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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18-2. 김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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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504회 작성일 15-11-1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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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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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현은 우리 인민들속에 항일유격대의 가장 대표적인 후방일군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하지만 그는 후방사업에만 능한것이 아니였다. 그는 우수한 군사지휘관이기도 하였으며 유능한 정치공작원이기도 하였다. 원래 그는 유격대에 들어오기전에 지하조직사업에 많이 관여하였다.

내가 김주현을 알게 된것은 항일유격대를 뭇기전부터였다. 1931년에 우리가 흥륭촌에서 무장투쟁준비를 하고있을 때 김주현은 대사하 고등창이라는 마을에서 농민협회와 반일동맹조직을 책임지고 지하활동을 하고있었다. 나에게 그를 처음으로 소개해준 사람은 소사하구 당조직책임자였던 김정룡이였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아주 허심하고 솔직한 사람이였다.

어느날 나는 김정룡에게서 김주현이 독립군출신들을 반일동맹조직에서 몽땅 몰아낼 잡도리를 하더라는 이야기를 듣고 일부러 그를 찾아갔다. 편협한 사람들로부터 독립군에 대하여 나쁜 소리만 들어온 김주현은 독립군출신들을 투쟁대상으로 보고있었다. 나는 혁명에서 통일전선이 가지는 의의와 반일애국사상을 가지고있는 독립군출신들에 대하여 그가 잘못 생각하고있는 점들을 품놓고 이야기해주었다.

김주현은 다음날 자기가 축출하려던 독립군출신유지들을 찾아가 사죄하였다. 유지들은 김주현을 돼먹은 사람이라고 칭찬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부터 김주현은 일하는 과정에 풀기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나를 찾아와 의논하군하였다. 나도 가끔 그의 집을 찾아가군하였다. 8살이라는 나이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 스스럼없는 친구로 되였다. 1931년이면 내가 항일유격대 대장을 하던 때도 아니였다. 그렇지만 김주현은 나의 의견을 항상 허심하게 받아들이였다.

나는 그의 겸허성에 매혹되였다. 그도 나를 무척 좋아하였다. 그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은 덮어놓고 다 지지하였다.

그런데 그 집 식구들은 김주현을 누구도 휘여잡을수 없는 옹고집쟁이라고 하였다. 그가 결혼하고 세간나던 과정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과연 그런 말을 들을만도 하였다.

김주현이네 일가는 원래 함북도 명천땅에서 살다가 가난때문에 화룡땅에 옮겨앉은 가정이였다. 퍼그나 애어린 시절에 떠나온 고국땅을 늘 그리워하던 김주현은 서당공부를 마치자 어대진에 나가 어업로동을 하면서 잔뼈를 굳히였다. 김주현의 형은 장가갈 나이가 지나도록 집에 돌아올 궁리는 조금도 하지 않고 그냥 타관에 머물러있는 동생을 억지로 대사하에 데려다가 이미 자기들이 점찍어둔 이웃동네의 처녀와 강제약혼을 시켰다. 본인의 의사를 고려하지 않은채 부모들끼리 맺은 혼약이였던만큼 김주현은 약혼녀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였다.

그는 부모들끼리 약혼식을 하건말건 연해주에 다녀온적이 있는 구산학교 선생한테만 뻔질나게 드나들며 로씨야혁명바람을 쏘이다가 집에서 잔치준비를 서두르는것을 보자 아버지에게 자기는 낯도 코도 모르는 녀자와 짝을 무을 생각이 조금도 없노라고 실토하였다. 아버지는 아들이 그저 한번 해보는 소리라고만 여기고 웃어넘기고말았는데 잔치날을 며칠 앞두고 신랑감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부모들은 큰 변고가 났다고 걱정하였다. 처녀의 집에서도 야단법석을 하였다. 김주현의 형은 동생의 행방을 찾으려고 온 겨울 집안일을 전페하고 돌아다니며 간도땅을 발칵 뒤지다가 구산학교 선생한테서 동생이 로씨야에 가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그는 갖은 신고를 다한 끝에 로씨야에 가서 동생을 데려왔다. 김주현은 결혼을 모면할수 없었다. 그가 돌아오기 바쁘게 집에서는 벼락잔치를 하였다.

그러나 김주현은 잔치를 한 다음에도 집에서 직심스럽게 농사를 지은것이 아니라 늘 밖에 나가 살았다. 아버지는 생각다 못해 그에게 집을 한채 지어주었다. 세간을 내여 딴살림을 시키면 처자를 먹여살리기 위해서라도 아들이 떠돌아다니지 않고 집에 눌러앉아 농사를 지으리라고 속단하였던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그런 처사는 오히려 김주현의 혁명열에 부채질을 해주는 격으로 되였다. 그는 부모의 통제를 받지 않아도 되는 제 집에서 조직을 꾸리고 군중을 계몽시키기 위해 하고싶은 일을 다하였다. 나중에는 집안에 땅굴을 파놓고 갓 시집온 안해까지 혁명사업에 끌어들이였다. 김주현의 아버지는 손을 들고 나앉으면서 개탄하였다.

《그놈의 고집은 할수 없구나!》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 김주현이 아주 주대가 있는 사람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의 의사와 결심에 따라 스스로 선택한 길을 완강하게 헤쳐나가는 김주현의 그 성미는 우리 마음에 퍽 들었다.

김주현은 바로 그런 완강성과 진취성을 가지고 우리가 안도에서 항일유격대를 창건한지 얼마 안되여 화룡땅에서 유격대를 조직하고 지휘성원으로 활약하였다.

몇년동안 서로 헤여져 활동하던 우리가 다시 만나서 한부대의 식솔로 된것은 마안산에서 새 사단을 편성하던무렵이였다.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가 새로 편성된다는 소식을 듣고 맨먼저 우리를 찾아 마안산으로 달려온것이 김주현이네 소부대였다. 간부감이 발라서 애를 먹고있던차에 그가 와주니 귀인을 만난듯이 반가왔다.

당시는 부대의 세간살이를 맡아볼 사람도 없어서 련대정치위원 김산호가 그 일까지 겸하여 보고있을 때였다. 부대를 편성하는 기회에 나는 김주현을 사령부 후방부관으로 임명하였다. 김주현은 부대의 후방사업을 드세게 내밀었다. 별로 분주히 뛰여다니거나 후방부문의 대원들을 다몰아대는것 같지는 않은데 먹을것과 입을것들을 어렵지 않게 구해들이고 부대살림을 윤택하게 만들었다.

유능한 후방일군으로서의 김주현의 뛰여난 솜씨는 부대가 백두산지구에 나와서 활동하던 시기에 남김없이 발휘되였다.

그가 한번만 출동하면 인차 지원물자를 진 원군대렬이 꼬리를 물고 밀영으로 밀려들군하였다. 일단 마음먹은것이면 그는 무엇이든지 다 구해들였다.

항일무장투쟁의 전기간에 걸쳐 1937년 설처럼 잘쇤 명절은 흔치 않았다. 그것도 김주현이 백두산에 와서 처음 맞는 설인데 허술히 쇨수 없다면서 마음먹고 준비한 덕이였다.

보천보전투를 앞두고 마련한 600여벌의 군복, 군모, 행전, 탄띠, 배낭감들과 천막감 그리고 또 그만한 수량의 신발들과 막대한 식량들도 그가 책임지고 오중흡과 함께 구해들인것이였다. 그의 아버지는 김주현을 두고 제 색시 하나도 먹여살리지 못할것이라고 걱정하였지만 그는 두주먹밖에 가진것이 없는 백두산에서 수백명 식구들의 식의주문제를 두어깨에 걸머지고 많은 일을 하였다.

내가 김주현의 수고와 후방사업성과를 치하하면 그는 서간도인민들이 좋은 인민이기때문에 일이 저절로 잘된다고 하였다.

부대의 살림살이때문에 늘 입술이 부르터가지고 눈에 충혈이 가셔질새 없이 돌아다니는 김주현의 헌신적인 노력에 감동된 인민들은 스스로 지혜를 짜내여 그의 사업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김주현은 인민들속에 들어가면 항상 그들과 호흡을 같이하면서 사람들의 아픈 마음을 알아주고 풀어주는 인민의 아들이 되였으며 대원들속에 돌아오면 다심하고 후덕한 어머니로 되였다. 서간도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우리 김부관》이라고도 하였다.

김주현은 아무리 굳게 닫긴 마음의 문도 어렵지 않게 열어제끼는 독특한 수완과 특이한 친화력을 가지고있었다. 언제나 진실을 말하고 진정으로 대하며 량심적으로 행동하고 검박하고 겸허하게 처신하는 참사람으로서의 인간적향취가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던것이다.

김주현이 후방사업에서만이 아니라 정치공작에서도 매번 큰 실적을 올릴수 있었던 리유의 하나가 거기에 있었던것 같다.

내가 김주현의 후방사업에서 독특한 점이라고 본것은 그가 매사를 정치적인 방법으로 풀어나간다는데 있었다. 가령 우리가 후방부에 군복제작과 관련한 과업을 주면 그는 아래일군들에게 사령부의 지시를 기계적으로 되받아넘긴것이 아니라 그 과업의 절박성과 수행방도에 대하여 진지하게 해설해주었다.

그의 정치사업능력을 귀중히 여긴 나는 어렵고 복잡한 정치공작임무가 제기될 때마다 자주 그를 찾군하였다. 나는 백두산근거지창설을 위하여 선발대를 파견할 때에도 김주현을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그 선발대를 파견한 목적이 단순히 백두산밀영후보지들을 탐색하고 부대의 이동통로를 개척하며 국경지대의 적정과 인민들의 동향을 알아오는데만 있은것이 아니라 반일지하혁명조직들을 내올수 있는 정치적력량을 찾아내고 준비시키는데 있은것만큼 반드시 정치공작을 병행해야 하였기때문이였다.

김주현은 그때 자기가 받은 정치공작임무를 원만히 수행하였다. 그가 백두산지구에 선발대로 나가서 이룩해놓은 업적은 응당 글로 써서 크게 자랑할만한것이였다. 소백수골, 곰산, 사자봉, 선오산, 곰의골, 지양개골, 덕수골을 비롯한 백두산지구의 밀영후보지들은 모두 김주현이 인솔한 선발대가 찾아낸것이였다. 그는 지양개, 소덕수, 신창동, 관도거리, 종리원촌, 평강덕, 상풍덕, 도천리, 삼수골과 같은 서간도의 여러 농촌들을 돌아다니면서 당조직건설과 통일전선운동에 이바지할수 있는 인재들도 많이 발굴하였으며 혁명군의 후비원천도 적지 않게 마련해놓았다. 김주현일행은 조국광복회10대강령과 창립선언에 담겨진 우리의 혁명로선을 국내와 서간도의 넓은 지역에 전파하는데서도 큰 역할을 하였다. 김주현선발대의 사업성과는 우리의 항일무장투쟁을 한단계 비약시킬수 있는 하나의 도약대로 되였다.

힘든 일거리가 생길 때마다 제일먼저 찾게 되는 사람, 김주현이 우리 부대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바로 이런것이였다. 그는 모두가 아끼고 사랑하는 부대의 보배였다. 그의 혁명임무에 대한 강한 책임성과 높은 정치적자질, 능숙한 조직적수완, 로련한 사업방법은 모든 지휘관들이 귀감으로 삼을만한것이였다. 한마디로 말하여 김주현은 문무를 겸비한 사람이였다.

김주현의 업적과 사업능력을 늘 좋게 평가하고있던 나는 1937년 8월중순에 그를 국내로 파견되여가는 소부대의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1937년 8월이면 중일전쟁이 폭발한 직후이다. 앞에서도 언급한바와 같이 우리는 이 전쟁의 발발과 관련하여 국내에서 정치군사활동을 대대적으로 진행하며 적의 배후를 크게 교란시키고 항일혁명을 정세의 요구에 맞게 한계단 더 앙양시킬것을 계획하고있었다. 이 계획을 실현하자면 무엇보다도 정치군사적으로 잘 준비된 유능한 인원들을 선발하여 소부대를 뭇고 그들을 국내의 필요한 지역에 선견대로 파견하여 현지에서 우리의 구상을 실현하기 위한 활동을 벌리도록 하는것이 중요하였다.

국내의 혁명조직들은 여러 경로를 통하여 성진, 길주, 명천, 단천 등 함경북도 남부와 함경남도 북부 해안지대의 산중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조선인민혁명군과의 련계를 가지려고 안타깝게 노력하고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통보해왔다.

소부대의 기본임무는 그런 애국청년들을 찾아내여 유격대를 조직하고 그들에 대한 훈련을 진행하는것이였다. 무장투쟁에 참가할수 없는 허약한 사람들은 필요한 강습을 주어 지하혁명조직원으로 양성해내야 하였다. 그밖에도 소부대는 주민들속에서 지하조직과 무장대오를 확대하기 위한 대중정치사업과 인재탐색사업도 겸해서 하게 되여있었다. 우리는 소부대에 백두산줄기와 마천령산줄기, 부전령산줄기들에서 무장투쟁거점으로 삼을만한 밀영후보지들을 탐색할데 대한 과업도 동시에 주었다.

그 사명의 중대성으로부터 우리는 쇠소리나는 쟁쟁한 사람들로 소부대를 꾸리였다. 거기에는 박수만, 정일권(옹조꼬맹이), 마동희, 김혁철과 같이 이미 정치공작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들이 망라되여있었다. 대장이 능란한 지휘관인데다가 대원들도 풍부한 투쟁경험을 가진 사람들로 꾸려진것만큼 소부대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기대는 컸고 그들의 기세와 결의 역시 대단히 좋았다. 나는 그들이 임무를 성과적으로 수행하고 돌아오리라는것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좋은 소식을 기다리겠소!》

나는 소부대를 떠나보낼 때 김주현에게 그이상 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우리의 의도를 속속들이 파악할줄 아는 사람이였다. 내가 한마디 말을 하면 열가지를 풀이해내는것이 김주현의 특징이였다. 그런 리유로 하여 나는 그에게 무슨 과업을 줄 때면 장황한 해석을 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건대 김주현에 대한 나의 믿음은 절대적인것이였다.

짧아서 너덧달, 길어서 대여섯달후에는 소부대가 좋은 결과를 가지고 부대로 돌아오리라는것이 우리의 한결같은 기대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소부대는 떠난지 한달이 좀 지나 문득 부대로 되돌아왔다. 이것은 우리가 전혀 예상할수 없었던 심각한 사태였다. 나는 김주현의 얼굴빛을 보고 국내공작이 실패로 끝났음을 즉시에 간파하였다. 그의 보고는 나를 아연케 하였다. 소부대는 애국청년들이 모여있다는 성진지방에 가닿지도 못하고 갑산땅에서만 맴돌다가 되돌아왔던것이다.

리제순의 신흥촌통로를 거쳐 국내에 들어간 소부대는 박달의 조직선을 타고 혜산쪽으로 나가다가 그곳 지방조직으로부터 일본의 금광업자들이 본국으로 략탈해가는 금괴들이 중평광산에 보관되여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김주현은 그 통보를 받자 광산을 쳐서 금덩어리들을 빼앗아내기로 결심하였다. 후방일군으로서의 직업적인 본성이 자기도 모르게 발동되였던것이다. 사실 금괴를 몇개만 손에 넣으면 그것은 부대의 후방사업을 위해서 횡재로 될수 있었다. 광산을 습격한 소부대는 얼마간의 금을 손에 넣을수 있었다. 그러나 그대신 소부대성원들은 비싼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되였다. 중평광산에서 울린 총소리를 듣고 크게 놀란 적들이 수십명씩 무리를 지어 소부대를 추적하기 시작했던것이다.

광산에서 철수한 소부대는 덕산동뒤산에 올랐으나 사면포위의 위험에 빠져 오도가도 못하게 되였다. 김주현은 한장의 통고장을 써서 바람에 날려보냈다.

《이 멍텅구리들아. 신출귀몰하는 혁명군을 아직 모르느냐. 우리는 압록강을 건너간다!》

통고장을 읽어본 적들은 압록강쪽으로 밀려갔다. 그 틈을 타서 김주현은 소부대를 이끌고 적들의 포위에서 빠져나갈수 있었다. 소부대는 요행 포위망에서 벗어났으나 국내깊이에로 더 들어갈수 없었다. 함경남북도의 산악지방들과 유격대공작원들이 다닐수 있다고 보는 길목들에 적들이 벌써 한벌 쭉 깔려있었기때문이였다. 김주현은 차후에 다시 기회를 보아 국내에 들어가 공작임무를 수행하기로 하고 일단 부대로 돌아오고말았다. 보천보전투를 계기로 하여 절정으로 치달아오른 우리 인민의 독립열망과 청년들의 참군열의에 편승하여 국내항쟁무력을 창설하고 무장투쟁의 불길을 동해안일대에까지 확대하려던 우리의 계획은 김주현소부대의 황당한 모험과 혹심한 자유주의로 하여 뒤로 밀리우게 되였다. 마천령산줄기에 만날 장소까지 정해놓고 소부대를 기다리던 국내의 애국청년들도 혁명군의 사절들을 만나지 못한 아쉬움과 실망을 안고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였다.

소부대가 공작현지에 침투하지 못하고 되돌아왔다는 소식은 유격대원들의 마음속에도 어두운 그늘을 던져주었다. 지하공작에 그처럼 능한 김주현이 공작현장까지 가닿지도 못하고 초입에서 되돌아섰다면 국내의 공기가 이만저만 살벌하지 않은 모양이라고 하면서 다들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자칫하다가는 무장투쟁의 국내확대가 당분간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하는 판단이 생길수 있었다. 김주현의 실책은 이처럼 수습할수 없는것이였다.

나는 김주현이 실책을 범했다는 사실이 잘 믿어지지 않았다. 금덩어리 몇개때문에 소부대의 활동을 파탄시킨 그의 과오는 우리의 구상을 실현하는데서 돌이킬수 없는 엄중한 결과를 가져왔다. 김주현의 자유주의로 해서 인민혁명군의 적배후교란작전과 국내진공작전에서는 하나의 커다란 공백이 생긴셈이였다. 나는 지금도 그때 그가 동해안쪽으로 그냥 나가서 애국청년들을 만났더라면 우리의 무장투쟁사가 좀더 풍만해지지 않았겠는가 하는 아쉬운 생각에 종종 잠기군한다. 그만큼 그 당시 나의 실망과 좌절감은 여간 크지 않았었다.

나의 분노도 보통정도를 넘었던것 같다. 그런데 이상한것은 그 당시의 그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숙이고 처분을 기다리는 김주현에게 한마디의 추궁이나 책망도 할수 없는것이였다. 아마 노여움이나 실망이 극도에 달하면 꾸지람도 나가지 않는 모양이였다. 나는 아무런 의사표시도 하지 않고 묵묵히 그를 지켜보기만 하였다.

사령부당위원회에서는 회의를 열고 김주현의 문제를 취급하였다. 동지들은 저마다 그가 범한 과오의 엄중성을 신랄하게 지적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격분한 나머지 주먹으로 방바닥을 내려치기도 하였다. 아마 그는 난생 처음으로 그런 비판을 받아보았을것이다. 김주현은 모든것을 체념해버린 사람처럼 맥없이 앉아있었다.

그날 사령부당위원회에서 여러 사람들이 정당하게 분석한바와 같이 김주현이 극심한 자유주의를 범하게 된 근본원인은 소총명과 자고자대로부터 문제를 근시안적으로 본데 있었다. 그는 소부대의 임무를 전략적인 높이에서 새겨두지 못하였다. 그런데로부터 금덩어리란 말을 듣게 되자 그만 리성을 잃어버리였던것이다. 김주현은 광산을 치면서도 그에 대한 후과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고백한바와 같이 그 당시 그는 꿩도 먹고 알도 먹을 속심이였다. 말하자면 광산을 쳐서 금덩어리도 털어내고 청년들을 만나 무장부대도 조직하고싶은 욕심이였다는것이다.

물론 나는 그 고백을 진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고백속에는 한마디의 허위도 없었다. 우리는 김주현이 얼마나 솔직하고 결백한 사람인가를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다. 하지만 의도는 어떻든지간에 소부대가 공작현지에 가보지도 못하고 돌아왔으니 전부대가 그들의 행위에 격분하는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나는 김주현을 용서해주고싶었지만 그런 말을 입밖에 내지 못하였다. 사령관이 친, 불친을 가리거나 원칙을 어길수는 없었다. 인정에 못이겨 그의 과오를 눈감아준다면 그것은 어느모로 보든지 백해무익한 일이였다. 내가 김주현을 위해 해줄수 있는 최상의 방조는 그가 자기 과오를 고칠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는것이였다.

사령부당위원회는 김주현을 후방부관의 자리에서 철직시키기로 결정하였다. 나도 물론 그 결정을 찬성하였다. 그러나 책벌을 받고 맥없이 사령부를 나서는 김주현의 뒤모습을 보면서 그가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사전에 잘 도와주지 못한 자기자신을 마음속으로 질책하였다.

소부대를 파견할 때 김주현에게 주변에서 어떤 일이 생겨도 돌아보지 말고 국내동지들이 기다리고있는곳까지 직행해야 한다는 말을 단 한마디라도 했더라면 사태는 이렇게까지 번져지지 않았을것이였다. 솔직히 말하건대 나는 김주현이 후방부관으로서 금덩어리와 같은 그 어떤 물건에 현혹되여 활동로정을 바꾸게 될수도 있다는 그런 특수한 정황에 대해서는 미처 예상하지 못하였다.

김주현은 후방부관의 자리에서 철직된 다음 사상단련을 아주 잘하였다. 지금은 그런 사상단련을 혁명화라고 한다.

사령부후방부관의 자리를 내놓고 작식대원으로 배치된 김주현은 새 초소에 온 첫날부터 가마를 지고 다니였다. 어제까지 자기가 지도하던 대원들앞에서 가마를 지고 다닌다는것은 말처럼 그렇게 용이한 일이 아니였다. 그런 경우에 부닥치게 되면 사람들은 흔히 다른데로 보내달라고 제기한다. 그러나 김주현은 작식대원으로 일하는것을 조금도 나무라거나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옆의 대원들이 미안해할 정도로 수걱수걱 맡은 일에 열중할뿐이였다. 표정도 밝고 기분도 늘 명랑하였다.

어느날 나는 김주현이 어떻게 생활하고있는가를 알아보려고 8련대 식당으로 찾아갔다. 김주현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식사중에 있는 대원들의 시중을 들고있었다.

그런데 한 대원이 자기앞에 차례진 국을 순식간에 다 먹어버리고나서 숟가락으로 양재기를 두드리며 김주현을 소리쳐 부르는것이였다.

《여보 작식대, 국 한그릇 더!》

순하게 덧국을 청하는 례사로운 소리가 아니였다. 그것은 분명 남을 얕잡아보는 말투였다.

그러나 김주현은 아무런 내색도 없이 《예, 가져다드립니다.》하더니 국자로 국을 퍼가지고 곱배기를 청한 대원에게로 총총히 다가가는것이였다.

그날저녁 나는 김주현을 하대하던 대원을 불러다가 과오를 범하고 철직을 당한 사람이라고 해서 함부로 호령질을 하거나 얕잡아보면 안된다고 타일러주었다. 과오를 범한 사람일수록 외면하거나 경계하거나 천대하지 말고 더 따뜻이 대해주고 진심으로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해주었더니 그 대원은 자기 잘못을 뉘우치는것이였다.

직위라는것은 고정불변한것이 아니여서 높다가도 낮아지고 낮다가도 높아지는것만큼 진정한 동지적관계를 유지하려면 직위를 따를것이 아니라 인간을 따라야 한다.

사람은 자기의 이웃이 곡절을 겪을 때일수록 그를 더 따뜻하게 충심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항일혁명투사들은 자기의 전우들이 과오를 범하고 본래의 직책에서 사업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랭대하거나 따돌리지 않고 그들이 과오를 깨끗이 씻을수 있도록 각방으로 도와주었다.

김주현이 작식대원으로 일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한주일쯤 지난 어느날 나는 행군중에 있는 그의 곁에 다가가 배낭을 벗으라고 하였다. 총과 배낭을 메고 거기다가 작식가마까지 지고 힘들게 걸어가는 그를 보니 측은한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그러나 김주현은 무겁지 않다고 하면서 사양하였다. 내가 배낭끈을 잡자 그는 배낭을 벗기려는 나의 손을 고집스럽게 떼여놓았다. 그리고는 그냥 대렬을 따라갔다.

그런 모습을 보게 되니 어쩐지 마음이 서운하였다. 이 사람이 혹시 철직처분을 내린 당회의의 결정을 고깝게 여기는게 아닐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무심결에 얼굴을 쳐다보니 김주현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있었다. 내 마음은 그 눈물앞에서 천근처럼 무거워졌다. 저 억센 사나이가 눈물은 왜 흘리는가?

김주현은 개인적으로 볼 때 커다란 슬픔과 불행을 안고있는 사람이였다. 그의 안해는 지방공작을 나갔다가 적의 《토벌》에 희생되였고 딸애는 병으로 죽었다. 일점혈육으로 남은 아들애는 김주현이 유격대에 입대할 때 남의 집에 주고말았다. 그때부터 김주현은 오직 혁명만을 위해 살았다.

그날밤 나는 대원들이 다 잠든 다음 김주현을 만나려고 8련대의 숙영지로 향하였다. 그런데 작식터에 이르러 뜻밖의 광경을 목격하게 되였다. 잠자리에 누워서 번민할줄 알았던 그가 놀랍게도 내가에 앉아 수세미로 가마를 닦고있지 않는가.

나는 그에게 래일부터 병기창에 가서 일하라고 하였다. 병기창에 가면 주변환경도 조용하고 자존심을 건드리는 사람들도 없어 마음만은 편안하지 않겠느냐고 하였더니 김주현은 눈물이 글썽해서 자기는 책벌을 받아도 사령관의 옆에서 받겠다고, 사령관가까이에 있어야 마음도 편해진다고 하였다.

《나는 낮에 동무가 남모르게 우는것을 보았소. 그래서 그 눈물을 내나름대로 해석했지. 작식대일이 고통스러워서 그러는줄로 알고 병기창으로 옮겨줄 생각까지 했구만.》

내가 이런 말을 하자 김주현은 웃음을 지으며 내 손을 잡는것이였다.

《아닙니다. 저는 사령관동지가 저에게 책벌을 주고 가슴아파하는것이 하도 고맙고 또 저자신이 배은망덕한것이 너무도 죄스러워 울었습니다. 사령부당회의에서 제 문제를 취급할 때 제가 제일 두려워한게 뭔지 아십니까? 그건 저를 대오에서 제명하여 멀리로 쫓아버리지나 않겠는가 하는것이였습니다. 전 죽어도 여기서 죽고싶었습니다. 제가 혁명대오에서 떠난다면 무슨 사는 보람이 있겠습니까. 저를 버리지 않고 작식대에서 일하게 해준것만 해도 고마운 일입니다.》

나는 김주현의 말을 들으면서 밤깊도록 내가에 앉아 수세미로 가마를 닦는 그의 심정이 리해되였다.

그는 일신의 문제야 어떻게 되든 우리곁에 있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였다. 우리의 곁에 있기만 하면 지휘관을 해도 좋고 작식대원을 해도 좋고 비판을 받아도 좋고 책벌을 받아도 좋고 그저 혁명대오에서 탈락당하지만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여기에 바로 김주현의 참모습이 있었다.

이런 체질을 가진 사람들은 동지들이 주는 비판이나 책벌을 믿음으로, 사랑으로 받아들인다. 김주현은 자기가 처신을 잘하지 못한것으로 하여 혁명에 얼마나 큰 손해를 주었는가 하는데 대하여 깊이 생각하였다.

(내가 혁명가가 다된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멀었구나. 사령관동지께서 나를 신임해주셨으니 그렇지 나처럼 설익은 혁명가가 어디 있겠는가. 동지들의 비판이 다 옳다. 이 기회에 내 사상단련을 잘해서 쇠소리가 나는 유격대원이 되여야겠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자기를 개조하기 위해 더욱 분발하였다.

김주현은 가마를 지고 다니던 나날에 공부도 많이 하였다. 김주현이 책벌을 받은 그해 11월에 사령부비서처성원들은 내가 쓴 글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임무》를 소책자로 찍어냈는데 그는 그 소책자를 제일먼저 구해다가 열독하였다. 그가 몸을 돌보지 않고 너무도 직심스레 공부를 하기때문에 작식대원들은 자기들이 그처럼 따르고 존경하던 옛 후방부관이 쓰러지기라도 할가봐 모두 걱정하였다. 그들은 김주현의 배낭에서 소책자를 몰래 꺼내다가 풍막뒤 돌짬에 감추었다.

김주현은 그 책자를 찾느라고 며칠동안 고심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오히려 살이 더 내리였다. 그 소책자를 잃은것때문에 그는 밥맛까지 잃어버릴 지경이였다. 바빠맞은 작식대원들은 김주현이 없는 틈을 타서 돌짬에 감추어두었던 소책자를 슬그머니 그의 배낭속에 다시 가져다넣었다. 그리고는 《주현동지, 다시 잘 찾아보시라요. 배낭속에 있던 물건이 배낭에 있겠지 어디로 가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김주현은 잃었던 소책자가 배낭속에서 다시 나타나자 《이것 참 귀신이 곡할노릇이군.》하면서 어린애들처럼 기뻐하였다.

그는 사상단련을 참으로 잘하였다. 역시 로동계급출신의 오랜 혁명가가 달랐다. 그가 자신을 개조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감동없이는 볼수 없는 그런 높은 경지를 이루고있었다. 그러기에 나는 지금도 간부들이 자신을 혁명화하려거든 김주현처럼 하라고 말한다.

김주현이 후방부관자리에서 철직된 때로부터 6개월만에 우리는 그를 7련대장으로 임명하였다. 우리가 그를 본래의 자리에 복직시키지 않고 련대장으로 임명한것은 그가 늘 총포성이 울리는 전장을 그리워하였기때문이다.

김주현은 련대장으로 임명된 다음 싸움을 잘하였다. 그는 장백현의 가재수와 12도구 전투를 비롯하여 림강현 6도구전투, 쌍산자전투, 오가영전투, 가가영전투, 신태자전투 등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가 벌린 1938년의 춘기공세와 그이후 진행된 여러차례의 대소전투들에서 령활하고 대담한 군사지휘관으로서의 실력을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그해 여름에는 신태자에서 몽강, 류하, 금천 지방에까지 진출하여 적의 배후를 타격하는 전투들을 능숙하게 지휘하였다. 그가 이끄는 7련대는 인민들에 대한 정치선전도 대단히 잘하였다. 련대장자신이 주민부락들에 들어가면 솔선 앞장에 서서 사람들과의 사업에 몸을 잠그었다.

김주현은 1938년 10월 몽강현 남패자의 수림에서 김택환, 김영국과 함께 후방병원의 환자들을 위해 산꿀을 채취하다가 적《토벌대》의 불의습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그는 련대장이 된 다음에도 부대를 입히고 먹여살리느라고 사방으로 뛰여다니던 후방부관시절처럼 전우들의 식의주문제를 한시도 잊지 않고있었다.

그가 전사한후 전우들은 그의 유물로 남은 배낭을 헤쳐보았다. 그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누구에게나 있어야 하는 예비신발조차 없었다. 그의 전령병에게 물어보니 그전날 신발을 꿰뜨린 대원에게 주었다고 하였다.

김주현이 남기고간 빈 배낭을 부둥켜안으니 솟구치는 눈물을 걷잡을수 없었다. 그가 후방부관을 하던 시절부터 우리 혁명군을 위해 공작해들인 쌀과 군복천, 신발을 전부 쌓으면 아마 산더미를 이룰것이다. 그는 신발만 해도 수천컬레나 구해들였다. 그러나 김주현은 자기 배낭에 있던 예비신발 한컬레마저 대원들에게 주었다.

그 빈 배낭은 혁명가의 재산과 인생관에 대하여 깊이 생각케 하였다. 행복을 지향하는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세상에는 황금만을 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의 눈으로 본다면 김주현은 아무 재산도 없는 무산자였다고 할수 있다. 그러나 나는 김주현이야말로 진짜거부였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가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억만금의 황금으로 살수도 없고 바꿀수도 없는 고결한 사상과 넋을 간직하고있었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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