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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17-1. 보천보의 불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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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10,673회 작성일 15-09-29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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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장 조선은 살아있다

1. 보천보의 불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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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보전투의 력사적측면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연구하고 이야기하였지만 이 전투를 직접 조직하고 지휘한 나에게는 정신적체험이나 추억거리들이 적지 않다. 지금도 반세기전에 있었던 가지가지의 정경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보천보전투는 한마디로 말하여 생리별을 당한 어머니와 그 자식들의 상봉과 같은 사변이였다고 할수 있다. 조국은 보천보에서 울린 총소리를 계기로 하여 자기를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충직한 아들딸들을 만날수 있었다. 다르게 말하면 이 전투는 망국사의 흐름을 광복에로 돌려세운 결정적인 계기의 하나였다고도 표현할수 있다.


나는 해방후 조국에 돌아와 항일무장투쟁시기의 전투담을 들려달라는 각계인사들의 요청에 접할 때마다 늘 보천보전투에 대해서 말해주군하였다. 전과로 보면 이 전투보다 규모가 훨씬 더 큰 전투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보천보를 칠 때 우리가 살상한 군경수는 사실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항일전쟁당시의 주요전투들을 소개할 때면 언제나 이 전투를 맨 웃자리에 놓군한다. 그것은 내가 이 전투를 그 어느 전투보다도 특별히 중시하기때문이다.


보천보전투에 대하여서는 많은 사람들이 흥미를 가지고 대하였다. 적측의 손실이라든가 피해정도 같은것은 이미 전투직후에 지상을 통해 소개되였으니 새삼스럽게 확인할것도 없었지만 그 작전의 동기에 대해서만은 누구나 호기심을 가지고있었다. 요컨대 어떻게 되여 보천보전투를 하게 되였는가, 국경부근에 그런 정도의 고을들과 촌락들이 수십개나 되는데 유독 보천보를 친것은 무엇때문이였는가 하는것이다.


우리가 보천보전투를 조직한 목적은 넓은 의미에서 보면 민족재생의 전기를 마련하려는데 있었고 좁은 의미에서 보면 항일혁명투쟁에서의 결정적인 단계, 질적비약을 이룩하자는데 있었다고 말할수 있다.


조선의 민족사는 피눈물로 얼룩져있었다. 이 피눈물은 일제가 강요한것이였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항전을 개시하였다. 무장투쟁은 조선의 아들들이 선택한 항일의지이고 수단이였다. 우리는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의 구호를 들고 한편으로는 무장투쟁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당조직건설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통일전선운동과 반제공동전선운동을 하면서 항일혁명을 추진시켜왔다.


이 길에는 난관도 많았다. 어떤 사람들은 조선사람이 조선혁명의 구호를 들고 싸우는것까지도 범죄시하면서 저들의 당리당략에 복종할것을 요구하기까지 하였다.

우리는 혁명의 길에 나선 첫날부터 언제나 사고의 출발점을 조선혁명에 두었다. 몸은 비록 이국에 있었으나 마음은 항상 조국에 가있었고 조국의 동포들에게 가있었다. 1920년대 후반기부터 우리가 이국땅에서 한 모든 일은 다 조국을 위한것, 조국의 해방을 위한것이였다. 우리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조선혁명의 기발을 들고 투쟁하는것이 우리의 당당한 권리로 되고 의무로 된다는데 대하여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남호두회의에서는 다른 일련의 문제들과 함께 무장투쟁을 국내에로 확대할데 대한 문제가 중요하게 론의되였다.

이 회의를 통해 표현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지향은 조선에 나가서 총소리를 크게 내자는것이였다. 바꾸어 말한다면 활동판도를 국내깊이에로 확대하여 조선혁명을 앙양시키자는것이였다. 1930년대 전반기까지의 우리의 주되는 활동판도는 만주지방이였다. 항일유격대창건을 전후로 하여 국내에도 여러번 드나들었지만 그것은 제한된 활동이였다.


1930년대 전반기의 우리의 활동은 주로 힘을 축적하는 단계라고 할수 있었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의 무장대오는 여러개의 사단을 이룰만치 장성하였다. 이 힘을 가지고 국내에 나가면 못해낼 일이 없었다. 백두산에 틀고앉아서 랑림산에도 1개 사단, 관모봉에도 1개 사단, 태백산에도 1개 사단, 지리산에도 1개 사단 하는 식으로 사방에다 무장부대들을 파견해서 근거지를 건설하고 적들을 연거퍼 답새기면 조선반도를 죽가마처럼 끓게 할수 있었으며 2천 300만 조선민족을 전민항쟁의 마당으로 모조리 불러낼수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우리자신의 힘으로 조국해방의 숙원을 달성할수 있는 대통로를 열어놓을수 있었다. 이것은 남호두와 동강, 서강 등지에서 열린 일련의 회의들에서 거듭되는 론의의 대상이 되였던 민족사의 요구, 항일혁명발전의 총화였다.


1937년 봄에 우리는 서강에서 수년간에 걸친 무장투쟁과정을 총화하면서 대부대에 의한 국내진출을 당면과업으로 내세우고 그에 따라 몇가지 실무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그 조치에 따라 혁명군무력을 3개의 방향으로 진출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군사작전이 세워졌다. 그 작전에 의하면 최현부대는 무송으로부터 안도, 화룡을 거쳐 두만강연안의 북부국경일대로 진출하게 되여있었고 다른 하나의 력량은 림강, 장백 일대로 진출하게 되여있었으며 내가 인솔하는 주력부대는 적의 공격이 두 부대에 집중될 때 혜산쪽에 쳐들어가서 한바탕 총소리를 내는것으로 되여있었다. 이 작전의 총적인 지향점은 국내의 적들을 치는데 있었다. 림강과 장백 일대에 진출하게 되는 2사부대의 활동도 기실은 국내에 진공하게 될 두 부대의 활동에 대한 배후지원을 목표로 삼고있었다. 그런데 적지 않은 우리 인민들속에는 일본군의 강대성에 대한 일종의 환상이 조성되여있었다. 그들은 일본군이 만주를 단숨에 삼켜버리는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세상에 이런 군대를 당해낼 군대는 없다고까지 생각하였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일본과 같은 강국을 상대로 하여 독립전쟁을 벌린다는것은 닭알로 바위를 깨겠다고 덤벼드는것과 같이 황당하고 무모한짓이라고 하였다.


여러가지 징후들로 보아 일제가 중국관내에로 침략전쟁을 확대하리라는것은 불을 보듯 명백한 현실로 되였다. 중일전쟁은 시간문제로만 남아있었다. 일본군이 기세등등해서 전쟁의 불길을 넓혀가는데 따라 《무적황군》에 대한 공포와 환상은 점점 더 커질것이였다. 적의 강대성에 대한 환상은 혁명의식을 마비시키는 환각제와 같은것이다. 이 환각제의 작용을 무용한것으로 만들려면 일본군에 대한 신화를 깨뜨려버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일본군이 강군이기는 하지만 치면 꺼꾸러뜨릴수도 있고 괴멸시킬수도 있다는것을 직관적으로 보여주어야 하였다.


우리가 한 5년동안 북간도와 서간도를 중심으로 하여 벌린 무장투쟁은 일본의 신화를 여지없이 깨뜨려버리였다. 그러나 혹심한 보도관제와 외곡된 선전으로 하여 우리 군대의 전과는 국내깊이에까지 사실대로 널리 알려지지 못하였다.

이런 때에 우리가 대부대로 국내에 쳐들어가게 되면 온 나라 강산이 경탄과 감격으로 발칵 뒤집히고 인민들은 일제를 쳐부시고 조선을 독립시킬 군대가 있다고 기뻐할것이다. 조국해방을 이룩할수 있는 조선의 혁명군대가 있다는 긍지와 자부심, 이것이야말로 2천 300만 동포들이 조국광복전선에 과감히 떨쳐나설수 있는 힘과 의지의 기초인것이다.

이것이 바로 국내진공작전에 일관되여있는 우리의 전략적의도였다.


나는 그 당시 두가지 점에 사색을 집중하고있었다. 하나는 군사적으로 국내의 큰 요충지들을 공격해서 온 나라에 충격을 주자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하조직망을 조밀하게 뻗쳐서 전민을 반일항전에 준비시키자는것이였다. 그래서 조국을 해방할수 있는 결정적시기가 도래할 때 무장투쟁과 전민봉기를 배합하여 일제를 격멸하고 독립을 실현하자는것이였다. 이것은 피와 땀을 많이 바쳐야 하는 어려운 전략이였지만 달리는 할수 없는 길이기도 하였다. 백두산지구와 서간도일대에서의 우리의 모든 활동은 이 전략의 실현에 철저히 바쳐지고있었다.


국내진공을 앞둔 때의 나의 제일 큰 관심사는 조국의 실정을 깊이 료해하는것이였다. 출판물만으로는 국내의 실정을 속속들이 다 파악할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국내에 갔다오는 공작원들과 담화를 많이 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국내에서 활동하는 지하조직원들을 불러다가 국내실정을 들어보기도 하였다. 실정자료는 새로운 통계수자나 충격적인 사건에만 있는것이 아니였다. 장마당풍경이나 길가의 객주집에서 울려나오는 아낙네들의 넉두리에서도 우리는 어용신문의 눅거리보도기사들에서는 볼수 없는 주요한 자료들을 모을수 있었다.

그 자료들가운데서도 우리가 제일 중시한것은 인민들의 동향이였다. 인민들이 어떤 고통을 겪고있으며 무엇을 생각하고있는가 하는것들이 우리의 주되는 관심사였다.


그해 4월이 아니면 5월이였다고 기억된다. 만포쪽에 나갔다가 돌아온 한 무장소조원이 나에게 사업보고를 하다가 산중에서 목격한 사실이라고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글쎄 팔다리가 저가락 같이 여윈 10살 되나마나한 사내애들이 솔밭에서 삭정이를 줏고있지 않겠습니까. 알아보니 학교에서 얼결에 조선말을 한것때문에 매를 맞고 벌금을 무느라고 나무를 한다는겁니다. 그 애들은 모두 보통학교 2학년생들이였습니다.》

무장소조원이 그 아이들한테서 들은데 의하면 일본인교원은 목검으로 아이들의 다리와 잔등을 굴뱀이 지게 두드려패고 머리에 물통을 뒤집어씌워 운동장에 장시간 꿇어앉히였다고 한다. 그리고 벌금까지 요구하였다는것이다. 그 학급에서는 조선말을 한마디 하면 5전, 두번 하면 10전, 세번이상 하면 퇴학이라고 하였다. 다른 학교나 학급들에서는 아직 그런 규정을 내지 않았는데 일본인교원이 담당한 그 학급만은 유독 《국어상용》을 강요한다는것이다.


일본사람들이 조선말을 한 아이들한테서 벌금을 받아낸 그 자체는 별로 놀라울것도 없는 일이였다. 나라를 통채로 빼앗은 일제가 무슨짓인들 못하겠는가. 나는 이전에도 조선총독부 당국이 조선사람들에게 일본말사용을 강제로 내리먹이지 못해 안달아한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었다. 경상북도에 있는 어느 한 보통학교에서는 벌써 1931년말부터 강제적인 방법으로 조선말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1937년 봄에 총독부 당국은 조선의 각급 관공청들에서 일체 공문서작성을 일본어로 할데 대한 지시를 내리먹였다.


이 모든 사실들은 일본의 치하에서는 달리될수 없는 필연적인것이였다. 그것은 새삼스러운 현상이 아니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다잡을수 없었다.

사람이 말까지 빼앗기면 사람으로서는 지능을 잃은 바보가 되는것이며 민족이 민족어를 빼앗기면 한 민족이기를 그만두는것이다. 민족의 징표가운데서 피줄의 공통성과 함께 언어의 공통성이 가장 중요한 요소로 된다는것은 세상이 다 공인하고있는바이다.

민족어는 민족의 정신이라고 할수 있다. 그러므로 언어를 빼앗고 말살하는것은 민족의 전체 성원들에게서 혀를 잘라내고 얼을 빼앗는것과 같은 잔학무도한 짓으로 된다. 령토와 국권을 잃은 민족에게 남는것이란 언어와 정신밖에 없다.


그런즉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조선민족전부를 숨쉬는 시체로 만들려는것이다. 《황민화》의 본질은 조선사람들을 일본사람들과 꼭같은 《1등국민》으로 만들어서 흰쌀밥을 먹이려는것이 아니고 아침마다 《궁성요배》나 《신사참배》를 하며 《황국신민서사》를 외우는 일본국민의 종복으로 만들려는데 있었다.


언어를 빼앗는것은 몇몇 사람들의 불행이나 희생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였다. 그것은 온 겨레의 운명과 관련되는 문제로서 2천 300만동포를 한줄에 세워놓고 그들모두를 한칼로 쳐없애는것과 같은 대살륙이나 다름없었다.


식민주의자들의 첫째가는 특성이 야만성과 탐욕성, 철면피성에 있다는것은 하나의 상식이다. 국적과 피부색에 관계없이 남의 나라를 강탈한자들은 모두가 포악하고 교활하고 후안무치한놈들이였다. 그러나 나는 다른 나라의 말과 글을 빼앗는자들, 다른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저들의 신사앞에 절을 하게 하는 그토록 야비하고 뻔뻔스러운 식민주의자들은 아직 한번도 보지 못하였다.


조선민족의 운명이 과연 어느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무장소조원이 안고온 소식은 나의 피를 끓게 하였다.

(조국으로 하루빨리 진군해서 그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 조선민족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것, 조선민족은 자기의 말과 글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는것, 조선민족은 《내선일체》와 《동조동근》을 인정하지 않으며 《황민화》를 거부한다는것, 조선민족은 일본이 망할 때까지 손에서 무장을 놓지 않고 항쟁을 계속한다는것을 보여주자. 그렇게 하는것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것이다.)


1937년 5월초였다. 나는 놀라운 국내소식을 또하나 받아안게 되였다. 조선공산주의운동의 거물 리재유가 체포되였다는 《매일신보》 특간호의 상보를 접하였던것이다. 그것은 옹근 4면짜리의 대대적인 특집이였다. 거기에는 경찰에 여섯번이나 체포되였다가 여섯번 다 탈출한바 있는 리재유가 일곱번째로 체포된데 대한 경위와 그에 대한 소개가 지나치다고 할만치 상세하게 적혀있었다. 신문은 리재유를 《조선공산운동괴멸의 최후진》이니, 공산주의운동 《20년력사 최후거물》이니 하면서 그의 체포로써 조선공산주의운동은 영영 끝나게 되였다고 요란하게 떠들고있었다.


부르죠아정치일반이 워낙 지능적인 속임수로 되여있지만 그 시녀노릇을 하는 관보의 활자뒤에는 항상 지배계급의 검은 속심이 숨어있는 법이다. 《매일신보》의 그 호외도 례외가 아니였다. 워낙 잡도리부터가 총독부의 골방에 깊숙이 들어앉아 반공을 업으로 삼는 로회한 책사들이 야심적으로 꾸며낸 가면극이라는것이 대번에 알리였다.


리재유가 이름난 공산주의자인것만은 사실이다. 그는 삼수사람이였다. 일본에 건너가서 고학을 하다가 로동운동에 참가하였으며 귀국후에는 서울을 활동무대로 하여 공산주의운동을 하였는데 주로 태평양로조조직들을 맡아가지고 함흥일대에까지 드나들면서 각 지방의 로조, 농조 운동을 지도하였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담력도 있고 림기응변하는 기지와 변장술도 있어 붙잡힐 때마다 매번 탈출에 성공하였다고 한다. 신문은 이이상의 탈출이 전혀 불가능하게 되였으니 조선공산주의운동은 최종적으로 막을 내린셈이라고 단언하였다.

공산주의운동에 대한 일제의 집요한 탄압과 모략선전은 기실 많은 사람들의 머리를 혼란시키고있었다. 그 점에서 적들은 대단한 효과를 거두고있는셈이였다. 여러차례에 걸친 대검거로 공산당이 무너지고 얼마 남지않았던 개별적공산주의자들마저 리재유의 체포로 활동의 종말을 고했다고 하니 그 실망과 좌절감은 이루 말할수 없을 정도였다. 공산주의운동을 학문으로 연구하던 사람들속에도 허무감에 잠겨 맥을 놓는 경향이 적지 않았다.


적들은 과녁을 면바로 고른셈이였다. 그 과녁이란 조선민족을 정신적으로 무장해제시키자는것이였다. 그 목적을 이룩하는데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그들은 어떤 폭언이나 감언리설도 아끼지 않았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한쪽으로는 총을 내대고 《복종하겠느냐, 아니면 죽겠느냐?》하고 을러메는가 하면 다른쪽으로는 《자, 〈동조동근〉에 〈내선일체〉이니 신사참배도 같이하자.》, 《만주에는 〈왕도락토〉에 〈오족협화〉의 꽃이 피여있고 일본에는 사꾸라꽃속에 복지가 기다리니 만주나 일본에 가서 부자가 되라.》, 《남쪽에서는 목화를 심고 북쪽에서는 양을 치며 대일본의 신민이 되여 온 아세아를 주물러보라.》 하고 입에 침발린 소리로 구슬리기도 하였다.


조선민족이 당하고있는 가장 무서운 비극적사태는 정신이 무너진다는 바로 그 점에 있었다. 일제의 독재기관으로부터 류행가를 불어넣은 축음기판대기에 이르는 모든것들이 조선을 없애고 조선민족의 넋을 뿌리채 뽑아버리는데 집중되고있었다. 조선은 사람이 살지 못할 생지옥으로 변하였다. 동방조선에 칠칠야밤과 같은 암흑이 끝없이 계속되였다. 그밤은 날이 가고 달이 가도 지샐줄 몰랐다.


(이 지리한 예속의 밤, 굴욕의 밤을 끝장내지 못한다면 우리 어찌 감히 자기들을 조선의 장부라고 할수 있으랴. 어서 빨리 조국으로 나가자. 조국에 나가서 기나긴 악몽속에서 시달리는 민족의 넋에 생명을 불어넣자.)

이것이 조국진군을 준비하던 나날 우리 지휘관들과 대원들의 머리를 지배한 생각이였다.


천상수와 소덕수를 거쳐 5월중순경 지양개등판에 이른 우리는 거기서 국내진공을 위한 대오정비와 여러가지 선동사업을 벌리였다. 한편 국내정세를 보다 상세히 료해하기 위해서 박달을 불러다가 만나보았다.


박달은 놀라운 소식을 알려주었다. 혜산, 갑산 방면으로부터 적들의 국경경비무력이 대대적으로 북상하여 최현부대가 진출하고있는 무산쪽으로 넘어가고있다는것이였다. 그 정보가 정확한것이라면 최현부대는 포위를 면할수 없었다. 물론 우리가 이런 정황을 전혀 예견하지 못한것은 아니였지만 적들이 혁명군의 움직임에 그처럼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것은 뜻밖이였다.


서강회의후 최현이 부대를 이끌고 작전지역으로 떠나간것은 1937년 4월경이였다. 나는 그가 떠날 때 안도에 가면 리도선의 부대를 주의하라고 말해주었다. 그 부대는 만주지방의 《토벌대》들가운데서도 가장 악질적인 부대였다.

리도선은 안도에 와서 처음에는 소사하의 대지주 쌍병준의 가병대장으로 있었다. 그때 그가 부화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소작인들을 총칼로 악착하게 다스린다는 소리를 나도 많이 들었다. 유격대의 습격에 몇번 혼쌀이 난 리도선은 가난뱅이는 다 공산당편이라고 하면서 걸핏하면 부락들을 기습해서 불을 지르거나 생사람의 목을 치군하였다. 주민들속에서는 리도선에 대한 원성이 그칠 날이 없었다.


수급졸개로서의 리도선의 야수같은 기질을 잘 알게 된 일제는 그를 간도지구 경비사령부산하 안도《토벌대》 대장으로 임명하였다. 그 부대는 혁명에 앙심을 품은 자산계급출신의 망나니들로 꾸려져있었다. 리도선의 특기란 한번 걸려든 대상은 살려서 돌려보내지 않는것이였다. 그는 적아가 다 공인하는 명사수였다.


최현은 험한 산발을 타고 북상하여 거듭되는 싸움을 치르면서 무송오지에 적들을 깊숙이 끌어들인 다음 갑자기 방향을 꺾어 안도지구에 진출하였다. 그의 부대는 금창에 도착하자 난관에 봉착하였다. 부대가 건너가야 할 강물이 범람했던것이다. 일부 대원들이 가교를 건설하는동안 부대는 휴식하게 되였다. 대원들이 방금 잠에 곯아떨어졌을 때 리도선부대가 벼락같이 달려들어 불질을 시작하였다. 금전판에 있는 버럭더미들을 사이에 두고 쌍방간에는 치렬한 화력전이 벌어지게 되였다.


이 총격전에서 주수동이 그만 전사하였다. 처음에는 적들이 주동에 서서 일방적인 공격을 하였다. 그러나 주수동을 대신하여 부대의 지휘를 담당한 최현은 불리한 정황을 재빨리 수습하고 역습으로 적들을 호되게 답새기였다. 적아간에 총격전이 한창 벌어지고있을 때 금전판에 있던 인부들이 리도선이 도망친다고 소리질렀다. 그 금전군들이 아마 리도선의 용모를 잘 알고있었던것 같다. 유격대원들은 도주하는 리도선을 뒤쫓아가서 기관총몰사격으로 즉사시키였다. 그날 최현부대는 도망치는 적들을 15리까지 따라가서 족쳐대였다.


금창전투는 인민들의 원한을 통쾌하게 풀어준 유명한 전투였다. 최현이 리도선을 죽이고 《토벌대》를 전멸시킨 소식은 그 당시의 신문들에 크게 소개되였다. 최현은 원래 이름난 싸움군이였다. 최현부대의 무산지구 진출과정에는 가슴아픈 희생도 없지 않았다. 그 과정에 그들은 《4사의 꽃》이라고 불리우던 리경희를 잃었다.


그가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리경희네 집안은 온 일가가 혁명사업을 하다가 희생된 애국정신이 강한 집안이였다. 그는 어린 나이에 오빠들과 삼촌들을 잃고 할머니마저 잃었다. 그의 아버지는 유격대원이였다. 리경희도 원한을 품고 쓰러진 혈육들의 복수를 위해 무장대오에 들어섰다. 처음에 지휘관들은 그를 부대에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나이도 나이였지만 그마저 총을 잡는다면 리씨가문을 지킬 사람이 한명도 남지 않게 되겠기때문이였다. 그런데 리경희의 떼를 당해낼수가 없었다. 그래서 참군을 허락하고말았다.


전우들이 《4사의 꽃》이라고 하면서 리경희를 친딸이나 친동생처럼 애지중지하게 된것은 그의 용모가 특별히 아름답고 귀염성스러운데다가 일솜씨가 좋고 마음씨가 고운데있었다. 그의 특기인 춤과 노래는 부대의 자랑이였다. 리경희가 유격대에 입대하였을 때 지휘관은 그에게 권총을 주었다. 체소하고 연약한 이 처녀에게는 보총이 적합치 않다고 생각하였기때문이였다. 그러나 리경희는 권총으로 싸우는것이 성차지 않아서 마상대총을 메고 다니였다. 그가 마상대를 메고 춤을 출 때면 전우들이 손벽을 치며 늘 재청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리경희는 부대의 분위기를 조절할줄 아는 뛰여난 솜씨를 가지고있었다. 가령 어떤 대원이 성을 내거나 울적한 기분에 잠겨있으면 그 대원에게 허물없이 감겨들어 웃겨놓으면서 귀엽게 어리광을 부리였다. 그가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기만 하면 지쳐서 쓰러졌던 대원들도 기운을 내여 자리에서 일어나군하였다. 리경희는 바느질도 잘하고 수놓이도 잘하였다. 그가 만든 담배쌈지는 누구에게나 귀물이고 자랑거리였다. 깔깔한 풀도 경희의 손에만 들어가면 맛있는 료리가 된다고 하였다.


리경희는 《토벌대》와 맞다들어 싸울 때마다 일부러 전우들의 곁에서 외따로 떨어진곳에 좌지를 정하고 조준사격을 해가면서 자기가 쏘아죽이는 적을 한명한명 세군하였다. 어느 한 전투때에는 적을 연거퍼 6명이나 쏴눕히였다. 그가 총알을 갈아재우는 사이에 두세명의 적들이 도망쳤다. 리경희는 그놈들을 놓친것이 분해서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보천보전투가 끝난 다음 3개 방면에서 활동하던 부대들이 지양개에서 만나 군민련환대회를 할 때 최현은 나에게 리경희의 최후에 대한 소식을 전하면서 눈물로 수건을 적시였다. 이 범같은 사나이의 눈에서 소리없이 떨어지는 눈물을 보았을 때 나는 리경희의 죽음이 우리모두에게 있어서 얼마나 비통한 손실로 되는가를 가슴저리게 느끼였다.


최현이 치명상을 당한 리경희를 안아일으켰을 때 그의 손가락짬으로는 피가 걷잡을수 없이 흘러내렸다고 한다.

《…여기가 조국땅이라지요? 그래도 조국땅을 밟아보았으니 다행입니다. 모두들 내 몫까지 잘 싸워주십시오.》

이것이 최현의 품에서 전사할 때 그가 전우들에게 남긴 마지막말이였다.


그후 리경희의 아버지도 회령쪽에 국내공작을 나갔다가 적들에게 학살당하였다. 아버지와 딸은 이렇게 조국땅에 묻히였다. 해방후 나의 부탁을 받고 그와 한부대에서 싸우던 전우들이 무산지구에 가서 리경희의 유골을 찾으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전사한 지점이 아리숭한데다가 창황중에 평토장을 한 무덤이여서 도무지 찾을 길이 없었다.

우리는 이처럼 전우들의 피로 물든 징검돌들을 하나하나 밟으면서 조국진군을 하였다.


최현부대는 무산지구의 붉은바위일대에 진출하여 적을 타격한 다음 만주지경으로 일단 종적을 감추었다가 다시 백두산동남쪽에 있는 일본인목재소의 상흥경수리 7토장을 들이치고 베개봉쪽으로 번개같이 이동하였다. 혜산, 호인,신파 등지에 있는 특설경비대와 군경들은 도로를 따라 베개봉쪽으로 급속히 진출하였다. 최현은 통신원을 보내여 우리에게 부대가 처한 형편을 간단히 보고해왔다. 그러면서도 그는 구원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통신원을 보낸것은 적의 움직임이 여사여사하니 작전상 참고하라는것이지 도와달라는것은 아니였다. 최현은 원래 곤난이라는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였다.


최현과 같은 로련한 싸움군이 최선을 다하여 난국을 타개하리라는것은 의심할바 없었다. 그러나 전국의 흐름을 락관만 하고있을수는 없었다. 이 돌발적인 사태는 우리의 작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였다. 당시의 정황은 우리로 하여금 전면포위의 위기에 처한 최현부대를 구출하는 일과 국내진공작전을 다같이 밀고나갈수 있는 묘술을 찾지 않을수 없게 하였다.

나는 지휘관들을 모여놓고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하였다.

…4사가 포위에 들었다. 최현은 자체로 빠져나올수 있다고 하는데 그 결심을 믿고 우리가 가만있어야겠는가. 만일 그 결심이 미덥지 못한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국내진공을 뒤로 미루고 최현부대부터 구출해야 하는가, 아니면 국내진공을 먼저 한 다음 련이어 구출작전을 펼쳐야 하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 주력부대력량을 둘로 갈라서 두개의 작전을 동시에 수행하는것이 옳겠는가. 최현부대를 포위에서 구출하자면 국내의 어느 지점을 치는것이 리상적이겠는가.…


모두가 긴장하여 나를 주시하였다. 어느것이나 다 절박하고 심각한 문제여서 론쟁은 처음부터 열을 띠였다. 지휘관들이 내놓은 의견을 종합하면 크게 두부류로 나눌수 있었다.

한부류의 주장은 북쪽으로 몰려간 적들을 배후에서 타격하는 방법으로 먼저 최현부대부터 구출하고 그후에 형편을 봐가다가 적당한 때에 국내진공을 단행하자는것이였다. 이 의견은 여러 사람들의 반박을 받았다. 주력부대가 최현부대를 구출하는 작전부터 벌린다면 물론 성공할수 있겠지만 우리의 총소리를 듣고 북부조선과 서간도일대의 적들이 기동로를 따라 물밀듯이 쓸어올수 있기때문에 오히려 주력부대가 적의 포위에 빠질수 있다는것이였다.


다른 한부류의 주장은 최현부대는 전투력이 강한 부대이기때문에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체의 힘으로 포위에서 빠져나올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있는것만큼 예정대로 한시바삐 국경1선인 혜산을 치자는것이였다. 그렇게 되면 적들도 당황하여 최현부대에 대한 포위를 풀고 총소리가 나는쪽으로 되돌아설수 있다는것이였다.


그러나 이 방안도 역시 허점이 있다는 리유로 하여 부정을 당하였다. 그 허점이란 최현부대가 전투력이 강한 부대인것은 사실이나 거듭되는 전투와 행군때문에 포위를 돌파할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을수도 있다는것, 그리고 주력부대가 혜산을 친다고 하여 거기에서 멀리 떨어진 무산지구로 북상하고있는 적들이 과연 최현부대에 대한 포위환을 풀고 돌아서겠는가 하는것이였다.


나는 그때 두가지 작전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방안을 내놓았다.

…우리는 반드시 국내에로 진공해야 한다. 이 작전에는 변동이나 취소라는것이 있을수 없다. 또한 우리는 시급히 최현부대를 구원해내야 한다. 국내진공을 중시한다고 하여 혁명동지들을 사지판에 내버려두는 일은 있을수 없다. 그렇다면 출로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국내의 어느 한 지점을 때려 두가지 목적을 단꺼번에 다 달성하는것이다.…


지휘관들은 《어느 한 지점》이라는 말이 나오자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 지점이란 어느 고장인가고 리동학이 일동을 대표해서 물었다.

나는 지도를 짚어가며 설명을 계속하였다.

…우리는 그 지점을 선택하는데서 다음과 같은 측면을 고려하여야 한다. 그것은 적의 력량이 집결되여있는 베개봉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있는 고장이여서는 안된다는것이다. 반대로 턱밑에 바싹 붙어있는 고장이여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국내진공이 두가지 효과를 다 낼수 있다. 베개봉쪽에서 제일 가까운 요충지는 혜산과의 중간지점에 있는 보천보이다. 보천보를 때려야 베개봉쪽에 집중되여있는 적들이 우리 주력부대와 최현부대에 역포위될수 있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혀 포위추격전을 포기하고 이미 진출했던 계선에서 철수할수 있다. 보천보를 치면 혜산을 치는것 못지 않게 국내에 강한 충격을 줄수 있다. 그러므로 국내진공의 목적 역시 원만하게 달성할수 있다. 문제해결의 열쇠는 보천보를 치는데 있다.…

내가 이런 방안을 발표하자 지휘관들은 고개를 끄덕거리였다.


나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였다.

…보천보를 치자면 여러가지로 타산을 해보아야 한다. 첫째로, 수백명에 달하는 부대가 적의 조밀한 국경감시망을 번개처럼 뚫고들어가 적을 치고 번개처럼 빠져나오는 전격전을 할수 있는가? 둘째로, 이 전투는 단순한 화력전이 아니라 국내인민들에게 승리의 신심을 주는것을 주요한 과제로 삼고있는것만큼 화력전을 하면서 강력하고 신속한 정치선동을 동시에 해야 하는데 이런 신속한 선전선동이 가능한가? 셋째로, 우리는 이번 기회에 혁명군무력과 지하조직이 하나의 목표를 놓고 련합작전을 하는 모범을 창조하려고 하는데 그것을 실행할수 있겠는가?

그 세가지가 다 헐치 않은 전제들이여서인지 지휘관들은 또다시 팽팽한 분위기에 휩싸이였다.


그러나 그때 권영벽이 무게있는 목소리로 정적을 깨뜨리였다.

《사령관동지, 해낼수 있습니다. 명령만 내리십시오!》

《해낼만한 담보가 있소?》

나는 권영벽의 대답이 달리는 될수 없으리라는것을 알면서도 다우쳐 물었다.

《있습니다. 보천보야 조국이 아닙니까!》

나는 그 대답을 귀로 들었다기보다는 자신이 웨친것만 같았다. 어쩌면 권영벽의 심정이 내 심정과 그렇게도 같은가. 아마 다른 사람들도 마음속으로는 그런 대답을 했을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실로 모두의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치고있던 대답이였다.


타향의 이슬비와 설한풍 속에서도 련전련승하여온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어찌 자기에게 생명을 주고 혼을 준 사랑하는 조국땅에서 승리하지 못하겠는가.

짧은 모임이였지만 많은것들이 론의되였다. 그러나 그 세부들은 세월의 년륜속에 묻혀버리였다. 다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것은 《보천보야 조국이 아닙니까!》하고 자신있게 웨치던 권영벽의 음성뿐이다. 국내진공이라는 력사적인 출정을 앞둔 그 순간에도 우리의 가슴속에는 조국이라는 크나큰 존재를 강탈당한 망국노의 울분이 자리잡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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