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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5-3. 무장에는 무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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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229회 작성일 15-04-06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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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무장에는 무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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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8사변으로 하여 우리에게는 항일전쟁을 시급히 개시해야 할 절박한 과업이 나서게 되였다. 새로운 세계대전을 예고하는 부정의의 포성에 정의의 포성으로 대답할 절호의 기회가 닥쳐온것이다.


일제가 만주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혁명가들은 모두 지하에서 나와 자기 진지를 차지하였다. 대륙을 뒤흔드는 포성에 만주지방사람들이 그해 가을 단단히 정신이 들었다고 할수 있다. 그 포성은 사람들을 위축시킨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성시키고 분발시키였다. 적의 폭압으로 초토화되였던 만주지대에는 또다시 새로운 투쟁기운이 태동하였다.


우리는 군중을 투쟁속에서 단련시킬수 있는 좋은 기회가 도래하였다고 판단하였다.

솔직히 말하여 그 당시 만주지방사람들은 폭동의 실패에서 오는 좌절감때문에 누구나 고민하였다. 혁명을 다음단계에로 상승시키자면 그들에게 신심을 줄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격문이나 뿌리고 빈말공부나 해가지고서는 그것을 해결할수 없었다.


실패에 습관된 군중에게 힘을 주고 신심을 주자면 새로운 투쟁에로 그들을 궐기시키고 그 투쟁을 반드시 승리로 결속지어야만 하였다. 오로지 승리한 투쟁만이 대중을 악몽과 같은 침체상태에서 건져낼수 있었다. 대중을 투쟁속에서 단련시키지 않고서는 설사 몇몇 선각자들이 무장투쟁을 시작한다고 하여도 크게 은을 낼수 없었다.


9.18사변의 발발은 동만지방인민들이 다시한번 투쟁에 일떠설수 있는 계기를 지어주었다. 국내인민들의 폭동적진출이 또한 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국내에서는 농민들의 소작쟁의와 반일폭동이 련이어 일어나고있었다. 고원동척농장소작쟁의, 룡천불이농장소작쟁의, 김제다목농장소작쟁의가 그 대표적인 실례였다.


룡천지구에서는 1929년이후에도 농민들의 투쟁이 계속적으로 일어났다. 그때 그곳 조직들이 우리와 련계를 가지고 투쟁을 잘하였다. 룡천땅에는 우리 공작원들이 많이 나가있었다.

영흥의 3,000여명 농민들과 삼척의 2,000여명 농민들은 9.18사변후 《비상시국》을 표방하며 파쑈적인 폭압과 략탈을 강화하고있는 일제를 반대하여 큰 규모의 폭동을 일으켰다.

이런 때 우리는 간도지방에서 추수투쟁을 조직하였다.

각지의 투쟁위원회는 자기 산하에 선전대, 규찰대를 두고 삐라와 격문을 찍어내며 투쟁구호를 제정하는 등 준비작업을 빈틈없이 한 다음 혁명조직구별로 추수투쟁에 들어섰다. 초기의 투쟁은 소작료를 낮추기 위한 합법적인 경제투쟁이였다.


한때 어떤 력사가들은 이 투쟁에 《추수폭동》이라는 이름을 붙이였는데 나는 그런 명명을 적중한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추수투쟁은 5.30폭동의 모방도 아니고 재판도 아니였다. 이 투쟁은 리립삼의 좌경망동적인 사상여독을 완전히 청산한 기초우에서 새로운 전술적원칙에 의하여 전개한 승리한 대중투쟁이였다. 5.30폭동에서는 종파분자들이 주역을 놀았지만 추수투쟁에서는 새 세대의 공산주의자들이 키를 잡고 군중을 지휘하였다.


추수투쟁은 폭력을 기본수단으로 삼지 않았다. 5.30폭동이 변전소와 교육기관에 불을 지르고 지주, 자산가일반을 타도하면서 방화와 살인도 서슴지 않았다면 추수투쟁참가자들은 소작료의 3,7제, 4,6제와 같은 정당한 요구를 내걸고 투쟁위원회의 통일적인 지도밑에 린접과의 보조를 맞추면서 질서정연하게 행동하였다.


소작료를 낮추라는 요구는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농민들의 처지로 볼 때 결코 무리한것이 아니였다. 그 요구가 정당하기때문에 길림성정부도 소작료를 3,7 ~ 4,6제(지주 30~40프로, 소작인 60~70프로)로 한다는것을 선포하지 않을수 없었다.


농민들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지주들에 대해서는 절대로 폭력이 사용되지 않았다. 폭력이 발동된것은 투쟁위원회의 요구를 완강히 거부해나서는 악질지주들과 농민들의 투쟁을 총검으로 탄압하는 군경들에 한해서였다. 농민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완고한 지주들에 대하여서는 량곡을 밭에서 3,7제나 4,6제의 비률로 소작인의 몫을 실어가거나 창고를 헤치고 나누어가졌다.


략탈적인 동척금융부와 고리대금업자들, 일제의 통치를 협조하는 조선인거류민회와 같은 반동단체들도 투쟁의 과녁이 되였다.

내가 연길지방에서 추수투쟁을 지도하고 안도로 돌아온 어느날이였다.

5.30폭동후 일제의 수사를 피해 숨어다니던 최동화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추수투쟁이 점점 폭력적인 성격을 띠여가는데 대하여 우려를 표시하였다.


안도지구에서 5.30폭동을 선동한 장본인이고 또 후에는 그 폭동을 좌경맹동이라고 규정한 우리의 립장에 의견을 가지고 론쟁까지 하겠다고 하던 그가 돌변하여 폭력의 유해설을 들고나오는 바람에 나는 놀라움을 금치못하였다.

《성주동무! 어떻게 된 일이요? 5.30폭동을 좌경맹동이라고 비난하던 동무네가 순수한 경제투쟁에 폭력을 끌어들이고있으니 이걸 도대체 어떻게 리해해야 하오?》

최동화는 이런 질문을 하고나서 팔짱을 지르고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아갔다. 아마 정통을 찔렀다고 생각하면서 속으로 흐뭇해하는것 같았다.

《선생님은 뭔가 오해하고계시는것 같습니다. 선생님들이 5.30때 제창한 〈붉은 폭력〉과 우리가 추수투쟁에서 사용하고있는 폭력이 같다고 생각하시는게 아닙니까?》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는것이 례절에 어긋나는 행동이라는것을 따져볼사이도 없이 나는 그만 이렇게 되묻고말았다.

《물론 미세한 차이야 있겠지. 그러나 폭력이야 이렇든 저렇든 폭력이 아니겠소.》

《우리는 정당한 리유와 타당성이 있을 때에만 폭력을 사용했습니다. 례를 들어 지주가 농민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완력으로 쌀창고를 헤쳤습니다. 군경들이 사람들을 잡아갈 때면 실력행사로 동지들을 탈환하기 위한 투쟁을 했습니다. 그래 놈들이 폭력을 휘둘러 투쟁을 탄압하고있을 때 우리는 그들에게 선정을 베풀어야 합니까?》

《폭력에는 폭력으로 맞서야 한다는 맑스주의의 일반적원리를 내가 몰라서 동무네를 시비하는게 아니요. 지금은 그렇게 1대1로 완력을 행사할 때가 아니라는거요. 5.30폭동은 벌써 아득한 옛말로 되였소. 우리 혁명은 불행하게도 퇴조기에 들어섰소.》

《퇴조기라구요?》

《그렇소. 퇴조기요. 이보퇴각의 시대요. 쓰똘릐삔반동기도 아마 지금보다는 더 암담하지 않았을거요. 관동군이 일거에 전 만주를 강점한것을 보지 못하오? 장학량의 30만 대군도 퇴각했소. 이런 때에는 혁명력량을 로출시키지 말구 보존해야 한단 말이요. 적을 서뿔리 건드리다가는 동만땅에서 경신년의 대〈토벌〉과 같은 참사가 재연될수 있소.》


최동화는 추수투쟁이 폭력투쟁으로 번져지는것을 막고 무장을 드는것을 중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우리의 무장투쟁구상에 대해서도 시기상조이고 사상루각이라고 하면서 반대하였다.

사실 그와의 론쟁은 힘에 부친것이였다. 최동화란 사람이 원래 두뇌도 명석하고 공산주의의식도 높은 지식인이여서 웬만한 말은 이가 들지 않았다. 그는 말끝마다 고전의 명제들을 끌어내여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론증하군 하였는데 다 아퀴가 맞았다. 최동화를 납득시킨다는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였다.


그의 주장은 결국 혁명이 퇴조기에 들어갔다는데로부터 출발한것이였다. 그는 일제의 대대적인 무장공세나 장학량군의 패주나 독립군의 와해와 같은 불리한 징후들은 보면서도 국내와 동만인민들의 폭동적진출은 전혀 보지 못하고있었다. 내앞에는 분명히 눈을 뜨고도 현실을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가 있었다.


반혁명의 공세와 비겁한 무리들의 패주가 곧 혁명의 퇴조기로 될수는 없었다. 문제는 혁명의 주체인 인민대중의 동향에 달려있었다.

최동화는 전 세대 공산주의자들이 다 그러했듯이 인민대중의 힘에 대하여 너무나 소홀히 여기고있었다.

그는 인민대중을 혁명의 주체로 보지 못하였으며 인민대중의 힘을 믿지 않고 과소평가하였다.


나는 그때 혁명의 퇴조기를 운운하는 최동화의 모습을 통하여 전 세대 공산주의자들과 우리와의 근본적차이를 느끼였다. 그들과 우리와의 모든 차이는 결국 인민대중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데서부터 산생되였다고 말할수 있다. 같은 리상과 목적을 추구하면서도 우리와 그들이 서로 힘을 합치지 못하고 남남처럼 지낸것은 바로 그 차이때문이였다.


나는 최동화에게 말했다.

《역설이라고 판단하실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인민대중이 일제의 침략에 굴복하지 않고 폭력으로 진출하고있는 지금이야말로 혁명의 고조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고조기를 놓치지 않고 추수투쟁을 끝낸 다음에는 곧 대중을 더욱 각성시키고 조직화해서 항일투쟁을 더욱 높은 단계에로 발전시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대세가 어떻게 되여가든 이 결심은 변하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을것입니다.》

최동화는 더 말을 못하고 쓴 입을 다시며 돌아갔다.


최동화와 같은 사람들이 혁명적폭력의 불리성을 운운하면서 우리에게 제동을 걸었지만 우리는 자신이 선택한 주로를 조금도 리탈하지 않고 신심에 넘쳐 추수투쟁을 지휘하였다.

10여만명의 간도농민들은 1931년 9월부터 그해말까지 일본군경들과 반동군벌의 야만적인 탄압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피어린 투쟁을 벌리였다.

이 투쟁과정에 조선민족의 영웅적기개를 보여주는 전설적인 일화들이 수많이 창조되였다. 개구지방인민들이 시위도중 두만강얼음우에서 일만군경들과 벌린 육박전에 대한 이야기는 한동안 만주지방사람들의 심혼을 흔들어놓은 화제거리가 되여 돌아갔다.


녀성투사 김순희의 극적인 최후에 대한 일화도 추수, 춘황투쟁의 불길속에서 태여났다. 김순희는 약수동의 적위대대원이였고 추수투쟁위원회의 위원이였다.

약수동에 나타난 《토벌대》놈들은 만삭이 된 그의 배를 총끝으로 쿡쿡 찌르며 배속에 있는것이 무엇인가고 물었다.

김순희는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일본수비대원들과 령사관 경찰들을 쏘아보면서 《잘 낳으면 임금이구 못 낳으면 대문전거리를 지나다니는 너 같은것들이다.》라는 유명한 대답을 하여 적들을 놀라게 하였다. 나중에는 조직의 비밀을 고수하기 위해 자기의 혀까지 끊어버리였다. 그는 적들이 싸지른 불속에서 22살의 아까운 꽃나이를 마치였다.


추수투쟁은 농민들의 승리로 끝났다.

이 투쟁을 통하여 동만지방인민들은 신심을 얻었다. 그들은 처음으로 투쟁의 승패가 대중자신의 불굴의 의지와 지도방법에 결정적으로 달려있다는것을 심각하게 깨닫고 추수투쟁을 승리에로 인도한 새 세대의 청년공산주의자들을 경이적인 시선으로 쳐다보면서 그들의 주위에 굳게 결속되였다.

대중은 추수투쟁의 승리를 통하여 5.30폭동이 실패한 원인을 스스로 찾아냈으며 폭력의 량이 결코 투쟁전과를 결정하는 기본요인으로 되지 않는다는 진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확고히 믿게 되였다. 5.30폭동이 실패한 원인이 폭력이 적게 투하된데 있지 않았던것처럼 추수투쟁이 승리한 요인 역시 폭력이 많이 투하된데 있지 않다는것을 모두가 다 잘 알게 되였다. 폭력은 결코 만능이 아니였다. 그것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뿐이였다.


정의로운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정당하고 분별있는 시기적절한 폭력만이 그것을 틀어쥔 사람들에게 승리를 기약해줄수 있다. 오직 그런 폭력만이 사회를 개조하고 력사발전을 추동하는데 참답게 이바지할수 있는것이다. 우리는 다만 이런 폭력만을 지지할뿐이다.

문제는 대중을 어떻게 동원하고 조직하며 지휘하는가 하는데 달려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새 세대의 공산주의자들은 하나의 모범을 창조해놓은셈이였다. 추수투쟁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을 밀접히 결합시키고 평화적방법과 폭력적방법을 적절하게 배합하면서 시종일관 주도권을 튼튼히 틀어쥐고 적을 피동에 몰아넣은 독특한 투쟁이였다. 다음해 봄에 있은 춘황투쟁도 이런 투쟁이였다고 말할수 있다.


추수투쟁을 통하여 조중인민들의 단결이 강화되고 조중공산주의자들의 혁명적뉴대가 공고화되였다.

추수투쟁은 인민대중을 각성시키고 단련시키는 훌륭한 계기로 되였다. 이 투쟁대오에서 소박한 보통사람들이 투사로, 혁명가로 자라났다. 동만의 혁명조직들은 추수투쟁에서 훈련된 수많은 핵심들로써 자기의 대오를 튼튼히 꾸려나갈수 있게 되였다. 그런 핵심들이 마련된것은 미구에 도래하게 될 무장투쟁을 위해서도 다행한 일이였다.

추수투쟁과정에서 배출된 수많은 청년혁명가들이 후날 동만의 각 현들에 조직된 유격대의 골간으로 되였다.


나는 추수투쟁을 지도하면서 무장투쟁에 대한 구상을 계속 심화시켜나갔다. 투쟁속에서 발현되고있던 동만인민들의 대중적영웅주의와 불굴의 투쟁정신은 새로운 단계의 혁명로선을 모색하고있던 나를 무한히 고무해주었으며 우리가 일단 무장을 잡고 일제와의 혈전을 벌리게 되면 대중이 반드시 우리를 지지성원해나서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하였다.


추수투쟁의 불길이 온 동만땅에 번져가고있던 1931년 10월에 나는 함경북도 종성지방에 잠간 다녀왔다. 내가 종성에 나가게 된것은 국내동무들을 만나 무장투쟁문제를 론의하고 륙읍일대에 파견되여 활동하는 공작원들을 소환하여 그들에게 무장투쟁과 관련된 중요한 임무를 주자는데 있었다. 나를 종성까지 안내한것은 채수항과 오빈이였다.


종성은 채수항의 고향이였으며 거기에는 그의 처가가 있었다. 그의 선친들은 구한국말기까지 거기서 살았다. 증조할아버지는 종성좌수의 벼슬을 지냈다. 채수항이네 일가가 조국을 떠나 화룡현 금곡땅으로 이주한것은 《한일합병》직후였다.

채수항은 간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였으나 항상 어린시절의 꿈이 묻혀있는 고향땅을 그리워하였다. 그는 나와 함께 종성으로 건너갈 때마다 기쁨을 걷잡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의 기분상태가 별로 침울해보였다.

나는 추수투쟁의 파도가 채수항의 집 낟가리도 헐어간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넌지시 물었다.

《채동무네도 수탈의 대상이 된게 아니요?》

채수항이네 집은 부유한 지주가정이였다. 그의 아버지는 가난한 사람들이 곱지 않게 보는 덕신사 사장의 자리를 차지하고있었다.

《수탈은 무슨 수탈, 우리는 농민들이 요구하기전에 3,7제의 비률로 밭에서 직방 곡식을 나누어주었소.》

《현당서기네 가정이 다르긴 달라. 그런데 왜 얼굴빛이 그렇게 어둡소?》

《일부 사람들이 나더러 아버지를 설복하여 사장직을 그만두게 하라고 하는데 아버지가 그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는구만.》


채수항은 자기 아버지가 혁명조직의 위임을 받고 덕신사사장의 자리를 맡아보고있다는 사실을 모르고있었다. 규률이 규률이니만치 아버지는 그 내막을 아들에게 까밝힐수 없었다. 그러니 채수항이 아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아버지에 대해 민망스럽게 생각하는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였다.

듣고보니 채수항이 머리를 썩일만도 하였다. 그 당시 상급당의 요직을 차지하고있던 일군들중에는 혁명의 리익에 배치되는 극단적인 요구를 마구 내리먹여 아래사람들을 난처하게 만드는 좌경분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채수항에게 아버지와의 계급적《계선》을 가르지 못했다는《과오》를 뒤집어씌워 그를 현당서기의 직책에서 해임시켰다가 다시 복직시키기까지 하였다.


나는 채수항의 울적한 기분을 돌려세우려고 무장투쟁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바꾸었다.

그러자 채수항은 롱조로 이제 우리 군대가 조직되면 선참으로 입대하여 기관총수로 되겠다고 하였다.

《무관은 어울리지 않아. 채동무한테야 문관이 천분이지.》

나도 웃으면서 롱을 하였다.

그렇지만 그 롱속에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나는 그를 타고난 정치일군이라고 생각하였다. 채수항이 만일 살아남아서 혁명군에 입대하였더라면 틀림없이 련대나 사단급의 정치일군은 되였을것이다.

우리가 유격대를 창건하고 무장투쟁을 한창 벌리고있을 때 그는 대립자부근에서 일본《토벌대》놈들에게 학살되였다.


오빈은 룡정동흥중학교시절부터 체육선수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다. 그는 훈춘현운동대회에서 씨름에 1등을 하여 황소까지 탄 일이 있는 소탈하고 쾌활하고 날파람있는 동무였다.

나는 오빈이야말로 혁명군대의 맹장이 될수 있는 무관형의 인물이라고 생각하였다. 사람을 사귀면 이 사람은 혁명군대에서 어떤 직무를 담당할수 있겠는가 하고 가늠해보는 나의 버릇은 이 무렵부터 생겼다고 할수 있다. 항일전쟁을 목전에 둔 당시의 긴박한 정세가 나를 그러한 《타산가》로 만들었던것 같다.


석건평나루에서 배를 타고 두만강을 건너간 우리는 동관진의 두량조합 콩정선장에 들리였다. 이 조합에서는 일제가 만주에서 략탈해오는 콩을 등급별로 나누어 계량하고 그것을 마대에 넣어 일본으로 실어보내는 일을 하였다.

우리는 간도에서 품을 팔러 나온 인부로 가장하고 로동자들의 일손을 도와주면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간도에서 나왔다는 말을 듣고 로동자들은 추수투쟁에 대한 화제를 꺼냈다. 추수투쟁에 대한 그들의 견해는 대체로 비관적이였다. 왜놈들이 만주를 강점하기전에도 간도에서 숱한 폭동들의 일어났다가 실패했는데 하물며 그놈들이 만주를 침략하고있는 때에 추수투쟁 같은것이나 벌려가지고 무슨 승산이 있겠는가, 이 투쟁도 결국은 5.30폭동의 운명을 면치 못할것이다, 지금은 어떤 투쟁을 벌려도 소용이 없다, 보라, 일본군이 승승장구하고있고 게다가 강대국들이 모여있는 국제기구에서도 그놈들의 편역을 드니 약소민족이 바라볼데가 더는 없지 않은가 하는것이 로동자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그때 로동자들이 우리에게 한 말을 듣고 나는 세가지 측면에서 큰 충격을 받았는바 하나는 혁명가가 민심을 잘 알려면 항상 대중속에 있어야 한다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장투쟁을 시작하려면 무엇보다도 대중을 정치적으로 각성시키고 조직화하는 사업을 더 다그쳐야 하겠다는것이였으며 또 다른 하나의 충격은 그 어떤 형태의 투쟁도 대중이 그 의의를 충분히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동원되기전에는 성과를 거둘수 없다는것이였다.


나는 로동자들의 허무주의적이고 자포자기적인 견해를 들으면서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무장투쟁을 한시라도 빨리 시작하여 우리 민족에게 재생의 희망, 독립의 희망을 안겨주어야겠다는것을 더욱 절감하였다.

그날 우리는 광명촌청년회 회장으로 사업하고있던 최성훈의 집에서 국내정치공작원들과 지하조직책임자들의 회의를 열고 무장투쟁과 관련된 국내혁명조직들의 과업에 대하여 토의하였다.


나는 회의참가자들에게 9.18사변후의 급변한 정세와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력사적교훈은 조직적인 무장투쟁을 벌릴것을 절박한 요구로 제기하고있다는것과 무장투쟁을 개시하는것은 우리 혁명투쟁의 합법칙적인 요구이며 질적인 비약이라고 강조하고나서 두가지 큰 과업 즉 군사적준비를 튼튼히 갖추는 과업과 함께 무장투쟁의 대중적지반을 튼튼히 축성해야 할 과업을 제기하였다.


회의참가자들은 조직적인 무장투쟁이라는 격동적인 사변앞에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으며 무장대오의 조직을 돕기 위한 창발적인 의견들을 내놓고 열변을 토하였다.


무장투쟁을 조직전개하기 위한 혁명력량준비문제는 1931년 5월의 공수덕회의에서 이미 론의되고 확정되였다. 이런데 기초하여 광명촌회의는 무장투쟁이라는 새 사변을 앞두고 국내혁명조직들앞에 나서는 실천적과제를 토의한셈이였다. 이 회의는 국내인민들과 혁명가들에게 보내는 무장투쟁의 예령이였고 사전신호였다. 회의과정에 표현된 무장투쟁에 대한 국내혁명가들의 적극적인 공명은 나에게 큰 힘을 주었다.


나는 종성에서 하루를 묵고 인차 간도로 돌아와 채수항, 오빈과 헤여졌다. 우리는 12월중순경에 명월구에 다시 모여 무장투쟁준비사업을 총화하고 무장투쟁의 구체적인 방도와 전략전술문제를 토의하기로 하였다.

그후의 나의 모든 일정은 명월구회의준비에 바쳐졌다.

회의준비라고 하면 보고서나 결정서와 같은 문건들을 먼저 념두에 둘수 있는데 그때의 회의준비란 로선문제를 구상하고 전략전술을 규정하는 모색과정을 의미하였다. 사상을 성문화하는것은 부차적인 공정이였다.


나는 특히 무장투쟁의 형식을 선택하기 위한 사색에 많은 시간을 바치였다.

맑스ㅡ레닌주의리론에서도 무장투쟁의 의의를 강조한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형식으로 무장투쟁을 해야 한다는 공식적규정은 없었다. 어느 시대에나 다 들어맞고 또 어떤 나라에나 다 적용할수 있는 그런 처방이란 있을수 없기때문이다. 나는 무장투쟁의 형식을 모색하는데서도 교조를 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나는 무장투쟁에 대한 론의를 심화시키고 새로운 정세에 대처할 과업을 토론해야겠다는 결심을 내리고 동장영을 만나기 위해 동만특위로 찾아갔다. 만주땅에서 무장력을 창건하고 항일전쟁을 시작하는것만큼 우리는 중국공산주의자들과의 협조를 무시할수 없었다.


무장투쟁문제는 만주지방의 중국공산주의자들속에서도 일정에 오르고있었다. 중국공산당과 중국의 로농홍군은 9.18사변후 군중을 조직하여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며 무장으로써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자고 호소하였다.


같은 과녁을 향해 함께 총구를 겨누어야 할 조중공산주의자들앞에는 그 어떤 철퇴로써도 깨뜨릴수 없는 튼튼한 공동전선을 맺고 서로 긴밀히 협조하고 지지해야 할 절박한 과제가 제기되였다.


특위서기로 임명된 동장영도 일본군대의 《토벌》에 죽을번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룡정시가지에 들어와있으면서 나를 만나려고 하였다.

밀정들이 우글거리는 룡정시가지에 들어가는것은 위험한 일이였으므로 나는 그를 명월구로 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동만특위에서는 아직 간도실정에 어두운 동장영이 특위가 이동된것도 모르고 그 행방을 수소문하느라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밀정들에게 걸려들어 감방으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 뜻밖의 소식은 나를 실망케 하였다. 만주성당 서기 라등현과 성당군사위원회 서기 양림은 9.18사변후 심양을 떠나 행처를 감추고있었고 양정우는 아직 감옥에 갇혀있는 몸이여서 의논할 사람이 없었다.


나는 어떤 수단을 쓰든지 동장영을 구원해야겠다는 결심을 내리고 동지들과 함께 그 방도를 의논하였다.

이런 때에 고보배(보배는 별명)라는 사람이 자기가 동장영을 구원해보겠다고 자청해나섰다. 요술사처럼 특별히 손놀림이 빠른 그는 《쓰리》를 잘했다. 마주 앉아서 이야기하는 사람의 주머니에 꽂혀있는 만년필도 눈깜빡할 사이면 뽑아내군 하였다. 고보배가 이런 장난을 잘하기때문에 그가 가는 장소에서는 매번 물건이 《잃어지는》소동이 일어나군 하였다.


이 사람이 룡정시내에 가서 쓰리를 한번 하고 우정 경찰에 잡혀들어가 감방에 있는 동장영을 만났다. 고보배가 감방에 들어가서 경찰들을 어떻게나 구슬려놓았던지 특위서기는 그후 구류장에서 인차 풀려나왔다. 그렇게 되여 그가 명월구회의에도 참가할수 있게 되였다.

우리는 1931년 12월 중순경에 명월구에서 당 및 공청간부회의를 소집하였다. 우리가 편의상 《겨울명월구회의》라고 부르는 회의였다.


이 회의에는 차광수, 리광, 채수항, 김일환, 량성룡, 오빈, 오중화, 오중성, 구봉운, 김철, 김중권, 리청산, 김일룡, 김정룡, 한일광, 김해산을 비롯하여 헌신적인 투쟁을 통해서 대중의 총애와 인망을 받고 있던 40여명의 청년투사들이 참가하였다.


그때 나는 명월구에서 영채김치라는것을 처음으로 먹어보았다. 내가 명월구뒤골안에 도착한 날 저녁 리청산이네가 당콩을 넣은 강냉이죽과 영채김치를 들여왔는데 그것을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모른다. 영채김치는 함경북도의 길주, 명천사람들이 잘 담근다. 지금은 이 김치가 국가연회상에도 오르고있다.


명월구회의때 리광이 어디서인가 꿩 다섯마리를 잡아가지고왔다. 회의를 하는동안 대표들이 강낭죽에 조밥만 먹는것이 가슴아파서 공청열성자들과 함께 꿩사냥을 한것 같았다.

그날 저녁 리청산은 좋은 꾸미감이 생겼다고 하면서 국수를 눌렀다. 명월구골안에 흰쌀은 귀했지만 농마가루는 있었다.


그런데 국수라면 오금을 못쓰는 차광수가 덜렁거리면서 리광에게 《이것보라구, 왕청아즈바이. 꿩 다섯마리를 가지고야 어느 코에 바르겠나.》하고 집적거리였다. 그는 위탈이 심하여 끼니때면 밥을 먹는둥마는둥 하면서도 청년들이 많이 모인곳에서는 늘 허기증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대식가연하였다.

《저 길림량반은 강낭죽 한사발도 못제끼는 주제에 큰 소리만 탕탕 치는군. 이보라구 차덜렁이, 그 꿩 다섯마리두 쌀짐우에 덧지고 오느라고 녹초가 됐네.》

리광은 웃으면서 차광수의 말에 롱으로 대답하였다.


차광수는 꿩 다섯마리면 고기가 얼마 되지 않으므로 대표들을 두 방에 가르고 한방에서는 꿩고기를 놓은 국수를 먹게 하고 다른 한방에서는 닭고기를 놓은 국수를 먹게 하자고 열이 나서 떠들었다.

그러나 대표들은 모두 그의 제의를 반대하였다. 우리는 그날 저녁 꿩고기와 닭고기를 한데 섞어서 꾸미를 만들게 하고 한방에 다같이 모여앉아 사이좋게 국수를 먹었다. 식성이 좋은 박훈은 세 그릇이나 곱배기를 하여 《국수대감》이라는 별명을 벌었다.


회의를 실속있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본회의에 앞서 리청산의 집에서 예비회의를 하였다. 그 모임에서는 회의안건과 회의참가자, 회의순서 문제 등이 토의되였다.

예비회의를 끝낸 다음 10일동안 진행된 본회의에서는 무장투쟁을 하되 어떤 형식의 무장투쟁을 하겠는가 하는 문제가 집중적으로 론의되였다. 왜냐하면 이 문제가 락착되여야 무장조직의 형식과 근거지의 형태문제 같은 이여의 문제점들이 동시에 결정될수 있었기때문이였다.


국가가 없으니 정규군에 의한 항쟁은 바랄수도 없고 그렇다고 하여 당장 전민이 동원되여 무장봉기를 일으킬수 있는 조건도 성숙되지 못하였다. 이런 형편에서 나의 마음은 자연히 유격전에로 끌리지 않을수 없었다.


레닌은 유격전을 대중운동이 이미 실지로 폭동에 이르렀을 때나 또는 국내전쟁에서 대전투와 대전투사이에 얼마간 중간기가 닥쳐오고있을 때 불가피적으로 나타나는 보조적인 투쟁형태로 규정하였다. 레닌이 유격전을 기본전투형태로 보지 않고 일시적이며 보조적인 투쟁형태로 본데 대하여 나는 매우 아쉽게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내가 그때 흥미를 가지고 탐구에 탐구를 거듭한것은 정규전이 아니라 유격전이였기때문이다.


나는 상비적인 혁명무력에 의한 유격전을 우리가 수행하여야 할 무장투쟁의 기본형식으로 선택하는 경우 그 투쟁형태가 우리 나라 실정에 적합하겠는가 적합치 않겠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많은 생각을 하여보았다. 그 과정에 《손자병법》도 보고 《삼국지》도 다시 보았다. 우리 나라의 병서들가운데서는 《동국병감》이나 《병학지남》과 같은것을 보았다.


유격전의 시원이 기원 400년대였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유격전이 구체적으로 어느 나라에서 어떻게 진행되였는가 하는것을 우리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맑스와 엥겔스가 제일 흥미를 가지고 연구한 유격전은 1812년 로불전쟁시기의 로씨야농민무장부대의 활동이였다. 로불전쟁이 낳은 빨찌산영웅 제니쓰 다위도브, 정규부대와 빨찌산의 련합작전을 능숙하게 지휘한 꾸뚜조브장군의 이야기는 유격전에로 끌리는 나의 호기심을 더욱 부채질해주었다.


유격전을 기본형식으로 규정하는데 있어서 임진조국전쟁은 나에게 많은것을 시사해주었다. 나는 임진조국전쟁을 승리로 장식한 의병들의 투쟁을 유격전의 력사에서 특출한 자리를 차지하는 하나의 모범이라고 간주하였다. 곽재우, 신돌석, 김응서, 정문부, 서산대사 그리고 최익현, 류린석 등 의병출신명장들이 발휘한 용감성과 다양한 전투방법은 나를 완전히 매혹시키였다. 유격전이라는 말은 발톱까지 무장한 일본제국주의자들과의 대전을 눈앞에 둔 나의 심혼을 온통 틀어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런데 국가적후방이나 정규군의 지원이 있어야만 유격전을 할수 있다고 하니 야단이였다. 맑스ㅡ레닌주의고전가들이 명시해놓은 이런 부대조건은 나로 하여금 무장투쟁형태를 선택하는데서 복잡한 탐구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되게 하였다. 후방으로 될 국가도 없고 정규군도 없는 조선의 실정에서도 유격전이 가능하겠는가 하는것은 그 누구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미지수로 남아있었다. 이것이 우리들사이에서는 심각한 론쟁거리로 되였다.


우리 주변에서는 혁명을 추동하는 극적인 사변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장개석과 장학량의 투항주의에 불만을 품은 구동북군의 애국적인 장병들속에서 병변이 련이어 일어났다. 왕덕림도 당취오도 리두도 장학량을 따라가지 않고 모두 반변하여 구동북군에서 떨어져나왔다. 마점산과 같은 장군도 병변을 일으킨 다음 무장을 들고 항일을 부르짖고있었다. 이런 인물들을 주축으로 하여 만주각지에서 반일부대들이 조직되고 구국군운동이 시작되였다.


이런 사태는 무장투쟁을 지향하고있는 우리에게 매우 유리한 환경을 지어주었다.

나는 무장투쟁형태가운데는 력사적으로 정규전과 유격전이 있었는데 정규전은 주도적인것이였으나 유격전은 보조적인것이였다는것, 우리는 이 두가지 형태가운데서 어느 하나를 택하여야 하는데 나 개인의 견해로 볼 때에는 유격전이 우리 나라 실정에 더 적합할것 같다는것, 정규전이 불가능한 우리 나라의 조건에서는 기존관례에 구애됨이 없이 유격전이 주도적인 투쟁형태로 되여야 한다는것을 강조하였다.


《변화무쌍한 유격전이야말로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기본무장투쟁형식이다. 국가가 없는 우리 나라의 실정에서 정규전으로 일제와 대항한다는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군사기술적으로나 량적으로 렬등한 무력으로 강대한 일제침략군과 맞서 싸워야 하는것만큼 변화무쌍한 유격전을 해야 한다. 이외에 다른 출로란 있을수 없다.》


장학량의 군벌군대나 독립군이나 일본군대밖에 보지 못한 청년들한테는 유격대에 대한 표상이 전혀 없었다.

나는 정규군과 유격대의 차이를 설명하여주고 강대한 일본침략군과 싸워 이기자면 소부대와 대부대의 령활한 배합작전, 기습전, 매복전, 정치활동, 정치공작, 생산활동 등 군사, 정치, 경제활동을 다 벌려야 하며 그러자면 자유자재로 분산과 집중을 거듭하면서 전쟁을 할수 있는 유격대를 조직해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몇몇 동무들이 나의 말을 듣고나서 그런 형식의 무장투쟁으로 적을 타승할수 있겠는가, 땅크와 대포, 비행기와 같은 현대적인 정예무기로 장비된 수백만대군을 국가적후방이나 정규군의 지원도 없이 그것도 남의 나라 령토에서 유격대와 같은 비정규적인 무력으로 이겨낼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을 표시하였다.

그들이 그런 의문을 표시하는것은 무리가 아니였다.

내자신도 사실 그런 가능성여부를 여러번 저울질해보았다.

우리가 몇자루의 총을 가지고 일본과 같은 군사강국에 감히 대항해나선다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는가, 의병도 독립군도 장학량의 30만대군도 모두 일본군대의 위력앞에서 풍전등화의 운명을 면치 못하였는데 우리는 무엇을 믿고 그들을 타승하려고 하는가, 우리에게 국권이 있는가, 령토가 있는가, 재부가 있는가?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국권도 령토도 자원도 다 빼앗긴 망국노의 아들들이다. 지금은 남의 나라 땅에서 곁방살이를 하는 적수공권의 청년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주저없이 도전해나섰다. 무엇을 믿고? 인민을 믿고 항일전쟁을 시작하려고 결심하였다. 인민이 국가이고 인민이 후방이며 인민이 정규군이다. 싸움이 시작되면 전민이 병사가 되여 일어날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벌리게 될 유격전은 인민전쟁이라고 말할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장시간의 론쟁을 거쳐 유격전을 기본으로 하여 무장투쟁을 조직전개할데 대한 문제에서 완전한 의견합치를 보았다.

유격전은 자체의 력량을 보존하면서도 적에게 커다란 정치군사적타격을 줄수 있고 적은 력량을 가지고도 능히 수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우세한 적을 소멸할수 있는 무장투쟁방법이다. 우리는 인민대중의 적극적인 지지성원과 유리한 자연지리적조건에 의거하면서 유격전의 방법으로 무장투쟁을 조직전개한다면 종국적으로 적을 타승할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남들이 다 유격전을 정규전을 보조하는 수단으로 보고있을 때 우리가 그것을 기본적인 투쟁형식으로 확정하고 방침으로 채택한것은 우리의 실정에 부합되는 과학적이면서도 창조적인 결단이였다.

유격전을 기본으로 하여 조직적인 무장투쟁을 벌릴데 대한 론의가 끝나자 우리는 그것을 관철하기 위한 방도를 협의하였다.


먼저 혁명무력건설문제가 상정되였다. 우리는 그때 처음에는 지방마다 소규모의 유격대를 조직하고 그를 무장시키기 위한 투쟁을 해가면서 점차 그것을 대부대의 혁명무력으로 발전시키되 첫단계에서는 대대를 건설하였다가 그것을 점진적으로 확대시켜 인민혁명군으로까지 발전시키자고 토의하였다. 뒤이어 무장을 해결하기 위한 방도도 토론하였다.


유격대조직에 관한 론의는 근거지에 대한 화제에 자리를 내주었다. 반일유격대가 조직되면 활동기지를 어디에다 두겠는가, 산에 두겠는가, 도시에 두겠는가, 농촌부락에 두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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