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와 더불어 22-4. 1940년 가을 > 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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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22-4. 1940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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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869회 작성일 16-04-21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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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40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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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는 항일혁명력사를 소개선전하는 글들을 읽어보는 과정에 력사가들의 연구사업에서 성과도 많았지만 더 개척하고 심화시켜야 할 부분들도 적지 않다는것을 발견하게 되였습니다.

특히 소할바령회의를 전후한 시기의 자료들이 많지 못합니다.

1940년 가을이 보통가을이 아닙니다. 그해 가을에 우리가 겪은 하많은 곡절에 대하여 이야기하자면 아마 몇편의 장편소설을 써도 모자랄것입니다. 대부대활동으로부터 소부대활동으로 이행한 때여서 그 당시 우리는 무송현성전투나 간삼봉전투와 같은 큰 싸움은 하지 않았습니다.

항일혁명력사에서 고난의 행군만큼 간고한 행군이 없고 고난의 행군시기만큼 간고한 시기가 없었다고 다들 말하는데 그것은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1940년 가을에 우리가 겪은 시련은 그에 못지 않은 시련이였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고난의 행군이 육체적고통이 극한점을 넘어섰던 시련이라면 1940년 가을에 우리가 처한 역경은 정신적고통이 이만저만 크지 않았던 또 한차례의 시련이였습니다.

육체적고통이나 정신적고통이나 다같이 그것을 이겨내자면 강한 의지가 있어야 하며 그것은 자기자신과의 부단한 투쟁을 동반하게 됩니다. 우리가 1940년 가을에 얻은 체험이 바로 그런것이였습니다.

소할바령회의이후 대부대활동으로부터 소부대활동으로 넘어간 다음에 우리는 변화된 투쟁전략에 맞게 부대도 새롭게 편성하여 방면군산하에 여러개의 소부대들을 내왔습니다.

그 소부대들의 활동지역과 임무를 분담한 다음 나는 소부대를 데리고 연길방향으로 나왔습니다.

그때 김일이네 소부대에는 왕청, 동녕 일대에서 활동할 과업을 주고 오백룡이네 소부대에는 연길, 안도 일대에서 겨울나이식량을 해결할 임무를 주어 떠나보냈습니다.

우리는 연길현 발재툰막바지에서 오백룡소부대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쪽에서는 여러날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도 없었습니다.

강냉이이삭 한개를 위해서도 피를 흘려야 하는 때였기때문에 그럴수밖에 없었습니다. 쌀을 한되박이라도 얻자면 집단부락으로 뚫고들어가야 하는데 그것은 목숨을 내대지 않고서는 쉽사리 해결할수 없는 일이였습니다.

우리는 그해 여름내내 거의나 무수해만 삶아먹고 지냈습니다. 산에 무수해는 얼마든지 있었지만 속이 빈데다가 그것만 먹고 지내자니 아무리 먹어도 허전해서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때에 식량이 있을만한곳을 찾아 정찰을 나갔던 우리 동무들이 골아래에서 농막을 하나 발견했다는 보고를 해왔습니다. 조선농민 셋이 거처하는 농막인데 막주변에는 보습으로 이랑을 지은 꽤 널직한 밭도 있더라고 하면서 그 농민들을 잘 발동시키면 식량을 얼마간 구할수도 있지 않겠는가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강위룡을 농막으로 내려보냈습니다. 농막사람들과 사업하되 우리가 유격대라는것을 숨기지 말고 툭 털어놓으라고 했습니다.

강위룡이 방조를 호소하자 농막사람들은 난색을 지어보였다고 합니다. 식량을 구하려면 명월구에 갔다와야 하는데 경계가 너무 심해서 어렵다는것이였습니다. 그러다가 유격대의 요구인데 물러설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명월구로 떠나갔다는것이였습니다.

강위룡이한테서 이런 내용의 보고를 들은 다음 나는 대원들에게 경각성을 높일것과 경계근무를 강화할것을 지시하였습니다.

그날 취사장에서는 더덕죽을 끓이였습니다. 더덕을 두드려서 푹 끓이면 죽처럼 되는데 여기에 낟알을 조금만 섞으면 별맛이였습니다. 풀음식치고는 상음식이였습니다.

더덕죽이 한창 끓고있을 때 보초를 서던 손장춘이 달려와서 적들이 누렇게 달려든다고 야단을 쳤습니다. 보초소에 나가본 동무들은 적들이 어디로 달려드는지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손장춘은 산아래켠을 가리키며 거기에 적이 있다는것입니다. 그가 가리키는곳에는 나무그루터기들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이 열병을 앓고나면 그렇게 나무그루터기를 사람으로 빗볼수도 있습니다. 그는 열병을 앓고난지 얼마 안되는 몸이였습니다.

내가 손장춘을 보초소로 내보낸 지휘관을 추궁하고있는 사이에 취사장에서 일하던 대원들은 적들이 달려든다는 말을 듣고 공들여 쒀놓은 더덕죽을 다 쏟아버리였습니다.

며칠후 식량을 사러 갔던 농막사람들이 나타났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명월구에 갔던 사람은 둘인데 양복을 입은 신사 한사람이 따라와서 나와의 면담을 요청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양복쟁이는 전에 왕청유격대에서 중대장을 하던 최용빈이였습니다.

최용빈은 한다하는 싸움군이였는데 원래 힘이 장사였습니다.

언제인가 그는 나를 찾아와 몸이 쇠약해졌는데 얼마동안 중대를 떠나 휴식할수 있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얼마간의 말미를 주었습니다. 소왕청치기에 가서 짐승사냥을 하면서 몸보신도 하고 그고장 당조직의 사업도 도와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후 그는 《민생단》으로 몰리게 되자 안해에게 편지 한장을 남기고 적통치구역으로 내려가버렸습니다. 편지의 사연인즉 아이를 데리고 잘 있으라, 나는 혁명을 하다가 《민생단》으로 몰려 개죽음을 당하기가 싫어서 내려가는것이니 그렇게 알라, 그러나 내려가서도 혁명사업은 계속하겠다는것이였습니다. 해산한지 얼마 안되는 그의 안해는 그 편지를 가지고 울면서 나를 찾아왔습니다. 산후탈을 만났는지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습니다. 갓난애는 금시 숨이 넘어갈것 같았습니다.

사경에 처한 처자를 버리고 저 혼자만 살겠다고 적구로 달아나버린 최용빈이, 너는 도대체 어떤 인간이냐. 내 가슴속에서는 이런 분노가 솟구쳐올랐습니다. 나는 속으로 최용빈을 무정한 인간이라고 욕하면서도 그가 편지에서 쓴대로 변치 말고 혁명사업을 계속했으면 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우리가 최용빈을 대신해서 그의 처자를 돌봐주었습니다. 후에는 그들모녀를 부상병들과 함께 쏘련으로 들여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훌쩍 떠나갔던 최용빈이 5년이 지나서 우리를 찾아왔더란 말입니다. 그것도 《민생단》바람이 불던 그때보다 더 어려운 때에말입니다.

최용빈은 쟁개비가 데룽데룽 매달린 배낭을 메고 껑충껑충 산으로 올라왔습니다. 고생을 별로 하지 않았는지 신수도 멀쩡했습니다. 그는 사령부천막에 들어서자 《이게 얼마만입니까!》하면서 나에게로 곤두박질해왔습니다.

나도 반갑게 그를 맞이하였습니다. 과거사야 어떻든 왕청시절의 내 수하지휘관이 아닙니까.

최용빈은 나를 만나기 바쁘게 유격대에 다시 들어오려고 산중을 헤매던 사연을 장황하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식사를 했는가고 물었더니 요아래에서 밥을 끓여먹고 오는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배낭속에서 쌀자루랑, 말린 가재미랑, 술이랑 꺼내놓았습니다.

배낭에 매달린 쟁개비를 보니 그을음이 전혀 묻어있지 않았습니다. 유격대를 찾느라고 산중을 오래 헤맸다는 사람, 그것도 방금 밥을 해먹고 온다는 사람의 쟁개비가 그을음 하나 묻지 않고 새것대로 있으니 이상한 일이였습니다.

나는 그가 리종락과 같은 인간추물이 되였다는것을 의심치않았습니다. 한때 우리 부대에서는 최용빈이 귀순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댔습니다.

최용빈은 내가 자기를 어떻게 본다는것도 모르고 고뿌에 술을 가득 붓고나서 다시 만난 기념으로 마시자고 하였습니다.

내가 그 청을 거절하자 그는 갑자기 술고뿌를 쥔 손을 덜덜 떨었습니다. 내 목소리가 노기에 차있었으니까 아마 자기 정체가 다 드러났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나는 최용빈이, 사실대로 말하라, 농막사람들은 어떻게 만났고 여기로 찾아온 진짜목적은 무엇인가고 따지였습니다.

최용빈은 더 오그랑수를 써야 소용없다는것을 인차 깨달았습니다. 그는 농막에 있던 세사람은 밀정인데 자기가 그자들의 보고를 받고 《토벌대》 3개 부대를 데리고와서 이 골안을 포위해놓고 들어왔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그가 신호만 보내면 《토벌대》가 곧 쳐들어올 판이였습니다.

나는 우리가 빠지기 어려운 포위속에 들었다는것을 직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 내 가슴을 더 아프게 한것은 사생결단을 해야 할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보다도 최용빈이 일제의 개가 되여 뻐젓이 내앞에 나타났다는 사실이였습니다.

그보다 더 기막힌것은 그가 나를 《귀순》시켜보려고 있는 말주변을 다 짜내여 온갖 궤변을 늘어놓는것이였습니다. 그는 내 눈치를 보면서 나는 김장군이 얼마만큼 어려운 처지에 있는가를 잘 안다, 만주천지에 일본군대가 쫙 깔렸다, 이제는 아무리 애를 써도 어쩔수 없지 않는가, 김장군은 민족을 위해서 할수 있는 모든것을 다했다, 당장 《귀순》한다 해도 허물할 사람이 없다, 《귀순》한 사람들은 다 잘되였다, 장군도 내려만 오면 길림성 성장자리를 주겠다고 하더라고 주어섬겼습니다.

나는 최용빈이 하는 말을 듣다 못해 용빈이, 네가 어쩌면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가, 그래 옛날 왕청에서 중대장까지 하던 사람이 부끄럽지도 않은가, 그래도 우리는 네가 처자를 버리고 달아났을 때 아까운 지휘관을 잃었다고 섭섭해했다, 네가 이런 몰골을 해가지고 감히 우리앞에 나타나다니, 처자까지 다 버리고 적들의 품에 들어간 너에게 인간의 량심이 있는가, 변해도 너절하게 변했다고 꾸짖었습니다.

사람이 자기만을 생각하면 결국 이렇게 됩니다.

최용빈의 변절은 몸이 허약해졌다는 핑게를 대고 중대를 떠나 소왕청치기에 가서 생활할 때부터 벌써 시작되였다고 봅니다. 그때 그는 혁명보다도 제 한몸의 보신을 먼저 생각했던것입니다. 그가 《민생단》으로 몰리게 되자 억울한 죽음을 당하기 싫어서 적구로 도망쳤다고는 하지만 그게 다 혁명에 대한 신념이 약해진데서 온 결과입니다.

최용빈의 실례가 보여주는바와 같이 혁명의 길에서 한걸음 물러서면 그 종착점은 변절입니다. 그래서 나는 늘 대원들에게 혁명가가 갈길은 죽으나사나 혁명의 한길밖에 없다, 이 길을 떠나면 반동이 되고 배신자가 되고 인간추물이 된다, 눈비가 두렵고 총알이 두렵고 식량난이 두렵고 산악행군이 두렵고 감옥이 두렵고 교수대가 두려워서 혁명을 중도반단하는 사람들은 형틀앞에 두세번 끌고가서 고추물만 먹여도 인차 기발을 바꾼다고 말해주군했습니다.

배신이라는것은 량심을 버리는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것은 최용빈의 사건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이였습니다.

간도에서 《민생단》문제로 숱한 사람들이 처형되던 그무렵에는 최용빈이처럼 유격구를 버리고 적구로 내려간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혁명가들은 《민생단》이라는 루명을 쓰고 억울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유격구를 떠나지 않고 혁명대오에 그냥 서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했겠습니까. 그것은 죽으면 죽었지 량심을 팔수 없었고 혁명을 등지면 반혁명의 길밖에 갈곳이 없다는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기때문입니다. 혁명가들은 이처럼 량심을 버리고 혁명의 붉은기앞에서 떠나가는것을 수치로 여기고 죽음으로 생각했습니다. 말하자면 사람못할짓으로 생각했습니다.

신선동유격구시절에 박성철이네 중대에는 인숙이라는 녀대원이 있었습니다.

이 녀대원이 하루는 보초근무를 서고있는 박성철에게 편지 한장을 가만히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중대에서 중대장을 하는 그 녀대원의 남편이 자기 안해에게 보낸 편지였습니다. 사연인즉 《붉은 포승에 묶였다.》는것이였습니다. 《민생단》에 걸렸다는 은어였습니다.

그 당시 박성철은 중대청년간사였습니다. 녀대원이 간사에게 그런 편지를 보이고 자기의 운명문제를 의논하려고 한것은 조직관념의 견지에서 볼 때 잘한 일이였습니다. 그 녀대원은 박성철에게 남편이 《민생단》으로 락인되였으니 이제는 자기도 무사치 못할것 같은데 억울한 죽음을 당할바에는 적구로 내려가는것이 어떻겠는가고 하였습니다.

박성철은 그게 무슨 소린가, 적구로 내려간다는것은 결국 혁명투쟁을 줴버린다는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투항하는것이나 같은짓이니 어떻게 그렇게야 하겠는가고 말해주었습니다.

인숙이라는 녀대원은 아니다, 《민생단》을 피하자는것이지 혁명투쟁을 그만두자는게 아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박성철은 혁명대오를 떠나게 되면 반혁명의 길밖에 없지 않는가 하고 차근차근 말해주었습니다.

녀대원은 그 말을 듣고 자기가 혁명가로서 가지 말아야 할 길로 갈번했다는것을 깨달았습니다. 박성철이 그때 그에게 좋은 말을 해주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고 죽지 않겠거든 뛰라고 부추겼더라면 어쩔번했습니까.

인숙이라는 녀대원은 유격구를 떠나지 않고 혁명대오에서 그냥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합니다.

그가 혁명이냐, 도주냐 하는 두 갈래의 길중에서 도주의 길을 택하지 않고 혁명의 길을 택할수 있었던것은 일신상에 생긴 문제를 혼자서 주관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청년간사에게 로출시켜 조직의 방조를 받은데 있고 일단 조직에서 주는 조언을 받은 다음에는 마음을 다잡고 리성으로 돌아와 혁명가답게 동요를 극복한데 있습니다.

그런데 사내대장부인 최용빈은 혁명동지들의 방조를 받을 궁리도 하지 않고 안해에게 편지 한장을 써보내고는 비굴하게 적구로 달아나버렸습니다. 그가 인간의 량심이라는것을 조금이라도 귀중하게 여겼더라면 방금 해산한 안해를 버리고 그처럼 비겁하게 적구로 도망갈수 없는것입니다.

그는 개인감정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최용빈의 운명은 벌써 여기서 결정되였습니다. 사람이 개인감정을 이겨내지 못하면 상상할수 없는 대죄도 범할수 있습니다. 자기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 자기의 감정만을 절대시하는 사람들은 어느때든지 혁명을 배반할수 있습니다. 배반이라는것은 어떤 경우에나 자기라는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라는것에서는 배반이 생기지도 않거니와 생길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혁명가들은 언제나 자기를 억제하고 우리라는것에 습관될수 있도록 늘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혁명의 길에 나선 사람들의 깨끗한 량심이며 매일, 매 시각 자기를 완성해가는 수양과정입니다.

자기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로 혁명가가 될수 없으며 혁명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수 없습니다.

남패자에서는 리종락이 일본군속의 옷을 입고 나타나 《귀순》을 권고했지, 고난의 행군때에는 리호림이 달아나버렸지, 림수산도 변절했지, 오늘은 또 최용빈이라는게 찾아와서 어쩌고저쩌고 하니 내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리종락이도 최용빈이도 내가 아끼고 신임하던 사람들이라는데 있습니다. 덜 아끼고 덜 신임하고 덜 사랑했다면 그래도 가슴이 그렇게까지는 아프지 않았을것입니다.

조선혁명군시절의 대장이라는게 간단치 않습니다. 항일유격대의 중대장도 간단한 자리가 아닙니다. 변절이나 해가지고 집에 가만있었다면 또 모르겠습니다. 혁명을 배반한것이 얼마나 량심이 없고 수치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고 옛 상관앞에 뻐젓이 나타나 《귀순》을 설교하니 내 가슴이 더 아팠습니다.

그들이 왜 그런 수치도 모르고 내앞에 뻐젓이 나타날수 있었겠습니까.

혁명이 다 망했기때문에 옛 사령관한테 찾아와 《귀순》을 설교해도 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정세에 암둔했고 인간자체가 극도로 타락했기때문입니다.

최용빈은 리종락과 같은 운명을 면할수 없었습니다.

그날 적들은 우리가 있는 산을 이중삼중으로 포위했습니다. 사방에 우등불천지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물을 친대도 온 산판을 다 뒤덮지는 못하는 법입니다. 적들은 대체로 산릉선이나 골짜기에 보초를 세우고 포위진을 치군했습니다.

우리는 이날 적들끼리 부딪치게 하고는 산허리를 타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명월구에서 안도로 가는 큰길을 넘은 다음 수림속에 들어가 한숨 돌리면서 보니 적의 《토벌대》가 시누렇게 우리가 있던 발재툰막바지에 올라 저희들끼리 싸우고있었습니다.

우리는 깊은 수림속으로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이렇게 예상치 못했던 정황이 조성되게 되자 우리와 오백룡소부대와의 접선에는 난관이 생기였습니다.

원래 우리는 발재툰막바지에서 오백룡이네와 만나기로 약속이 되여있었습니다. 오백룡이네 부대의 통신원들을 만나려면 누구인가 거기에 가야 하는데 사실 그것은 죽음을 각오해야만 하는 일이였습니다.

그보다 더 문제로 되는것은 오백룡이네 통신원들이 발재툰막바지가 적들의 수중에 넘어간 사실을 전혀 모른다는 사정이였습니다.

우리는 지봉손과 김홍수를 련락지점으로 보냈습니다.

김홍수는 장백에서 갓 입대했을 때 《꼬마신랑》이란 별명으로 불리우던 대원인데 책임성이 강했습니다.

지봉손과 김홍수는 다음날 저녁때 련락지점에서 통신원들을 만나 오백룡이 보낸 편지를 받아가지고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통신원을 만나려고 련락지점으로 뚫고들어가던 경위를 들어보았는데 참말로 아슬아슬했습니다. 나무를 한대한대 안고 돌면서 뚫고들어갔다고 하였습니다.

오백룡이네는 그동안 집단부락들을 치고 얼마간의 식량을 해결했습니다. 후에 그들은 그 식량의 대부분을 사령부에 보내왔습니다.

발재툰을 떠난 우리가 다음으로 거처를 잡은곳은 안도현 황구령기지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1940년 겨울을 나면서 소부대활동을 벌리기로 하였습니다.

소부대활동을 벌리면서 파괴된 혁명조직들을 복구하고 군중지반도 튼튼히 꾸려놓자면 겨울나이준비를 잘해야 했습니다.

나는 오백룡소부대외에도 여러 소부대들에 식량과 소금, 천을 비롯하여 겨울나이준비에 필요한 여러가지 생활필수품들을 구입할 과업을 주었습니다.

겨울나이준비중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정치사상적준비였습니다. 어떤 어려운 조건에서도 혁명적신념을 고수할수 있도록 대원들에 대한 사상교양사업을 특별히 잘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어느때보다도 규률을 강하게 세워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후 강위룡이네 소부대에서는 사상적으로 해이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밀영을 앉힐만한곳을 탐색하고 오던 그들은 개울에서 물고기가 와글거리는것을 보자 거기에 총을 마구 갈기였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자 가슴이 서늘해졌습니다. 근방의 고개마루에서 적들이 포대를 쌓느라고 왁작거리고있었다는데 그런데서 총소리를 내는것이 얼마나 위험한 행동이겠습니까.

밀영에 틀고앉아 한해 겨울 많은 일을 하려 했던 우리의 계획이 몇방의 총소리때문에 다 나무아미타불이 될번했습니다.

그 당시의 일가운데서 또하나 잊혀지지 않는것은 소사건이였습니다.

이 사건의 주인공은 장흥룡이였습니다. 그는 기관총소대에서 분대장을 하는 사람이였는데 소부대 하나를 책임지고 쟈피거우일대에 식량공작을 나갔습니다.

장흥룡은 목재소 소도 아니고 뿔에 임금왕(王)자 도장을 새긴 민회소도 아닌 농민의 소를 끌고왔습니다.

물론 그럴만한 사정은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대의 식량을 해결하기 위해 마을로 내려가다가 산중에서 그 소를 발견하였습니다. 주인을 찾으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종시 찾아내지 못하게 되자 장흥룡은 대원들을 시켜 소를 밀영으로 끌고가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소를 매두었던 장소에 그대로 남았습니다. 주인이 오면 사연을 말하고 돈을 물어주자는것이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주인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소값을 치르지 못한채 밀영으로 돌아왔습니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소를 내다맨 주인이 소를 풀어가려고 오다가 총멘 사람이 그 곁에서 서성거리는것을 보고는 질겁해서 달아났다는것이였습니다.

장흥룡이네 소부대가 값도 치르지 않고 농민의 소를 끌어왔다는 말을 듣고 나는 몹시 분개하였습니다.

혁명군의 복무조례를 잘 모르는 신대원이 그랬다면 몰라도 혁명을 오래했다는 장흥룡이 그런 엄청난 탈선을 했다는것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장흥룡은 1932년에 자위단놈들과 싸우던중 적탄에 손가락 하나를 잃고 포로되였다가 도망쳐서 귀대한 사람입니다. 처음에 동료들은 그가 혹시 적들한테서 무슨 임무를 받고 오지 않았나 하고 의심하였습니다.

장흥룡은 동지들의 신임을 회복하기 위해 피타는 노력을 하는 과정에 처창즈유격구에서의 모진 기아도 이겨내고 고난의 행군도 견디여냈습니다.

이런 사람이 주인도 모르게 소를 망탕 끌어오는것과 같은 과오를 범한것은 리해할수 없는 일이였습니다.

군민관계를 잘 가지라는것은 우리가 무장투쟁초기부터 강조해온것이고 인민혁명군의 복무조례에도 명문화한 문제입니다. 1940년이면 군민관계가 아주 높은 수준에서 잘 유지되던 때였습니다. 어느 정도로 군민관계가 순결했는가. 인민이 후방물자를 지원하면 오히려 그것을 되돌려주는 수준이였습니다.

1940년 봄에 우리는 양초구에서 전투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전투가 끝난 다음 그 마을사람들이 우리에게 여러마리의 닭을 보내왔습니다. 우리는 우리대로 그들에게 닭값의 몇십배에 달하는 돈을 주었습니다. 마을농민들은 그 돈을 보자 펄쩍 뛰였습니다. 혁명군을 인민의 아들딸로 조직된 군대라고 하는데 그럼 우리가 제 자식들에게 돈을 받고 팔라는것인가, 성의를 몰라도 너무나 몰라준다고 막 성을 냈습니다. 그렇게 들이대니 우리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인민이 표시한 지성에 유격대가 돈을 치르어주는것으로 대답했으니 성의를 표시한 마을사람들의 립장에서 보면 우리의 처사가 얼마나 섭섭했겠습니까. 우리는 마을사람들이 돈을 안받으면 닭을 받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돈과 닭이 한참동안 이쪽저쪽으로 왔다갔다했습니다. 결국은 우리도 닭을 받고 마을사람들도 돈을 받는것으로 싱갱이가 끝났습니다. 그러나 부대가 양초구를 철수할 때 값을 치르고 가져가던 그 닭들마저 놓아주고 갔습니다.

자, 보시오. 이것이 오래전 일도 아니고 몇달전에 있은 일인데 장흥룡이 이런 전례를 다 무시해버리고 그런 행위를 했으니 내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장흥룡에 대한 대원들의 비판이 대단했습니다. 그들은 장흥룡이 죽음으로써도 이 과오를 씻을수 없다고 력설했습니다.

장흥룡이도 자기비판을 잘했습니다.

그가 자기비판을 잘했기때문에 우리는 그에게 책벌만 주고 소를 주인에게 되돌려주라고 하였습니다.

장흥룡은 1941년에 내가 소부대를 데리고 만주로 다시 나왔을 때 김일이네 소부대에 망라되여 활동하다가 전사하였습니다.

우리가 황구령기지에 있을 때는 도주사건도 발생하였습니다.

도주자는 쑈채라고 부르던 중국인대원이였습니다.

쑈채는 평소에 집생각을 많이 하였습니다. 추석날에는 월병을 먹으면서 울기까지 했습니다. 마음이 아주 약한 사람이였습니다. 그래서 당조직이 그에 대한 개별교양을 많이 하였습니다.

쑈채가 전염병을 앓게 되자 우리는 그를 후방병원에 보냈습니다. 그후 그가 작식대에서 일하는 녀대원을 만나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충동질했다는 사실이 사령부에 보고되였습니다. 그는 군인생활을 성실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직일을 세우면 졸기만 하고 보초를 서라면 배가 아프다고 죽는 시늉을 했습니다. 억지로는 혁명을 못합니다.

쑈채는 끝내 우리의 성의를 저버리고 도주하였습니다. 그런데 도주한 다음의 그의 행위가 문제였습니다. 그는 대오를 떠나자마자 《토벌대》를 데리고 우리한테로 달려들었습니다.

대부분의 성원들은 소부대공작을 나가고 밀영에는 나와 전령병 몇사람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후 사령부의 위치를 맹산촌오지로 옮겼습니다.

소부대들과 소조들은 임무를 수행하는족족 여기로 모여들었습니다.

오백룡이네 소부대에서는 수백석의 식량을 장만하여 비밀장소에 저장해놓았습니다. 강냉이밭을 통채로 사서는 이삭을 따서 마대에 넣어 푸르허에서 50리가량 떨어진 깊은 수림속에 뒤주를 만들고 은밀하게 저장했습니다.

국제당이 쏘련에서 소집하는 조, 중, 쏘 군사지휘관들의 회의에 참석하라고 련락을 보내온것이 바로 이무렵이였습니다. 그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그때 국제당의 련락을 받고 먼저 선발대를 파견하여 그쪽 형편을 자세히 알아보게 하는 한편 종전에 세운 방침 그대로 겨울을 동북땅에서 날 준비를 마저 해놓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식량이 적들의 손에 몽땅 들어갔다는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비탄장이 변절하는 바람에 식량을 저장했던 장소가 로출되였다는것입니다. 비탄장이란 김명화가 돈화의 수림속에서 온갖 지성을 다해 살려낸 그 비로까데입니다. 련대장까지 한 사람이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고 변절하였습니다.

식량저장고의 위치를 알아낸 적들은 산에다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몰고와 뒤주를 헤쳐서는 몽땅 퍼갔습니다. 몇달동안의 수고가 하루아침사이에 물거품이 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모든 곤난앞에서도 놀라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때의 난관은 큰것이였지만 우리가 그런 난관을 어디 한두번만 겪었습니까.

라자구등판에서 겪은 고생, 두차례에 걸치는 북만원정과 무송원정은 얼마나 간고한 원정이고 고난의 행군은 또 얼마나 곡절많은 행군입니까.

그렇지만 우리는 그 모든것을 다 이겨냈습니다. 촉한도 이겨냈고 주림도 이겨냈고 그믐밤처럼 캄캄한 절망도 이겨냈습니다. 동지들의 희생으로부터 생기는 슬픔과 심장의 동통도 다 디디고 일어섰습니다.

그것은 우리모두가 어떤 정황에서도 혁명승리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고 조국과 민족 앞에 지닌 사명과 책임, 혁명가의 량심을 한순간도 잊지 않았기때문입니다.

어떤 일이 있든지 이 고비를 이겨내고 혁명을 다시한번 상승시키자. 좋다. 누가 승리자가 되는가 두고보자!

나는 그때 맹산촌에서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혁명에 대한 사명감이라고 할가, 배짱이라고 할가, 시련이 겹칠수록 담력은 커지고 혁명에 대한 열정과 책임감은 더욱 불처럼 타올랐습니다.

출로는 무엇인가.

이런 때일수록 강행군을 하는데 있었습니다. 강행군을 하자면 신심과 용기를 안겨주는 사상동원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필요성으로부터 소집한 회의가 바로 맹산촌회의입니다.

나는 대원들에게 툭 털어놓고 말했습니다.

정세는 엄혹하고 더 간고해진다. 우리 혁명위업이 열매를 맺어 나라가 독립되리라는것은 누구나 일치하게 믿고있는바이지만 그런 날이 언제쯤 오겠는가 하는것은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10년이나 고생이란 고생은 다하면서 싸웠지만 그런 고생을 이제 5년 더하게 될지 10년 더하게 될지 그것은 찍어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명백한것은 최후의 승리는 반드시 우리에게 있다는것이다.

물론 이 길에는 허다한 난관이 있다. 우리가 이때까지 겪은 난관보다 몇배, 몇십배 더 큰 난관도 있을수 있다. 그러니 우리를 끝까지 따라가 혁명을 계속할 자신이 없는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

집으로 가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려비도 주고 길량식도 주겠다. 그리고 투쟁을 중도반단한데 대하여 문제시하지 않겠다. 힘이 약하고 신심이 모자라서 대오를 떠나는거야 어떻게 하겠는가. 갈 사람은 가라. 그러되 인사는 하고 가라.

대원들은 그 말을 듣자 와 하고 내 팔에 매달려 장군님, 혁명이 성공하는 날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 해도 일없습니다,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으니 우리는 장군님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동지들을 배반하고 산에서 내려가 적들한테 머리를 숙이고 살바엔 여기서 싸우다 죽는것이 낫습니다, 우리는 장군님과 생사를 같이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눈물을 뿌렸습니다.

대원들이 그런 말을 하는 바람에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났습니다. 그때의 그 말이 나에게 얼마나 큰 힘과 용기를 주었는지 모릅니다. 그 어떤 화려한 연설도 그날 대원들이 한 말보다는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못할것입니다.

그때에 우리가 다진 맹세는 항일혁명의 장도에 바친 우리들자신의 피를 헛되이하지 않으려는 결의였습니다.

맹산촌오지에서 열린 회의, 그것은 서로 떨어질수도 없고 떨어져서도 안되는 사령관과 전사들의 혼연일체, 지도자와 대중의 철통같은 통일단결을 다시한번 확증한 회의였습니다. 항일유격대원들은 이 회의를 통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위기에서 구출할수 있는 기본명맥이 혁명적량심을 귀중히 간직하며 사령관과 전사들이 운명을 끝까지 같이하는데 있다는것을 더욱더 깊이 깨닫게 되였습니다.

맹산촌회의를 하고나서 우리는 조선의 혁명가들이 혁명적 신념과 의지를 변함없이 간직하고 굴함없이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게 된다는것을 더욱더 굳게 확신하게 되였습니다.

바로 이런 때에 그전에 원동에 보냈던 동무들로부터 련락이 왔습니다.

국제당이 장차 하바롭스크에서 소집하게 되는 조, 중, 쏘 세 나라 군사지휘관들의 회의에 참석할수 있도록 나와 위증민을 비롯한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련군 1로군 대표들이 빠른 시일안에 쏘련으로 들어올것을 거듭 요구한다는것과 그 기회에 동북지방에서 활동하고있는 유격부대들이 쏘련경내에 들어오는 경우 받을 준비가 되여있다는것이였습니다.

국제당은 우리가 일단 원동에 들어가서 한해 겨울을 난 다음 차후활동대책을 실정에 맞게 상론할것을 제기하였습니다.

우선 국제당이 소집하려고 하는 회의취지가 명백하고 또 동북항일련군의 다른 지휘관들도 이미 도착했다고 하는 실정에서 나는 쏘련경내에 들어가 회의에 참가할것을 결심하면서 주력부대 일부 성원들을 데리고가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였습니다. 제 나라, 제 땅과 더 멀어지고 이미 싸우던 고장을 또다시 잠시나마 떠나게 된다니 섭섭하다는것이 대원들의 일반적인 심리였습니다.

내가 지휘관들의 회의에서 쏘련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그 결과를 알려주자 일부 대원들은 국제당이 중대한 회의를 소집해놓고 사령관을 찾으니 장군님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만 들어가고 자기네는 남아서 싸우면 어떻겠는가고 하였습니다.

물론 그것도 하나의 방도이기는 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부대를 데리고 원동으로 들어가는것이 그때로서는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대원들을 설복하였습니다. 우리가 원동으로 들어가는것은 혁명을 버리고 주저앉자는것도 아니고 또 영원히 그곳에 가서 살자는것도 아니다, 내생각은 국제당에서 소집한 지난해의 회의에도 못참가하였는데 이번 회의에는 참가하자는것이다, 그래서 거기에서 국제당이나 쏘련당국과 좀더 폭넓게 조선혁명의 장래문제를 론의해보자고 한다, 그렇게 하는것이 우리에게 도움으로 될수도 있다, 그런데 국제당에서 소집하는 회의가 얼마나 오래 걸릴지 그것은 잘 알수 없다, 그래서 나는 그 회의에 갈적에 동무들을 데리고가자는것이다, 겨울나이준비도 잘 안된 조건에서 동무들만을 떨궈놓고 갈수 없다, 그러니 함께 쏘련경내에 갔다가 겨울이나 나고 봄에 다시 이 전장으로 돌아오자고 말해주었습니다.

후에 나는 이 엄혹했던 1940년 가을을 돌이켜보면서 그때 내가 지휘관으로서 제때에 결심을 잘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가 원동으로 들어갈 준비를 끝내고 처창즈치기를 떠난것은 10월말경이였습니다.

출발에 앞서 나는 위증민과 오백룡에게 련락원을 보냈습니다. 위증민도 오백룡도 병상에 매인 몸들이여서 원동으로 들어갈수 없었습니다.

련락원을 만나지 못한 오백룡은 그후 우리의 행방을 찾느라고 안도땅을 다 뒤졌다고 합니다. 오백룡이 처창즈치기에 당도했을 때는 우리가 이미 떠난 뒤였습니다.

그 사람이 우리가 묻어두고간 식량과 동복을 발견하고 눈물을 흘렸다는것이 바로 그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원동으로 들어가기전에 오백룡이네를 생각해서 쌀 두가마니와 솜옷 몇십벌을 파묻어두고갔는데 그것이 그들을 구원해준셈입니다.

그후 오백룡소부대도 뒤따라 원동으로 들어왔습니다.

원동으로 들어가는 로정에서도 우리는 고생을 많이 하였습니다. 낮에는 주로 숲속에 들어가있다가 밤에만 행군했는데 적들을 피해가며 행군하자니 품도 많이 들고 시간도 많이 걸리였습니다. 그래도 로두구까지는 단숨에 쭉 빠져나갔습니다.

그러다가 백초구쪽으로 갈 때 《토벌대》와 맞다들었습니다. 우리가 외줄로 서서 산고개를 넘어서는데 골아래쪽에서부터 적들이 마주 올라오고있었습니다. 우리는 오던 길로 되돌아서서 산릉선으로 다시 올리뛰였습니다.

그때 짐을 많이 지고 행군하던 김정숙이 미처 따라서지 못해 큰일날번했습니다.

산릉선을 넘은 다음 대렬을 살펴보니 김정숙이가 보이지 않더란 말입니다. 나는 다시 릉선을 넘어와 적들이 마주오는 언덕아래를 내려다보았는데 그는 큰 배낭에 눌리워서 발을 재게 옮기지 못하고있었습니다. 적들이 사로잡으라고 고함치며 그를 뒤쫓아오고있었습니다.

나는 싸창으로 그놈들을 쏴갈기였습니다. 경위대원들도 뛰여와서 기관총으로 김정숙을 엄호하였습니다. 그렇게 그를 무사히 구출했습니다.

적들을 요행 따돌리고 하마탕근방에서 숙영하였습니다. 그날은 적들의 기동이 너무도 심해서 어슬어슬해질 때까지 마을가까이에 있는 조밭고랑에 누워있었습니다.

밭고랑에 마침 배추와 무우를 심은것이 있어 그것으로 요기는 하였으나 추워서 견딜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초불을 켜놓고 가드라드는 손을 조금씩 녹이였습니다.

훈춘에서부터는 조선농민 두사람이 우리를 안내하였습니다. 그들은 쏘만국경가까이까지 우리를 데려다주고는 저 앞산을 넘으면 쏘련땅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산을 넘어서니 아무런 표식도 없는 허허벌판이였습니다. 어디까지 만주땅이고 어디서부터 쏘련땅인지 알수 없었습니다.

리두익을 시켜 높은 나무에 올라가 강물이 어느쪽으로 흐르는가, 인가가 있는가를 알아보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어려서부터 나무를 잘 탔습니다. 리두익은 나무꼭대기에 올라갔다가 내려와 강도 안보이고 인가도 안보인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동쪽으로 얼마쯤 더 가다가 수림속에서 전화선을 발견하였습니다. 뚱딴지를 보니 중국이나 조선것과는 달랐습니다. 쏘련땅에 들어섰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더 확인하고 행동해야 했습니다.

그날밤 우리 일행이 정찰을 다시 파견하고 한참 휴식하는데 동쪽에서 기관총소리가 자지러지게 울렸습니다. 얼마후 정찰나갔던 동무들이 돌아와 어떤 자그마한 경비막에 들어가 고뿌랑, 주전자를 만져보다가 보초에게 들키는 바람에 큰변이 날번했다고 하였습니다. 차잔이며 주전자가 류달리 크고 투박한것으로 보아 쏘련의 국경초소가 틀림없는것 같더라는것이였습니다. 그 경비막이 얼마쯤 되는곳에 있는가고 물으니 10리쯤 된다고 하였습니다.

쏘련국경경비대원들은 온밤 기관총으로 위협사격을 하였습니다. 정찰나갔던 우리 사람들이 그들을 몹시 놀래웠던게 분명하였습니다.

다음날 나는 리을설과 강위룡을 국경초소에 보내여 쏘련경비대원들을 데려오게 하였습니다.

정작 쏘련사람들과 마주앉고보니 말이 통하지 않아서 애를 먹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우리는 조선빨찌산이고 내가 그 대장인 김일성이라는 말을 몇번이고 되풀이하였습니다. 다행히도 그들은 《빨찌산》이라는 말과 《김일성》이라는 말만은 알아들은것 같았습니다.

원동으로 들어가는 경위자체도 이처럼 수월치 않았습니다. 우리가 국제당의 련락을 받고 입쏘하는것이였지만 그 구체적인 통로와 시간이 국경초소에까지 와닿지 않다보니 고생을 하였습니다.

쏘련경내에 들어간 다음 여러날 방역사업을 하느라고 지체하였습니다.

방안에서 하루종일 하는 일없이 지내다보니 대원들은 다들 클클해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대원들은 하루종일 노래를 불렀습니다. 혁명가요란 혁명가요는 다 부르고 그것마저 밑천이 떨어져서 나중에는 어느 고망년에 풍월로 얻어들은 노래까지 다 불러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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