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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20-3. 소금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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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16,662회 작성일 16-02-14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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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소금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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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6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공화국내각소회의를 지도하시였다. 회의에서는 소금배급제를 페지하고 자유판매제를 실시할데 대한 문제가 토의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날 회의를 결속하시면서 우리가 항일무장투쟁시기 체험한데 의하면 소금이 떨어졌을 때처럼 고통스러운 일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산에서 싸울 때 쌀은 떨구는 일이 있어도 소금만은 떨구지 않기 위하여 애썼습니다라고 하시면서 소금생산이 급격히 늘어나고 예비까지 조성할수 있게 되였으니 이제는 소금을 자유판매하도록 하자고 말씀하시였다.

소금을 자유로 팔고사는 조치를 취하신 수령님께서는 일군들앞에서 고난의 행군때 소금고생을 하던 일을 회상하시였다. 세칭 소금사건이라고도 부르는 그 사연을 두고 위대한 수령님께서 여러차례에 걸쳐 하신 회고의 말씀을 종합하여 아래에 소개한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소금사건은 1939년 봄 고난의 행군의 마지막시기에 있은 일입니다. 그 소금사건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소금을 먹지 않고는 살아갈수 없습니다. 사람이 소금을 먹지 못하면 손발이 붓고 맥이 없어져 움직이지 못하게 됩니다.

초식을 하는 짐승들도 염분을 섭취하지 못하면 살아가지 못합니다. 산속의 웅뎅이에 고여있는 염기있는 쩝쩔한 물이 있는 부근에 락각이 많은것은 사슴들이 염분을 섭취하기 위하여 그곳에 자주 찾아오기때문입니다.

유격대의 생활에 4대필수품곤난이라는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뭔가 하면 식량곤난,신발곤난,성냥곤난,소금곤난이였습니다. 그 네가지 곤난가운데서 제일 참기 어려웠던 곤난이 무엇인가고 물으면 아마 대다수의 항일투사들이 소금곤난이였다고 대답할것입니다.

워낙 북간도나 서간도 지방은 소금이 바른데다가 관청이 통제를 심하게 하다나니 귀물이 될수밖에 없었습니다. 소금은 만주지방에서도 관청의 전매품으로 되여있었습니다.

적들은 주민지구의 소금이 인민혁명군의 수중에 넘어가지 못하게 엄격히 단속하였습니다.

장사군들이 조선에서 소금을 밀수해다가 주민지구를 돌아다니며 더러 밀매를 하였지만 크게 보탬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간도오지에서는 소금대용으로 나무재를 우려먹는 집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나는 동만에 있을 때 한세대의 식구가 돌소금 한알을 가지고 한끼를 굼때는것을 보았습니다. 내가 왕청에서 활동할 때 한번은 최춘국이네 중대에 내려가 고현숙에게 작식대에서 제일 큰 애로가 무엇인지 말해보라고 하니 첫 순서로 꼽는것이 소금이였습니다. 고현숙은 오백룡이네 이웃에 살다가 적들의 《토벌》에 숱한 식구를 잃고 원쑤를 갚으려고 유격대에 입대한 녀자입니다. 그는 입대하자 작식대원으로 임명되였는데 내가 중대에 내려가서 식사를 할 때마다 찬이 변변치 않다고 하면서 못내 송구해하였습니다. 어떤 때에는 그가 소금을 치지 못한 찬을 밥상우에 내놓은것이 면구스러워 내앞에 얼굴도 내밀지 못하고 부뚜막앞에 서서 어쩔바를 몰라하였습니다.

고현숙의 말이 자기네도 온 집안식구가 돌소금 한알로 한끼를 굼땔 때가 많았다고 하였습니다. 중국돌소금 한알은 보통 당콩알만치나 컸습니다.

2차 북만원정때 소금사정이 얼마나 곤난했던지 어떤 중대에서는 대원들이 저마끔 혁띠에 소금을 넣은 자그마한 비상주머니를 차고다니기까지 하였습니다. 주머니라야 손가락이 겨우 드나들수 있는 도장주머니만한것이였습니다. 비상주머니의 소금은 그 어디서도 염분을 섭취할수 없는 막다른 경우에만 소비하였습니다. 소금고생을 해보지 못한 동무들에게는 아마 이런 이야기가 옛말처럼 들릴것입니다. 빨찌산시기에 소금공작을 하느라고 적구에 내려갔다가 희생된 대원들이 한두명이 아니였습니다. 지하조직원들도 소금공작을 하는 과정에 많이 희생되였습니다. 소금을 구해들이는 기본통로는 지하조직선이였습니다. 지하혁명조직들에 돈을 주면 그 조직들이 군중을 발동하여 소금을 사다놓았습니다. 물론 부대에 들어오는 소금중에는 인민들이 스스로 사보낸것도 있었습니다.

적들은 우리가 어떤 경로를 통하여 소금을 구해들이는가 하는것도 잘 알고있었고 소금부족때문에 얼마나 큰 곤난을 겪고있는가 하는것도 손금보듯 알고있었습니다. 이것은 적들로 하여금 소금을 가지고 인민혁명군을 괴멸시키기 위한 무서운 작간을 할수 있는 조건을 지어주었습니다. 적들은 소금을 가지고 모략을 잘 꾸미면 총 한방 쏘지 않고서도 혁명군을 몽땅 사로잡거나 전멸시킬수 있다고 타산하였습니다.

그들은 체험을 통하여 순수한 군사정치적대결만으로써는 우리 인민혁명군을 타승할수 없다는것을 잘 알고있었습니다. 그래서 《귀순공작》도 벌려보고 집단부락정책이나 초토화작전도 해보았습니다. 한때는 《민생단》을 조작하여 조중 두 나라 인민들사이에 쐐기를 박는 민족리간전술로 우리의 혁명력량을 내부로부터 와해시켜보려고도 하였습니다.

일본사람들은 심지어 《김일성사살설》까지 퍼뜨려 우리에 대한 소문이 자꾸 퍼지는것을 막아보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김일성이 저들한테 잘못된것처럼 거짓보도를 날리고 이제는 김일성도 없어졌으니 독립투쟁도 끝장이 났다는 식으로 거짓선전을 하면서 조선민족의 반일열기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그 당시 조선과 만주의 적지 않은 출판물들은 우리가 어느 전투에서 어떻게 잘못되였다는 식으로 그럴듯하게 엮은 현지보도형식의 글까지 뻐젓이 냈습니다.

1937년 11월에 《경성일보》는 만군《토벌대》가 무려 5시간의 격전끝에 우리를 사살하는데 성공하였다고 쓰고 부자가 2대에 걸쳐 항일반만운동을 계속하던 김일성도 《토벌군》에 의하여 궁지에 몰리우다가 드디여 36살을 일기로 파란많은 생애의 막을 닫았다고 하였습니다.

위만군이 발간하던 잡지 《철심》도 《김일성비 토벌상보》라는 제목으로 우리를 어쨌다는 글을 실었습니다. 그 상보에 의하면 내가 무송현 양목정자부근에서 위만군의 불의의 습격을 받아 고전을 겪던중 부하 8명과 함께 잘못되였는데 부락민들을 불러다 확인해보니 《김일성이 옳다.》고 하였다는것입니다.

이 《공로》로 해서 위만군 제7련대 중대장이였던 리 아무개란자는 관동군사령관,만주국치안부 대신으로부터 특별승급과 상장을 받고 1만원의 상금을 타먹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후 김일성이 다시 나타나 일이 참으로 맹랑하게 되였다고 했습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조선사람과 중국사람들을 대상으로 생체실험까지 하였는데 그 목적이 무엇이였겠습니까. 그것은 두말할것도 없이 조중 두 나라 인민들과 혁명군대를 노린것이고 전망적으로는 동양제패를 방해하는 온갖 적대세력에 대한 생리적소멸을 꾀한것이였습니다.

그러나 적들은 그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써도 항일혁명의 불길을 끌수 없었고 조선인민혁명군의 존재를 없애버릴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악에 받친 적들은 우물에도 독약을 치고 빵에도 독약을 치고 지어 소금이나 쌀에도 독약을 쳐서 들여보내는 비렬한 방법으로 우리를 어째보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장백땅에 가자마자 적들의 롱간질에 걸려들번했습니다. 서간도에 나가서 첫 싸움을 대덕수에서 하고 련이어 소덕수전투까지 치른 다음 우리가 마순구라는곳에서 추석준비를 하고있을 때였습니다. 하루는 보초장이 나한테로 뛰여와서 어떤 로인이 지금 보초소에 나타나 무작정 대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조르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몰라서 나의 결론을 받으러 왔다고 보고하였습니다. 나는 로인을 만나보았습니다. 로인은 우리가 장백에서 구해들인 소금이 독소금이라는것을 신고하였습니다. 적들이 소금에 독약을 쳤다는것입니다. 우리는 그 말이 사실인가를 알아보려고 독약이 들어있다는 소금을 짐승에게 먹여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즉시에 독효가 나타났습니다. 로인이 제때에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정말 큰일날번하였습니다. 소금에 독약을 치는 방법으로 우리를 멸살시켜보려는 적들의 시도는 우리가 소금곤난을 당할 때일수록 더 극심해졌습니다.

우리는 1939년 봄에도 소금이 떨어져 몹시 애를 먹었습니다. 분산행동에로 넘어갔던 련대들이 한데 모여 사령부와 같이 움직이며 고난의 행군을 마무리지어가던 때였습니다. 행군이 거의 끝나갈 림박이여서 대원들의 사기는 매우 좋았습니다. 그때는 식량도 해결되고 날씨도 푸근했습니다. 새봄을 맞이하다보니 다들 기분도 들떠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아주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행군중에 있던 대원들이 술에 취한 사람들처럼 몸의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칠거렸습니다.

몇사람이 그런다면 모르겠는데 숱한 사람들이 그러니 정말 야단이였습니다. 대원들은 모두가 얼굴이 퉁퉁 부어있었습니다. 어떤 대원들은 부증이 너무 심해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였습니다.

나는 대원들이 맥을 못추는 원인을 소금에서 찾았습니다. 부증이 심한 원인도 염분을 섭취하지 못한데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우리 사령부성원들은 그때 열흘쯤 소금을 먹지 못하였습니다. 오중흡에게 소금을 언제까지 먹었는가고 물어보니 7련대도 사령부와 헤여진 다음부터는 거의나 먹어보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소금때문이라는것이 명백하였습니다.

행군을 결속짓고 다시금 국내에 들어가 적들을 답새길 궁리를 하고있는 때에 이런 광경을 보게 되니 정말 기가 막히였습니다. 어떻게 하나 소금을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부대가 전멸당할수 있었습니다.

나는 적구에 나가 소금을 구해올수 있는 적임자를 물색하였습니다. 경위중대를 인솔하고있던 오백룡이 김봉록이라는 신입대원을 추천했습니다.

김봉록은 로획물자를 지고 따라왔다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우리 부대에 입대한 청년이였는데 유격대에 들어온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생활도 잘하고 싸움도 잘하였습니다. 오중흡도 그를 착실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의 부모가 서강이라는곳에 살고있으니 그가 가게 되면 소금을 꼭 구해올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김봉록을 불러 소금을 구해올 자신이 있는가고 물으니 해보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맘때면 아버지가 산에 나무하러 다니는데 자기가 사복을 입고 내려가면 밀정들의 눈에 걸려들지 않게 아버지를 만날수 있고 아버지만 만나게 되면 소금은 문제없다는것이였습니다.

우리는 김봉록에게 임무를 주면서 협조자를 한명 붙이였습니다. 김봉록은 그 대원을 데리고 소금공작을 떠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만나자 몹시 기뻐하면서 네가 김장군의 부하가 되였다니 얼마나 장한지 모르겠다,그분한테 너를 맡겼으니 나는 마음이 푹 놓인다,그런데 요즈음 왜놈들의 선전을 들어보면 김장군이 잘못되였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인가고 하였습니다. 김봉록은 그렇지 않습니다,나는 방금 장군님의 군영에서 그분의 령을 받고 아버지를 만나러 오는 길입니다,그분은 건재해계십니다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봉록의 아버지는 눈물이 글썽해서 아무렴,그러면 그렇겠지,사실 우리는 그분이 어찌어찌되였다는 소문을 듣고 얼마나 락심했는지 모른다,김장군이 살아계신다니 이제는 됐다고 하면서 좋아서 어쩔줄 모르더라고 하였습니다. 아들한테서 집으로 찾아오게 된 사연을 들은 로인은 펄쩍 놀라 소금때문에 혁명군이 싸움도 할수 없는 지경에 처한다는게 될 말인가고 하면서 자기가 어떻게 하든지 소금을 구해서 김장군의 걱정을 덜어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늙은이가 아들앞에서 그렇게 장담하고 나섰지만 소금을 구하는 일이 말처럼 쉽지는 않았습니다. 혼자서 한두근을 사면 몰라도 그이상부터는 적들의 의심을 살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만주국관청이나 경찰기관들에서는 상점들에서 소금을 한도량이상 팔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상점에 수시로 나타나 소금의 판매정형을 가만히 조사장악하였습니다. 장사치들가운데는 주민들의 물자구매정형을 적들에게 정상적으로 통보해주는 끄나불들도 있었습니다.

김봉록의 아버지는 혼자서도 소금을 얼마간 구할수 있었지만 행군에 참가하고있는 군사가 수백명이나 된다는 아들의 말을 듣고는 한두근이라도 더 사보내려고 평시부터 가깝게 지내던 이웃집로인한테 부탁해보기로 했습니다. 사정이야기를 들은 이웃집늙은이는 협력을 약속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로인이 그만 친분이 두터운 다른 로인에게 김일성장군이 산에서 소금을 구해오라고 사람을 보내왔는데 자기도 한몫 하기로 약속했다는것을 자랑삼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당신도 유격대를 돕고싶은 생각이 있거든 재간껏 소금을 사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세번째 로인도 소금구입에 나섰는데 바로 거기서 사달이 났습니다. 그 세번째 로인이 협화회원인 자기 아들이 밀정인줄을 모르고 비밀을 루설했습니다. 그 당시 일제는 《선무반》이요,《귀순공작대》요 하는것들을 무어가지고 《귀순》놀음을 벌렸습니다. 그런 놀음에서는 협화회놈들도 한몫 하였습니다.

적들의 밀정노릇을 하고있던 아들놈은 자기 아버지한테서 들은 사실을 곧바로 상급에 들고가서 고자질하였습니다.

우리가 늙은이들을 통하여 많은 량의 소금을 사들이려 한다는것을 알게 된 관동군특무기관에서는 경찰기관들에 명령을 떨구어 서강일대의 상점들에 있는 소금을 몽땅 사들이게 하고 그대신 장춘에서 비행기로 급송한 소금을 상점들에 넘겨주게 하였습니다. 적들이 비행기로 실어보낸 그 소금은 독약을 뿌린 독소금이였습니다. 그 독소금을 먹으면 인차 죽는것이 아니라 점차 머리가 아프고 다리맥이 없어져 전투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김봉록의 아버지를 비롯하여 소금을 사러 다니는 령감들이 이런 속내를 알수가 없었습니다. 적들의 계책이 얼마나 은밀하고 교활하게 꾸며졌는지 도가집강아지처럼 눈치가 빠르다는 장사군들도 그 낌새를 전혀 냄새맡지 못하였습니다.

두 령감은 소금을 사지고 김봉록과 함께 유격대의 숙영지로 향하였습니다. 그들이 부대에 찾아온것이 아마 낮 1시나 2시쯤 되였을것입니다.

나는 그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소금을 부대들에 나누어주게 하였습니다.

그 당시 김정숙동무는 사령부의 안전을 보장하느라고 늘 식초를 가지고다니였습니다. 사령부의 작식공작은 그가 맡아하였습니다. 그는 사령부의 몫으로 받아온 소금에 식초를 쳐보고 독약을 친 소금 같다고 하였습니다. 식초를 쳐보면 독약을 친 음식인가 아닌가 하는것을 인차 알수 있습니다. 식초는 독약에 빨리 반응합니다.

그래서 사령부성원들과 경위중대 대원들은 독소금을 먹지 않았습니다. 원래 그들은 사령관이 수저를 들기전에는 아무 음식에도 손을 대지 않는것을 도덕으로,규률로 여기고있었습니다. 그날도 그들은 내가 회의를 끝내고 천막으로 돌아올 시간만 기다리면서 아무 음식도 먹지 않았습니다.

그때 나는 회의를 하다가 로인들이 지고온 소금이 독소금인것 같다는 보고를 받고 휴회를 선언하였습니다. 우등불에 소금을 넣어보았더니 과연 퍼런 불이 펄펄 일었습니다. 소금에 독약이 들어있으면 그렇게 퍼런 불이 납니다.

나는 군수관에게 부대들에 나누어주었던 소금을 모조리 회수해들이라는 과업을 주었습니다. 소금을 회수하라는 사령부의 지령이 떨어지자 동무들은 몹시 당황해하였습니다. 대원들이 벌써 소금을 조금씩 먹었다는것이였습니다. 일부 부대들에서는 소금회수명령을 받고서도 소금에 무슨 독약을 쳤겠는가고 하면서 잘 내놓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지어 어떤 대원들은 소금을 자그마한 주머니에 넣어 감추기까지 하였습니다.

더우기 문제로 된것은 이미 독소금을 먹고 기습전을 떠난 7련대와 8련대였습니다.

우리는 그날저녁에 적을 들이치고 식량을 해결한 다음 곰의골밀영방향으로 가자고 계획하였습니다. 그래서 7련대와 8련대 동무들에게 전투임무를 주어 내보냈습니다.

날이 밝으면 우리에게 독약을 먹인 적들이 달려들것이 뻔한데 기본전투부대들을 전투에 내보냈으니 몹시 걱정스러웠습니다. 빨리 불러들여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전령병들을 띄우려고 하는데 출전했던 전투원들이 헐떡거리면서 맥없이들 돌아왔습니다. 오중흡동무가 그렇게 맥없이 와서 보고하는것을 처음 보았습니다. 다른 동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떤 동무들은 너무 다리맥이 없어서 숙영지까지 채 오지 못하고 쓰러졌습니다.

분명 놈들은 우리가 소금을 먹고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했을 때에 달려들어 일격에 괴멸시키든가 몽땅 사로잡으려고 꾀했던것 같습니다. 교활한 적들은 소금짐이 몇시쯤이면 우리 부대에 당도하고 우리가 몇시쯤이면 그 소금으로 음식을 지어먹으며 또 몇시쯤 지나면 우리의 전체 성원들이 꼼짝달싹 못하고 쓰러져있게 되겠는가를 타산했을것입니다. 사태는 매우 엄중하였습니다. 사령부성원들을 제외한 전부대가 독약에 마비된 상태에서 적의 공격을 받게 된것입니다. 부대가 전멸당하고마는가 아니면 천행으로 살아나 반일항전을 계속할수 있겠는가 하는 심각한 정황이였습니다.

나는 1937년 봄에 소탕하에서 우리가 수천명 적들의 포위에 들었을 때보다 훨씬 더 속이 상하였습니다. 그때에 내가 체험했던 당혹감을 뭐라고 표현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소탕하에서는 우리가 수천명이나 되는 대군의 포위속에 들어있었지만 전투원들이 싸울 능력을 잃지 않았기때문에 막다른 경우에는 적을 치면서 돌파하자는 배짱을 가지고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독소금에 중독된 부대를 가지고 적과 맞다들게 됐으니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우리는 조성된 사태를 놓고 심중히 론의하였습니다. 격분한 일부 동무들은 소금을 사다준 늙은이들을 당장 처단하자고 하였습니다. 적의 앞잡이라는것입니다. 놈들의 개가 아니고서야 감히 독약을 친 소금을 가져올수 있겠는가 하는것이였습니다.

그것은 리치에 닿지 않는 판단이였습니다. 그 늙은이들이 적과 내통했고 그 소금이 독소금이라는것을 미리부터 알고있었다면 서강마을에 내려갔던 유격대원들에게 넘겨주고말지 왜 굳이 우리들한테까지 지고들어왔겠는가 하는것입니다. 또 아버지가 제 자식을 죽이려고 독소금을 가져올수도 없는것입니다.

나는 두 늙은이를 처단하자고 하는 동무들을 호되게 질책하였습니다. 아들들이 잘 싸우게 하자고 생사를 결단하고 무거운 소금짐을 지고온 늙은이들을 따뜻이 대하지는 못할망정 처단하자니 그게 무슨 망녕된 소리인가,동무들은 독약을 먹은 나머지 리성을 잃은것 같다,그 늙은이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소금에 독약이 들어있는줄을 몰랐을것이다,우리는 지금 적들의 간계에 빠져들었다,내 짐작으로는 독약의 효과가 절정에 이른 때에 반드시 적들이 쳐들어올것 같다,그러니 움직일수 있는 사람들은 빨리 전투준비를 갖추고 시급히 제독대책을 취해야 한다,다른 방법이 없다,날이 밝으면 적들이 나타날것이다,현재 싸움을 할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으니 오늘이야말로 결사전을 벌려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본련대동무들은 모두 맥이 없어서 움직이지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아무리 맥이 없더라도 적들이 달려들기전에 이곳을 떠나야 한다,목숨이 붙어있는 한 모두 안전한 수림지대까지 기여서라도 가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적들의 비행기가 와서 폭격을 하고 또 놈들의 지상부대가 포사격을 하면서 포위해들어오면 우리는 다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기본련대동무들을 안전한 수림지대까지 기여가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령부호위성원들과 기관총소대동무들에게는 전투준비를 단단히 하게 하였습니다.

얼마후 우리가 예견한대로 적들이 달려들었습니다. 우리는 적들과 이틀동안이나 가렬한 전투를 하였습니다. 기본전투련대사람들은 모두 안전한 곳에 데려다 눕혀놓고 얼마 안되는 기관총소대동무들과 사령부호위병들이 달려드는 적들을 답새겨 물리쳤습니다. 그때 사령부성원들이 정말 결사적으로 잘 싸웠습니다.

적들이 심신을 서서히 마비시키는 독약을 쓴것을 보면 우리를 전원 사로잡으려고 했던것 같습니다. 우리만 사로잡게 되면 세상에 대고 만주땅에서의 《공비토벌전은 종결되였다.》고 광고했을것입니다. 김일성부대만 괴멸하면 유격대《토벌전》은 끝난다고 적들이 떠들 때였습니다.

우리는 적들을 물리친 다음 련대들을 피신시킨 수림속에 들어가서 병원을 차려놓고 녹두도 달여먹이고 호박도 삶아먹이면서 한주일가량 치료전을 벌렸습니다. 그랬더니 모두가 깨끗이 건강을 회복하였습니다.

그 소금사건때 내가 정말 진땀을 뽑았습니다. 소금에 독이 들어있다는것이 알려졌을 때 제일 혼이 난것은 김봉록이였습니다. 자기네 부자가 가져온 소금이 독소금이였으니 그가 얼마나 딱했겠습니까. 김봉록과 그의 아버지는 사색이 되여 어쩔바를 몰라하면서 처분을 기다리는 죄인들처럼 말도 변변히 하지 못하였습니다.

나는 소금짐을 지고왔던 두 로인에게 우리는 로인들을 조금도 의심치 않을뿐아니라 성심성의로 도와준데 대하여 고맙게 생각한다는것을 거듭 말해주어 안심시킨 다음 서간도의 물정에 밝은 김일에게 과업을 주어 그들을 데려가되 집으로 가지 말고 다른 안전한 고장에 모셔다주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모략작전이 실패한데다가 도리여 숱한 죽음을 당한 적들이 악에 받쳐서 실패의 책임을 죄없는 로인들에게 들씌워 무슨 행패질을 할는지 알수 없었던것입니다. 유격대원인 아들과 내통하여 숱한 소금을 유격대에 빼돌렸다는 한가지 리유만으로도 놈들은 김봉록의 아버지와 이웃집로인을 죽일수 있었습니다.

김일은 내가 준 임무를 책임적으로 수행하였습니다. 두 로인에게 먼저 안전한 은신처를 마련해준 다음 가족들도 그리로 몰래 빼돌리였습니다. 그는 로인들이 지고왔던 소금에 독약이 들어가게 된 내막도 탐지해가지고왔습니다. 세번째 로인의 아들놈이 나쁜놈이였습니다.

지난 전쟁시기 보건부문에 침투한 적의 고용간첩들은 음식물속에 독성물질을 넣어 환자들의 생명을 해치는 잔인한 살인행위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인민들의 사기를 저상시키고 의료일군들 호상간에 불신과 불화를 조장시키기 위한 고의적인 해독행위이기도 하였습니다. 미제는 우리 인민을 멸살시키기 위하여 세균전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반혁명은 혁명을 공격하는데서 언제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20세기의 력사가 보여주는바와 같이 제국주의자들은 동방것들이든 서방것들이든 다 인간도살의 능수들입니다. 그들은 남에게 얽매이지 않고 자주적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없애버리기 위한 기교와 능력을 부단히 련마해가고있습니다. 현대제국주의자들은 지금 몇백명의 혁명가나 몇만명의 혁명군대를 소멸하기 위한 작전이 아니라 사회주의나라전체를 일시에 붕괴시켜버리기 위한 엄청난 작전을 진행하고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책동에 항상 경각성을 높여야 합니다.

항일혁명때 산에서 소금고생을 얼마나 했던지 나는 해방후 북부국경지대에서 온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소금사정부터 물어보군하였습니다. 한번은 후창에서 군소비조합 부위원장으로 일하는 일군을 만나서 군내인민들이 요구하는 상품가운데서 제일 부족한것이 무엇인가고 물으니 소금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1947년 여름에 집무실에서 금강산에 가서 야영생활을 하고 돌아온 창성지방소년을 만난 일이 있습니다. 그때 그 소년도 창성사람들이 소금고생을 몹시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업부문 일군들에게 과업을 주어 산간벽지의 인민들에게 소금공급을 충분히 하도록 대책을 세웠습니다. 량강도지방은 북간도나 서간도와 마찬가지로 바다와 떨어져있는 내륙산간지대인만큼 소금이 바를수 있습니다. 전쟁때 고산진에 가보니 자강도에도 소금이 아주 발랐습니다. 그래서 일시적후퇴시기의 어려운 정황이였지만 고산진사람들에게 내가 직접 소금을 해결해주었습니다.

일군들은 내륙지대 인민들이 소금이 떨어져 고생하는 일이 없도록 일상적으로 잘 보살펴주어야 합니다.

사슴목장에서는 사슴들에게도 소금을 정상적으로 먹여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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