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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10-4. 사도구참변에 대한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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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7,111회 작성일 15-05-19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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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도구참변에 대한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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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유격구를 해산하는 사업을 지도하느라고 분망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라자구지하조직에서는 요영구에 련락원을 파견하여 나에게 사도구참변에 대한 상보를 전해주었다. 련락원이 가져온 통신문건에는 문영장부대가 로흑산지방에 있는 정안군을 끌어들여 사도구부락을 완전히 초토화하고 부락민전부를 살해하였다는 기막힌 사연이 적혀있었다.


통보는 믿을만한것이였지만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문영장이 우리와의 언약을 무시하고 정안군을 대학살에로 유도하였다는 사실이 잘 믿어지지 않았던것이다. 문영장과 우리 부대사이에는 오늘날의 공수동맹 비슷한것이 맺어져있었다. 우리가 문영장과 손을 잡은것은 라자구전투직후였다.


하루는 적구지하조직에서 라자구로 가는 위만군부대의 우마차수송대가 백초구를 떠났다는 련락이 왔다. 우리는 계관라자부근에서 매복전을 하였다. 위만군호송병들은 변변히 저항도 하지 못하고 전원 포로되였다. 포로들중에는 문영장의 수하에서 복무하는 철가성을 가진 중대장도 있었다. 그 중대장은 혁명군에 붙잡힌 몸이라는 강박관념은 조금도 없이 마치 응당 겪어야 할 일을 당한 사람처럼 태평스러운 얼굴로 히물히물 웃기만 하였다.

《당신은 장교인데 왜 저항도 하지 않고 투항하였소?》

나는 그 괴짜에게 질문을 하였다.

《여기야 〈고려홍군〉활동구역인데 저항해서는 뭘하겠습니까. 싸워도 이기지 못할바에야 손을 드는게 상책이지요.》

그도 녕안지방의 사람들처럼 조선인민혁명군을 《고려홍군》이라고 불렀다.

《게다가 〈고려홍군〉이 포로들을 죽이지 않는다는건 온 만주가 다 알고있는거구요.》


빈농가의 자식인 철중대장은 만주국군대의 봉급이 높다는 소문을 듣고 장가갈 밑천이라도 마련해보려고 총을 멘 사람이였다. 세상물정에 너무나 어둡다고 흠을 잡는 동무들도 있었지만 교양만 잘하면 위만군장교라는 간판과 관계없이 량심적으로 살아갈수 있는 인간이였다. 우리가 포로들과의 담화를 끝내고 그들을 돌려보내려고 하자 철중대장은 나에게 이런 청을 하였다.

《대장나리, 이 우마차들에 싣고 온 물건가운데서 다른건 다 가져가도 좋은데 돈과 총만은 돌려주실수 없겠습니까? 우리가 빈손으로 돌아가면 사병들에게 월급도 주지 못하고 … 아마 문영장이 우리를 총살할것입니다.》


나는 우마차에 실린 물자전량과 함께 포로들을 고스란히 라자구로 돌려보냈다. 우리 동무들은 《친구들, 우린 탄알값도 못하고 잠만 밑졌소.》하는 롱까지 해가며 그들을 바래주었다.

철중대장은 리효석중대장을 보고 《친구, 이 센기리(무우를 썰어서 말린것.)가마니에 대구 총 몇방만 쏴주게.》하면서 탄알상자 한개를 통채로 내주었다. 우리의 대범한 처분에 감심했던 모양이였다. 리효석이 탄알상자를 받지 않고 마차에 실어주자 호송병들은 자기네끼리 센기리가마니에 총을 몇방 갈기였다. 그런 다음 장탄했던 총알들을 모조리 뽑아 손수건에 싸서 풀밭에 내던지고 덜렁덜렁 달아나버리였다.


이 일로 하여 철중대장은 문영장의 각별한 신임을 받게 되였다. 문영장은 수송대를 파견할 때마다 그의 중대를 따라보내군하였다. 다른 중대들을 보내면 빈털터리가 되여 돌아오는데 철중대장만은 한번도 털리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군하였기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수송대들은 다 치면서도 그 수송대만은 다치지 않았다. 그는 군수물자를 실으러 갈 때마다 부하들을 보내여 아무아무날 몇시에 자기네 수송대가 어느어느 지점들을 통과하는데 수송대의 표적은 어떠어떠하다고 우리에게 알려주군하였다. 그러는 과정에 문영장도 철중대장이 인민혁명군의 보호와 관심 속에 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어느날 철중대장은 문영장을 만나 《우리 중대가 라자구에 와서 인민혁명군의 보호를 받고있는데 이왕이면 우리 영(대대)이 김대장네 부대와 공수동맹을 맺고 안전하게 지내는것이 어떻습니까?》 하고 슬쩍 제기하였다. 문영장은 처음에 큰일이라도 난것처럼 펄쩍 뛰는 시늉을 해보였으나 나중에는 본심대로 아주 훌륭한 보신책이라고 하면서 그 제의에 쾌히 동의해나섰다. 이 사실이 철중대장을 통하여 우리에게까지 전달되고 위만군이 인민들의 생명재산을 침해하지 않는 조건에서 동맹을 맺는데 동의한다는 우리의 의사가 문영장한테 전달되였다. 회담도 없고 서명날인도 없는 파격적인 《신사협정》이였다.


우리 부대와 문영장부대와의 공수동맹은 쌍방이 서로 협동하여 공격도 같이하고 방어도 같이하는 동맹이라는 본래의 의미를 떠나 두 군사집단이 서로 상대방을 치지 않고 친선적으로 지내는 동맹이라는 전이된 뜻을 가지고있었다. 이 동맹은 량측의 리익을 존중시하고 상호협조를 강화하는 방향에서 큰 곡절이 없이 좋게 유지되여왔다. 우리가 불가침원칙을 충실하게 지키자 문영장은 여러차례에 걸쳐 혁명군에 많은 량의 탄약과 식량, 피복을 보내주었다. 지어 그들은 일본군의 움직임과 관련한 중요한 군사정보까지 제공해주었다.


이상과 같은 동맹의 화평관계를 보더라도 문영장이 정안군의 사도구 《토벌》을 유도했다는 소식은 믿을수가 없었다. 나는 철중대장에게 련락원을 보내여 진상을 알아보게 하였다. 련락원의 보고에 의해 사도구참변도 사실이고 문영장의 배신행위도 사실이라는것이 확인되였다. 문영장이 일본상전의 압력을 받고 공수동맹을 파기하는 길로 나가고있다고 철중대장이 알려왔다.


우리는 문영장의 배신과 그가 안내자의 역할을 담당한 사도구참변에 응당한 대답을 주어야 하였다. 복수전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매일같이 지휘부에 날아왔다. 지휘관들도 사도구인민들의 피값을 받아내자고 대원들을 선동하였다. 미친개는 몽둥이로 다스려야 한다는것이 혁명군이 즐겨 사용하던 격언이였다.


나는 대원들의 요구가 정당하다고 생각하였다. 로흑산의 정안군부대나 라자구의 위만군부대를 그대로 두고서는 이 일대에서 살고있는 인민들의 안전도 담보할수 없었고 마을마다에 박혀있는 지하조직들의 활동도 군사적으로 뒤받침해줄수 없었으며 인민혁명군의 북부만주진출도 무난하게 할수 없었다. 유격구를 해산하는 사업에서도 혼란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라자구는 유격구를 떠난 왕청, 훈춘 지방의 해산군중이 가서 살게 될 소개지이기도 하였다.


우리는 정안군부대와 문영장부대를 동시에 치기로 결심하고 부족되는 력량을 보충하기 위하여 연길1련대와 처창즈에 가있는 독립련대를 왕청으로 소환하였다. 독립련대는 그때 한끼에 빵을 한개씩 먹으면서 5일가량 강행군을 하여 우리가 주둔하고있는 당수하자의 산재부락까지 왔다. 독립련대의 련대급 간부들은 련대장 윤창범이하 대부분 《민생단》으로 몰려죽고 참모장이 중대들을 인솔해가지고 왔는데 지휘관들을 잃은 그들의 사기는 여지없이 저락되여있었다.


우리는 그때 독립련대의 일부와 연길1련대의 일부, 왕청3련대의 일부력량으로 전각루전투를 조직하였다. 토성속에 깊숙이 들이박혀 오만가지 악행을 다하는 위만군과 자위단 무력을 제압하지 않고서는 라자구로 가는 통로를 개척할수 없었다.


전각루전투를 끝낸 혁명군무력은 라자구를 공격하기 위한 작전계획을 세우고 출진기지로 내정되여있는 사도구와 삼도구, 태평구 방향으로 백일행군을 강행하였다. 죽을 먹으면서 200여리를 행군하였으나 대원들의 사기는 매우 좋았다.


사도구는 원래 리태경과 같은 독립군출신의 로병들과 의병출신 선각자들이 《리상촌》으로 개척한 고장이였다. 사도하자 또는 상방자라고도 부르는 이 마을을 후에는 우리가 리광과 함께 혁명촌으로 개조하였다. 우리는 리태경로인을 내세워 이 마을에 반일회도 뭇고 농민협회도 내오고 혁명호제회도 조직하였다. 우리가 사도구에 자주 다니다나니 당시 라자구와 그 주변부락 사람들은 그곳을 《공산당사령부》라고도 불렀다. 인민혁명군에 대한 이고장사람들의 우대와 애정은 실로 놀랄만한것이였다. 혁명군이 왔다는 말만 들으면 신짝도 걸치지 않고 맨발바람으로 뛰여나오군하던 그들의 열정적인 모습앞에서 나는 한두번만 감탄한것이 아니였다.



사도구마을 가까이에 있는 삼도하자도 우리의 물을 많이 먹은 유명한 혁명촌이였다. 삼도하자부락의 서쪽산기슭에는 중국사람들이 경영하는 양조장이 하나 있었다.

나는 주보중과 함께 이 양조장에 가서 지하혁명조직의 간부들과 인민들을 자주 만나보았다.

사도구인민들에 대한 우리의 옛정은 이고장을 적시는 수분하의 흐름처럼 련련하였건만 마을은 불타버려 재더미가 되고 사람들은 진토속에 묻히였다. 고개너머 리태경로인의 8간 집도 다 타버리고 주추돌만 남았다. 그것은 우리가 한해전에 라자구진공전투를 앞두고 주보중을 비롯한 구국군부대의 지휘관들과 함께 작전회의를 했던 집이였다.


로인은 이 집터근처에 학교를 세우고 후대교육에 열중하고있었다. 참변의 총소리, 아우성소리가 아직 귀전에 쟁쟁한 그때 그는 강심을 먹고 교육운동을 위해 궐기한것이다. 로인은 사도구참변에서 요행 살아남은 독립군친지의 아들을 집에 숨겨두고있었다. 청년은 그날 나들이를 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사도구를 한눈으로 볼수 있는 산상에서 정안군의 만행을 직접 목격했다고 하였다.


사도구사건의 발단으로 된것은 라자구시내에서 공작원으로 활동하던 공청원 서일남에 대한 부당한 심문이였다. 그는 상점에서 물건을 훔쳤다는 혐의를 받고 《민생단》으로 몰리다가 체포되여 사도구혁명조직책임자로부터 억울한 심문을 당하였다. 아무리 조사를 해도 《민생단》이라는 증거가 나오지 않아 서일남을 체포한 사람들은 일단 그를 석방하고 그의 일거일동을 감시하였다.


서일남은 집에 돌아가자 《민생단》도 아닌 애매한 사람을 《민생단》으로 몰아 고문한다고 불평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상급에서는 다시금 그를 체포하여 《민생단》으로 처형하려고 하였다. 그 기미를 간파한 서일남은 도주하여 적들에게 귀순하였다. 그리고는 자기를 학대하고 고문한 인간들에 대한 복수심을 품고 사도구지하혁명조직과 관련된 비밀을 불어버렸다.


서일남이 제공한 비밀은 당시 라자구에 와서 설명절준비를 하고있던 정안군부대의 살인마들을 흥분시키였다. 100여명에 달하는 《토벌》군은 1935년 음력 정월 대보름날새벽에 사도구마을을 감쪽같이 포위하고 중기, 경기의 일제사격으로 마을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쓸어눕히였다. 집집을 돌아다니며 불을 지르고 화염속에서 뛰여나오는 사람들을 남녀로소 가림없이 총창으로 찔러 불속에 던져넣었다.

적들은 1시간밖에 안되는 사이에 마을을 재더미로 만들어버리였다.


삼도하자의 백호장이 사건현장으로 달려왔을 때 거기서는 참변을 요행 모면한 8명의 조선족어린이들이 시체더미속에서 울고있었다.

백호장은 근처의 마을사람들과 함께 그 아이들의 양육문제를 의논하였다. 고아가 된 어린이들을 1명씩 데려다 기르기로 하였다. 백호장자신도 고아 1명을 집으로 데리고 갔다.

참화를 면한 3명의 사도구청년들은 우리 부대에 입대하였다.

우리들은 이 참변의 전말을 듣고 모두다 이를 갈았다. 화근의 동기로 된것은 물론 서일남을 《민생단》으로 몰아 학대한 인간들의 좌경망동적행위임에 틀림없었으나 그것과는 관계없이 우리는 사도구마을을 피바다로 만든 정안군의 살인백정들에게 일차적인 저주를 보내지 않을수 없었다.


사도구대학살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조종과 사촉에 의해서만 감행될수 있는 야수성과 악랄성, 잔인성의 극치였다. 남의 나라 왕궁안에 뛰여들어 그 나라의 왕비를 서슴없이 살해하고 그 범죄의 흔적을 없애기 위하여 시체마저 불태우는 그런 무지막지한 강도의 후예들이 무슨짓인들 못하겠는가.


나는 어렸을 때 아버지한테서 을미사변(1895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분통을 금치 못하였다. 왕궁안에서 살해되여 시체마저 건질수 없었다던 그 왕비가 바로 우리 나라의 마지막왕 순종을 낳은 명성황후 민비였다. 조선의 국정을 한손아귀에 거머쥐고있던 민비가 친로파의 수괴가 되여 일본세력을 반대하는 립장에 서게 되자 이에 당황망조한 일본의 통치자들은 조선주재 자국공사 미우라를 돌격대로 내세워 수비대무력과 경찰무력, 지어는 깡패들과 불량배들까지 포함한 살인집단을 뭇고 그들을 동원하여 경복궁을 습격하게 하였다.


일본도로 민비를 란도질한 미우라의 하수인들은 범죄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하여 시체를 화장하고 남은 그의 유골까지도 못속에 집어던지였다.


원래 조선사람들은 민비를 그다지 숭상하지 않았다. 개국으로 나라를 망친 장본인이라고 생각하고있었기때문이였다. 그가 왕가의 며느리로서 외부세력과 결탁하여 시아버지인 대원군을 정권의 자리에서 들어낸데 대해서도 좋지 않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원군이 둘러친 쇄국의 울바자가 20년이나 30년만 더 유지되였어도 우리 나라가 남들의 식민지로 되지 않았을것이라고 말하는 천진란만한 사람들도 있었으니 민비에 대해 국민들이 품고있었던 고까운 심정도 리해하기 어렵지 않을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국민의 신임을 받지 못한 민비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정치는 정치이고 왕비는 왕비인것이다. 그는 우리 국민의 일원이였고 왕가의 주인이였으며 고종을 대변하여 국정을 다스린 국가권력의 대표자였다. 그러므로 을미사변을 도발한 일본지배층의 야만적행위는 곧 우리 인민의 자주권을 강도적으로 침해한것으로 되며 전통적인 왕가의 존엄을 침해한것으로 되는것이다. 국민의식이 강하고 존왕정신이 강하며 민족적자부심이 남달리 강한 조선사람들이 이것을 용납할리 만무하였다.


거기다가 단발령까지 강제적으로 시행되여 민족감정은 분화구를 헤치고 크게 폭발하였다. 우리 인민은 의병항쟁으로써 을미사변과 단발령의 시행에 대답하였다.


간도대《토벌》의 해로 알려진 경신년에도 일본군대는 만주지방에서 조선사람들을 대량적으로 학살하였다. 그것은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당한 대참변의 수치를 재만조선족 비군사인원들에 대한 살륙으로 씻어보려는 전례없는 살인광증의 폭발이였다. 씨비리출병을 끝내고 남하하는 일본군과 라남을 떠나 만주지방으로 북상하던 일본군은 가는곳마다에서 조선사람들이 살고있는 촌락들을 재더미로 만들고 청장년들을 끌어내다가 무데기로 학살하였다. 민비시해의 수법을 그대로 적용하여 시체들은 석유를 치고 화장하여버리였다.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의 증거를 없애치우자는 수작이였다.


1923년의 간또대진재는 지각운동이 일으킨 자연의 재난과 함께 일본의 국수주의자들에 의하여 조선민족에게 강요된 인공적인 재난도 기록하고있다. 대진재를 조선인탄압의 호기회로 삼은 깡패들은 도처에서 일본도와 참대창으로 조선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죽이였다. 그들은 수많은 인총들가운데서 조선족들을 정확히 식별해내려고 겉만 보고 잘 분간할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덮어놓고 《고엔 고쥬고센》이라는 말을 번져보게 하였다. 《고엔 고쥬고센》이란 《5원 55전》이라는 뜻이다.


이 말을 류창하게 번지지 못하는 주민들은 례외없이 조선사람으로 인정되고 살해의 대상이 되였다. 이 재난의 첫 18일동안에만도 우리 민족은 6,000여명의 희생자를 내였다. 이것은 일본군국주의자들이 조선인민을 과녁으로 하여 저질렀던 죄악의 일부이며 살륙과 략탈로 얼룩진 일본근대사의 한토막에 지나지 않는다. 그 력사의 일부가 사도구라는 자그마한 부락에서 재현된것이다.

《마을에는 지하조직도 있었는데 왜 그렇게도 무경각했습니까?》


나는 분하고 안타까운 나머지 리태경로인에게 물었다. 사실 그것은 부질없는 질문이였다. 경각성이 있은들 어떻게 한단말인가. 상비적인 유격대무력이 없는 이 부락에서 보초를 세울수야 없지 않는가. 설사 보초를 세웠다고 해도 숱한 무장인원이 새벽어둠을 타고 은밀히 기여드는데 다른 수가 있는가.

《장군님, 우리가 너무 허리띠를 풀어놓고 살았습니다. 나같은 늙다리들에게 죄가 많습니다. 혁명군의 보호밑에서 늘 편안하게 살아오다나니 우리가 망국민이라는것도 잊고 독립전쟁중에 있는 나라의 백성이라는것도 잊고있은것 같습니다. 사도구마을의 어떤 령감들중에는 간디를 숭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니까요.》

리태경로인은 어그러지는 말이라도 꺼낸 사람처럼 어줍게 웃었다.

나는 놀랐다. 이 산골에 간디의 숭배자가 다 있다니?!

《로인님, 그 로인은 어떻게 되여 간디를 숭배하게 됐습니까?》

《조선서 건너온 어떤 신사멋쟁이가 령감에게 간디를 소개해준 모양입니다. 우리 나라 신문에 실린 간디의 편지까지 보여주었다지 않겠습니까. 그후부터 령감이 마실방에만 나타나면 폭력이 어떻고 비폭력이 어떻고 하면서 무혈독립론을 념불처럼 외웠습니다.》


나도 길림시절에 《조선일보》지상에서 간디의 편지를 읽고 박소심과 함께 무저항주의를 론평한적이 있었다. 그 편지의 원문은 아래와 같은것이였다.

사랑하는 친구여!

나는 당신들의 편지를 받았나이다. 내가 보낼 유일한 부탁은 절대적으로 참되고 무저항적인 수단으로 조선이 조선의것으로 되기를 바란다는것뿐입니다.

1926년 11월 26일 사바르마티에서

엠. 케이.간디

편지가 보여주는바와 같이 간디는 조선사람들에게 무저항적인 방법으로 독립을 이룩할것을 설교하고있다. 아마 간디의 사고방식에 매력을 느낀 어떤 무저항주의자가 그에게 편지를 보낸것 같았다.


길림의 교포청년들속에서는 간디의 사상을 자기의 신앙으로 삼고있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다. 비폭력불복종운동 같은것으로 포악하고 탐욕스러운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서 독립을 선사받을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환상가가 있을수 없었다. 그러나 간디의 사고방식은 무력항쟁을 포기하였거나 독립운동의 길에서 탈락한 일부 민족운동자들에게서 일정한 공명과 지지를 받았다.


영국의 지배를 저주롭게 여기면서도 단 한사람의 영국인도 해칠 생각이 없다고 하였고 영국정부의 조직적인 폭력을 억제할수 있는 힘은 조직화된 비폭력이라고 언명한 간디의 사상이 광범한 인도인민의 호응을 불러일으킨것은 그 사상을 관통하고있는 인도주의정신의 힘에 있었다고 말할수 있다. 그것이 인도의 실정에 어느 정도 부합된것이였는지는 모르겠다.


설사 그것이 타당한것이였다 할지라도 아세아와 구라파의 서로 다른 강국을 종주국으로 섬기고있던 조선과 인도가 같은 처방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할수는 없었다. 인도는 인도이고 조선은 조선이였다.


인민혁명군의 군사정치활동이 가장 맹렬하게 벌어지고있던 라자구지구에 무혈독립론에 미련을 가지고있는 사람이 있었다는것은 리해할수 없는 일이였다.

《그 령감은 죽는 순간에야 무혈독립론이 허황하다는걸 깨달았을것입니다. 그것마저 깨닫지 못하고 간다면 얼마나 슬픈일입니까. 왜놈들은 피맛을 보구싶어 자꾸만 갈개는데 당치도 않게 무혈이라니…》

리태경로인은 말을 잇지 못하고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로인님 말씀이 지당합니다. 강도들하고는 무혈이라는게 있을수 없습니다. 미친개는 몽둥이로 다스려야 합니다!》

《장군님, 조선사람목숨이 너무도 헐값입니다. 우리 백의민족이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부탁입니다. 사도구사람들의 피값을 받아주십시오. 그 원쑤만 갚아주면 나는 죽어도 눈을 감고 편안히 죽겠습니다.》

로인은 나를 바래주면서도 복수를 해달라고 거듭 간청하였다.

《로인님의 부탁을 명심하겠습니다. 우리가 사도구인민들의 피값을 받아내지 못하고 돌아오면 이 집 마당에 얼씬도 못하게 하십시오.》

살인마들의 머리우에 철추를 내리려는 확고한 결심을 품고 우리는 라자구진공의 길에 올랐다.


나는 한평생 민족의 존엄을 위하여 싸워왔다. 나의 일생은 민족의 존엄과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투쟁력사였다고 말할수 있다. 우리 민족을 해치거나 우리 나라의 자주권을 건드리는 놈들을 나는 한번도 용서하지 않았다. 우리 인민을 깔보고 우롱하는자들과도 타협하지 않았다. 우리를 우호적으로 대하는 사람들과는 선린관계를 맺고 친선적으로 지내왔으며 비우호적으로 대하거나 차별시하는 사람들과는 담을 쌓고 살아왔다. 상대가 우리를 치면 우리도 상대를 치고 상대가 우리에게 미소를 보내면 우리도 상대에게 미소를 보냈다. 떡으로 치면 떡으로 치고 돌로 치면 돌로 친다는것이 내가 일생을 통해 고수해오고있는 호상성의 원칙이다.


지난날 조선의 무능한 봉건정부는 우리 나라에 와있는 일본인들에게 치외법권을 적용하였다. 오늘날 남조선통치배들이 미군의 위법행위앞에서 법을 발동하지 못하고 눈을 감아주고있는것처럼 일본인들이 우리 인민들의 생명재산을 마구 침해하는것을 보면서도 그 가해자들을 조선의 법에 따라 처벌하지 못하였다. 일본사람들은 일본의 법으로만 다스리게 되여있었다. 하지만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구역에서는 그런 치외법권이 허용될수 없었다. 우리에게는 조선민족과 조선의 강토에 대한 그 어떤 형태의 침노도 용납하지 않는 우리의 법이 있었다. 사도구참변을 도발한 살인자들은 그 법앞에서 무사할수가 없었다.


우리는 단오날을 계기로 서산포대부터 점령하고 일거에 라자구시내에 돌입할 계획이였다. 훈춘련대의 도착으로 하여 작전력량은 증강되였다.

혁명군의 종대들이 라자구쪽으로 계속 행군해가고있을 때 시내에 정찰을 갔던 왕청련대의 대원들이 철중대장을 데리고 내앞에 나타났다. 철중대장이 나를 갑자기 찾아온것은 우리에게 문영장의 동향을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영장님은 인민혁명군이 라자구를 포위공격한다는 정보를 받고 무서워서 벌벌 떨고있습니다. 정안군이 쓸어와서 사도구의 위치를 대달라고 하기에 부하를 시켜 위치를 대주게 하였는데 그런 변이 일어날줄이야 어떻게 알았겠는가, 내가 잘못한것이 있다면 왜놈들 압력에 못이겨 사도구에 정안군을 안내한것이고 부하들이 백성들의 재물을 로략질할 때 그것을 제지시키지 못한것밖에 없다, 아무렴 김대장과의 약속을 의식적으로 줴버렸겠는가고 하면서 제발 용서를 빈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철중대장의 말을 듣고 여러가지로 생각해보았다. 문영장이 사병들의 략탈행위를 엄단하지 못한것과 부하를 시켜 정안군의 길안내를 해주도록 한것은 분명 우리와의 약속을 어긴것으로 된다. 하지만 일본상전들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괴뢰군부대의 장교가 한짓이니 그 죄는 대범하게 다스릴수도 있었다.

만약 문영장을 쳐없앤다면 어떤 후과가 빚어지겠는가? 우리와의 공수동맹은 완전한 결렬에 이를것이고 라자구에는 문영장부대와는 대비도 할수 없는 악질적인 부대가 새롭게 파견되여올것이다. 우리가 원하건 원하지않건 적들은 반드시 그렇게 할것이다. 이것은 제2, 제3,제4의 사도구참변이 재현될수 있는 조건으로 될것이다. 이 일대에 왕청, 훈춘 지방의 유격구주민들을 소개시키려던 우리의 노력도 난관에 봉착할수 있고 라자구지구를 조선인민혁명군의 전략적지탱점으로 계속 고수하려는 우리의 의도도 엄혹한 도전에 부딪칠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할것인가?


나는 문영장을 징벌하지 않고 우리편에 더 바싹 끌어당기기로 결심하였다. 그대신 로흑산일대의 정안군을 답새겨 인민을 해치는자들의 말로가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주려고 하였다. 동녕현일대에 파견되였던 정찰병들의 보고에 의하면 로흑산 왕보만이라는곳에 증강된 정안군 1개 중대의 병력이 주둔하고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도구를 초토화한 살인광들의 집단이라는것이였다. 정찰병들은 이 중대가 악명높은 요시자끼부대에 소속된 1개 파견대라는것까지 탐문해왔다.

나는 철중대장에게 우리의 결심을 말해주었다.

《인민혁명군은 라자구진공계획을 보류한다. 문영장이 우리의 신의를 저버린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고있다. 문영장은 공수동맹에 충실하겠다는 의사를 재차 표명하여왔는데 그것을 무엇으로 담보할수 있겠는가. 그 맹약이 사실이라면 우선 단오날 인민혁명군이 라자구시내에서 군민련환운동회를 할 때 안전을 보장해주겠다는것을 담보하는것이 좋겠다. 당신이 돌아가서 영장에게 우리의 의사를 전달하라. 우리는 여기서 회답을 기다리겠다.》

철중대장은 군영에 돌아가자 문영장이 우리의 모든 요구를 수락하였다는것을 통지해왔다.


우리의 련대들은 전투대형으로부터 명절놀이대형으로 재빨리 이행하였다. 라자구진공의 설계를 담당했던 작전의 능수들은 군민의 기호와 감정에 맞는 체육종목들을 설정하고 군민일치의 위력을 시위할수 있는 합리적인 선수단구성을 위해 바쁘게 돌아갔다. 적이 주둔하고있는 성시 한복판에서 혁명군《토벌》의 사명을 띠고있는 적군의 호위를 받으며 대성황리에 진행된 전쟁사상 류례를 모르는 라자구군민련환운동회는 이렇게 마련되였다.


이날은 지하에 숨어있던 공작원들까지 다 떨쳐나와 운동회를 구경하였다. 문영장부대의 사병들도 이 희한한 명절놀이에 넋을 잃었다. 사도구참변을 계기로 저락되였던 인민들의 기세는 단오놀이와 함께 다시금 고조되였다. 군민련환운동회는 그 소속과 명칭에 관계없이 인민을 건드리지 않는 군대와는 언제든지 우호적관계를 가질 준비가 되여있는 우리의 변함없는 립장과 의지를 내외에 당당하게 천명하였다.


우리는 태평구에서 중대정치지도원급이상의 군정간부들이 참가하는 지휘관회의를 열고 로흑산전투 계획을 면밀히 작성한 다음 사도구참변의 희생자들에 대한 추도식을 성대히 하였다. 그 추도식은 혁명군장병들의 복수심을 격발시키는 하나의 좋은 연단으로 되였다.


우리가 로흑산에서 《홍수툴》을 요정낸것이 아마 1935년 6월중순경이라고 생각된다. 《홍수툴》이란 만주지방인민들이 정안군놈들에게 달아준 별명이다. 소매에 붉은 완장을 끼고다니는 그들의 허식적인 차림새가 그런 별명을 만들어내게 한 동기로 된것 같다.


그때 우리 대원들은 왕보만에서 적들을 아주 교묘하게 끌어내였다. 로흑산의 왕보만에 주둔하고있는 정안군은 제1차 북만원정때에 우리의 발뒤꿈치를 물고 집요하게 따라다니던 부대였고 사도구참변을 일으킨 독종들이였다.


우리는 처음에 소부대를 파견하여 정안군에 싸움을 걸어보았다. 그러나 후각이 예민한 정안군은 우리 부대가 왔다는것을 어떻게 알아냈던지 좀처럼 싸움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마을사람들을 통하여 정안군놈들이 겨울에만 유격대《토벌》을 하고 여름에는 될수록 혁명군과의 교전을 피하면서 산림대나 토비 같은것만 친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이것들을 치자면 우선 우리에서 끌어내야 하였다. 그래서 유인전법을 적용하기로 결심하였다.

우리는 적들이 볼수 있게 일부러 대낮에 부대를 라자구로 철수시켰다. 놈들로 하여금 우리가 다른데로 철수한것으로 믿게 하려는 계책에서였다. 그리고는 그날밤으로 은밀히 정안군이 주둔하고있는 왕보만근처의 수림속으로 부대를 이동시켜 매복진을 치도록 하였다. 그 다음 중국말을 아는 대원 10여명을 산림대로 가장시켜 왕보만으로 내려보냈다. 마을에 내려간 우리 대원들은 주민들의 하늘소도 빼앗고 가재도구도 차굴리고 남새밭의 울짱도 뽑아던지면서 한바탕 야료를 부리는척하다가 부대로 돌아왔다.


그러나 첫날은 어떻게 된 셈판인지 정안군놈들이 그 수에 걸려들지 않았다. 우리는 불편한대로 매복지점에서 마른 음식으로 대충 저녁을 굼때고 모기들의 성화를 받으면서 지루하게 하루밤을 보냈다. 리관린이 장철호와 함께 백두산을 개척할 때 모기들의 성화가 너무나도 심해서 이마에 쑥타래를 둘러감고 감자밭을 맸다는 말을 들었는데 로흑산 깔따구의 드살이 또한 이만저만하지 않았다. 대원들은 볼과 뒤덜미를 철썩철썩 때리면서 이 로흑산이라는데서는 깔따구조차도 《홍수툴》을 닮아서 독침으로 사람을 찌른다고 푸념을 하였다.


다음날에도 유인조동무들은 왕보만부락에 내려가서 산림대행세를 하고 돌아왔다. 좀 괜찮게 사는 집에 가서 닭을 두세마리 잡아가지고 슬금슬금 꽁무니를 사리는척했더니 그제서야 정안군이 무리를 지어 유인조를 뒤따르기 시작했다. 그날은 주민들이 산림대가 또 왔다갔다고 굉장히 아부재기를 친 모양이였다.


사실상 정안군놈들은 유격대의 전법에 정통하고있었다. 그들은 유격대가 수송대는 어떻게 치고 성시습격은 어떤 방법으로 한다는것까지 다 알고있었다. 이런놈들을 속인다는것은 참새목에 굴레를 씌우는것만치나 힘든 일이였다. 우리 유인조동무들이 확실히 산림대 망나니들의 연기를 빈틈없이 수행한것만은 틀림없었다.


이 전투와 관련된 일화들중에서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것은 내가 두번째날 매복지점에서 피곤에 못이겨 졸고있을 때 김택근의 부인이 나를 흔들어 깨워주던 일이다. 그 녀자는 내가 십리평골짜기에서 열병에 걸려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있을 때에도 간호병의 구실을 하느라고 남편과 함께 많은 고생을 하였다. 말하자면 부관노릇을 한셈이였다. 그때 택근의 처가 넙적하게 생긴 풀을 뜯어가지고 와서 먹음직하게 생겼는데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내가 보니 취였다. 곰이 많은 고장에서 나는 취이므로 나는 그 풀에 《곰취》라는 이름을 붙이자고 했다. 해방후에는 대홍단에 갔다가 거기서 다시 곰취를 먹어보았다.


혁명군의 매복진으로 기여든 적들은 《이런곳에서 포위에 들면 재미없겠는데.》 하면서 불안스럽게 사방을 두리번거리였다. 나는 적들이 산골짜기에 다 들어섰을 때 전투개시를 알리는 신호총을 쏘았다. 일본지도관을 겨냥하여 한방 갈겼는데 단번에 꺼꾸러졌다. 적은 저항도 변변히 못하고 순식간에 괴멸되였다. 유격대의 선동가들은 적들이 지형지물에 의지하여 저항을 꾀하기전에 중국말로 함화공작을 들이대였다.《일제를 타도하라!》, 《총을 바치면 목숨을 살려준다!》는 함화에 적들은 저항을 포기하고 순순히 무장을 바치였다. 로흑산전투는 우리가 진행한 최초의 대표적인 유인매복전이였다. 이때부터 일본군경과 위만군은 우리의 전법을 《라와전법》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로흑산전투에서 《천하무적》을 자랑하며 안하무인격으로 행세하던 정안군을 100여명이나 쏴제끼였다. 중기, 경기,보총,수류탄,군마를 비롯한 많은 전리품들이 우리의 수중에 들어왔다. 그 전리품들중에는 박격포도 있었다. 적들은 말안장에 그 포를 싣고 거들먹거리였으나 한방도 쏴보지 못한채 우리에게 빼앗기였다. 내가 조택주로인에게 주었던 백마도 바로 이 전투에서 로획한 10여마리의 우량종 군마들중 한마리였다.


우리는 이 전투에서 여러마리의 군견도 로획하였다. 그때 우리 지휘관들은 그 군견들중 몇마리를 나의 호신용으로 쓰라고 권고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 세빠드들을 모두 태평구와 석두하자 인민들에게 보내주도록 하였다. 로획한 군견들은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였기때문이였다.


다홍왜회의때 동무들이 나의 호신용으로 일본군에게서 로획한 개를 한마리 끌어온적이 있었다. 아주 영악하고 령리한 개여서 도움을 받을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전우들의 성의는 고마왔으나 나는 일본사람들이 길들인 개인데 빨찌산대장에게 정을 붙이지 못할것이라고 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니나다를가 후날 적《토벌대》와의 싸움이 붙었을 때 그 개는 일본놈의 냄새를 맡고 적진으로 달아나버리고말았다.

나는 백마의 덕은 많이 보았지만 전리품군견의 덕은 한번도 보지 못하였다.


우리의 항일전쟁사에서 유인매복전의 전형으로 내세우고있는 로흑산전투의 전과정은 유인매복전이야말로 유격전의 특성에 부합되는 가장 능률적인 전투형식의 하나라는것을 실증해주었다.

이 전투를 시발점으로 하여 우리는 후날 몽강땅에서 구도의 부대를 소탕하였고 장백, 림강 일대에서는 요시자끼자신이 이끄는 정예부대를 타승하였으며 최후결전의 시기에는 정안군의 후신인 1사를 와해괴멸시키는 련전련승의 통쾌한 기록을 남기였다.


로흑산전투는 고정된 지역에서 유격구방위에 주력을 돌리던 인민혁명군이 협소한 해방지구의 울타리를 터치고 광활한 지대에 진출하여 대부대활동의 위력을 처음으로 시위한 전투였다. 로흑산골짜기를 진감시킨 아군의 총성은 유격구를 해산하고 광활한 지대에 진출하여 적극적인 대부대활동을 전개할데 대한 요영구회의방침의 정당성에 대한 찬가였으며 제2차 북만원정의 승리를 예고해주는 종소리였다. 로흑산에서의 승리로 하여 인민혁명군은 2차 북만원정을 성과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준비를 더 잘 갖출수 있게 되였다.


인민혁명군의 승전소식은 전광석화와도 같은 속도로 만주대지에 전파되여 정안군의 압제밑에서 고통받던 조중 량국의 로농대중에게 신심을 주고 그들을 투쟁에로 고무해주었다. 로획한 말들에 전리품을 처싣고 태평구로 돌아올 때 그고장 인민들은 도로량옆에 장사진을 치고서 우리들을 열광적으로 환영하였다. 삼도구의 리태경도 우리가 휴식하고있는 신툰자마을로 달려왔다. 진창과 화소포 사람들도 위문품들을 가지고 인민혁명군을 찾아왔다.


나는 2차 북만원정전야에 훈춘유격대가 보내온 정보에 따라 대황구에 있는 1개 중대의 위만군을 돌려세우기 위한 작전을 하였다. 그때 나에게 정보를 가져온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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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그때 나에게 정보를 가져온 사람은 훈춘유격대에서 전령병으로 복무하던 황정해였다. 그의 아버지 황병길은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격살할 때 그 거사에 적극 참여했던 이름난 애국렬사였다.

황정해는 대황구의 위만군중대에는 련공사상을 가진 중사가 1명 있는데 그가 지금 대원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있다, 그런데 그는 중대전체를 돌려세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일부 대원들만 데리고 유격대로 찾아올 생각을 하고있다, 잘만 하면 중대전체를 돌려세울것 같은데 나의 조언을 바란다고 하였다.

대황구에 주둔하고있는 위만군중대에 대해서는 나도 이미 관심을 두고있었다. 그 1개 중대의 위만군은 우리가 다니는 길목에 뻗치고 서서 이모저모로 유격대의 활동을 구속하는 거치장스러운 존재였다. 우리는 중대장이 중국사람이라는것과 중대에서 통역으로 복무하는 조선사람이 아주 악질적인 인간이라는것까지 다 알고있었다.

병변공작에서 주인공역을 담당한 인물은 바로 황정해를 비롯한 우리 공작원들의 배후조종을 받고있던 그 중사였다. 중사는 우리가 파견한 공작원도 아니였고 공산당원도 아니였다. 그저 대련에서 로동자로 일하다가 군대에 징모된 평범한 청년이였다. 그가 속한 《토벌대》는 원래 열하에 있었다. 《토벌대》가 간도로 활동무대를 바꾸게 되자 그도 자동적으로 훈춘에 와서 복무하게 되였다.
열하에 있을 때부터 간도에 공산당이 와글와글하다는 선전을 많이 들어온 중사는 훈춘에 와서도 주변에서 벌어지는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였다. 지어는 공산당과 손을 잡고 자기의 운명을 새롭게 개척해보려는 엉뚱한 생각까지 품고있었다.

어느날 중사는 동료들과 함께 음식점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빌어먹을것, 공산당과 싸움을 해서는 뭘해, 차라리 이놈새끼들을 한놈 쏘아죽이고 넘어가고말아야지 하면서 불평을 털어놓았다. 음식점에서 그 광경을 목격하고 온 황정해는 이 사실을 곧 지휘관들에게 보고하였다. 중사는 곧 우리가 쟁취해야 할 사업대상이 되였다.

바로 이무렵에 훈춘시내에 소부대공작을 나갔던 우리 동무들중 한명이 경찰에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동무는 조선사람이였지만 중국말을 아주 능란하게 하였다. 경찰이 그를 비끄러매가지고 차고 때리고 고함을 치면서 야단법석을 할 때 시가지를 지나가던 그 로동자출신 위만군중사가 마침 그 광경을 보고 우리 동무를 가로챘다. 이 자식아, 공산당이면 공산당이지 너나 이 사람이나 다 압박받는 처지인데 사람을 이렇게 치는법이 있는가고 하면서 경찰놈을 후려갈기고 쫓아버린 다음 자기네 병영으로 우리 대원을 데려갔다.
중사는 우리 동무에게 말했다.
《당신을 당장 놓아줄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나하구 같이 우리 병영으로 가야겠다. 당신이 용감한 사람이라면 우리 부대에 가 하루밤 자면서 우리 중대장한테랑 공산군의 형편을 좀 말해주라. 우리는 그것을 몹시 알고싶다. 우리 중대에는 일본놈지도관이 하나 있고 통역을 하는 조선놈이 하나 있는데 이 두놈이 다 나쁜놈이다. 요 두놈은 수를 써서 시가지로 보낼테니까 마음을 놓으라.》

우리 동무는 중사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그런 권고를 하는지 알수없어 좀 얼떠름했지만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바에는 영예롭게 죽겠다는 마음을 먹고 위만군병영으로 따라갔다.
중사는 병영에 도착하자마자 자기의 친구인 중대장한테 우리 동무를 데리고 갔다. 세사람이 차탁을 가운데 두고 밀담을 한창 벌리고있을 때 일본지도관이 중대부로 쑥 들어와서 우리 동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중사는 지도관이 의심을 가지지 않도록 중대장을 향해 이 사람은 내 친구인데 술값 받으러 왔다, 그런데 돈이 없어서 야단났다, 중대장,술값을 좀 대주지 않겠는가고 하였다. 중대장도 능청스럽게 내가 술값을 대줄테니 그건 걱정말라, 당신의 친구이면 내 친구나 같은데 잘 대접해야지 그저 보낼수야 없지 않는가, 여기서 차나 마시면서 천천히 회포를 나누다가 헤여지라고 하였다.
일본지도관이 시가지로 내려간 다음 세사람은 밀담을 계속하였다.
중사의 간청으로 우리 동무는 공산당선전을 들이댔다. 유격대는 조선사람도 있고 중국사람도 있는 조중련합군이다, 나는 조선사람이다, 조선사람들도 일본놈의 만주강점을 반대한다, 당신네 위만군에도 애국자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과는 손을 잡을 용의가 있다고 하면서 위만군에 대한 우리의 정책을 선전하고 중국말로 위만군에 대한 노래를 몇가지 불러주었다.

우리 동무의 선전에 감화된 위만군중대장은 당신이 래일 돌아가서 상관에게 보고하라, 우리는 유격대와 싸울 생각이 없다고, 설사 우리 부대가 《토벌》을 간다 해도 수림근방에다 대고 암호로 총을 몇방 쏠테니까 당신네는 다른데로 피하라고 하였다.
중사는 중사대로 우리 동무를 바래주면서 나는 앞으로 당신과 련계를 가지고싶다, 당신도 나와 련계를 가지는것이 나쁘지 않을것이다, 오늘 토론된 내용을 당신네 정치위원한테 가서 보고하라고 하였다.

이렇게 되여 우리는 그 줄을 잡아쥐게 되였고 그 줄을 움직이면서 병변공작을 심화시키였다. 나는 황정해에게 구체적인 임무를 주어 대황구로 돌려보냈다. 황정해는 그 중사와 다시금 련계를 맺고 위만군중대를 통채로 병변시키기 위한 공작을 하였다. 중사는 황정해를 보고 《우리는 할수 없어 이 노릇을 해먹는다. 사람으로 태여나 남의 괴뢰노릇을 하는것보다 더 부끄러운 일이 어디 있는가. 당신네가 부럽다. 중대를 다 데리고 공산군편으로 넘어갈 각오가 돼있으니 우리를 습격해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하였다.

우리는 위만군의 병영근처에 2개 중대인가 3개 중대의 력량을 파견하였다. 그 중대들이 병영을 포위하고있다가 위만군사병들이 조기체조를 하고있을 때 위협사격을 하면서 함화를 들이댔다. 위만군측에서는 대표를 보내여 담판을 요구했는데 그 대표가 바로 우리의 영향을 받고있던 대련내기중사였다. 중사는 교전의 중지를 요구하고나서 우리의 대표앞에 병변결의를 표명하였다. 그 결의대로 150여명에 달하는 위만군장병들은 일본교관과 조선인통역을 제껴버린 다음 시가지에 있는 적들의 물건을 모조리 빼앗아서 말수레에 싣고 나팔을 불면서 우리 유격구역으로 들어왔다.

이 중대를 인민혁명군에 어떻게 편입시키겠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훈춘련대의 지휘관들은 한동안 토론을 많이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중대를 해체하여 인민혁명군의 새 중대들에 배치하자고 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중대를 해체하지 말고 그대로 편입시키자고 하였다. 그런데 이 두가지의 안중에서 압도적인것은 해체해서 편입시키자는 주장이였다.

련대지휘부는 이 안을 가지고 반변해온 중대의 지휘관들과 담판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위만군지휘관들은 자기네 중대를 해체하는데 좀처럼 동의하지 않았다. 훈춘련대의 정치위원 최봉호는 결론을 바란다고 하면서 나에게 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나는 위만군사병들의 요구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하여 그들속에 들어가서 담화를 하였다. 해체를 반대하는 위만군측의 립장은 강경하였다. 해체설로 하여 사병들은 몹시 뒤숭숭해하고있었다. 포로도 아니고 의식적으로 반변하여 넘어온 사람들을 그들이 원하지도 않는 방식으로 이 중대, 저 중대에 분산배치한다는것은 털어놓고 말해서 례절에도 어그러지는 처사였다. 가장 합리적인 안은 위만군의 요구를 최대한으로 존중하는것이였다.

나는 중대를 해체하지 않고 통채로 편입시키되 그것을 인민혁명군의 실정에 맞게 3개의 중대로 나눈다는것과 각 중대의 지휘관은 병변군인들의 전대회의에서 민주주의적인 방법으로 선거한다는 절충안을 내놓고 토의에 붙이였다. 위만군측에서는 그 절충안을 만족스럽게 받아들이였다. 후국충련대장과 최봉호정치위원도 그 안을 지지하였다.

병변공작에서 주동적역할을 한 중사도 중대장으로 되였다. 그전 중대장은 쏘련에 류학을 보내기로 하였다.
나는 위만군중대의 병변군인들가운데서 중국관내로 들어가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쏘련을 거쳐 관내로 보내고 남아서 우리와 함께 싸울것을 지망하는 사람들은 훈춘유격대에 편입시켜 데리고다니다가 북만에 가서 리연록의 부대에 넘겨주었다.

적들은 라자구, 태평구 방면에 진출하여 적극적인 군사정치활동을 벌리고있는 인민혁명군의 대부대를 포위섬멸하기 위하여 관동군, 위만군,경찰,자위단,철도경호대 등의 대무력을 동원하였다. 《토벌》군의 주력은 라자구방면에서 태평구를 압박하였고 일부는 요영구와 백초구 일대에 전개되여 인민혁명군이 서남방향으로 퇴각할 경우 이 일대의 협소한 지역에서 완전히 포위섬멸할 작전준비를 하고있었다.

1935년 6월 20일 적들은 마침내 태평구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우리는 태평구뒤산에 부대들을 전개시키고 박격포중대 가까이에 지휘부를 정하였다. 지휘처아래에는 천연동굴이 있었다.
적들은 배를 타고 대화소포강을 도하하기 시작했다.
이때 우리의 박격포중대가 포문을 열었다. 배 한척이 강복판에서 박산이 났다. 혼비백산한 적들은 대화소포강도하를 단념하고 자기들의 진지로 황망히 달아나버리였다. 그 박격포의 포수들이 참으로 대단하였다. 위만군을 병변시키고 그 일부 력량으로 포중대를 따로 내온 보람이 있었다. 위만군의 전투참여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회의론자들은 그제서야 자기들의 실책을 뉘우치였다.
나는 포중대장을 얼싸안고 전투승리를 축하해주었다. 위만군에서 넘어온 사람들을 미덥지 않게 여기던 혁명군의 일부 지휘관들도 기쁨을 참지 못하고 포좌지로 뛰여왔다. 대화소포강에서 울린 인민혁명군의 포성은 우리 나라 포무력의 탄생을 의미하는 력사적인 고고지성이였다. 적들은 그 포성앞에서 전률하였고 인민은 그 포성앞에서 춤을 추었다. 우리는 지금 그날을 포병절로 기념하고있다.

대화소포강을 도하하려다가 우리의 박격포공격에 넋을 잃고 라자구로 달아난 문영장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것이 인민혁명군이다. 어제 포를 로획해가지고 오늘은 단 두방에 명중시키는 귀신같은 재간을 가지고있으니 그걸 어떻게 당해내겠는가. 인민혁명군과 맞서는것은 머저리들이나 할짓이다. 이제는 내 목에 일본도가 날아들어도 김일성부대와는 싸우지 않겠다.》고 하였다 한다. 물론 이것도 철중대장이 보낸 정보였다.

로흑산과 태평구에서 련이어 전승의 개가를 올린 인민혁명군의 위력을 배경으로 하여 우리의 혁명조직들은 도처에서 생기발랄하게 움직이였다. 라자구반일회장은 인민혁명군이 로흑산에서 정안군을 녹여낸 다음부터 시내에 살고있는 주민들이 촌정부를 찾아가지 않고 자기를 찾아와 결혼등록도 하고 출생신고까지 한다고 자랑하였다.

인민을 건드리는놈들은 용서하지 않는다!
우리는 로흑산과 태평구에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이 의지를 다시금 실천으로 힘있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인민을 건드리는자들은 너무나도 간악하였다. 《공산주의를 박멸해야 우리가 생존한다!》, 이것은 바로 인민의 적으로 등장한 인간들이 가지고있는 신앙이였다. 우리는 이런 신앙을 가진자들과 아직도 많은 싸움을 해야 하였다.

태평구전투때 적들이 흘린 피는 한주일이 지나도록 대화소포강을 어지럽히였다. 그래서인지 그해에는 전례없이 많은 황어가 떼를 지어 이 강으로 올라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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