고 하면서도 자꾸만 나를 따라왔습니다.

이름도 없는 심산중에 그들을 두고가자니 나도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번 했던 당부를 두세번 곱씹느라고 시간을 수태 지체하였습니다.

후날 하바롭스크에 간 나는 위증민의 부탁을 다 들어주었습니다.

국제당일군들은 위증민이 보낸 편지가 정확히 와닿았다고 말하였습니다.

 

위증민이 국제당에 보낸 비밀서한이 처음으로 공개된것은 주체29(1940)년 12월 일제의 관헌자료집 《사상휘보》 제25호에 그 전문이 실린 다음이였다.

그 서한이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수중에 들어간것은 제3방면군의 리룡운련대장이 그해 가을 왕청에서 전사한후 적들이 그의 소지품을 회수해갔는데 그속에 위증민이 국제당에 보낸 편지가 있었기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으로 하여 위증민이 국제당에 보낸 편지는 국제당에 가닿지 못한채 중간에서 적들의 손에 들어간것으로 해석되여있었다.

그렇다면 국제당이 정확히 인수하였다는 위증민의 편지는 누가 전달한것인가.

국제당문서고에 있는 다음의 자료는 이에 대한 명백한 해답을 주는것으로 된다고 볼수 있다.

《극비 국제공산당 집행위원회 앞

항일련군 제1로군 부사령이며 중국공산당 남만성위 서기인 위동지의 1940년 4월 10일부 보고와 2통의 편지번역문을 보낸다.

쉘리가노브

1940년 8월 10일》

문건에는 1941년 1월 23일 날자와 지미뜨로브의 수표가 있다.

편지의 앞부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우리의 통보는 4개의 부분으로 되여있다. 여기에는 다 말하지 못한것도 놓친것도 많다. 그러므로 이번에 동지들이 거기로 가는 왕윤성과의 담화를 통하여 관심사로 되는 모든 문제들을 해명하기 바란다.

그가 글로 쓸수 없는 비밀문제들에 대해서도 동지들에게 이야기해줄것이다.

동지들에게 파견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내가 특별히 보증한다.》

이 인용문을 보면 위증민이 리룡운만이 아니라 왕윤성에게도 국제당에 보내는 편지를 맡긴것으로 짐작된다. 일부 개소들에서 약간의 차이를 찾아볼수 있으나 편지의 기본내용은 두통이 다 같다. 다만 리룡운에게서 나온 편지내용에는 왕윤성과 관련된 언급이 없을뿐이다.

왕윤성은 일찌기 동만에서 위대한 수령님과 밀접한 련계를 가지고 활동하던 《왕다노대》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2사 4련대 정위를 하였고 후에는 동북항일련군 제2군 제2사정위로 있었다.

주체30(1941)년 봄 소부대를 이끌고 사선을 헤치며 만주로 나오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위증민과의 마지막상봉이 이루어졌던 한총구를 찾으시였다. 그러나 위증민일행은 거기에 없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위증민과 그 호위성원들의 상세한 소식을 입수하신것은 그때로부터 몇달이 지난 주체30(1941)년말이였다.

 

우리가 다시 만주와 국내에 소부대를 데리고 나갔다가 돌아온후 쏘련동지들이 나를 급히 만나자고 하였습니다. 울라지보스또크에서 왔다는 쏘련군대좌가 사복차림으로 내앞에 나타났습니다. 그가 하는 말이 항일련군의 한 소부대로 짐작되는 사람들이 쏘만국경을 넘어와 울라지보스또크에 체류하고있는데 그들은 자기들의 신분을 확인할수 있는 사람은 김일성동지뿐이라고 하면서 나를 만나게 해달라고 완강하게 요구한다는것이였습니다.

쏘련군대좌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울라지보스또크로 가면서 나는 오만가지 생각을 다했습니다. 그 일행중에 혹시 위증민이 끼여있지 않을가, 그가 병사했다는 말이 혹시 헛소문일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도 품어보았습니다.

승용차가 여드레 팔십리 걸음을 하는것 같아서 얼마나 답답하고 초조했는지 모릅니다.

쏘련군대좌는 울라지보스또크에 도착하자마자 내앞에 곽지산을 데려다주었습니다. 한해사이에 환갑로인처럼 늙어버린 곽부관의 모습을 보고 나는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습니다. 그 모습이 위증민일행이 겪어온 참담한 고충을 다 말해주는것 같기도 하였습니다.

곽지산은 원래 연길지방에서 교편을 잡고있다가 유격대에 들어와 정치일군으로 성장한 사람입니다. 초기에는 연길유격대에서 중대지휘관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세련된 혁명가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서 글을 배웠습니다.

곽지산은 식견이 높고 품성이 좋아 어데 가서나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왜 그를 진심으로 따르고 존경했는가 하면 그가 동지들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기때문이였습니다.

그런데다가 성미도 대범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곽지산을 가리켜 《열두폭치마》라고도 하였습니다. 어떤 인간이든지 타발하지 않고 다 품에 감싸안는 너그러운 일군이라는 뜻일것입니다. 대가정의 크고작은 잡사를 다 맡아안고 속을 태우는 어머니 같다는 의미를 담아 《열두폭치마》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1로군에 경위련대가 조직될 때 우리는 그를 위증민의 후방부관으로 추천해주었습니다. 대원들이 그때부터 그를 《곽푸관》, 《곽푸관》하고 따랐습니다.

곽지산은 위증민을 위해 있는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는 몇번이나 사선을 헤치고 적구에 직접 뚫고들어가서 식량과 약품들을 지고왔습니다. 위증민은 늘 자기 생명이 연장되는것은 곽부관덕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우연한 말이 아닙니다.

곽지산은 마음이 좀 진정되자 쏘련군대좌에게 자기가 맡긴 싸창을 가져다달라고 하였습니다.대좌가 싸창을 가져오자 그는 목갈린 소리로 《위증민동지의 싸창입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곽지산에게서 싸창을 받아들었으나 《그가 어떻게 됐소?》하는 말은 종시 나가지 않았습니다. 위증민은 보이지 않고 싸창만 온것을 보니 그가 희생된것이 분명하였습니다.

그날 나는 비로소 곽지산을 통하여 위증민의 운명과 관련된 상보를 들었습니다.

내가 한총구에 가서 위증민을 만나고 돌아온후 그들은 화전현 쟈피거우밀영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합니다. 쟈피거우란 고장은 왕청현에도 있고 동녕현에도 있습니다. 만주에 쟈피거우란 지명을 가진 고장이 많습니다.

화전현 쟈피거우에 자리를 옮긴 위증민일행은 밀영을 두군데 두었습니다. 하나는 쟈피거우에서 북쪽으로 수십리가량 되는곳에 정했고 다른 하나는 서남쪽으로 그보다 더 먼곳에 정하였습니다.

위증민은 첫번째 밀영에 있었습니다. 그 밀영에 황정해도 있고 김봉남이도 있고 의사 김희선이도 있었습니다. 7~8명쯤 되는 기관총반성원들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곽지산과 김철호, 주도일, 리학선, 전문욱, 김득수네는 두번째 밀영에 있었습니다.

두 밀영의 위치를 다 아는 사람은 곽지산뿐이였습니다. 그가 두 밀영을 힘들게 오가면서 필요한 련락도 하고 식량도 날라다주었습니다. 그는 쟈잘리를 맺고있던 위만군장교들의 도움을 받아 식량을 해결하군했습니다. 장교들은 곽지산의 요구라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었습니다. 헌병대의 특무대장도 그의 영향하에 있는 사람이였습니다.

쟈잘리에 속한 위만군장교들이나 특무대장이나 다 량다리치기를 하는 사람들이였습니다. 그들은 식량이나 소금 같은것을 지고 산에 들어와 유격대에 넘겨주고는 유격대원들이 입던 헌옷이나 꿰진 신발, 구멍난 양재기 같은것을 가지고가서 빨찌산을 몇명 살상했다고 거짓보고를 하고는 상금까지 타먹군하였습니다.

위증민은 운명직전까지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붓을 들고 보고서도 집필하고 유격투쟁을 총화하는 글도 썼습니다. 어떤 날은 로군의 사업과 관련된 문건기안도 했습니다. 최후의 순간까지 손에서 일을 떨구지 말자는것이 혁명가로서 그가 품고있던 지향이였던것 같습니다.

림종이 박두하자 위증민은 싸창과 문서보따리를 전우들에게 넘겨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동무들은 혈기왕성한 청년들이니 끝까지 싸워야 한다. 혁명은 동무들을 믿고있다. 혁명이란 간고하고 피도 흘리고 희생도 있기마련이다. 그러나 고생을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가 흘린 피는 헛되지 않을것이다.

동무들은 꼭 김일성동지를 찾아가라.

위증민이 사망한 때가 1941년 3월이였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가 32살이였습니다. 아까운 나이였습니다. 조총도 쏘지 못하고 추도식도 없는 쓸쓸한 최후였습니다. 그러나 전우들은 있는 정성을 다해 그의 시신을 안장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후 중국인대원이 산에서 내려가 적들을 끌고오는 바람에 묘소가 발견되게 되였습니다. 위증민이 평소에 몹시 사랑하던 대원이라는데 무엇때문에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위증민을 전투에서 사살했다고 한 적측의 자료는 사실과 맞지 않습니다. 사살인것이 아니라 병사입니다. 일본사람들이 그런 가짜선전을 잘했습니다. 적들은 현상금을 타먹자고 위증민의 묘를 파헤치였습니다. 야만들이나 할짓이였습니다.

위증민의 싸창이 내 손에까지 와닿게 된 경위를 들어보니 그를 호위하던 사람들의 그후 행로에도 곡절이 많았습니다.

위증민은 처음에 그 싸창을 황정해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가 황정해를 몹시 사랑하고 신임했습니다.

황정해는 처음에 통신을 맡아보았습니다. 필요할 때에는 위증민의 통역도 하였습니다. 그후 경위소대장이 되여 전적으로 위증민을 호위하고 그의 사업을 보좌하는 인물이 되였습니다. 그는 위증민의 요구에 따라 문건과 자료 번역도 하고 그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할 때에는 집필도 대신하였습니다.

황정해도 곽지산과 함께 위증민의 신변을 끝까지 호위한 동무입니다. 그가 위증민을 정말 성실하게 호위하였습니다.

한번은 밀영에서 위증민의 백마가 없어진 일이 있었습니다. 황정해는 기관총수에게 위증민을 부탁하고 백마를 찾아 떠났습니다. 백마를 찾자면 발자국을 따라가야 했습니다. 그는 발자국을 따라 얼마쯤 가다가 밀영으로 살금살금 기여드는 적들을 발견하였습니다. 적들도 말발자국을 더듬어가면서 밀영쪽으로 접근하고있었습니다. 아주 위급한 정황이였습니다. 경위소대원들이 식량공작을 떠난 뒤여서 위증민의 곁에는 황정해와 기관총수밖에 없었습니다.

황정해는 오던 길로 되돌아가 비밀문건을 건사한후 위증민을 둘쳐업고 수림속으로 달렸습니다. 적탄이 인차 우박처럼 날아왔습니다. 그러자 그는 위증민을 안고 달리였습니다. 자기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위증민만은 살려내자는것이였습니다. 그날 황정해는 어깨에 부상을 당하였습니다. 그런 상태로 더는 위증민을 안고 뛸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그는 위증민을 기관총수에게 넘기였습니다. 그리고는 기관총을 잡고 엄호사격을 하면서 적들을 견제하였습니다.

황정해란 사람은 이런 사람이였습니다. 그러니 위증민이 그를 사랑하지 않을수 있습니까. 위증민이 그에게 싸창을 넘겨준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였습니다.

그후 황정해는 소부대를 데리고 곽지산이 있던 밀영에 옮겨앉았습니다. 소부대는 메돼지나 곰과 같은 산짐승들을 잡아먹기도 하고 길량식으로 저장하기도 하였습니다.

황정해는 곰사냥을 하다가 잘못되였습니다. 한방 얻어맞고 달아나는 곰을 뒤좇아갔는데 그놈의 곰이 돌따서서 사납게 달려드는 바람에 전혀 예상치도 않았던 불상사를 당했습니다. 아까운 사람을 맹랑하게 잃었습니다.

황정해가 간수했던 싸창은 백학림의 동향친구인 리학선이 건사하게 되였습니다. 그는 하루에 한번씩 꼭꼭 그 싸창을 소제하면서 위증민을 추억하군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뜻하지 않은 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리학선이 희생된후 위증민의 싸창은 곽지산이 간수하였습니다.

그는 한편으로는 소조활동을 하고 다른 편으로는 아편농사를 하면서 쏘련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였습니다.

류경수네 조가 쟈피거우근방에 가서 곽지산이네와 련계를 맺고있던 로인을 만난 때가 그때일것입니다. 그 로인이 비밀을 철석같이 지키는 바람에 류경수네가 곽지산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곽지산일행은 아편농사를 지은것으로 군복도 해입고 식량과 소금도 마련하였습니다. 그렇게 준비를 착실히 해가지고 떠났는데 로상에서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하였습니다. 쏘만국경을 넘을 때는 바지를 벗어 이고 강을 건넜다고 합니다.

한자루의 권총이 몇사람의 손을 거쳐 나에게로 넘어왔습니다.

곽지산은 그후 김일이네 소부대에 망라되여 만주로 진출하였습니다. 그는 쟈잘리라는 공간을 통하여 이전부터 련계를 가지고있는 위만군장교들을 포섭하여 지하조직도 꾸리고 인민들속에 들어가 정치사업도 하였습니다.

곽지산을 비롯하여 위증민의 곁에서 그를 호위하던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생전에 위증민이 그렇게도 번민하던 군사일변도경향을 없애고 무장투쟁의 대중적지반을 강화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곽부관이 전사한것은 1943년일것입니다. 새로운 정찰임무를 받고 만주로 나갔는데 임무를 다 수행하고 돌아오다가 적탄에 맞아 희생되였습니다.

위증민은 조선혁명이 가장 어려운 시련을 겪고있을 때 우리를 진심으로 지지해준 사람입니다. 내 지금도 그래서 그 사람생각을 하군합니다.

위증민은 실천상에서 결심을 내리기 어려운 문제에 부닥칠 때마다 꼭꼭 우리의 견해를 들어보군했습니다. 그가 어느 정도로 우리를 신뢰했는가 하는것은 양정우가 전사한후 1로군과 남만성위의 사업과 관련된 문제를 전적으로 우리와 협의한데서도 찾아볼수 있습니다.

1로군간부들이 자기한테 무슨 결론을 받으려고 찾아오면 위증민은 그들을 모두 나한테로 보냈습니다.

위증민이 전사한 다음부터 국제당은 동북항일련군 1로군사업과 남만성위사업과 관련된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 우리와 협의하였습니다.

위증민은 인간으로서도 훌륭한 사람이였고 혁명가로서도 훌륭한 사람이였습니다. 훌륭한 인간이고 훌륭한 혁명가였기때문에 우리도 있는 성의를 다하여 그를 도와주었습니다.

위증민을 보살펴주느라고 많은 사람들이 수고하였습니다. 위증민을 목숨으로 보호해준 국제주의전사들이 한두명이 아닙니다.

조선혁명에 대한 관심과 우리에 대한 우애에 있어서 위증민은 특별하다고 할수 있습니다.

한때 위증민곁에 가서 오래 일한바 있는 우리 동무들의 말에 의하면 위증민은 언제나 조선혁명의 운명을 우리와 련결시켰고 그래서 말끝마다 김일성동지를 잘 받들라고 했다는것이였습니다.

위증민의 생애가 아름다운 일생으로 되는것은 시작과 끝이 같은데 있습니다. 인생의 첫 자욱을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 인류를 위해서 뗀 사람은 인생의 마감도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 인류를 위해서 맺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일생이 사람들의 추억속에 영원히 남는 고결하고 아름다운 인생으로 될수 있습니다.

항일혁명시절에는 사람들의 정신세계가 참으로 깨끗하였습니다.

국제공산주의운동내부에 현대수정주의가 대두하면서부터는 국제주의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별반 없습니다. 입만 벌리면 국제주의를 부르짖던 사람들도 지금은 제 주머니를 채우느라고 바삐 돌아가고있습니다.

못먹고 못입어도 혁명을 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국적을 따지지 않고 먹어라, 써라 하던 때가 좋았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언제 어떤 환경에서나 국제주의적 의무와 의리를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서비스이용약관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상단으로


Copyright © 2010 - 2023 www.hanseattle1.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