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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8-1. 리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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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5,716회 작성일 15-04-24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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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반일의 기치 높이

1. 리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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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리광


나와 리광과의 우정은 길림에서부터 시작되였다.

동만청총계통에서 온 김준이네 패거리들이 하루는 낯선 청년 한사람을 데리고 와서 나에게 소개해주었다. 그 낯선 청년이 바로 리광이였다.


리광이 길림에 나타난것을 두고 그때 우리 동무들은 여러가지로 많은 추리를 하였다. 공부를 하고싶어 왔을것이라는 사람, 조직선을 찾으려고 왔을것이라는 사람, 길림일대의 청년학생운동실태를 알고싶어 왔을것이라는 사람 등으로 제나름의 해석들을 하였다. 김준은 리광이 길림에 온것은 성적으로 소집되는 교원들의 어떤 비밀회합에 참가하기 위해서인것 같다고 넌지시 귀띔해주었다.


총명하고 대범하고 과묵한 사람, 이것이 리광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이였다. 그후 접촉이 거듭되는 과정에 나는 그가 남달리 감수성이 예민하고 인정이 무르며 우애심이 지극한 청년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어떻게 되여서인지 그때 우리 동무들은 초면인물인 리광에게 홀딱 반해서 식견을 높이려면 문광중학교가 좋고 출세를 하려면 법정대학이 안성맞춤이고 혁명을 하려면 육문중학교가 제일이라는 말까지 해가며 그를 길림바닥에 잡아두지 못해 안달아하였다.


리광도 길림을 떠나고싶어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연길현 고성자라는곳에서 소학교를 다닐 때 독립군령감들의 심부름을 해주느라고 길림에 몇번 다녀간적이 있는데 그때보다는 청년학생들의 생활풍조가 몰라보게 달라졌다고, 전에는 이 도시에 청년들이 있는지 없는지 느끼지 못할 형편이였지만 지금은 학생들의 사회운동이 활발해져서 도시가 부글부글 끓는 쇠가마 같은 인상을 준다고 탄복하여마지 않았다. 이렇게 되여 리광은 길림제5중에서 얼마동안 학창생활을 하였다.


리광이 초기에 접촉한 인물들은 대부분이 홍범도, 김좌진,황병길,최명록과 같은 독립군거두들이였다. 고성자의 그의 처가에는 독립군의 한개지휘부가 오래동안 있었는데 그것이 반연이 되여 그는 많은 민족운동지도자들과 접촉하였다. 눈썰미가 좋고 판단력이 빠르며 입이 무거운 리광의 기질은 인차 독립군령감들의 주의를 끌었다. 오동진이나 리웅이 나를 자기네 교대자로 만들려고 했던것처럼 그들도 아마 리광을 독립군의 후비인재로 키우려고 했던것 같았다.


리광은 어려서부터 외할아버지가 운영하는 서당을 다니면서 한문공부를 하였는데 아버지가 신병으로 고생하는것을 보고서는 진학의 꿈을 버리고 14살의 연약한 몸으로 가계를 유지해나갔다. 16살때부터는 완전한 호주로 가사를 도맡아보았다. 그러다나니 학교공부도 늦어서야 하였다. 학창생활을 끝낸 그는 한동안 연길과 왕청의 소학교들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때까지는 그를 본명대로 리명춘이라고 불렀다. 리명춘이 리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기 시작한것은 그가 춘화향 북하마탕에서 교원을 할 때부터였다. 그때 북하마탕에서는 주변 8개 학교가 모여 계몽활동의 한 고리로 웅변대회도 하고 운동회도 하였는데 당시 지하공작에 관여하고있던 그는 리광으로 변성명을 하고 하마탕팀선수로 축구경기에 출전하였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리광으로 부르게 되였다.

《나에게 민족주의를 안내한것도 독립군들이고 공산주의를 안내한것도 독립운동이요.》

리광은 나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 고성자시절을 회상하면서 이런 말을 하였다.

내 귀에는 그 말이 몹시 괴이하게 들리였다.

《그렇다면 그 독립군령감들이 리광동무에게 단꺼번에 두가지 사조를 내리먹였단말이요?》

《아니, 내리먹였다는건 아니고 뭐라고 할가… 물을 먹였다고 하는 표현이 적중하겠는지, 하여튼 나는 그 령감들을 통해서 민족주의적인 영향도 받았고 동시에 맑스-레닌주의사조의 영향도 받았으니까.》

《그 령감들은 이중적인 사조의 소유자들이였던게로구만.》

《이중적인 사조의 소유자라기보다는 방향전환을 모색하던 인물들이였다고 할수 있지. 그들은 독립군운동을 하면서도 슬금슬금 공산주의서적들을 탐독했댔소. 우리 처가집에 가면 방구석에 그 령감들이 보는 책이 디글디글했소. 그래서 나도 심심풀이삼아 읽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퍼그나 인이 배겼소.》


나는 리광의 손을 덥석 그러잡고 허물없이 말했다.

《공산주의신봉자를 알게 되여 기쁘오.》

그러자 리광은 웬일인지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내 말을 부정해버리였다.

《아니요. 나는 아직 공산주의자가 되지 못한 사람이요. 맑스나 레닌이 제창한 공산주의원리가운데는 내가 리해하지 못할 개념들이 적지 않았소. 나의 소박한 눈으로 보면 공산주의적인 리상이라는게 어쩐지 너무 허황하게만 생각되였소.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성주동무는 좀 섭섭해할수도 있겠는데 에두르기가 싫어서 한 말이니 널리 량해해주오.》


첫 대면이였지만 나는 리광의 그 솔직한 성품이 마음에 들었다. 그 솔직성이 그의 첫째가는 매력이기도 하였다.

초기의 리광은 이처럼 민족주의자도 아니고 공산주의자도 아니였다. 한마디로 말하면 방향전환도상에 있었던 인물이였다. 그는 길림에 와서 우리와 접촉하는 과정에 완전한 공산주의신봉자로 되였다. 그러나 우리가 조직한 공청이나 반제청년동맹 조직에 망라되지는 않았다.

리광이 길림으로 올 때 학전 3만여평에 해당되는 토지문서가운데서 3장을 저당잡히고 400여원의 로자를 마련했다는 자료도 나왔다는데 그 사실여부는 잘 알수 없다. 학전이란 교육기관을 운영하기 위하여 국가가 특별히 떼여준 논과 밭을 말한다. 그 자료가 사실이라면 리광이 개인소유도 아닌 공유지를 저당잡히는 모험을 하면서까지 객지로 떠날 용단을 내린것으로 보아 포부가 대단히 컸던것 같다.


그가 집을 떠나면서 처남에게 남긴 편지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의 비장한 결의가 적혀있었다고 한다.

《나는 만주벌판과 조선8도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진정한 애국자를 찾고야말겠다. 이 소망이 10년후에 이루어질지 20년후에 이루어질지 그것은 누구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일을 성사시키기전에는 부모님의 슬하로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것을 맹약하는바이다.》

이 결의를 보면 리광의 성미도 알수 있고 그가 집을 뛰쳐나와 만주의 주요도시들과 정치활동의 중심지들을 발이 닳아빠지게 돌아다닌 리유도 짐작할수 있다.


리광은 대바르고 깐깐하면서도 궁리를 잘하는 사람이였다. 중국말도 동북본토배기들 못지 않게 자유로이 구사하였다. 이런 장점은 후날 그를 십가장, 백호장,향장의 직책에서도 일할수 있게 하였다.

서도출신인 나는 리광을 통하여 간도의 풍습, 함경도 풍습도 배울수 있었다.


리광은 길림에 온후 무슨 까닭에서인지 조직생활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짐작컨대 그것은 길림을 잠간동안 들렸다 가는 정거장 같은곳으로 보는데서 온 림시관념의 작용때문이 아니였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대신 그가 나와의 거래는 많이 하였다. 나중에는 나를 통하여 우리 어머니와도 범연치 않은 인연을 맺었다.


리광이 우리 어머니를 만난것은 길림에서 공부하다가 간도로 돌아갈 때였다. 출발에 앞서 나를 찾아온 그는 작별인사를 나누다가 느닷없이 이런 말을 꺼내는것이였다.

《성주, 간도로 돌아갈 때 잠간 무송에 들려 성주어머니를 만나뵙고싶은데 그래도 일없을가?》

나는 리광이 그런 결심을 한것이 고마왔다.

《원, 리광답지 않게 일없을가는 또 무슨 일없을가요. 만나보고싶으면 만나보는게지. 그것도 허락을 받아야 하나?》

《그럼 동의한단 말이지? 좋소! 내 그럼 결심대로 어머니를 만나겠소.남들이 다 성주어머니를 〈우리 어머니〉라고 하면서 따르는데 난 아직 뵙지조차 못했으니 세상에 이런 인사불성이 어디 있겠소. 왜 성주어머니가 김혁이나 계영춘이 같은 사람한테만 〈우리 어머니〉겠소. 나도 어머니로 모시고싶단 말이요.》


《고맙소. 리광! 그러니 우리 어머니한테 아들이 또하나 늘어나게 됐구만. 나와 리광은 오늘부터 친형제요.》

《그렇다면 잔을 찧어야 하지 않을가. 하다못해 국수라도 나누든가.》

물론 우리는 잔도 찧고 국수도 나누었다.


리광은 결심대로 무송에 들려 며칠동안 우리 어머니를 동무해드리다가 왕청으로 돌아갔다. 그 당시 그의 가족은 연길현 의란구가 아니라 왕청현에 거주하고있었다.

리광이 무송을 떠나간후 어머니가 나에게 보낸 편지는 리광에 대한 소식으로 일관되여있었다.

《성주야, 리광이 오늘 간도로 떠나갔다. 내 그 사람을 송화강나루터까지 바래주었지. 너를 객지에 떠나보낸 날처럼 마음이 허전해서 일손을 잡을수 없구나. 어쩌면 사람이 그렇게도 싹싹할수 있을가. 남의 자식이라는 생각이 도무지 나지 않으니 이상한 일이 아니냐. 그 사람도 나를 친어머니 같다고 하더라만. 내 슬하에 끌끌한 아들들이 날마다 늘어나는게 얼마나 흐뭇한지 모르겠다. 세상에 락이 있다면 이보다 더 큰 락이 어디 있겠니. 네가 나한테 참 좋은 사내를 소개했다. 글쎄 그 리광이란 사람이 철주를 데리고 양지촌에 가서 아버지의 묘에 절을 하고 벌초까지 하고 오지 않았겠니. 우리 집에 드나드는 너의 동무들이 한둘이 아니고 내가 아는 청년들도 여럿이지만 리광이 그 사람처럼 정이 푹푹 들게 처신하는 사람은 처음이구나. 아무쪼록 너희들의 우정이 저 남산 송백처럼 변치말고 청청하기를 바란다.》


이 편지를 받은 날은 나도 하루종일 들뜬 기분으로 송화강변을 거닐었다. 글줄마다에 차넘치는 어머니의 희열이 나까지도 감염시키였다. 어머니가 기쁘다면 나도 기쁘고 어머니가 만족하다면 나도 만족한것이다. 리광의 출현이 정녕 어머니를 그렇게도 만족스럽게 했다면 그것은 나에게도 최대의 기쁨으로 되는것이다.


리광이 길림을 떠난후 나는 우정국으로부터 한장의 송금통지서를 받았다.

내가 길림에서 육문중학교를 다닐 때 많은 사람들이 나를 재정적으로 후원하였다는것은 이러저러한 기회를 통하여 여러번 말한바가 있다. 나에게 학비를 대준 사람들은 대부분 오동진, 손정도,량세봉,장철호,현묵관과 같이 길림시내에 거주하거나 류하, 흥경,무송,화전을 비롯한 독립군의 본거지들에 있으면서 정의부 본부에 들락날락하던 아버지의 친구들이였다.

길림시절의 나의 후원자들가운데는 공청원들과 류길학우회원들도 있었다. 문광중학교에 적을 두고 공청열성자로 활동하던 신영근도 부자는 아니였지만 나의 학비를 보태주었다.


이미 이야기한바지만 그 당시 어머니의 하루수입이란 삯바느질을 해서 벌어들이는 5~10전 정도의 보잘것없는 돈이였다. 하루 10전씩 버는 때라야 월 3원의 돈을 쥐는데 그 3원이라는 금액은 육문중학교가 제정한 한달 학비와 맞먹는것이였다.

어머니는 나에게 학비를 보낼 때에도 돈을 절약하느라고 우정국신세를 지지 않았다. 수공료를 받아서는 한달 월사금이 될만큼 푼푼이 모아두었다가 길림으로 가는 인편이 있으면 보내주군하였다. 그래서 나는 우정국출입을 하지 않아도 되였다.


인편을 통해 돈을 받는 날이면 나는 두가지의 상반되는 감정을 느끼군하였다. 하나는 학비가 왔으니 망신을 면하게 되였다는 다행스러운 감정이고 다른 하나는 나에게 월수입의 전부를 보내주고 집식구들은 어떻게 살아갈가 하는 걱정스러운 감정이였다.

사실 3원이란 돈은 부자집 도련님들의 한끼 식사비도 될가말가한 보잘것없는것이였다. 육문중학교의 학생구성을 보면 부자집자식들이 과반수였다. 우리가 돈깍지라고 부른 송금통지서들이 어떤 날은 수십장씩 학교에 날아올 때도 있었는데 그런 날이면 나처럼 송금통지서가 어떻게 생긴것인지 한번도 구경조차 하지 못한 평민집의 자식들은 공연히 어깨가 처져서 돌아갔다.


이런 때에 평민가의 자식들중에서도 그중 가난한 집의 자식인 나에게 10원의 뭉치돈이 단꺼번에 굴러들었다는것은 하나의 사변이였다.

나는 그 송금통지서를 들고 우정국으로 가면서 송금자가 누구이겠는가 하고 여러가지로 추리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그런 뭉치돈을 보내줄만한 친지는 종시 찾아내지 못하였다. 길림시밖의 다른 지방에서 나에게 송금을 할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우리 어머니인데 어머니한테 10원이나 되는 목돈이 생길리는 만무하였다. 혹시 우정국에서 사무를 처리하는 사람들이 이름을 삭갈려서 다른 사람이 받아야 할 송금을 내앞으로 돌린것이 아닐가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그런 일은 있음직할것 같지 않았다.

송금을 받는 사람이 송금자의 이름을 대지 못하면 우정국에서는 돈을 잘 내주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나한테서 송금통지서를 접수한 우정국 사무원은 송금자의 이름을 묻지도 않고 순순히 돈을 내주었다. 오히려 내쪽에서 취급원에게 돈을 보낸 사람이 누구인가고 물었다. 간막이너머에서는 뜻밖에도 《리광이요!》하는 대답소리가 들려왔다.


그 대답을 들은 순간의 나의 놀라움이란 실로 이루 형언할수 없는것이였다. 내 친구들가운데는 리광보다 더 가까운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 리광이 길림에서 나와 가깝게 지내다가 헤여진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돈까지 부쳐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나는 리광의 웅심깊은 성미에 몹시 감동되였다.


리광은 왕청에 돌아간 다음에도 우리 집과의 거래를 끊지 않았다. 우리 어머니가 안도에 계실 때 그는 많은 량의 첩약과 돈을 가지고 흥륭촌에 찾아왔다. 그 돈이란 그가 백호장을 하면서 다달이 모아두었던 생활비였다. 리광은 마음씨가 한정없이 고와서 남을 도와줄 때에는 뽕이빠지는줄도 모르고 제것을 다 퍼주었다.

리광은 어머니의 곁에 며칠씩 머무르면서 우리 집 살림살이를 돌봐주다가는 왕청으로 돌아가군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그는 우리 일가의 총애를 받는 단골손님으로 되였다.


남들이 나를 재정적으로 후원해줄 때마다 나는 그것을 갚아줄 힘이 없는것이 안타까왔다. 돈을 돈으로 갚아주자면 우리집 밑천이 너무도 딸리였다. 나는 조국의 훌륭한 아들이 되고 민중의 충실한 노복이 되는것으로써 나의 친지들과 동료들의 배려에 보답하려고 생각하였다.

리광은 1929년 겨울에 나를 만나려고 길돈선렬차에 몸을 실었다. 1929년 겨울이면 내가 감옥에 있을 때였다. 리광으로서는 때를 잘못 선택한셈이였다.


그대신 그는 자기가 숙박하고있던 객주집 접대부 공숙자를 통하여 길림지방 청년학생운동실태와 그것을 주관해온 지도핵심들의 투쟁방법에 대하여 속속들이 파악하였다. 공숙자는 접대부의 간판을 가진 녀자였지만 공청조직의 위임을 받고 길림시로 찾아오는 청년들과 우리와의 련계를 지어주는 중간다리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객주집에서의 해후가 계기로 되여 후날 그 녀자는 리광의 두번째 안해가 되였다. 리광의 첫번째 안해 김어린녀는 병으로 사망하였다.


리광은 상처를 하고난후에도 두고두고 그 녀자를 잊지 못해하였다. 본처와의 금슬이 좋았던 그는 세상에 그보다 더 훌륭한 녀자는 없을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일생을 홀아비로 살려고까지 결심하였다. 김어린녀가 세상을 떠난후 한해가 지나가기도전에 사방에서 많은 혼처들이 줄레줄레 나타났으나 마음이 결백하고 고정한 그는 뭇녀인들을 거들떠보려고도 하지않았다.


그래서 나는 리광을 만나기만 하면 동무들과 함께 어린 자식을 생각하고 병약한 부모들을 생각해서라도 장가를 들라고 설복하군하였다. 그의 결심을 휘여놓기란 참으로 마른나무를 비틀어서 송진을 짜는것보다 더 힘에 부치였다. 리광은 김어린녀의 3년상을 물린후에야 나의 권고를 받아 들이였다. 그의 두번째 부인 공숙자는 마음씨가 무던하고 현숙한 녀성으로서 뭇사람들이 모두 탄복할 정도로 전처의 자식들을 잘 키우고 돌봐주었다. 전처의 자식들도 그를 친어머니처럼 따랐다. 공숙자자신은 불행하게도 아이를 낳지 못하였다.


리광은 나를 만나지 못하였으나 공숙자의 소개로 길림육문중학교와 길림사범학교에 다니던 운동권청년들과 친교를 맺었다. 나라의 독립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우선 모든 애국력량을 단합시켜야 한다는것, 애국력량을 단합시키자면 그 기치로 삼을수 있는 사상과 로선이 있어야 하며 통일단결의 중심이 있어야 한다는것은 길림조직이 리광의 가슴에 심어준 진리였다. 리광은 이 진리를 받아안고 간도로 돌아갔다.


리광의 길림행은 그의 혁명활동에서 하나의 분기점을 이루는 사변이였다. 그는 이 걸음으로 하여 일본령사관 밀정들과 만주경찰의 감시속에 들게 되였으나 그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항로를 따라 용감하게 돌진하였다.


추수, 춘황 투쟁은 리광이 길림에서 얻은 진리를 확증하는 중요한 계기로 되였다. 그의 세계관은 이 투쟁을 통하여 새로운 높이에로 또다시 도약하였다.

거주지를 왕청으로 옮긴 다음부터 리광은 북하마탕이라는 곳에서 향장으로 일하였다. 혁명 그자체가 자기 리상의 전부라고 말해온 사람이 말단행정기관의 심부름군에 지나지 않는 향장의 벼슬을 얻었다면 그것은 자못 흥미있는 현상이라고밖에 말하지 않을수 없는것이였다.


나와 리광과의 상봉은 1931년 12월 명월구에서 다시금 이루어졌다.

리광은 그때 겨울명월구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의 숙식조건을 보장하느라고 사방으로 바쁘게 뛰여다니였다. 그가 좁쌀배낭에 다섯마리나 되는 꿩을 얹어가지고 회의장소에 나타난것을 보고 나는 마음속으로 역시 리광이답구나 하고 감탄하였다.


꿩고기와 닭고기로 꾸미를 한 간도특유의 농마국수는 곱배기를 청하지 않고서는 못견딜 지경으로 기막히게 맛이 좋았다.

나와 리광은 그 국수를 두그릇씩 겸상을 하여 배불리 먹은 다음 리청산이네 집 웃방에서 목침을 베고 드러누워 밤을 새워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먼저 리광이 우리 어머니의 살림살이를 극진히 돌봐주고 나의 학비를 보태준데 대하여 진심으로 되는 사의를 표시하였다.

《난 오늘저녁 국수를 먹으면서도 많은 생각을 했소. 그 꾸미에 깃들어있는 리광의 수고를 생각하면 사실 눈물이 날 지경이였지. 길림에서 공부할 때도 동문 날 데리고 식당으로 종종 가지 않았댔소. 이 신세를 언제 다 갚겠는지.…》


내가 이런 말을 꺼내자 리광은 나의 어깨를 가볍게 밀치였다.

《신세는 무슨 신세. 난 그저 의연금을 내는 심정으로 성주네 일가를 도와주었을뿐이요. 성주네 아버지야 한생을 독립운동에 바치신분이 아니요. 성주도 청년학생운동을 지도하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해왔소. 이런 애국자의 가정에 돈 몇푼을 보태줬다면 그거야말로 응당한 일이지.… 신세라니, 그런 말은 두번다시 입밖에 꺼내지도 마오.》

그는 짐짓 노하는체하면서 손으로 위혁하는 시늉을 해보이였다.


나는 여기에서 리광이 지니고있는 또 다른 한측면의 성격미를 보는것 같았다.

《리광이, 너무 그러지 마오. 은혜에는 반드시 고맙다는 인사가 뒤따르는 법이요. 내 어머니의 몫까지 합쳐서 다시한번 감사를 드리는바이요. 솔직히 말해서 나는 리광이 우리에게 그처럼 진정이 넘치는 후원을 해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소.》

《나도 그러리라고 짐작했소. 그런데 성주, 나의 그 선행은 우연이 아니요. 계기가 있단 말이요.》

《무슨 계기?》

《어느날 성주어머니는 나에게 성주아버지와 혼사를 이루던 이야기를 옛말처럼 해주시지 않겠소. 어머니의 말씀이 그 혼사가 이만저만 힘들게 성사되지 않았다는거요.》

《그 혼담은 나도 알고있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후 어머니는 우리 삼형제를 앉혀놓고 그 고사를 이야기해주셨소. 그건 참말로 눈물겨운 혼담이였소.》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합할 때에 생긴 혼담이니 그것은 아마도 《한일합병》전야에 있은 고사일것이다.

어머니의 집이 있던 칠골과 아버지의 집이 있던 남리는 나지막한 야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7리쯤 떨어져있었다. 남리에서 평양성안으로 가자면 반드시 칠골을 지나야 했다. 칠골사람들도 남포방면으로 나갈 때는 남리부근을 지나다니였다. 친교가 깊고 래왕이 잦다나니 두 동네사람들은 서로 사돈을 잘 맺었다.


우리 외할아버지도 남리에서 사위감을 물색하였는데 그 첫 대상으로 물망에 오른 총각이 다름아닌 우리 아버지였다. 두집사이에 매파가 왔다갔다하게 되자 외할아버지는 남리의 아버지네 집에 먼저 와보았다. 그러나 결심을 내리지 못하고 칠골로 돌아갔다. 사위감은 마음에 들었으나 살림살이가 지나치게 궁색하였기때문이였다. 그처럼 가난한 집에 딸을 보내면 고생만 하게 될것이라는 위구와 불안이 외할아버지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외할아버지는 그후에도 다섯번이나 우리 아버지네 집에 와보았다.


가난이 원쑤라고 아버지네 집에서는 사돈될 사람이 여섯번씩이나 다녀가는데도 점심한끼 변변히 대접하지 못하였다.

외할아버지는 여섯번째만에야 칠골외할머니와 의논하고 약혼에 동의한다는 편지를 남리에 보냈다.

《나는 그 혼담을 들은 다음부터 성주네 가계를 더 잘 알게 되였소. 내가 참게사건까지 알고있다면 성주는 깜짝 놀라겠지?》


리광이 참게사건이라는 말을 꺼내는 바람에 나는 정말로 깜짝 놀랐다. 그 사건은 우리 가문에서도 어머니나 보현할아버지를 비롯한 몇몇 어른들과 나만 알고있는 가정고사였다.

《아니, 리광이 어떻게 되여 그 일까지 다 알게 되였소?》

《내가 성주네 집안사람들과 어느 정도로 친숙해졌는지 짐작이 가겠지?》

리광은 내가 놀라는것을 보고 약간 우쭐하는체하였다.


내가 참게잡이를 시작한것은 만경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예닐곱살 때였다. 우리 할아버지는 집안살림에 보탬을 주느라고 참게잡이를 많이 하였다. 대동강의 지류인 순화강에는 참게가 많았다. 할아버지는 참게잡이를 하러 갈 때마다 어째서인지 나를 꼭꼭 데리고 다니였다. 어려서부터 생계를 이어가는 요령을 터득하도록 나를 이끌어주고싶었는지도 모른다. 부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참게였지만 절구어 먹으면 그것도 별식이였다.


참게잡이는 좀 싱겁다고 할 정도로 공정이 아주 단순하고 단조로운것이 특징이였다. 푹 삶은 수수이삭을 강물에 넣으면 낟알냄새에 참게들이 새까맣게 모여들었다. 우리는 하루에 수십수백마리씩의 참게를 잡아내군하였는데 그것을 구럭에 넣어들고 집으로 돌아올 때의 즐거움이란 실로 한량없는것이였다.


우리 집의 식생활에서 참게는 큰 보탬이 되였다. 할머니는 집에 손님이 올적마다 단지속에서 절군 참게를 꺼내여 권하군하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에게도 저런 참게를 대접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군하였다. 나에게 있어서 칠골외가는 끝없는 사랑과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신비의 세계였다. 나는 칠골집 외양간에서 풍기는 구수한 소여물냄새를 좋아하였고 뜨락의 대추나무아지에서 귀따갑게 재잘거리는 새들의 지저귐소리를 언제나 즐기였다. 여름날밤 모기쑥이 타는 내내를 맡으며 멍석우에서 듣는 옛말에도 그지없는 애착을 느끼였다.


나의 이모는 내가 외가에서 태여났기때문에 칠골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된다고 늘 훈계하군하였다. 아마 나를 낳을 때 어머니가 친정집에 얼마동안 가있었던 모양이였다. 그러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는 나의 출생지를 늘 남리라고 하였다. 너의 어머니가 너를 낳을 때 며칠동안 친정에 가있은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출생지가 칠골로 될수는 없다고 하였다. 녀자가 설사 객지에서 몸을 풀어도 아이의 아버지가 사는 집이 있는곳을 출생지로 정하는것이 조상전래의 법도라는것이였다.


어쨌든 나는 외가를 친가에 못지 않게 몹시 사랑하였는데 이 감정이 참게잡이를 하는 순간에도 무시로 발동되였다.

나는 칠골에서 창덕학교를 다닐 때에도 일요일이면 만경대에 가서 할아버지와 함께 참게잡이를 하였다. 어느날 나는 그 참게의 절반을 수풀속에 감추고 할아버지에게 구럭을 내여드렸다. 할아버지는 《오늘은 소득이 신통치 않구나.》 하면서 마리수가 적은데 대해 아쉬워하였다. 나는 그 말을 못들은체하였다.


사실 제대로 일을 처리하려면 내가 할아버지에게 외가집에 갖다주려고 절반몫을 남겨놓았다고 진상대로 말했어야 했다. 그런데 실토하게 되면 할아버지가 기뻐하시겠는지 언짢아하시겠는지 가늠이 가지 않아서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집까지 구럭을 들어다드린 다음 다시 순화강가에 나가 수풀속에 숨겨놓았던 참게를 구럭에 담아들고 칠골로 냅다뛰였다. 외가사람들은 성주덕에 오늘은 게추렴까지 하게 되였다고 하면서 기뻐하였다. 나는 그 참게는 보현할아버지가 잡은것이니 인사를 하려면 만경대할아버지에게 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외할아버지가 만경대에 왔다가 보현할아버지에게 참게자랑을 하였다. 사돈덕으로 참게를 먹었는데 별맛이더라고 하면서 그 전말을 다 이야기하였다.

보현할아버지는 앉은자리에서 뜻하지 않는 인사를 받고 어리둥절해하다가 그 이야기를 듣고는 흐뭇해하였다.

며칠후 나는 할아버지한테서 속궁냥이 깊다고 칭찬을 받았다.


이것이 바로 리광이 알고있다는 참게사건이였다. 가난만이 빚어낼수 있는 일화이고 인정세태극이였다.

그런데 리광은 인정적인 측면에서가 아니라 다른 각도에서 이 일화를 소화한것 같았다.

《나는 혼담이야기와 참게이야기를 들은 다음부터 성주네 일가를 동정하기 시작했소.》

리광의 말이였다.

나는 그 설명속에 담겨져있는 리광의 사려깊은 마음씨에 완전히 감복되였다.

《리광이, 향장을 하는 재미가 어떻소?》

이것은 내가 중부만주지방에 있을 때부터 알고싶었던 문제였다. 그 당시 동만에 파견되였던 공작원들이 간도지방에서 보내온 통보자료에 바로 내가 가장 관심하고있던 사업대상중의 한 대상인 리광이 왕청에서 향장으로 일한다는 사실이 밝혀져있었던것이다.


리광은 나의 물음에 미소부터 지어보이였다.

《고달프긴 하지만 소득이 괜찮소. 지난해 가을에 우리 동무들이 하마탕에서 보위단에 붙잡힌 일도 있는데 그때도 내가 보증을 서서 그 사람들을 구출했댔소. 향장의 간판이 은을 낸셈이지.》

그는 롱담으로 만일 허락만 한다면 자기는 종신 향장을 할 의향도 있노라고 하였다.

내가 고향자랑을 자꾸 하자 리광은 이런 롱까지 하였다.

《만경대가 그런 절경이라면 나도 독립된 다음 가족을 데리고 성주를 따라가겠소.》

《종성은 어떡하구? 고향이 종성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정을 붙이면 아무데나 고향이지 뭐 태여난 고장만 고향이겠소? 어쨌든 내가 가면 소학훈장자리나 하나 잡아주구려. 성주는 교장을 하고 나는 그 밑에서 교사로 일해야지.》

《이걸 어쩐다. 난 소학훈장이라면 질색인데…》

《그런 말 마오. 저기 안도인가 고유수인가 하는데서 교단에 선 전적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소. 아버님도 다년간 교편을 잡던분이시였다는데.》


우리의 우정은 별동대를 조직하던 나날들에 더 두터워졌다. 리광이 나를 만나려고 소사하로 찾아온것은 그가 우리의 권고대로 왕청에서 별동대를 조직한 직후였다. 조선공산주의자들과 애국적청년들에 대한 구국군의 적대적행동으로 하여 왕청동무들은 그 당시 반일인민유격대창건준비에서 커다란 애로를 느끼고있었다. 리광은 별동대를 조직한 다음에도 그 활동방향을 결정짓지 못해 안타까와하였다.


나는 그때 그에게 반일부대들과의 통일전선을 실현하는데서 나서는 몇가지 원칙적문제들과 방도에 대한 나의 견해를 말해주고 그와 함께 별동대의 활동 방향과 방법을 구체적으로 의논하였다.

리광은 나의 건의를 허심하게 받아들이였다.


좁쌀에 수수쌀을 섞은 밥과 된장국, 마른산나물채가 고작이였지만 우리 어머니는 그때 리광을 극진하게 환대해주었다. 리광도 우리 어머니를 몹시 따르고 존경하였다. 어머니의 육친적사랑은 리광을 감동시켰고 리광의 청춘다운 열정과 순박한 품성은 어머니를 만족시키였다.


우리가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한것은 리광이 흥륭촌에 와있을 때였다. 병상에서 일어나 철주와 함께 유격대오를 찾아온 어머니는 리광이 메고있던 총을 만져보면서 이런 총을 가져야 진짜 싸움을 할수 있다, 독립군처럼 닭다리 같은 총을 가지고서야 어떻게 일본놈의 군대를 쳐부시겠나, 너희들이 군대를 만들고 총멘것을 보니 평생을 두고 쌓인 한이 다 풀린다, 너희 어머니들이 이 모습을 보면 얼마나 기뻐하겠느냐, 어머니들은 자식이 머저리구실을 하거나 몹쓸짓을 하면 가슴이 아파 울지만 나라를 위해 총을 메고 싸움에 나선 아들들을 보면 장해서 눈물을 짓는다고 하였다.

리광은 왕청에 돌아가서 구국군과의 사업에 적극적으로 달라붙었다.


우리가 안도에서 우사령과의 합작을 성공에로 이끈것은 반일부대공작의 좋은 경험으로 되였다. 시초의 반일부대공작은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되였다. 성과도 적지 않았다. 많은 구국군부대들이 우리와의 반제공동전선에 적극적으로 호응해나섰다.

구국군부대들과의 통일전선을 실현하는데서 주패장은 공산주의자들의 수중에 완전히 장악되여있었다.


그런데 좌경이 이 통일전선을 방해하였다. 그들이 제창한 《상층타도, 하층쟁취》의 모험주의적구호는 반일부대 상층의 강한 반발과 분노를 야기시켰고 적지 않은 구국군 지휘관들로 하여금 공산주의자들을 경계하거나 탄압학살하는 길에 들어서게 하였다.

이런 때에 리광이 반일부대공작에 뛰여든것은 어느모로 보나 환영할만한 일이였다.

리광은 반일부대들과의 사업을 위하여 거주지도 북하마탕으로부터 태평구로 옮기였다.


그때 나는 태평구에 있는 그의 집을 자주 방문하였다. 300호가량의 농호를 가진 태평촌은 지리적으로는 소왕청, 요영구,로흑산을 련결하는 삼각지점의 중심에 놓여있는 마을이다. 그리 멀지 않은곳에는 쏘만국경이 있었다. 이 동네에서 라자구까지는 20∼30리가량 되였다. 구국군의 중요집결지들이 다 태평구 가까이에 있었다. 리광이 지휘한 별동대의 주

둔지는 라자구시내에서 5리가량 떨어진 쟌창거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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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리광의 집은 태평구 본부락 강기슭의 올리막경사지에 외따로 떨어져있었다. 인상적인것은 그 집옆에 있던 용드레우물이다. 그래서 리광이네집을 용드레집이라고 불렀다. 내가 이 우물에서 물을 여러번 마시였다. 무더운 여름날 우리가 땀을 철철 흘리며 집앞에 나타나면 리광이 용드레우물에서 찬물을 한드레박 떠가지고와 나에게 권하군했는데 그 물이 별맛이였다.

나는 라자구에 갈 때마다 태평구에 들려 리광의 부모들에게 꼭꼭 문안인사를 드리군하였다. 우리가 주보중, 진한장,호진민,왕윤성 등 중국의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구국군과의 통일전선문제를 토의한 마지막 반일병사위원회도 리광의 집에서 하였다.

리광은 소왕청방어전투를 비롯한 여러차례의 대소전투들에서 지휘관으로서의 높은 수완과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가 발휘한 실천적모범은 구국군병사들을 감화시키였으며 군사정치일군으로서의 그의 명성은 동만의 광범한 민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별동대를 반만항일의 진정한 무장력으로 신임하게 된 오의성은 리광을 구국군 전방사령부 보위대 대장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경위대원들까지 붙여주었다.

그후 리광은 구국군과의 련합항일을 위하여 동산호와 련계를 가지였다.
반일을 한다고 무장을 들기는 하였으나 동산호는 이미 토비로 전락된 자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적지 않은 사람들은 토비와 마적을 같은 개념으로 보고있었다.

만주지방에는 예로부터 마적이 많았다. 청나라말기에 관내로부터 많은 한족들이 산해관을 넘어 만주지방으로 흘러들어올 때 이 이주민들의 침습으로부터 농토를 지키고 조상전래의 유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이 고장사람들은 자위적인 무장대들을 조직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일본사람들이 마적이라고 명명한 만주에서의 의적의 시작이였다.

마적단은 《산적》이나 《류적》과 같은 잡스러운 도적떼와는 달리 자기 식의 법도를 갖춘 의적으로 행세하였으며 남의 재물에 대한 강도, 강탈 행위를 추구하지 않았다. 마적사회는 중앙의 정치적권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었으며 그 권력에 대하여 저항적이였다.

마적생활은 무장을 떼여놓고서는 상상할수도 없었다. 그들은 오래동안 무장을 휴대하고 살아왔다. 그런 생활은 사람들속에서 일종의 부러움과 동경심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녀표남비》라는 말이 만주지방에서 공연히 류행되였겠는가. 《녀표남비》란 녀자는 창녀가 되고 남자는 비적이 되여야 한다는 뜻이다.

마적사회의 엄격한 법도가 물론 어느때나 다 존중시된것은 아니였다. 적지 않은 마적부대는 생존과정에 부패타락하여 토비로도 되였다. 어느것이 의적이고 어느것이 토비인지 정체를 똑똑히 판단할수 없는 성격이 모호한 마적단들도 있었다. 적지 않은 비적들은 의적으로 행세하였다. 의적의 탈을 쓴 비적떼들이 외래제국주의침략세력과 군벌들에게 정치적으로 매수리용되여 무지막지한 살륙을 감행할 때 그 피해란 참으로 상상을 초월하는것이였다.

반일부대공작과정에서 발로된 좌경분자들의 《상층타도》전략으로 하여 많은 구국군지휘관들이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원한과 반감에 사무쳐있을 때 그것을 재빨리 포착하고 반일력량의 내분에 리용한것은 일제의 모략가들이였다. 《이이제이》나 《이비정비》는 모략의 능수이고 리간의 명수인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남의 손을 빌어 반일력량들끼리 서로 싸우고 물어뜯어 지리멸렬케 하는 악명높은 수법이였다.

일제는 동산호가 리광별동대를 전원 참살할 때에도 이 수법을 적용하였다.
그 첫 작업으로 리광에 대한 귀순공작에 달라붙었다. 리광을 잡으면 많은 상금을 주며 리광자신이 귀순하면 높은 벼슬을 준다는 오만무례한 통첩장이 사방에 나붙었다. 오의성의 부대를 와해시키자면 공산주의자들의 영향을 막아야 하는데 그 영향을 주입하는 장본인이 리광이라고 그들은 단정하였다. 리광의 별동대는 구국군의 심장부에 깊숙이 들어박힌 통일전선의 돌격대라고 말할수 있었다. 그만하면 일본정탐기관들이 그의 금새를 잘 알고있었던것 같다.

토비의 전형인 동산호는 정치적으로 암둔한데다가 포악하고 변덕스러운 자여서 일본의 모략가들에게 쉽게 매수당하였다. 리광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를 잘 알고있던 그는 일제가 짜준 각본대로 로흑산에서 련합작전문제와 관련한 담판을 하자고 미끼를 던지였다.

실책은 리광이 이 미끼를 덥석 받아문것이였다. 그는 동산호가 일제의 개로 전락된 사실을 모르고 구국군 전방사령부 비서장 왕성복을 비롯한 10여명의 별동대원들과 함께 로흑산으로 떠났다. 당조직에서는 동산호와 같은 무지막지한 토비대장과 접촉하는것은 위험한 일이니 심사숙고하라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리광은 반제공동전선로선을 관철하지 못하면 혁명을 더 전진시키지 못하는데 신변이 위태롭다고 가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가야 하겠다고 하면서 끝끝내 초지를 굽히지 않았다.

동산호는 연회까지 차려 리광일행을 대접하고는 그들을 모조리 학살하였다. 살아서 돌아온것은 단 한사람뿐이였다. 토비들은 리광이네 일행이다 죽은줄로 알고 학살현장에 그 사람을 그냥 내버리고 달아났는데 우리가 가서 구원해주었다. 그런데 그도 후날 라자구와 로흑산사이의 수림지대에서 전사하였다.

리광은 당년 29살의 청춘으로 불귀의 객이 되였다. 그의 잘못은 경각성이 없은것이였다. 동산호와 통일전선을 하려면 사상적으로 그들을 개조시켜야겠는데 그는 그저 인간적으로 친교를 맺는 방법으로 통일전선을 하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로흑산부근의 산막에서 붙잡혀 학살당하였다.
나는 리광의 죽음앞에서 좀처럼 마음을 진정할수 없었다.


그 당시 나의 감정을 지배한것은 부대를 데리고 가서 동산호일당을 당장 요정내고싶은 복수심뿐이였다. 반일부대들과의 공동전선을 이룩하는것이 공산주의자들앞에 부과된 시대적 의무이고 과제이며 총전략이라는 리성의 목소리만 아니였더라면 나는 그런 감정의 분출을 자제하지 못하고 류혈적인 복수전에 뛰여들었을것이다.

온 동만이 동산호의 천인공노할 죄행을 절규하며 피는 피로써 갚자고 부르짖었다. 좌경망동분자들은 군대가 출동하여 리광을 참살한 계급적원쑤들에게 쓴맛을 보이지 않는다고 두덜거리였다. 유격대가 동산호를 치지 않는것은 우경이라고 떠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반제공동전선을 위한 공산주의자들의 위업은 리광의 희생으로 하여 돌이킬수 없는 타격을 받았다. 우리는 1,000명의 적과도 바꿀수 없는 귀중한 동지를 잃었다. 적들은 내곁에서 조선혁명을 떠메고나갈 또하나의 동량지재를 앗아간것이였다.

나는 살점을 사정없이 뜯어내는것 같은 아픔때문에 입술을 깨물고 오열을 참으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다. 항일전쟁을 시작한지 한해밖에 되지 않았는데 얼마나 많은 전우들이 벌써 내 곁에서 떠나갔는가. 어찌하여 나의 친구들은 정들기 바쁘게 다시 돌아오지 못할 그 세상으로 이렇게도 총총히 가버리는것인가. 이것이 과연 숙명이란 말인가.

나는 주먹을 부르쥐고 리광과 함께 항일대전의 전략을 의논하던 소왕청하의 기슭을 정처없이 거닐면서 나를 끝없는 슬픔의 심연속으로 몰아넣는 운명의 무자비한 처사를 저주하고 또 저주하였다. 그리고 결심하였다.

리광의 죽음을 헛되이 말자. 리광이 그토록 많은 로고와 정력을 바친 반일부대들과의 통일전선을 성과적으로 추진시킨다면 그도 지하에서 기뻐해마지 않을것이 아닌가.
리광의 죽음은 나로 하여금 오의성과의 담판을 서두르게 하였다. 그 죽음은 나를 통일전선의 길에서 물러서게 한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가깝게, 더는 후퇴할수도 움직일수도 없게 바싹 접근시켜놓았다.

오의성을 찾아가자! 오의성과의 담판에 성공하면 리광의 원한을 풀수 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라자구에로 백일행군을 다그쳤다. 리광의 가족을 만나 조상이라도 하려고 태평촌에 잠간 들렸더니 그의 부인 공숙자가 두팔을 벌리고 나를 막아나섰다.
《장군님, 그리로 가시면 안됩니다. 거긴 장군님이 가실데가 아닙니다. 애아버지도 그러다가… 장군님, 부탁입니다.》
눈물에 젖은 그 부인의 애절한 호소가 나의 백일행군을 재촉해주는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였다.
부인은 7∼8살쯤 됨직한 사내애를 품에 꼭 끌어안고 옷고름으로 눈굽을 찍어내며 소리없이 어깨를 떨고있었다.

녀인의 품에 안겨있던 그 애가 바로 리광의 아들 리보천이였다. 그도 눈물이 글썽해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있었다. 내가 나타날 때면 토방돌앞에서 놀다가도 매번 《성주삼촌!》하고 부르며 사립문밖으로 뛰여나오군하던 리보천이였다. 언제인가는 그가 나한테 매달려 풀메뚜기를 만들어 달라고 성가시게 군적도 있었다.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로상에 뛰여나온 리보천을 보니 그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한 자책이 가슴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저 애가 이전날처럼 내 몸에 칭칭 휘감기며 풀메뚜기를 만들어 달라고 다시금 떼를 쓴다면 얼마나 좋을가.

그럴 용기마저 없다면 나를 《작은 아버지》라고 부르던 지난날의 철부지답게 내 어깨를 디디고 올라가 목마를 태워달라고 조르기만이라도 한다면 이 마음이 얼마나 가벼울가.
그런데 보천이는 아무 말도 없이 눈물만 뚤렁뚤렁 떨구고있었다. 내앞에는 푸접이 좋고 양기가 발발한 장난꾸러기 리보천이 아니라 칠색무지개 같은 동요시절과 결별하고 새로운 고뇌의 세계에 앞질러 뛰여든 침울하고 소심한 사내아이가 서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그 어린것에게서 풀메뚜기를 탐내던 랑만의 세계를 완전히 앗아갔다. 그러고보면 보천이는10살이 되기도전에 벌써 량친을 다 잃은것으로 된다.

보천이는 이제 두번다시 나에게 그런 주문을 하지 않을것이다. 그의 연약한 넋속에는 오로지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사변만이 가득차있다.
나는 리보천의 얼굴을 속절없이 굽어보았다.
《보천아, 잘 있거라. 내 이제 아버지의 원쑤를 갚고 돌아오마.》
내 입에서는 하마트면 이런 말이 튀여나올번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와는 비슷지도 않은 말로 어린 보천에게 청을 하였다.
《보천아, 이 삼촌은 지금 목이 말라서 못견디겠구나. 내가 집에 올 때마다 너의 아버지가 나에게 랭수를 권하군했는데 오늘은 네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물 한사발 떠다주지 않겠니?》

몽상에 잠긴듯하던 리보천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생기가 돈것은 그 순간이였다. 그는 바람처럼 집으로 사라졌다가 놋대접에 용드레우물의 물을 퍼담아가지고 다시금 바람처럼 내앞에 나타났다. 이 별치않은 움직임은 그의 기분상태를 일변시킨듯 싶었다.
놋대접속에서 출렁거리는 물을 보니 새삼스럽게 리광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자그마한 수면우에 리광의 얼굴과 보천의 얼굴이 겹쳐 그려질 때 내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질번하였다.
나는 어린것의 성의를 생각하여 대접의 물을 한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마셔버리였다.
보천이는 코밑을 훔치고나서 대접을 들고 정다운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마음이 다소 가벼워지는것을 느끼며 대오에 출발구령을 내리였다.
그런데 내가 작별인사를 하려는 그 순간 보천이는 갑자기 집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저 애가 왜 저럴가?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보천이는 사라질 때와 같은 속도로 쏜살같이 행길에 되돌아와 나의 백마에게 한줌의 귀밀을 권하는것이였다. 그 말없는 행동이 마침내 나로 하여금 참고참았던 눈물을 쏟아놓게 하고야말았다.
우리가 강을 건너 멀리 갈 때까지도 보천이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강변에 그냥 서있었다. 말안장우에 앉아 고개를 돌리니 그 애의 모습이 하얀 점으로 아물거리고있었다.
(보천아, 너도 크거들랑 아버지의 뒤를 이어 혁명을 해야 한다!)
나는 멀리서 손을 높이 들었다내리며 마음속으로 보천이의 장래를 축복하였다. 그후 유격구를 해산하고 제2차 북만원정을 시작했을 때에도 나는 리광의 집에 한주일가량 머물러있으면서 공숙자와 함께 보천이의 장래문제를 두고 많은 론의를 하였다.

그 보천이가 후에는 나의 념원대로 혁명가로 성장하였다. 림구에서 철도로동을 하던 그는 일제의 군수렬차를 습격하다가 발각되여 두해동안 감옥살이를 하였다. 이것은 그가 20살도 채 되지 않았던 때에 있은 일이였다.

해방과 함께 감옥문을 나선 리보천은 할아버지의 태가 묻힌 조국의 땅과 하늘과 물이 그리워 그해 가을 단동을 거쳐 평양, 서울까지 밟아보고나서 다시 림구로 돌아갔다. 그 려행은 20살의 다감하고 전도양양한 청년 리보천의 마음속에 뚜렷한 인상을 남기였다.

그는 아버지의 친구들이 있는 조국에서 건국의 불도가니속에 심신을 깊이 잠그고싶은 충동을 느끼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압록강철교를 건너갔다. 그 조국에는 아버지가 바라던 새 세상이 있었고 그자신이 어려서부터 목마르게 기다리고 꿈꾸던 락원이 있었다.
그런데 그 락원이 다섯해후에는 전쟁의 화염속에 휩싸이게 되였다. 청소한 공화국은 자기의 존립을 위하여 결사적인 싸움을 벌리였다.

수천리밖에서 그 초연내를 맡은 중국인민해방군 중대장 리보천은 용약 조선전선으로 탄원해나와 인민군대에 편입하였다. 그는 한 기계화사단에서 지휘관으로 싸우다가 1950년 가을 애석하게도 희생되였다.

리광의 불같은 생애와 혁명활동을 남다르게 깊이 파악하고 있던 김정일동지는 1970년대에 영화창작가들에게 과업을 주어 그를 원형으로하는 예술영화 《첫 무장대오에서 있은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게 하였다. 그때부터 리광의 이름은 온 나라가 다 아는 이름으로 되였다.

리광의 부인 공숙자는 유격대오에서 재봉대원으로 투쟁하다가 희생되였다.
아들의 희생에서 오는 슬픔을 혁명군원호의 열의로 메꾸던 리광의 아버지 리주평과 누이 리봉주는 적들의 고문에서 생긴 어혈로 이 세상을 떠났다.

리보천이 우리의 곁에 아들을 하나 남기고 전사한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 아들이 지금 총대를 틀어잡고 할아버지네 세대가 개척한 길, 그 뒤를 이어 아버지네 세대가 넓혀온 길을 힘차게 걸어가고있다.

그러고보면 리광이네 일가는 3대가 혁명군대에 복무하는것으로 된다. 한가문이 3대에 걸쳐 총을 잡는다면 그것은 참으로 성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리광의 손자가 다른 분야로 가지 않고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군복을 입은것은 대단히 장한 일이다.

얼굴도 몸가짐도 걸음걸이도 모두 할아버지를 닮은 젊은 군관이 자기 어머니와 함께 처음으로 내앞에 나타났을 때 나는 60년전에 우리곁을 떠난 리광이 다시 살아서 나를 찾아온것만 같아 가슴뭉클해지는 감회를 금할수 없었다.

25살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리보천의 안해가 장장 40년이 지나도록 그 아들 하나를 믿고 꿋꿋이 키워 리광의 대를 잇고 그의 혁명정신을 잇게 한것은 만사람의 축복을 받을만한 일이다.
리보천의 아들은 나를 만난 자리에서 자기는 물론, 자기의 아들딸들도 군복을 입고 나와 김정일원수를 위해 대를 이어가며 충성을 다하도록 하겠다고 결의하였다. 나는 그 결의가 빈말공부로 되지 않으리라는것을 잘 알고있다. 리광이네 가문은 빈말을 하지 않는 집안이다.

리광이 만일 살아서 광복된 조국으로 돌아왔더라면 무슨 일을 하였을가?
나는 지금도 종종 이런 가설을 세워보군한다. 리광의 사회활동은 물론 교육으로부터 시작되였고 그가 겨울명월구회의 때 리청산이네 집에서 표명한 리상도 교단에 서는것이였다.

그러나 나는 그가 해방된 조국에 살아서 개선하였더라면 강건이나 최현이처럼 군복을 입었을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어려운 초소를 골라가며 일생을 산 헌신적인 공산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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