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와 더불어 24-6. 현해탄 너머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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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현해탄너머에서도
조국해방의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다그치고있던 1940년대 전반기에 우리는 국내에 강력한 전민항쟁력량을 꾸리는 한편 일본본토안에서 우리의 혁명조직이 전민항쟁운동의 일익을 담당할수 있도록 하는데 특별한 주목을 돌렸습니다.
일본땅에서의 우리의 활동은 두가지 방향에서 진행되였다고 할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일본에 이미 조직되여있는 조국광복회 조직들과 여러가지 형태의 반일조직들을 조선인민혁명군이 최후공격작전을 개시할 때 그에 합세할수 있도록 정비하면서 새로운 조직을 계속 늘여나가는것이였고 다른 편으로는 조선인민혁명군의 특수공작원들이 일본제국주의의 아성에 깊이 침투하여 적들의 군사정보를 정찰함으로써 대일군사작전의 승리를 마련하기 위한 준비사업을 본격화하는것이였습니다.
원래 우리가 일본본토에 정치공작원들을 본격적으로 박아넣기 시작한것은 1930년대 후반기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가 백두산과 서간도 지구에 진출하여 조국광복회 하부조직들을 꾸리기 시작한 다음부터입니다. 적의 심장부에 혁명의 포대를 쌓자는것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무장투쟁초기부터 들고나온 구호입니다.
정치공작원들이 일본으로 침투하자면 물론 죽음을 각오해야 했습니다. 잘되면 감옥행이고 그렇지 않으면 교수대에 올라야 하였습니다. 게다가 일본에로의 출입구라는것이 배길 하나뿐이였습니다. 그 배길에는 정사복경관들과 형사들, 밀정들이 어느때나 쫙 깔려있었습니다. 이런 위험천만한 통로를 거쳐 공작원들이 일본으로 침투한다는게 용이한 일이 아니였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일본을 단념할수 없었습니다.
일본 내무성 경보국이 작성한 다음의 자료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일본본토에 대한 군사정찰활동이 얼마나 활발하였는가를 잘 보여주고있다.
《김일성의 선내(조선과 일본)량지에의 특수밀정파견에 관한 건
재만불령선인 … 김일성일파의 책동은 의연 극히 치렬한 모양인바 최근 본성 조선특파원으로부터 아래와 같은 정보가 있어 정세에 맞게 엄중수배할것이다.
특히 해항경비, 렬차이동경찰 실시 등 부, 현에서는 크게 류의할것이다.
1.파견목적
쏘련으로부터 특별히 파견된 공비로 이루어진 특수밀정을 사용하여
조선 및 일본에서 첩보근무에 종사시키자는데 있다.
2.파견지점
도가선, 봉길선의 각 중요군사지점
조선안의 주요항(청진, 라진, 부산, 목포, 원산, 군산, 신의주)
일본의 시모노세끼 및 쯔루가
3.파견원의 년령, 복장, 휴대품
년령;20∼25살의 조선 만주계 남자
복장;국방색 제낀형양복에 편상화
휴대품;트렁크에 정치, 경제, 문예 등 여러가지 잡지, 세면도구 등을 가지고있다.
그밖에는 자세치 않으나 이 밀정은 일본어에 능하며 본래 교원, 경찰관 등의 경험을 가지고있는자 같은데 언어, 태도 등에서 일본사람과 다른바 없다고 한다.》[내무성 경보국, 소화16년(1941년)11월 8일]
우리가 일본본토를 중시한것은 그곳이 일제식민지통치의 아성이고 본바닥이기때문입니다. 본바닥을 뒤흔들어놓으면 적의 심장부에 강타를 안길수 있고 식민지통치를 붕괴시키는데서도 큰 효과를 볼수 있었습니다.
일본에 가있는 조선사람들, 특히 강제련행된 많은 조선청년들을 의식화하고 조직화하는것은 대일작전이 눈앞에 박두한 조건에서 군사정치정보수집을 위해서도 필요했으며 전쟁의 대포밥이 될 운명을 지닌 그들을 일본파시즘의 마수에서 떼내여 혁명의 편으로 집단적으로 돌려세우기 위해서도 필요했습니다.
일본본토의 반일력량은 국내와 해외에 있는 반일애국력량과 함께 일본제국주의를 최종적으로 격멸하기 위한 대일작전의 시기 조선인민혁명군에 화합하여 적극적으로 나설수 있는 무시할수 없는 력량이였습니다.
일본의 력대천황의 년호들을 보면 그네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생살이라도 떼여줄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됩니다. 《명치》요, 《대정》이요, 《소화》요 하는것들이 뜻은 다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소화시대는 일본이 이웃나라들을 인간도살장으로 만들고 국제적인 백정으로 등장하여 수억만 인류에게 불행과 재난만을 강요하던 시대였고 이마에 밝은 정치를 하겠다고 써붙이고 나선 명치천황은 조선을 먹어라, 동양을 먹어라, 세계를 먹어라, 무엇무엇을 먹어라 하고 사무라이들을 부추기였습니다. 청나라와도 전쟁을 하고 로씨야와도 전쟁을 해서 숱한 리권을 강탈한게 바로 명치시대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 나라를 총칼을 가지고 접어들어 대낮에 삼켜버렸습니다. 대정시대에도 일본은 못된짓을 많이 하였습니다.
이렇게 력사적으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조선사람들의 등껍질을 벗기고 피땀을 빨아내면서 하고싶은짓을 다하였습니다.
조선사람들은 일본으로 끌려가는 순간부터 짐승취급을 당하였습니다. 인간을 개, 돼지나 마소처럼 다루는데서는 일본을 당할 나라가 없었습니다.
조선사람들이 가고싶어서 일본땅으로 간게 아닙니다. 군대와 경찰이 자동차를 끌고와서는 길가는 사람들을 짐짝처럼 사정없이 처싣고 달아나군하였습니다. 밤중에 속옷바람으로 련행되여 일본에 끌려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을 강제로 련행한 다음에는 군대식으로 대오를 뭇고 그들에게 사소한 자유도 주지 않았습니다. 배나 기차를 탈 때에는 변소에까지 당번을 세워 감시를 하였습니다.
일본사람들은 우리 나라에 와서 《일시동인》이라는 말을 곧잘하였습니다. 조선사람을 일본사람과 꼭같이 본다는 뜻입니다. 그건 입에 꿀을 바르고 하는 소리였습니다. 《일시동인》이 일본사람들의 진정이라면 왜 그들이 자기네 나라에 끌려간 조선사람들을 마소처럼 학대했겠습니까.
구일본을 형상한 문학작품들가운데 《다꼬베야》란 말이 더러 나오는데 《문어집》, 《문어방》이라는 뜻입니다. 문어는 돌짬에서 삽니다. 북해도의 토목로동자들은 콩나물시루같은 자기네 합숙을 《다꼬베야》라고 불렀습니다. 《감옥방》이라고 부르는게 위험하니까 에둘러서 《문어집》, 《문어방》이라고 한것입니다.
조선로동자들이 드는 막사는 《반도방》이라고 하였습니다. 반도땅에서 온 사람들이 거처하는 방이라는 의미인데 이것은 《다꼬베야》보다 더 한심했다고 합니다. 밤에는 밖으로 쇠를 잠그고 여러마리의 개까지 붙여놓아 도주는커녕 바깥출입도 못하게 하였습니다.
조선말을 한마디만 해도 참대칼이나 곡괭이자루 같은것으로 로동자들을 마구 찌르고 때렸습니다. 도주를 기도하는 사람들은 끈으로 코를 꿰가지고 사방으로 끌고다녔습니다. 일본의 청부업자들과 고용주들은 심지어 조선로동자들의 등을 칼로 째고 그안에 불에 달군 연덩어리를 넣는 고문까지 서슴지 않고 하였습니다. 수틀리면 작업현장에서 로동자들을 때려죽여 물속에 던지거나 콩크리트혼합물속에 처넣었습니다.
그런즉 민족적자존심이 강한 조선사람들이 이런 학대와 모욕을 참을수 있었겠습니까. 조선사람들이 어질고 순박해도 배짱은 셉니다.
일본에 징용, 징병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백수십만이 된다는데 그들이 다 속으로는 딴꿈을 꾸었습니다. 무슨 꿈이였는가. 일본을 망하게 할 꿈이였습니다. 항일유격대가 조선으로 밀고나오면 자기네도 와 하고 들고일어나 일본놈들을 답새기자는것이였습니다.
이런 꿈은 로동자들만 꾼게 아닙니다. 일본에 가서 공부하던 청년학생들도 다 그런 속생각을 가지고있었습니다. 일본에 가있는 조선류학생들의 수가 만여명이 잘되였다고 합니다. 류학생이 만여명이면 적은 수가 아닙니다.
나는 조선사람들이 일본땅에서 겪고있는 참상에 대한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파서 견딜수 없었습니다. 말이 났으니말이지 만주에서 사는 조선사람들은 그래도 우리의 보호를 좀 받았습니다.
그런데 일본에 있는 조선사람들은 그런 보호를 받을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들을 더 동정했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동정이나 해가지고서야 어떻게 그들을 구원해주겠습니까. 사람이 사람을 동정하는것은 누구든지 할수 있는 일입니다. 착취받고 압박받는 인민대중을 위해 공산주의자들이 마련할수 있는 선물가운데서 가장 훌륭한것은 조직입니다. 조직만이 인민들을 파멸에서 구원할수 있었습니다.
일본땅에 조선사람들이 꾸려놓은 조직들이 많았습니다. 공산주의조직, 민족운동조직, 계몽조직, 학생조직을 비롯해서 별의별 조직이 다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벌어진 반일운동에서도 청년학생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들이 재동경조선인류학생학우회라는 간판을 가진 조직을 뭇고 3.1인민봉기전야에는 독립선언서도 작성하였습니다. 그 선언서의 사본이 국내에도 들어와 독립운동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일본이 무력으로 우리 나라를 병탄했을 때에는 그에 대한 항거의 표시로 도꾜와 교또에 가있던 숱한 조선류학생들이 집단적으로 귀국해버렸다고 하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조선청년학생들의 저항정신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짐작할수 있을것입니다.
민족운동의 형태를 띠고 전개된 그곳 청년학생운동은 청원과 시위, 실력양성이라는 소극적인 투쟁형태로 적들과 맞서고있었지만 우리 동포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있었습니다.
이름난 무정부주의자인 박렬도 일본에 가있던 류학생출신입니다. 그는 일본천황에 대한 살해음모를 하였다는 죄로 무기징역형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20여년간이나 옥살이를 하다가 해방이 되여서야 석방되였습니다.
1925년도 조선공산당을 창건한 사람들가운데는 적지 않은 일본류학생출신들이 있었습니다. 일본땅에 맑스주의가 전파되자 그들은 여러 사상단체와 조직들을 내오고 새 사조를 연구보급하는 사업에 달라붙었습니다.
1930년대초에 벌써 일본땅에 있는 조선사람들의 공산주의단체는 30여개에 달했고 거기에 망라되여있는 인원은 수천명이나 되였다고 합니다. 공산당조직은 일본공산당의 1개 지부형태로 존재하였습니다.
새 사조의 영향밑에 일본에 있는 조선인들속에서는 로동운동도 발전하였습니다. 오사까에는 동아합동조합이라는 이름을 가진 민족기업단체도 있었습니다. 조선사람들은 일본에 건너가서 종교조직도 많이 무었습니다. 일본땅에는 신간회지부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일본에 있는 조선사람들속에는 여러가지 형태의 조직들이 조밀하게 꾸려져있었습니다. 물론 이 조직들은 주의주장도 각이하고 활동방식도 서로 제나름이였습니다. 계몽, 호상친목, 상호부조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 조직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전민항쟁의 견지에서 볼 때 그 하나하나가 다 큰 밑천으로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순수한 계몽단체들에 입김을 불어넣어 혁명적인 실천투쟁의 마당으로 끌어내는것은 문제가 아니였습니다. 모든 조직들이 다 반일을 지향하는것만큼 그런 개조는 우리의 노력여하에 달려있는것이였습니다.
일본에 끌려가있는 우리 동포들속에 존재하던 이러저러한 조직들은 모두가 일제의 심장부에 박혀있는 시한탄과 같은 존재들이였습니다. 이 폭탄에 불을 달아줄 사명이 우리한테 지워져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선사람들로 이루어진 수십만의 로동력과 반일력량이 집중되여있는 일본본토를 특별한 시선으로 주목하게 되였습니다.
일본에 공작원들을 파견하는것은 반일조선인운동과 항일무장투쟁을 한맥락에서 이어주고 일본각지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산만무질서하게 진행되는 조선사람들의 대중운동에 대한 통일적령도를 보장하는 동시에 이 운동을 새로운 정세의 요구에 맞게 질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 시급히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문제였습니다.
일본에 공작원들을 침투시키는 통로로는 주로 부산-시모노세끼항로와 청진-쯔루가항로를 리용하였습니다. 장기적으로 깊숙이 박아넣어야 할 중요한 정치공작원들은 제3국의 항구들을 리용하여 멀리로 에돌아가게 하였습니다.
일본에 제일 쉽게 드나들수 있는 계층은 류학생들이였습니다. 돈깨나 있는 사람들이 트렁크나 고리짝을 메고 일본류학을 가는것은 하나의 추세였습니다.
나는 박달과 김정숙에게 우리의 공작원으로 활동할수 있는 유망한 류학생들을 물색해보라는 임무를 주었습니다.
그후 김정숙은 풍산지방에서 일본에 건너가 고학을 하는 청년들이 도꾜에 류학생조직을 가지고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적의 수도에 있는 류학생조직을 혁명적인 조직으로 개편한다면 일본본토의 심장부에서부터 조선사람들을 혁명화할수 있는 길을 열수 있었습니다.
도꾜-요꼬하마를 중심으로 하는 경빈지구는 일본에서 인구가 제일 많이 집중되여있는 공업지대였습니다. 조선 류학생들과 로동자들이 제일 많은곳도 경빈지구였습니다.
나는 김정숙에게 조국광복회 10대강령을 주면서 풍산출신의 류학생들과 손을 잡고 도꾜에 있다는 그들의 조직을 우리의 영향밑에 있는 산하조직으로 전환시킬 방도를 세워보라고 하였습니다.
김정숙은 주병포에게 우리의 의향을 전달해준 다음 그와 함께 도꾜의 류학생조직을 장악하기 위한 방도를 의논하였습니다.
주병포가 일본에 파견할 적임자로 고른 대상이 바로 리인모였다고 합니다.
도꾜에서 풍산출신 류학생들이 무은 조직이란 풍우동경고학생친목회를 말합니다. 풍우라는것은 풍산에서 간 벗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친목회는 이따금씩 모여앉아 시국담도 나누고 신세타령도 하고 독후감도 발표하고 때로는 무직업회원들에게 일자리도 알선했습니다. 그야말로 순수한 친목단체였습니다.
좀 정치적색갈을 띤것이 있었다면 《내선일체》도 가짜다, 《동조동근》도 헛나발이다, 《일시동인》도 개수작이다 하고 일본놈들을 욕질하는것뿐이였습니다.
리인모는 도꾜에 가자바람으로 이 조직에 백두산바람을 불어넣었습니다.
풍우동경고학생친목회 성원들은 조국광복회 10대강령과 창립선언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아무런 목표도 방향각도 없이 울분속에 모대기기만 하던 친목회는 반일애국단체로 개편되였습니다.
그때 일본대학들에 가서 공부하고있던 조선류학생들이 백두산에서 싸우는 우리를 지지하고 우리와 합세하기 위하여 여러모로 노력하였습니다.
반일지하조직은 고등학교, 중학교, 전문학교들에도 적지 않았습니다.
1944년 상반년에 일제경찰에 발각되였던 가나자와조선인학생민족주의그루빠도 우리 주력부대의 정치공작원들이 꾸려놓은 항쟁조직이였습니다.
가나자와중학교에서 공부하고있던 조선류학생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조선인민혁명군 정치공작원인 리철수가 우리에게 다 보고하였습니다.
리철수는 특수임무를 받고 청진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학생의 신분을 가지고 정치공작임무를 수행할 때 일본 가나자와중학교로 류학을 가는 학생들속에 공작원을 박아넣었습니다.
가나자와에 건너간 공작원은 조선각지에서 간 학생들을 흡수하여 학교안에 무명조직을 내왔습니다. 조직에 이름을 붙이지 않은것은 있을수 있는 적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이 조직도 역시 최종목적은 결정적시기에 무장봉기로 인민혁명군의 국내진출에 호응하자는것이였습니다.
일제경찰이 밝힌 자료에 의하면 이 무명조직에 망라된 성원들은 북조선출신의 독립운동자 김일성이 백두산을 근거지로 해서 빨찌산을 조직하여 조선독립을 위해 싸우고있고 또 우수한 조선동포들을 훈련시키고있는데 자기들도 그밑으로 달려가 독립운동에 협력하자고 하였다고 합니다.
일본에 여러 갈래의 반일항쟁조직들이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백두산쪽에 와서 우리와의 투쟁에 합세할것을 공공연히 자기의 투쟁목표로 내세운 조직은 몇이 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항쟁조직들이 우리의 투쟁소식에 힘을 얻고 우리가 최후공격작전을 벌릴 때 그에 호응할 기세밑에 싸웠지만 일제경찰의 탄압을 고려하여 그러한 투쟁목적을 공개적으로 로출시키지 않고있었습니다.
오사까에는 고학생들로 된 충성회라는 조직도 있었습니다.
원래 거기에 제주도와 경상도에서 간 고학생들과 로동자들이 많았습니다.
제주도사람들이 저항정신이 높고 단결력이 강하다고 합니다. 총련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오사까의 빈민구역에 모여살면서 대학야간학부에 다니던 제주도청년들은 모두 민족의식이 강했다고 합니다. 민족의식이 강한곳에서는 조직도 생기고 혁명가들도 많이 배출되는 법입니다.
제주도출신 류학생들이 오사까에서, 제주도에서 온 청년들로 동인야학을 조직하고 거기에서 육성된 사람들로 반일친목단체를 무었다가 우리의 공작원들로부터 조국광복회 10대강령을 입수한 다음 반일친목단체성원들과 일본대학 야간중학부 학생들로 충성회라는 새로운 조직을 무었습니다.
이 조직이 내세운 강령과 투쟁임무가 괜찮았습니다.
충성회가 어떤 조직인가를 알려면 쏘련, 일본이 개전하면 즉시 조선으로 돌아가 동포청년들을 지도하여 일본에 저항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며 김일성이 본격적으로 반기를 휘날릴 때는 이에 호응하여 과감히 일떠설것이라고 한 이 회의 취지만 보아도 충분합니다.
충성회가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자 그 관계자들은 서울에 돌아와 우리가 파견한 국내공작원들과 손을 잡고 혁명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 해방후에는 남조선과 일본에서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 투신하였습니다. 그들은 제주도빨찌산과도 련계를 가지고있었습니다.
조선류학생들의 반일지하조직은 지어 일본의 신학교들에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인것으로 고베에 있는 중앙신학교 조선인학생민족주의그루빠를 들수 있습니다.
그들의 투쟁에서 주목되는것은 백두산에서 싸우는 우리를 장래가 크게 기대되는 독립운동자라고 찬양하면서 민족의식과 독립정신, 애국심을 키워나간것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오까야마 6고등학교에 조직되였던 조선인학생친목회도 조국광복회 하부조직으로 개편되였습니다.
오까야마 6고등학교의 조선인학생친목회를 조국광복회 하부조직으로 개편한 사람은 그 당시 도꾜에서 대학에 다니던 민덕원입니다.
민덕원이 조선의 광복은 조선동포들앞에 나선 지상의 과업이다, 조국광복회는 민족의 모든 애국력량을 조국광복을 위한 성전에 묶어세울것을 호소하였다, 류학생들도 조선의 지식인으로서 일제에게 끌려온 불행한 조선동포들을 계몽하고 의식화하여 반일조직에 묶어세웠다가 일본내부에서 혼란기가 닥쳐올 때 일제히 들고일어나 독립을 성취하자고 했다는데 그때 공작원들이 대체로 그런 내용의 선전을 많이 하였습니다.
민덕원은 려운창, 김재호 등 조직성원들에게 방학기간의 투쟁과제도 주었다고 합니다. 조직성원들은 방학철마다 고향에 돌아가 가족, 친척들과 친지들, 동창생들 속에서 계몽사업을 하였습니다.
그 시기의 계몽사업에서 중심은 항일유격대의 전과를 소개선전하는것이였습니다. 전과를 소개하고 조국광복회 10대강령까지 해설하면서 조선의 독립을 진정으로 원하거든 당신들도 광복성전에 나서라, 그럴 의향이 없는가고 직방 들이댔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뜻이 통하는 가까운 친척, 친우들부터 동아리를 지어서 슬슬 조직에 묶어세웠습니다.
6고사건에는 흥미있는 점이 많습니다. 6고의 조직성원들이 자기네 동생들과 동생의 친구들이 일본사람들의 선전에 속아서 소년항공대에 입대하려고 할 때 그들에게 김일성부대에 찾아가라고 권고했다는데 그것도 흥미있는 일입니다. 그때 조직성원들의 선전에 공감한 여러명의 청소년들이 만주로 떠났다가 우리를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조국광복회 오까야마분회 성원들중 어떤 사람들은 해방후 조국통일을 위한 사업에 몸을 바쳤고 어떤 사람들은 지리산에 들어가 리현상과 함께 빨찌산투쟁을 하였습니다.
반일항쟁조직은 로동자들속에도 많았습니다. 일본의 주요공업지대인 경빈지구, 판신지구 그리고 북해도나 니이가다 등 조선사람들이 많이 가있던곳에 로동자들로 조직된 항쟁조직이 적지 않았습니다.
경빈지구의 조직들중에서 이채를 띠는것은 도꾜에서 조직된 동맹회입니다. 동맹회는 로동자들을 골간으로 하고 거기에 고학생들을 망라하여 꾸린 반일조직이였습니다. 이 조직은 일본천황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파벌을 반대배격하였으며 조선애국자들의 활동, 조선인민혁명군의 투쟁을 찬양하였습니다.
동맹회는 로동자들과 고학생들 속에서 우리에 대한 선전을 많이 하였습니다.
일제관헌자료는 동맹회성원들이 진행한 선전내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있다.
《북만에 있는 … 김일성은 우리 동포인데 그 세력이야말로 위대한것으로서 일본군대도 상당히 골머리를 앓고있다. 때때로 조선내를 습격하여서도 조선동포의 집은 절대로 치지 않고 일본인가옥과 일본인을 목표로 하고있다는것은 참으로 우러러 볼만한 행위이다.…》[《특고월보》내무성 경보국, 소화17년(1942년)3월분 202페지]
동맹회의 전략은 적의 지원병제도를 역리용하여 일단 군사훈련을 받아두었다가 유사시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총부리를 돌리자는것이였습니다. 동맹회는 조선독립이 공산주의운동을 통해서만 이룩될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경빈지구 조선로동자들의 흠모와 반일기세가 얼마나 높았는가 하는것은 도꾜의 한 로동자조직성원이 다진 다음과 같은 결의를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1.김일성은 만주국에서 조선독립단을 조직하고 활동하고있다. 장래조선의 대통령은 김일성이다. 우리들은 그분의 뒤를 따를것이다. 2.징병에 합격하여 일본을 위해 전사하는것은 개죽음이다. 김일성의 슬하로 달려가 조선을 위하여 일할것이다.》[《특고월보》내무성 경보국, 소화19년(1944년) 3월분 75페지]
원래 경빈지구는 1920년대에 재일본조선로동총동맹이 발족하여 활동하던곳입니다. 이 로총은 오래전에 해산되였으나 그 그루터기를 타고 로동운동이 미미하게나마 이어졌는데 여기에 백두산바람이 불어들자 기성조직들이 혁명조직으로 개편되고 없던 조직들이 새로 태여나는 회오리가 일어난것입니다.
우리가 공작원을 많이 보낸곳은 북해도지방이였습니다.
북해도에 침투한 우리 공작원들중에 김태현이라는 가명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북해도가 목적지였지만 그는 거기로 직행하지 않고 꾸릴렬도에 있는 군용기지건설장에 먼저 들어가 조국광복회 10대강령에 대한 선전을 하면서 살금살금 조직을 무었습니다. 그러다가 체포되여 형무소로 끌려가던 도중 벼락같이 탈출하여 지하로 들어갔습니다. 얼마동안 종적을 감추고있다가 북해도로 가서 일을 시작하였는데 여러 탄광, 광산, 비행장, 수력발전소 건설장에 징용된 조선인로동자들을 반일조직에 묶어세웠습니다. 그가 정치공작을 잘했다고 합니다.
그는 로동자들에게 조국이 무엇인지 아는가, 당신들은 조국을 잃었기때문에 바다건너 이 북해도땅에 끌려와 고생이란 고생을 다한다, 조국에서는 우리 민족이 나라를 찾기 위하여 피투성이싸움을 하고있다, 저 백두산밀림속에는 손에 총을 잡고 목숨을 걸고 일본군대와 싸우고있는 사람들이 있다, 조국이 있어야 우리가 있다, 우리들은 김일성부대와 함께 싸워서 하루빨리 조국을 광복해야 한다, 조국을 광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직을 꾸리고 사람들을 우리의 주위에 단결시켜야 한다고 선전하고나서는 조국광복회 10대강령을 한조항한조항 해설해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 강령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조직을 꾸려나갔다고 합니다. 이렇게 쟁취한 로동자들이 북해도 여러 고역장들에서 파업투쟁의 앞장에 선 주인공들로 되였습니다. 유바리탄광 로동자들의 폭동은 바로 그 공작원이 조직한것입니다.
일본에서 출판된 《조선인 강제련행, 강제로동의 기록》이라는 책을 보면 북해도와 남부싸할린, 꾸릴렬도 등지에서 진행된 조직건설정형과 반일, 반전 투쟁내용을 비교적 상세하게 알수 있습니다. 그 책은 조선인강제련행진상조사단이 편찬한것입니다. 이 조사단의 부단장 후지시마 우다이는 저명한 평론가인데 우리 나라를 여러번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일본사람들가운데서 우리 나라의 혁명전적지들을 제일먼저 답사한 인물입니다.
조선인강제련행진상조사단이 편찬한 책에는 북해도의 한 토목공사장에 침투한 우리 공작원이 조선인로동자들속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에 대해 소개선전하고 그들을 반일투쟁에로 불러일으킨 자료들도 서술되여있었습니다. 그 공작원은 공사장에서 태업을 자주 조직하고 도주자를 많이 내여 군수생산에 지장을 주었습니다.
도주자들은 다른 공사장에 가서 불씨가 되여 떨어졌습니다.
그 당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패망의 날이 다가오자 《만들라, 보내라, 이겨라.》라는 구호를 내걸고 군수생산을 필사적으로 다그쳤습니다. 일본의 공산주의자들과 반전주의자들은 《못만들겠다, 못보내겠다, 못이긴다.》는 반대구호를 들고 싸웠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 공작원들이 반일력량을 동원하여 군수생산에 제동을 건것은 일본의 패망을 위해서나 조선의 해방을 위해서나 매우 유익한 일이였습니다.
북해도의 삽뽀로에 들어간 우리 공작원은 군사기지건설장에 강제로 끌려간 조선로동자들속에서 지하조직을 꾸리고 그 대렬을 점차적으로 확대하면서 무장봉기를 위한 준비까지 진척시켰다고 합니다.
우리의 공작원들은 북해도에 있는 대학을 비롯한 각급 학교들에서도 활발히 움직이였습니다. 그들의 영향밑에 일본인로동자들과 진보적인 청년학생들도 반제, 반전 투쟁에 합세하였습니다.
일본의 주요공업지대인 판신지구는 우리 공작원들의 영향이 많이 미친곳입니다.
이 지구의 조직들가운데서 이채로운것은 효고현에 있는 한 공장에 징용으로 끌려간 조선로동자들이 꾸린 협화훈련대 특별청년회라는 조직이였습니다. 여기에 침투한 공작원은 우리가 파견한 정치공작원한테서 교양훈련된 사람이였습니다.
구일본의 비밀문건에는 국내공작원의 이름이 고영석으로 되여있는데 내 기억에 없는것으로 보아 그것은 본명이 아니고 가명인것 같습니다.
협화훈련대 특별청년회사건과 관련된 일제관헌자료의 일부를 아래에 소개한다.
《아마가사끼에 있는 조선인민족주의그루빠 협화훈련대 특별청년회사건 검거취조상황
…주모인물 … 병규(27살)는… 점차 민족적자각을 가지고있는데다가 우연히 재만조선독립운동의 … 김일성휘하의 고영석이라고 하는자로부터 〈머지 않아 일쏘개전이 있게 되는데 이에 호응하여 조선도 일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소화20년(1945년) 8월경에 만주의 김일성은 조선에 침공해들어오는것으로 되여있다. 그래서 그 준비공작으로 나는 조선청년들의 통일과 식량확보 … 사명을 띠고 이번에 김일성으로부터 비밀리에 파견된것이다. 조선청년들은 바야흐로 조선독립의 시기를 맞이한것만큼 크게 활약해주기 바란다.…〉고 하는 선동을 받고 … 당면하여 동지획득에는 조선안보다 오히려 조선청년의 다수가 일하고있는 일본땅에 이입로동자로 잠입하여 그 집단생활을 통하여 일대조직을 결집하고 김일성일파의 조선침공에 내선호응하여 일제히 봉기를 일으켜야 할것이라고 하며 소화19년(1944년) 3월하순 오오다니중공업 아마가사끼공장에 건너와서 동료인 이입조선인로무자를 목표로 민족의식을 각성앙양시켜 결집단결을 도모하는 등 책동을 추진전개하고있는바다.》[《내선관계월보》, 소화20년(1945년) 6월]
원동의 훈련기지에 있을 때 우리는 국내와 만주, 일본에 많은 정치공작원들을 파견하였는데 그들이 조선인민혁명군의 총공격전에 합세할수 있도록 전민항쟁력량을 잘 꾸렸습니다.
그때 일본에는 김창국과 같이 우리가 직접 선발해서 파견한 정치공작원도 있고 우리의 지도밑에 있는 국내조직이 우리가 보낸 지령을 받고 파견한 정치공작원도 있었으며 국제련합군 별동대의 선과 련결된 특수정찰원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이 모든 정치공작원들은 우리가 제시한 전민항쟁계획에 초점을 맞추면서 일본의 모든 반일력량을 철저히 준비시키기 위하여 맹활약을 하였습니다.
《김일성대》만 하여도 니이가다철공소에 강력한 반일력량을 꾸리고 주요군수품생산을 저애함으로써 일본의 전쟁수행능력을 약화시켰으며 새로 들어온 수십명의 징용로동자들을 집단도주시키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교또의 조선인로동청년들은 장차 백두산을 근거지로 하여 조선독립계획을 실현할 목표를 세우고 여러 공장들에 반일조직들을 내왔습니다.
실로 북으로는 북해도로부터 남으로는 구주에 이르기까지 일본땅 어디에나 그리고 대학생으로부터 신학교의 학생, 탄광로동자로부터 징용로무자에 이르기까지 조선사람이 있는곳에 우리의 조직이 박혀있었습니다.
다음의 자료는 일제경찰당국이 조선인민혁명군 정치공작원들과 특수정찰원들이 일본에 파견되는것과 관련하여 얼마나 전전긍긍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자료는 조선북부의 항로에 취항중인 선박이 보충선원을 모집하였는데 평소에는 응모자가 전혀 없는 형편이였으나 이번에는 상당히 교양이 있는것 같고 일본어에 능통한 사람들이 매 항구마다 각각 47~48명이 지망해온 사실을 놓고 그들의 속심을 알수 없어 오히려 채용을 중지하였다고 쓰고 그 리유를 이렇게 밝히고있다.
《정보에 의하면 그들은 모두 농후한 민족주의사상을 가진자들인바 내지도항이 쉽지 않다는것을 알고 비교적 쉽게 내지에 도항할수 있는 선원을 지망하여 내지항만으로 기항하게 되는 때 배에서 빠져나와 도꾜, 오사까 그밖의 대도시들에 잠입하며 그곳 조선사람들을 선동하여 그들의 민족의식을 높이고 내외에 호응하여 불온행동으로 나가려고 하는것 같으므로 만주방면에서 도항하는 조선인과 용의 조선인선원들의 동향에 대하여서는 엄중히 경계할 필요가 있다.》[《특고월보》내무성 경보국, 소화16년(1941년)8월분 77페지]
일본땅은 전국에 조밀하게 꾸려진 조선인들의 항쟁조직들에 의하여 분출직전의 활화산우에 놓여있었다고 말할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정치공작원들과 소조성원들의 적극적인 투쟁에 의하여 마련된것이였습니다.
똑똑한 정신을 가진 조선사람들중에는 강대국들의 협상탁에서 민족의 전도가 열린다고 생각하는 얼간이들이 없었습니다. 무장투쟁이야말로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는 유일한 방도라고 확신한 우리 인민의 일치한 립장과 관점은 조선의 모든 애국력량을 인민혁명군의 두리에 묶어세울수 있게 하는 요인으로 되였다고 볼수 있습니다.
조선사람들이 달래 백두산을 쳐다본게 아닙니다. 거기에 혁명군이 있었기때문에 백두산, 백두산 하고 말끝마다 외운겁니다. 옛날에는 백두산이 조종의 산으로서 민족의 사랑을 받아왔지만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거기에서 항일대전을 벌린 다음부터는 혁명의 성산으로서 민족의 사랑을 받아오고있습니다.
우리가 무장투쟁을 빨리 발전시키고 그것을 주축으로 하여 주체적혁명력량을 튼튼히 꾸려온것은 참으로 큰 의의를 가집니다. 항일혁명의 전로정이 보여주는바와 같이 식민지민족해방투쟁에서는 기본의 기본이 무장투쟁입니다. 무장투쟁을 높은 수준에서 발전시켜야 인민들도 그만큼 빨리 각성하게 되고 각계각층의 광범한 대중을 제국주의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항전에로 쉽게 동원할수 있습니다.
망국으로 하여 심하게 상처를 입었던 우리 인민의 민족적자존심은 우리가 백두산에서 무장투쟁을 벌린 다음부터 백배, 천배로 증대되였습니다. 그것은 지난날의 민족적자존심과는 대비도 할수 없는 높은 형태의 혁명적자부심입니다. 그러고보면 우리 인민의 참된 민족적자부심과 조국애는 백두산에 그 시원을 두고있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항일무장투쟁의 영향밑에 일본땅에 꾸려진 전민항쟁조직들은 여러가지 형태의 실천투쟁을 통하여 민족자주의식을 높이고 일제의 패망을 앞당기는데 기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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