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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3-3.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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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485회 작성일 15-03-17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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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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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ㅌ. ㄷ》성원들과 비밀독서조성원들의 활동에 의하여 맑스ㅡ레닌주의사상이 빠른 속도로 전파되여가자 청년학생들의 사상의식에서는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선진사상은 그들로 하여금 점차 력사와 민족앞에 지닌 자기들의 임무를 깊이 자각하게 하였다.


우리는 청년학생들의 의식화를 위한 사업을 계속하면서 그들을 여러가지 조직에 묶어세워나갔다. 조직을 통해서만 맑스ㅡ레닌주의사상을 더 널리 보급할수 있었고 핵심력량도 더 빨리 키워낼수 있었다.


나의 혁명활동은 청년학생운동으로부터 시작되였다. 우리가 혁명활동을 청년학생운동으로부터 시작하고 거기에 그처럼 큰 의의를 부여한것은 내가 학생의 몸이라는데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로동자와 농민을 비롯한 광범한 군중을 의식화하고 조직화하는데서 그 운동이 노는 역할과 위치가 매우 중요하였기때문이였다.


맑스ㅡ레닌주의리론에서는 청년학생운동을 교량자의 역할에 비기고있다. 다시말하여 청년학생운동이 선진사상을 보급하고 대중을 계몽각성시켜 혁명운동에로 추동하고 안내하는 교량자적역할을 수행한다고 규정하고있다. 우리도 그 리론을 긍정하였다.


혁명이 심화발전되는데 따라 청년학생들의 역할에 대한 우리의 견해와 립장에서는 질적인 변화가 생기였다. 우리는 혁명의 동력을 로동자, 농민의 본위로만 규정하던 종전의 낡은 시각에서 벗어나 청년학생들도 혁명투쟁에서 당당한 주력을 이룬다고 새롭게 규정하였다. 이것은 청년학생운동이 걸어온 로정이 립증해주고있다.


3.1인민봉기와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사건 등 해방전 우리 나라 반일애국투쟁의 봉우리를 이루는 주요한 력사적사변들에서 청년학생들은 항상 앞장에 서서 용감하게 싸웠다. 우리는 공산주의운동의 새 력사도 청년들의 힘으로 개척하였고 15성상의 항일무장투쟁도 청년학생들을 골간으로 하여 전개하였다. 오늘도 우리 혁명에서는 청년학생들이 돌격대의 역할을 수행하고있다.


남조선혁명에서도 주력은 청년학생들이라고 할수 있다. 4.19인민봉기의 산파도 청년학생들이였고 광주인민항쟁(1980년)의 주역도 청년학생들이였으며 《제5공화국》정권을 타도한 6월항쟁의 기수들도 청년학생들이였다.


중국사람들이 신민주주의운동의 시발점으로 보고있는 5.4운동의 최선봉에 청년학생들이 서있었다는것도 세상이 다 알고있는 사실이다.


인류가 아직 한번도 걸어보지 못한 전인미답의 길을 헤치며 새로운 경험을 부단히 창조해온 조선인민의 풍부하고도 장구한 투쟁력사는 청년학생들을 하나의 계층으로조차 보지 않던 종전의 리론이 우리 나라의 실정과는 잘 맞지 않는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1920년대 전반기까지의 우리 나라 청년학생운동에는 계급적립장과 반제적립장이 확고하지 못하고 대중속에 깊이 침투하지 못하는 부족점이 있었다. 운동의 상층은 대부분 인테리출신들이였으며 운동의 주력도 계몽활동에 편중되고있었다.


우리는 청년학생운동에서 이런 부족점이 재현되지 않도록 철저히 경계하면서 첫 걸음을 잘 떼려고 있는 노력을 다하였다.


그런데 막상 조직을 내오고 거기에 청년학생들을 망라시키자고 하니 복잡한 문제들에 부닥치게 되였다.

청년학생들을 조직화하는데서 우리에게 가장 큰 난관으로 제기되였던것은 민족주의자들과 종파분자들에 의하여 이미 만들어진 기성청년조직들이 있는 조건에서 어떤 방법과 형식으로 우리의 조직을 내오겠는가 하는 문제였다. 길림에는 길림청년회, 조선인려길학우회와 소년회를 비롯한 여러가지 기성조직들이 있었다.


그런 조직들이 없다면 빈터우에 집을 짓는 식으로 거침없이 새 조직들을 내오겠는데 여러 갈래의 기성단체들이 출현하여 청년학생들과의 사업을 하고있는 조건에서 그것을 전혀 무시할수도 없었다.

우리는 심중히 토의한 끝에 이미 있는 조직들가운데서 간판만 있고 활동하지 않는 조직은 무시하고 새롭게 꾸리며 미약하게나마 움직이는 조직은 그대로 두고 리용개편하는 방법을 취하기로 하였다.


우리가 길림에서 처음으로 내온 조직은 조선인길림소년회였다. 그때 길림에는 민족주의자들이 만들어놓은 소년회가 있었는데 그것은 이름뿐이고 길림시내의 조선소년들은 그런 조직이 있는지조차 모르고있었다. 우리는 1927년 4월에 손정도네 례배당에서 조선인길림소년회라는 합법적조직을 무었다.


나는 김원우, 박일파(박우천)와 함께 이 모임을 지도하였다. 모임에서는 조직부와 선전부, 문체부(문화체육부)와 같은 소년회의 부서들을 내오고 학교와 지역별로 되는 반도 조직하였다.

그때의 일에 대해서는 당시 소년회 선전부 책임자로 있던 길림녀자사범학교출신의 황귀헌이 잘 기억하고있을것이다.


소년회는 로동자, 농민, 중소상공인, 민족주의자의 자제들을 비롯하여 길림시안의 조선인소년들을 다 망라시키였다. 조선인길림소년회의 목적은 소년들을 반일사상으로 교양하여 그들을 혁명의 믿음직한 후비대로 키우는데 있었다.


조선인길림소년회는 강령에서 회원들이 새로운 선진사상을 학습하고 그것을 광범한 군중속에 널리 해설선전하는것을 중요한 과업으로 내세웠다.

그해 5월에 우리는 조선인려길학우회를 조선인류길학우회로 개편하였다.

조선인려길학우회는 망라된 인원도 적지 않았고 일정한 정도로 영향력도 있었다.

원래 조선인려길학우회는 길림에 와서 공부하는 조선인청년학생들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조직한 단체로서 민족주의자들의 후원을 받고있었다. 려길학우회의 고문들가운데는 손정도도 있었다.


우리가 려길학우회를 류길학우회로 개편하려고 하자 어떤 동무들은 조선인려길학우회가 민족주의자들이 주관하는 순수한 친목단체라는것을 문제시하면서 그것을 밀어치워버리자고 하였다. 본바탕이 민족주의이면 거기에 아무리 이질적인것이 량적으로 많이 첨가된다고 하여도 그것은 결국 민족주의화된다는것이였다. 그 주장의 본질은 낡은 사조로서의 민족주의를 타도하자는데 있었다.


당시는 대중을 끄는데서 경쟁이 심했다.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이 서로 대치되여 승벽내기로 군중을 끄는가 하면 같은 공산주의운동내부에서도 파벌별로 저마끔씩 대중을 끌어당기느라고 야단법석을 하였다. 오늘 서울파가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의 지도부를 장악하면 래일은 화요파가 그에 대항하여 한양청년회라는것을 만들어내고 모레 화요파가 조선로농총동맹을 만들어내면 이번에는 반대로 서울파가 거기에 맞서서 경성로농회라는것을 만들어내는것이 하나의 풍으로 되고있었다. 종파분자들은 심지어 다른 파들을 견제하기 위한 테로단도 경쟁적으로 만들어냈다.

그러나 우리 새 세대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전철을 밟을수가 없었다.


우리가 만일 종파분자들이 하는 식으로 조선인려길학우회를 무시하고 길림에 새로운 청년조직을 또 내온다면 민족주의자들과의 관계에서 복잡한 문제가 생길수 있었으며 학생청년들의 대렬을 분렬시킬수 있었다. 그렇게 하는것은 어느 모로 보나 백해무익한 일이였다.


우리는 조선인려길학우회속에 들어가 본래의 합법성을 계속 유지하면서 점차 그 조직을 순수한 친목단체로부터 혁명적인 조직으로 개편하자고 하였다. 공산주의자인 내가 명예회장으로 되였지만 표면상으로는 민족주의자들을 끼고하는 일이였기때문에 중국군벌당국의 주의도 덜 끌었다. 나는 조선인려길학우회를 지도하면서 그것을 조선인류길학우회로 개편하였다.


조선인류길학우회는 겉으로는 조선인청년학생들의 친목을 도모하는 단체라고 표방하였지만 실지로는 《ㅌ. ㄷ》의 리념을 실현하는 혁명적인 학생청년조직으로 활동하였다. 조선인려길학우회를 조선인류길학우회로 개칭하고 그것을 순수한 친목단체로부터 혁명적인 조직으로 개편한것은 우리가 청년학생운동을 하면서 얻은 하나의 큰 경험이였다.


우리가 만든 조직들이 움직이게 되면서부터 길림시안의 풍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청소년학생들의 일과생활부터 몰라보게 변하였다. 소년회와 류길학우회에 망라된 청소년들은 아침마다 지구별로 조기회를 하였다. 일요일이 오면 길림시내 모든 회원들이 대렬을 지어 북산에도 가고 가창행진도 하였으며 북산밑에 있는 운동장에서 체육경기도 하였다.

우리는 청소년학생들과의 사업을 하는데서 그들의 취미와 의식수준에 맞게 여러가지 형식과 방법을 활용하였다.


소년회에 망라된 학생들가운데는 기독교신자들의 자녀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부모들의 종교적영향을 어떻게나 많이 받았는지 세상에 정말 《하느님》이 있다고까지 생각하였다. 이런 학생들에게는 아무리 《하느님》이 없고 종교를 믿는것이 어리석은짓이라고 말해주어도 소용이 없었다.


어느날 나는 우리의 영향을 받고있던 조선인소학교의 한 녀선생에게 부탁하여 종교를 믿는 학생들을 데리고 례배를 보러 가게 하였다.

그 녀선생은 나의 말대로 학생들을 데리고 례배당에 가서 온종일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아버지시여, 배가 고픈데 우리에게 떡을 주시고 빵을 주십시오.》하고 기도를 드리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떡이나 빵이 차례질리는 만무하고 배만 여전히 쪼록쪼록 고팠다. 이번에는 녀선생이 학생들을 데리고 가을을 하고난 밀밭에 가서 이삭을 줏도록 하였다. 선생은 밭에 학생들을 데리고가서 굉장히 많은 이삭을 주어왔다. 그 이삭을 털어서 빵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학생들은 그 빵을 먹으면서 《하느님》에게 기도를 드리는것보다는 실지 로동을 통해서 먹을것을 얻는것이 낫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였다.

단순한 사실같지만 청소년들의 사상의식을 개조하고 낡은 인습을 청산하는데서는 이것도 하나의 방법이였다.


우리가 청소년들이 례배보러 다니는것을 경계하고 그들이 미신의 포로가 되지 않도록 부단히 교양한것은 결코 종교 그자체를 타도하자는데 있지 않았다. 청소년들이 미신에 빠지고 예수의 교리를 절대화하게 되면 혁명에 아무 쓸모도 없는 나약하고 무기력한 존재로 될수 있기때문에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자는데 목적이 있었다. 신자라고 하여 혁명을 못한다는 법은 없지만 세계에 대한 과학적인 리해가 부족한 청소년들의 경우에는 종교가 내포하고있는 무저항주의적인 요소들로부터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수 있었다.


길림에 가보니 어떤 소년회원들은 거리를 걸어다니면서도 찬송가를 부르고있었다. 그만큼 청소년들에게 미치는 종교적영향력이 강하였다. 그런데 찬송가나 불러가지고서는 적의 화구앞으로 돌진할수 없었다. 우리에게는 찬송가를 부르는 신도들보다도 결사전가를 부르는 투사들이 더 필요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청소년들에게 혁명적인 노래들을 대대적으로 보급하였다. 찬송가를 부르면서 거리를 오가던 소년회원들이 얼마후부터는 《소년애국가》와 《조선인길림소년회가》를 부르며 버젓이 시가행진을 하였다.


조선인길림소년회와 조선인류길학우회가 나온 다음 우리가 한 활동가운데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것은 그해 여름방학에 조직한 국어강습이다. 그 강습에는 중국인소학교에 다니는 조선소년들을 비롯하여 우리 나라 글을 모르는 아이들을 다 참가시키였다. 그 소년들의 대다수는 출생지가 만주였다. 만주에서 태여난 소년들은 조선말보다 중국말을 더 잘하였다.


우리는 그때부터 《조선사람은 조선을 알아야 한다.》는 구호를 내들었다.

계영춘, 김원우, 박소심이 엇바꾸어가며 강의에 출연하였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우리에게는 교원이 따로 없었다. 조직의 모든 핵심들이 다 교원이였고 강사였다.

20일동안 강습을 하고나니 여기에 참가했던 소년들이 누구나 다 어린이잡지를 볼수 있게 되였다.


소년회와 학우회는 청소년들의 취미와 기호에 맞게 룡담산원족과 강남공원야유회도 조직하고 문화유적들에 대한 참관과 답사도 조직하였으며 강연회, 토론회, 학습회, 웅변대회, 독서발표회, 노래보급, 연예공연과 같은 과외활동도 많이 조직하였다.


우리는 그때 비밀활동장소로서 강남공원과 북산을 많이 리용하였다. 강남공원은 릉라도와 같이 아름답게 생긴 송화강상의 섬이였다. 길림의 자본가들은 이곳에 나무를 많이 심어 섬을 식물원과 같이 수려하게 꾸리고 입장료까지 받아먹으면서 돈벌이를 하였다. 공지에다가는 락화생 같은것도 재배하였다. 이 공원에서 우리가 야유회의 간판을 가진 비밀회의를 많이 하였다.


강남공원보다 더 리상적인 밀회장소는 북산이였다. 초목이 무성한 여름철을 위주로 리용하던 강남공원에 비하여 북산은 계절의 구애를 받지 않고 사시장철 자유롭게 리용할수 있었다. 길림에서 사람들이 제일 많이 모여드는 유원지가 바로 북산이였다. 그러므로 북산과 그 주변에는 봉사망도 시적으로 제일 조밀하게 배치되여있었다. 북산으로 들어가는 거리 량옆에는 음식점, 빙탕막, 완구상, 담배상, 잡화상, 차집, 오락장 등이 즐비하게 늘어서있었고 서양상품판매를 전업으로 하는 큰 경광상점도 있었다.


북산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것은 경치가 좋은데도 있지만 거기에 약왕묘와 같은 명승고적이 많았기때문이였다. 약왕묘라는것은 약신의 제사를 지내는 절당이라는 뜻이다.

길림에서는 매해 6월 4일부터 6일까지의 사흘간을 묘회기간으로 정하고 성정부의 주관하에 북산에서 약신령의 탄생을 축하하는 관제행사를 벌리였다. 이 행사에는 일반서민들은 물론, 관직을 가진 사람들까지도 다 참가하였다. 묘회기간의 3일은 휴가로 선포되였다.


경찰당국은 이 행사가 벌어질 때마다 북산아래 대도로 동쪽에 림시파출소를 내오고 전화를 가설하였으며 산우에는 경찰분반까지 배치하여 상공계의 질서를 유지하는가 하면 약왕묘, 관제묘, 랑랑묘에 피우는 향불이 산불로 번져가지 않도록 부단히 경계하고 단속하였다. 3일간의 행사기간에는 마차부들과 인력거군들까지 평상시의 10배나 되는 돈을 벌었다.


장사아치들이 3일간의 묘회를 돈벌이의 호경기로 삼았다면 이 도시의 유지들과 선각자들은 성립통속강습소의 간판을 가지고 군중을 계몽시키는 사회교육의 연단으로 삼았다. 각이한 직업에 종사하는 계몽활동가들이 도처에 나타나 주먹을 흔들며 애국, 도덕, 법수호, 미감, 실업, 체육, 위생 등의 주제를 가지고 열변을 토하였는데 북산이 아니고서는 어데서도 볼수 없는 참으로 희한한 광경이였다.


이런 복잡한 틈바구니에서 우리도 군중을 찾아다니며 선진사상을 먹이고 때에 따라서는 비밀회합도 하였다. 약왕묘 지하실은 우리의 전용회의실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 절의 중은 우리가 쟁취한 사람이였다.


나는 길림에서 학교를 다닐 때 강연도 많이 하였다. 어떤 때에는 민족주의자들이 조직한 토론회에 가서도 연설을 하였다. 오동진, 리탁을 비롯한 정의부의 지도자들은 국치일(8월 29일), 3월 1일, 단군탄생일(10월 3일) 등 주요기념일이 있을 때마다 시내 교포들과 청소년학생들을 모여놓고 강연회와 토론회를 자주 조직하였다.


류길학우회의 성원들속에서는 리준의 방법이 옳은가, 안중근의 방법이 옳은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론쟁을 많이 하였다. 아무리 론쟁을 해도 결판이 나지 않으므로 우리는 려길학우회가 류길학우회로 개편된 그해 여름에 손정도네 례배당에 시내에 있는 조선인학생들을 다 모아놓고 그 문제를 토론에 붙이기까지 하였다. 그 토론회를 계기로 길림의 청소년들이 크게 각성되였다. 그들은 테로로써도 안되겠다, 청원으로써는 더구나 안되겠다, 강대국들이 도와주리라고 생각하는것은 망상이다 하는것을 처음으로 깨닫고 조선을 독립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진로가 탐구되여야 하겠다는것을 일치하게 인정하였다.

그 당시 길림에서 진행된 토론회나 독서발표회에서는 조선혁명의 실천과 관련된 문제가 많이 론의되였다.


우리는 매해 5월 첫주 일요일을 《소년회날》로 정하고 이날에 길림시내의 조선인청소년들과 그 부형들, 유지들과 독립운동자들이 참가하는 운동회도 열어 단결의 분위기를 마련하였다.

이렇게 청소년들을 단결시킨 다음 그들을 대중을 교양하고 계몽시키는 사업에 참가시키였다. 열살안팎의 소년회원들까지도 방학이면 강동, 륙대문, 신안툰, 대황구와 같은 주변농촌마을에 나가 농민들의 일손을 도와주면서 그들을 계몽하였다. 파쟁이 우심하던 길림에서 우리가 백가지 숨을 쉬던 청소년들을 한가지 숨을 쉬게 만들어놓은것은 확실히 귀중한 소득이였고 체험이였다.


조선인길림소년회, 조선인류길학우회, 맑스ㅡ레닌주의독서조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길림일대에서는 《ㅌ. ㄷ》성원들을 핵심으로 하는 새 세대의 혁명력량이 급속히 자라나게 되였다.


길림에 주재하고있던 일본총령사까지도 이것을 간파하고 우리의 활동에 주의를 돌리게 되였다. 길림일대에서 새로운 혁명세력이 등장하여 그것이 빠른 속도로 확대되고있는데 질겁한 총령사는 자기 나라 외무대신에게 보낸 공식보고문에서 그 대오가 조직력이 강하다는것과 장차 무서운 존재로 나타나게 될 위험성이 있으니 특별한 주의를 요한다는것을 경고하였다.


일제는 내부가 통일되여있지 않고 사분오렬된 조선공산당의 종파집단이나 실행력과 군중에 대한 침투력이 미약한 민족주의세력보다도 파쟁과는 담을 쌓고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면서 인민대중속에 깊숙이 스며들어가 독자적인 방법으로 혁명의 길을 개척해가는 우리의 존재를 더 무서워하였다.


길림에 새로운 운동선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만주각지는 물론, 국내와 중국관내에까지 퍼져갔다. 이 소문은 주로 길림에 와서 공부하던 류학생들과 그들의 부형들에 의하여 멀리까지 전파되였다.


우리의 운동선에 합류하려고 국내와 일본, 연해주, 만주각지에서 수많은 청년들이 길림으로 모여들었다. 독립군에 관계했던 청년들, 일본에 가서 고학을 하던 청년들, 백파들과 싸우던 청년들,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광주폭동에 참가했던 청년들, 국민당반동들의 추격을 피해 여기저기 숨어다니던 청년들, 레닌의 숭배자, 손문의 숭배자, 루쏘의 숭배자 등 정견과 소속, 생활경로가 서로 다른 천태만상의 청년들이 우리를 찾아왔다. 김혁, 차광수, 김준, 채수항, 안붕 등도 그 시기에 우리를 찾아온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교양하여 《ㅌ. ㄷ》에 받아들이는 한편 조직을 시내 여러 학교들에 확대해나갔다.

그 과정에 우리는 《ㅌ. ㄷ》보다 더 큰 그릇을 가지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망라할수 있는 조직을 내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였으며 이런 필요성으로부터 1927년 8월 27일에 《ㅌ. ㄷ》를 반제청년동맹으로 개편하고 그 다음날 련이어 《ㅌ. ㄷ》의 정수분자들로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을 창립하였다. 반제청년동맹은 《ㅌ. ㄷ》의 구호를 그대로 내세우고 그 강령을 그대로 계승한 반제적이고 대중적인 비합법적청년조직이였다. 조직의 기본구성은 조선청년들이였으나 우리는 반제적립장이 강한 중국청년들도 거기에 가입시키였다.


반제청년동맹은 광범한 반일청년대중을 혁명대렬에 묶어세우며 반일투쟁의 대중적지반을 튼튼히 하는데서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이 조직은 문광중학교, 길림제1중학교, 길림제5중학교, 길림사범학교, 길림녀자중학교, 길림법정대학을 비롯하여 조선학생들이 있는 시내의 모든 학교들에 다 들어갔으며 강동, 신안툰을 비롯한 길림주변의 농촌지역과 류하현, 화전현, 흥경현일대에도 뿌리를 박았다. 조선청년들이 있는곳이면 다 퍼지였다.


반제청년동맹에서는 얼마후부터 등사판으로 선전용자료까지 밀어내뜨렸다.

우리는 그때 청년들을 더 많이 결속하기 위하여 토요일이면 공부가 끝나기 바쁘게 주변농촌으로 나가군 하였다. 토요일에 공부가 끝나서 떠나면 일을 보고 일요일 오후에 돌아올수 있었다.

우리가 《ㅌ. ㄷ》를 반제청년동맹으로 개편하고 련이어 공청을 창립한것은 반년 남짓한 사이 길림과 무송일대에서 청년학생들을 망라하는 합법, 비합법의 여러가지 대중조직들이 자라난 조건에서 그 모든 조직들을 통일적으로 지도하고 령솔할수 있는 조직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였기때문이다.


청년들의 새로운 전위조직을 내오는것은 당시 청년운동발전의 합법칙적요구였다.

당시까지는 내가 어느 조직에나 다 관련되여있었기때문에 나 개인의 활동을 통하여 조직들 호상간의 련계가 지어지군 하였다. 최창걸, 김원우, 계영춘과 같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개별적인 청년공산주의자의 자격으로 학생청년조직들에 관계하였을뿐이다.

새로운 전위조직을 내오는것은 당시의 정세로 보아도 절박한 요구로 제기되고있었다.


그때 일제는 만주침략을 서두르고있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조선인민에 대한 폭압을 강화하면서 만주에서 반동군벌과 결탁하여 조중인민의 반일기세를 말살하려고 혈안이 되여 날뛰였다.

조선청년들은 일제와 중국의 반동군벌들을 반대하여 도처에서 투쟁에 궐기하였다. 이런 실정은 청년학생들을 조직적으로 결속하고 통일적으로 장악하며 그들의 투쟁을 능숙하게 이끌어나갈수 있는 강력한 전위조직의 필요를 절실하게 제기하였다.


고루한 민족주의자들과 종파분자들의 령도권쟁탈로 하여 사분오렬의 길을 걷고있는 청년운동의 실태를 보아도 청년들을 분렬의 위기에서 구원하고 통일단결의 길로 건전하게 이끌어갈 전위조직의 탄생은 새 세대의 공산주의자들앞에 단 하루도 지체시킬수 없는 시대적과제로 부과되였다.

당시 중국 동북지방에는 비합법적청년조직으로서 만주조선공산주의청년단이 조직되였고 합법적청년조직으로서 남만주청년총동맹, 북만주청년총동맹, 동만주청년총동맹, 길림청년동맹, 길회청년동맹, 삼각주청년동맹 등 여러 단체들이 조직되여있었다.


각이한 계렬의 종파분자들이 이 청년단체들을 서로 끌어당기고 각이한 세력의 민족주의자들이 승벽내기로 이 단체들에 손을 뻗쳤기때문에 거기에 속해있는 사람들조차 자기의 소속단체가 공산주의단체인지, 민족주의단체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정도였다. 청년학생들은 이렇게 여러갈래로 갈라져있었다. 엠엘파나 화요파의 영향을 받는 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같은 민족주의자의 자식들인 경우에도 아버지가 무슨 단체에 속해있는가에 따라 정의부편, 참의부편, 신민부편으로 갈라지고 거기다가 또 보수파와 혁신파로까지 나뉘여져었었다. 견해가 다르고 소속단체가 다르다보니 그들은 늘 반목상태에 있었다.


분렬된 청년운동을 바로잡고 청년들을 민족주의세력과 종파분자들의 영향밑에서 떼여내여 참다운 공산주의혁명의 길로 이끌어나가자면 반드시 새로운 전위조직을 내와야 하였다.

털어놓고 말해서 그때 조선공산당이 제구실을 어지간히라도 하였더라면 우리까지 그런 걱정을 안해도 되였을것이다. 공산주의리념을 가진 당이 있고 많은 청년조직들이 있으면서도 그 덕을 하나도 보지 못하니 그보다 더 안타깝고 가슴아픈 일은 없었다.

조선혁명은 그자체의 특수성으로 하여 복잡한 문제들을 안고있었다. 많은 애로와 난관이 걸음마다 앞을 가로막아나섰다.


종파분자들과의 관계, 민족주의자들과의 관계, 중국인민들과의 관계, 국제당과의 관계에서 복잡한 문제들이 항시적으로 제기되였다. 게다가 만주에서 활동하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일제와 중국반동군벌들로부터 이중적인 위협을 받고있었다.

이런 조건에서 혁명을 능란하게 령도해나가자면 그것을 감당할만 한 세련된 령도핵심과 옳바른 지도리론이 있어야 하였다.


《ㅌ. ㄷ》의 리념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과정에 우수한 청년공산주의자들이 많이 자라났다. 파쟁도 모르고 사대주의도 모르고 집권욕도 모르며 낡은 때가 묻지 않은 새형의 청년공산주의자들로써 우리 나라 청년운동과 공산주의운동을 새롭게 개척해나갈수 있는 참다운 핵심이 육성되였다.


화전과 길림에서 새 사조를 탐구하고 《ㅌ. ㄷ》와 함께 투쟁의 길을 헤쳐나가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조선혁명의 실천과 관련된 일정한 지도리론도 가지게 되였다.

나는 이런 지도리론을 구현한 전위조직으로 공청을 내올것을 결심하고 그 강령과 규약을 만드는데 착수하였다.

강령에서는 공청이 조선혁명의 실천과 밀접히 결부된 리론에 의하여 지도되며 종파를 철저히 배격한다는것이 특별히 강조되였다.


우리는 이런 준비에 기초하여 1927년 8월 28일 북산공원의 약왕묘 지하실에서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을 결성하는 모임을 가지였다.

모임에는 최창걸, 김원우, 계영춘, 김혁, 차광수, 허률, 박소심, 박근원, 한영애를 비롯한 반제청년동맹 핵심들과 청년공산주의자들이 참가하였다.

내가 보고를 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미 소책자로 세상에 나갔다.


그날 우리는 《ㅌ. ㄷ》를 뭇던 때처럼 서로 어깨를 겯고 한덩어리가 되여 《인터나쇼날》의 노래를 불렀다.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은 반제청년동맹의 핵심들을 골간으로 하고 여러 혁명조직들에서 단련되고 검열된 청년들로 무어진 반제민족해방과 공산주의를 위하여 투쟁하는 비합법적인 청년조직이였다.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은 조선청년공산주의자들의 선봉대로서 각계각층 대중단체들을 조직지도하는 전위조직이였다.

우리는 공청을 창립한 다음 대렬의 순결성을 보장하고 대오의 조직사상적통일단결을 강화하는데 특별한 관심을 돌리였다. 이것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헌병, 경찰, 특무들의 준동과 반동분자들, 종파분자들의 해독행위가 심한 당시의 실정에서 조직을 보존할수 없었다.

공청은 동맹원들의 사상교양사업에 큰 의의를 부여하고 그들속에서 정치리론수준과 지도수준을 높이기 위한 학습에 많은 힘을 넣었다. 동맹원들속에서는 그때 《제국주의론》, 《식민지와 민족문제》, 《조선혁명의 당면투쟁과업》과 같은 문제에 대한 연구와 토론이 진지하게 진행되였다.


우리는 공청원들의 조직생활을 매우 중시하였다. 그 당시 공청에서는 한달에 한번씩 성격검토회를 가지고 공청원들의 생활을 총화하였다. 공청원들은 조직생활을 통해 단련되였으며 공청대오는 조직성과 규률성이 강한 집단으로 자라났다.

우리는 공청원들에게 아래조직들을 지도할데 대한 분공, 청년학생들과 군중을 계몽시킬데 대한 분공, 농촌을 혁명화할데 대한 분공 등 다양한 분공을 많이 주어 실천활동을 통하여 그들을 부단히 단련시키였다.


또한 혁명조직들에서 단련된 우수한 청년들로 공청대오를 부단히 늘여나갔다. 그리하여 공청은 짧은 기간에 길림시와 그 주변은 물론, 돈화, 흥경, 화전, 무송, 안도, 반석, 장춘, 할빈 등 만주의 넓은 지역과 북부조선일대를 비롯한 국내깊이에까지 확대되였다. 공청은 조선혁명에서 전위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당이 대중조직들에 대한 지도를 맡아하는것은 공산주의운동에서 하나의 상식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당이 제구실을 똑똑히 하지 못하였기때문에 공청이 당에서 해야 할 일까지 맡아가지고 자기산하의 청소년조직들에 대한 지도와 함께 로동자조직, 농민조직, 녀성조직들에 대한 지도까지 동시에 담당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우리는 공청을 창립한 다음 소문을 내지 않으면서 조용히 대중속으로 스며들어갔다. 설사 그 누가 인정해주지 않아도 혁명에 리롭고 인민에게 리로운 일을 하면 그만이다, 이것이 우리의 립장이고 배짱이였다. 남들이 령도권이 탐나서 자신들을 《정통파》라고 자랑하며 돌아다닐 때에 새 세대의 청년공산주의자들은 그런 허영의 세계와 담을 쌓고 혁명의 길을 한치한치 톺아나갔다.


공청은 청년들의 조직적결속을 촉진시키고 핵심을 육성하며 우리 혁명의 주체적력량을 강화하는데서 눈부신 역할을 하였다. 공청의 창립은 새형의 당조직을 내오기 위한 청년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힘있게 추동하였으며 그 위업을 앞당기는데서 중추적이고 근본적인 역할을 하였다. 1930년 여름에 결성된 첫 당조직의 성원들중 대다수는 공청을 통해 육성된 선봉적인 청년투사들이였다.


얼마전에 우리는 공청창립일인 8월 28일을 청년절로 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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