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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1-4. 타향에서 타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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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760회 작성일 15-03-05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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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타향에서 타향으로


아버지가 활동거점을 자주 옮기였기때문에 우리는 이사를 여러번 하여야 하였다.

내가 처음으로 고향을 떠난것은 다섯살 잡히던 해였다. 그해 봄에 우리는 봉화리로 이사를 갔다. 그때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한 일가친척들과 헤여지면서도 별로 서운한줄을 몰랐다. 아직 철이 덜 든 때여서 리별에 대한 생각보다도 새고장, 새것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컸다.

그러나 중강으로 들어가던 그해 가을에는 가슴이 아팠다.

우리가 북쪽 한끝으로 이사를 간다니 집안식구들도 못내 서운해하였다. 아버지가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지지해주고 뜻을 합쳐주던 할아버지도 아들, 손자들이 천리밖으로 가게 된다는 말을 듣고는 아연해하였다.

아버지는 리별을 앞두고 쓸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할아버지의 마음을 눅잦혀드리느라고 무던히 애를 썼다. 토방우에서 할아버지의 일손을 마지막으로 도와드리며 아버지가 하던 말씀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나는 요시찰인으로 등록되여 조선한복판에서는 꼼짝하지 못합니다. 내가 감옥을 나올 때 놈들은 나보고 운동을 그만두고 집에서 농사나 지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열번 다시 감옥에 끌려가는 한이 있더라도 싸워야 하겠습니다. 왜놈들은 독한놈들입니다. 독립만세나 불러서는 나라를 찾지 못합니다.》

우리가 중강으로 이사를 가던 날 큰삼촌은 아버지를 붙들고 먼데 가도 고향을 잊지 말고 오실 짬이 없으면 편지라도 자주 하라고 하면서 몹시 울었다.

아버지도 삼촌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오냐, 고향을 잊지 않으마. 내 이 고향을 어떻게 잊겠니. 우리가 세상을 잘못 만나서 이렇게 헤여지지만 어느때든지 독립이 되면 한데 모여 재미있게 살게 되겠지. 네가 어릴 때부터 내 뒤바라지를 하느라고 신삼이로 손이 다 부르텄는데 오늘은 또 너한테 큰 집안살림을 다 떠맡겨놓고 가자니 내 마음이 아프구나.》

《형님, 그런 말은 말라요. 아버지, 어머니는 내가 모실테니 아무쪼록 잘 싸워서 품었던 뜻을 꼭 이루시라요. 나는 여기서 그날만 기다리겠어요.》

그 작별모습을 보는 나도 북받치는 설음을 억제할수 없었다.

나라가 독립되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였지만 그런 날이 과연 언제이겠는지 그때로서는 막연하고 답답하기만 하였다. 사실 그때 고향을 하직한 아버지와 어머니는 다시 만경대에 와보지 못한채 낯설은 이국땅에 묻히였다.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헤여지기 싫어 자꾸 뒤를 돌아다보았다.

나서자란 산천을 떠나 먼 타향으로 자리를 옮기는것이 싫었지만 한가지만은 마음이 놓이였다. 중강에 가면 평양감옥에서 멀어지는것이 좋았다. 사실 아버지가 형기를 마치고 감옥에서 나온 후에도 나는 좀처럼 불안을 덜어버릴수 없었다. 왜놈들이 또 아버지를 감옥으로 붙잡아가지 않겠는가 하는 근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세상물정을 모르던 그 시절에 나는 서울이나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산간벽지에 가면 감옥도 없고 왜놈들의 꼴도 보지 않게 될것 같은 천진한 생각을 하였다.

평양에서 중강이 몇리인가고 물었더니 천리라고 하였다. 나는 천리라는 말에 마음을 푹 놓았다. 왜놈들이 그 먼데까지는 따라오지 못할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중강은 조선에서 제일 추운 고장이라고들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만 안전하다면 추위 같은것은 얼마든지 참을수 있었다.

이사짐은 밥그릇에 숟가락 몇개를 꾸려넣은 어머니의 보퉁이와 아버지가 메고 가는 전대짐 하나가 전부였다. 봉화리로 갈적에는 궤짝도 있고 책상도 있고 놋그릇, 질그릇 따위도 있었는데 이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아버지의 친구 한사람이 우리와 동행하였다.

우리는 신안주에서 기차를 내려 개천, 희천, 강계를 거쳐 중강까지 내내 걸어갔다. 강계쪽으로는 아직 철도가 놓이지 않았을 때였다.

아버지는 길에 나서자 내가 먼길을 꽤 걸어가내겠는지 모르겠다고 걱정하였다. 어머니도 내가 따라가지 못할가봐 조마조마해하는 눈치였다. 내 나이 여덟살밖에 안될 때였으니 부모에게 시름거리가 될만도 하였다.

나는 지나가는 달구지를 잠간씩 얻어타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의 로정을 걸어갔다. 내 일생에서는 처음으로 되는 커다란 육체적시련이였다.

강계에 도착한 우리는 남문밖에 있는 객주집에 들려 하루밤을 자고 다음날 길을 떠났다. 객주집주인은 강계지방의 지하조직성원들과 함께 우리 일행을 따뜻이 맞이해주었다. 강계에서 중강에 이르는 500리길은 령도 많고 무인지경도 많았다.

우리가 배낭령을 넘을 때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였다. 세살 나는 철주를 업고 보퉁이를 인데다가 초신이 해지고 발까지 부르터서 여간 애를 먹지 않았다.

중강에 도착한 나는 그만 실망하였다. 거기도 평양의 황금정이나 서문통처럼 일본사람들이 우글우글하였다. 조선사람들은 고향에서도 살수가 없어 이리저리 쫓겨다니는데 그자들은 이런 벽지에까지 쫓아와서 주인행세를 하고있었다.

아버지의 말씀이 조선사람들이 살고있는곳이면 어디에나 일본사람들이 다 배겨있다는것이였다. 알고보니 중강에는 경찰서도 있고 류치장도 있고 헌병대도 있었다.

나는 중강에 가보고서야 조선이라는 땅덩어리전체가 하나의 감옥이나 다름없다는것을 깨닫게 되였다.

일본사람들은 중강웃거리 절반이상의 땅에 저들의 이주민지대를 만들어놓았는데 거기에는 학교도 있고 상점도 있고 병원도 있었다.

중강사람들은 일제가 벌써 10년전부터 이고장에 촉수를 뻗치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을사보호조약》이후 우리 나라의 산림채벌권을 빼앗은 일제는 신의주에 영림창을 설치하고 중강에 지창을 둔 다음 저들의 벌목부들을 이고장에 이주시켰다. 말이 벌목부이지 사실은 군사훈련을 체계적으로 받은 《재향군인》들이 많이 끼여있어 유사시 어느때든지 출동할수 있는 반군사집단이나 같은것이였다. 중강에는 이런자들외에 여러명의 무장순경과 정규군수비대까지 있었다.

아버지가 우리를 데리고 중강으로 간 목적은 독립운동자들의 래왕이 빈번한 이고장에 병원을 차려놓고 그것을 거점으로 삼아 반일투쟁을 보다 적극적으로 벌리려는데 있었다. 의사의 신분을 가지면 적들의 감시로부터 자신을 쉽게 위장할수 있었고 사람들과의 접촉도 비교적 자유롭게 할수 있었다.

우리는 강기락이네 객주집에 자리를 잡았다.

강기락은 우리를 위해 려인숙의 방들중에서 제일 조용하고 깨끗한 방을 하나 따로 내주었다. 우리 아버지는 감옥에서 나와 간도에 다녀오다가 중강에 얼마동안 계시였는데 그때에도 우리 식구들이 들었던 그 방을 썼다고 한다.

강기락은 려인숙이라는 간판을 걸어놓고 치과와 사진업도 하면서 내막적으로는 중강에 틀고앉아 아버지가 국내에 계실 때는 조선국민회의 국외조직과 아버지를 련결시켜주고 아버지가 국외에 계실 때는 조선국민회의 국내조직과 아버지와의 련계를 지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아버지는 이 려인숙을 통하여 림강, 장백, 중강, 벽동, 창성, 초산 등 압록강류역일대에서 활동하는 국내외의 독립운동자들과 련계를 가지였다.

강기락은 중강치고 큰 유지여서 관청출입도 마음대로 하였다. 그가 관청을 통해 얻어낸 적측자료들은 아버지의 활동에 큰 도움을 주었다.

나는 아버지를 도와 망도 봐주고 려인숙에 찾아오는 독립운동자들의 시중도 해주고 중상, 중덕 등지를 다니면서 비밀련락도 하였다. 중강인상가운데서 잊혀지지 않는것은 나보다 몸집이 더 큰 일본아이와 씨름을 하여 그 아이를 배지개로 넘어뜨리던 일이다. 나는 그때 조선아이들을 못살게 구는 일본아이가 있으면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객주집주인들은 후환이 두려워서 걱정했지만 아버지는 조선사람들을 업신여기는 놈들앞에서는 절대로 머리를 숙이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서 내 배짱을 지지해주었다.

이 시기 중강에서는 반일기세가 높아지고 도처에서 삐라살포, 동맹휴학, 악질주구처단 사건들이 련달아 일어났다.

적들은 중강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들을 아버지와 관련시켜보게 되였다. 중강경찰서에서는 평안남도경무부에서 보내온 통보에 의하여 아버지를 《불령선인》, 《특호갑종요시찰인》으로 등록하고 감시하고있었다. 강기락은 면사무소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밑에 빨간줄을 쳐놓은 호적등본을 보게 되였다. 그는 경찰놈들이 김선생을 체포하려고 벌써 점을 찍어놓았으니 빨리 자리를 뜨는것이 안전할것 같다고 귀띔해주었다. 그런 때에 중강경찰서에서 아버지를 체포하려 한다는 말이 그곳 경찰순사의 입에서 루설되였다. 아버지는 중강에 그이상 더 머물러 있을수 없게 되였다.

우리는 다시 보짐을 들고 찬바람부는 나라의 북단마저 떠나 이역땅으로 건너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중강에서 한걸음만 내디디면 중국땅이였다. 중덕나루에서 도막궁이를 타고 압록강을 건느자니 눈물이 나서 견딜수 없었다. 중강까지 떠나면 이사를 네번이나 하는셈이였다. 중강을 낯선 고장이라고 서름서름하게 여겨왔는데 막상 이국에 간다고 하니 중강도 고향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나저러나 중강은 조국의 한 부분이였다. 나에게 자장가를 불러주고 나를 그네에 태워 밀어주던 품이 만경대라면 중강은 봉화리와 더불어 조선은 어데 가나 다 일본제국주의의 감옥이라는것을 깨우쳐준 잊지 못할 고장이였다.

우리가 중강을 떠나던 날은 날씨조차도 류달리 음산하였다. 마가을의 락엽이 나루터에까지 날아와 처량하게 굴러다니였다. 하늘에서는 철새들이 무리를 지어 남쪽으로 날아가고있었다. 그 새들을 보니 웬일인지 구슬픈 생각이 더 들었다.

중강을 떠나는 이 길이 어머니한테는 조국을 영영 하직하는 마지막걸음이였고 동생 철주도 이 강을 건는 후로는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였다.

사람이 한생을 살아가느라면 별의별 설음을 다 겪기마련이다. 그러나 그 모든 설음가운데서도 가장 큰 설음은 나라를 잃은 슬픔이며 망국노가 되여 조국을 떠나는 슬픔이다. 고향을 떠나는 슬픔이 아무리 크다해도 조국을 하직할 때의 비감에는 견주지 못한다. 고향을 친어머니에 비기고 타향을 이붓어머니라고 한다면 그 타향보다 몇곱절 더 생소한 이국은 무엇에 비길것인가.

오라는 사람도 없고 반겨줄 사람도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에 가서 살아갈 생각을 하니 어린 나로서도 기가 막히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러나 조국을 떠나는 뼈저린 슬픔도 나라를 찾으려는 아버지의 뜻을 위해 묵묵히 참아야만 하였다.

배사공은 만주로 넘어가는 이민의 수가 점점 늘어난다고 하면서 조선사람의 신세가 왜 이다지도 가련해지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하였다.

아버지의 말씀이 이렇게 고향의 문전옥답을 버리고 해외로 떠나가는 사람들의 수가 몇천몇만인지 모른다고 하였다.

나라가 망하기 전에도 이 나라 백성들은 먹을것이 없어서 만주와 씨비리의 황야를 찾아 무리로 떠나갔다. 생존권을 잃은 백성들은 참형을 당하면서도 필사적으로 이 땅을 탈출하였다. 이민의 물결은 미국과 메히꼬를 비롯한 머나먼 미주에도 흘러갔다. 《사시장철 꽃이 피고 씨만 뿌리면 백곡이 저절로 풍요하고 하루 세시간만 품을 팔면 3년안에 부자가 된다.》는 감언리설에 속은 농부들과 뜨내기군들이 태평양을 건너 아메라카대륙에 가서는 미개인의 취급을 당하며 음식점이나 부자집의 막심부름군으로 일하든가 해볕이 불같이 쏟아져내리는 농장에서 참을수 없는 고역을 치르었다.

그래도 그때는 국호를 가진 제 나라가 있었다.

나라가 망한 후에는 수천수만의 농민들이 농토를 빼앗기고 산설고 물설은 만주황야로 가랑잎처럼 굴러들어갔다.

대대로 살아온 조상의 땅에는 일확천금에 환장한 일본의 부자들과 장사아치들이 홍수처럼 쓸어들고 그 땅을 살찌워온 주인들은 쫓기는 몸이 되여 남의 나라 지경을 넘어 헤매야 했으니 국권을 잃은 백성의 신세를 어찌 가랑잎이나 길가의 조약돌에 비기지 않을수 있겠는가.

그런 류랑민의 후손들이 지금 자기네 선친들이 버리고 간 조상의 땅으로 매일같이 찾아오고있다. 그 교포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압록강가에서 보던 류랑민들의 모습을 회고하군 한다.

림강에 가니 다른것은 다 서먹서먹해서 글렀는데 한가지만은 좋았다. 왜놈들의 몰골을 얼마 보지 않게 된것이다.

중국 료녕성의 변방상업도시인 림강은 우리 나라와 남북만으로 통하는 교통중심지의 하나였다.

일제는 그때까지만 하여도 중국땅에 공공연하게 세력을 뻗칠수 없었기때문에 비밀리에 특무들을 파견하여 독립운동자들을 위협하였다. 그러므로 림강은 중강에 비해 혁명활동을 벌려나가기에 유리하였다.

우리가 림강에 건너가자 아버지는 한 반년나마 중국교원을 붙여 중국말을 배우게 한 다음 나를 인차 림강소학교 1학년에 입학시키였다. 나는 이 학교에 입학한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중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후에는 팔도구소학교와 무송제1소학교에 가서 중어공부를 계속하였다.

내가 젊은 시절부터 중어를 자유롭게 구사할수 있은것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공로에 속한다고 말할수 있다.

어째서 아버지가 나에게 서둘러 중국말공부를 시키고 나를 중국인학교에 다니게 하였는지 그때로서는 미처 다 깨닫지 못하였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지원》의 사상에 기초한 아버지의 그 선견지명이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가 나에게 일찍부터 중국말공부를 시키지 않았더라면 4반세기를 중국땅에서 보낸 나는 걸음마다에서 커다란 언어적장벽에 부딪쳤을것이다.

털어놓고 말해서 우리의 투쟁무대가 대부분 만주지방이였던 조건에서 우리가 중어를 잘하지 못하였더라면 중국사람들과의 친교도 쉽게 이룰수 없었을것이고 그들과의 반일련합전선도 성과적으로 실현시킬수 없었을것이다. 도대체 적들의 폭압이 우심한 동북땅에 가서 감히 발도 붙이지 못하였을것이다.

우리가 중국옷을 입고 거리에 나서서 중국말을 류창하게 하면 사냥개들처럼 후각이 발달했다고 하는 일본정탐군이나 만주경찰들도 내가 조선사람이라는것을 감촉하지 못하였다.

결국 내가 중어를 배운것이 조선혁명에서 큰 은을 냈다고 말할수 있다.

아버지는 이미부터 알고있던 로경두라는 사람의 알선으로 세집을 하나 얻어가지고 병원을 차려놓았다. 방 한칸을 내여 약방 겸 치료실로 꾸리고 바깥벽에 《순천의원》이라는 간판을 큼직하게 달아놓았다. 방안에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졸업증도 하나 걸어놓았다. 아마 평양을 떠나기 전에 어느 친구에게 부탁하여 얻어온 졸업증이였다고 생각된다.

몇달이 지나지 않아서 아버지는 명의로 소문나기 시작했다. 의서 몇권을 읽고 림상실천에 뛰여든 아버지가 명의라는 평판을 얻게 된것은 의술덕이 아니라 인술의 덕이였다. 아버지는 어디를 가나 사람을 귀중히 여기였다. 고향도 조국도 모두 빼앗기고 설음많은 이국살이에 허덕이고있는 조선동포들을 위해주고 돌봐주는 아버지의 정성은 각별하였다.

《순천의원》을 찾아오는 사람들가운데는 빈손으로 오거나 얼마 안되는 돈을 가지고 와서 병을 보이는 환자들이 적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들이 약값때문에 걱정할 때마다 돈을 내겠으면 나라가 독립된 후에 내라고 하면서 지금은 우리들이 다른 나라에 와서 빈곤한 생활을 하고있지만 멀지 않아 나라를 찾고 다시 압록강을 건늘 날이 올것이라고 위로해주군하였다.

림강의 우리 집도 봉화리에서처럼 늘 손님으로 들끓었다. 환자도 환자지만 그 대부분은 반일운동자들이였다.

강진석외삼촌이 림강에 들어와 백산무사단을 조직한것도 이무렵이였다. 백산무사단은 평안도지방의 독립운동자들을 중심으로 무어진 무장단이다. 《백산》이란 백두산을 의미한다.

그 당시 만주지방에 살고있던 조선의 선각자들은 《백산》이란 명칭을 매우 귀중히 여기였다. 그들은 무송지방에 설립한 조선인사립학교에도 백산학교라는 이름을 붙이였다. 우리가 1927년 12월 무송에서 내온 청년조직도 백산청년동맹이라고 불렀다.

백산무사단은 림강과 장백일대에 조직된 군소독립군단체들가운데서 비교적 규모가 크고 대오가 째인 무장단이였다. 이 무장단의 본부는 림강현에 있었다. 백산무사단의 국내활동지점은 중강, 초산, 후창을 비롯한 평안북도일대와 멀리 평양, 순천, 강서지방에까지 길게 뻗어있었다.

평양에서 비밀청년단체 성원으로 활동하던 외삼촌은 만주에 들어온 다음 무사단을 조직할 때까지 림강의 우리 집에 거처하면서 한동안 채벌로동을 하였다. 무사단을 조직한 후에는 외무위원으로 임명되여 평안남북도일대에서 정치공작과 군자금모연활동을 하느라고 동분서주하였다.

외삼촌은 무사단의 지휘관들과 함께 우리 집에 자주 다니였다. 그때 변대우도 오고 백산무사단의 재무인 김시우도 동행하였다. 그 지휘관들이 우리 집에서 자고 갈 때가 많았다.

다른 손님들은 다 웃방에서 잤지만 외삼촌만은 늘 우리들이 있는 방에 내려와서 베개밑에 권총을 감추고 자군 하였다.

그 당시 아버지는 관전회의에서 선포한 방향전환의 요구에 따라 선진사상에 기초한 무장투쟁준비에 많은 힘을 기울이였다. 아버지가 홍토애에 자주 다닌것도 백산무사단과의 사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어느날 밤 잠에서 깨여난 나는 등잔불밑에서 외삼촌이 아버지와 함께 권총을 분해하는것을 보았다. 그 권총을 보는 순간 내 눈앞에는 어째서인지 3.1독립만세시위때 보통문 앞거리에서 보던 광경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그때 내가 시위군중속에서 본것은 쇠스랑과 나무작대기뿐이였다. 그런데 1년도 못되여 외삼촌의 손에서 마침내 총을 보게 된것이다. 수백수천의 죽음으로써 얻어진 피의 교훈에 조선의 선각자들은 무장으로써 화답한것이다.

며칠후 나는 아버지한테서 중강에 건너가 탄알과 화약을 운반해오라는 과업을 받았다. 세관에서 어른들에 대한 단속을 심하게 하는 때였으므로 나에게 그런 일을 시키려고 결심한것 같았다.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중강에 건너가 가방속에 탄알과 화약을 넣어가지고 무사히 돌아왔다. 경찰들이 세관에서 배를 타는 사람들을 깐깐하게 조사했지만 그날은 웬일인지 무서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외삼촌은 그후 국내에 나가 무장소조활동을 벌리기 위하여 림강을 떠났다.

그런데 한달도 못되여 중강헌병대에 있는 김득수오장이 림강에 건너와 외삼촌이 붙잡혀갔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김득수는 헌병오장이지만 아버지의 심부름을 많이 들어준 량심적인 사람이였다.

내가 학교에 갔다오니 어머니가 그 소식을 듣고 눈물을 짓고있었다. 외삼촌이 붙잡히는 바람에 온 집안이 왁작 끓었다.

외삼촌은 림강을 떠난 후 무장소조원들을 데리고 자성, 개천, 평양일대에서 맹렬한 활동을 벌리다가 1921년 4월 평양에서 일제경찰에 붙잡혀 15년 장기형을 받고 13년 8개월동안이나 옥중생활을 하였는데 보석으로 집에 나왔다가 1942년에 세상을 떠났다.

고향에서 미풍회라는 계몽단체를 뭇고 도박과 음주, 미신을 반대하여 싸우던 외삼촌의 활동이 구국운동으로 승화될수 있은것은 강돈욱외할아버지와 우리 아버지로부터 좋은 영향을 받았기때문이였다.

혁명은 특수한 몇몇 사람들만 하는것이 아니다. 의식화를 잘하고 영향만 잘 주면 누구든지 세계를 개조하고 변혁하는 혁명투쟁에서 놀라운 위훈을 발휘할수 있다.

외삼촌을 체포한 후 적들은 림강에 많은 밀정들과 사복경찰들을 들여보내여 아버지를 체포하려 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밤에는 림강교외에 있는 친구의 집에 피해가서 자고 낮에는 집에 돌아와 일을 보군 하였다.

이제는 림강에서도 더 살수가 없었다. 우리는 또다시 이사짐을 꾸려가지고 남의 나라 지경의 타향에서 타향으로 자리를 옮기지 않으면 안되였다. 온 식구가 이고 지고 메고 림강을 떠났는데 인력으로는 이사짐을 도저히 다 나를수가 없어 방사현이라는 전도사가 발구를 끌고 우리가 살게 될 장백현 팔도구까지 동행해주었다. 림강으로부터 팔도구까지는 250리가량 된다고 하였다.

림강과 마찬가지로 팔도구도 압록강을 끼고있는 국경마을이였다. 림강대안인 중강땅에 일본헌병대가 있고 경찰관주재소가 있는것처럼 팔도구대안인 포평에도 일본 헌병대분견소와 경찰관주재소가 있었다.

포평은 조선의 북단에 속하지만 독립운동의 기본무대가 만주로 옮겨진 뒤여서 일제는 이 일대에도 폭압력량을 조밀하게 배치하였다. 포평에서 파견된 밀정들과 헌병, 경찰들이 매일같이 팔도구에 넘어와 애국자들을 찾아내느라고 혈안이 되여 돌아갔다.

우리 집은 팔도강이 압록강으로 흘러드는 합수목으로부터 멀지 않은곳에 있었다. 아버지는 이 집에다 《광제의원》이라는 새 간판을 내걸었다.

우리 집 오른쪽에는 조선국민회원인 김씨네가 살았고 왼쪽에는 국수장사를 하는 다른 김씨네가 살았으며 길건너 맞은편에도 역시 국수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김씨네가 살았다.

아버지의 지도를 받으면서 압록강연안의 무장부대들에 물자를 계통적으로 대주던 장사군형제도 김씨였는데 근처에서 살았다. 이렇게 우리 집을 둘러싼 네 김씨네들이 대체로 좋은 사람들이였다.

다만 뒤집 하나가 문제였다. 후에 판명된것을 보면 그집 주인은 포평경찰서에서 박아넣은 손세심이라는 밀정이였다. 이 손가도 원래는 중강에서 살았는데 일본경찰기관의 지령을 받고 팔도구에 뒤따라와 우리 아버지를 감시하였다.

아버지는 팔도구에 와서도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접촉하였다.

그들가운데는 황씨성을 가진 사상가도 있었다. 그는 남사목재소에서 서사로 일하는 과정에 선진사상의 영향을 받고 혁명의 길에 들어섰다. 내막적으로는 우리 아버지의 련락임무를 수행하였다. 황씨는 임무를 받으면 인차 팔도구를 떠나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그것을 다 수행하고 다시 우리 집에 돌아와 새 과업을 기다리군 하였다.

어떤 날은 그 사람이 우리 아버지와 함께 술상을 앞에 놓고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아사히신붕》에 무슨 기사가 났는데 그 내용이 어떻더라고 하면서 열을 내여 시국평을 하는 때도 있었다.

아버지가 낚시질을 하러 가는 날은 그도 고추장단지를 들고 강가에 따라나가 그물질도 하고 고기밸도 따면서 천렵을 하였다. 그 사람이 이렇게 3년동안이나 우리 집에 다니다나니 어떤해 추석은 우리와 함께 쇤적도 있었다.

아버지는 그의 안내를 받으면서 200리나 떨어진 남사목재소에 여러번 찾아가 로동자들을 교양하고 그들을 반일조직에 묶어세웠다. 라죽보통학교 교원들도 아버지의 지도를 받았다. 어느해였던지 이 학교에서 동맹휴학사건이 일어나 크게 소문을 낸적도 있었다.

그 당시 아버지가 많이 다닌곳의 하나가 포평례배당이였다. 례배당이라 하지만 뾰족지붕에 십자가가 달린 집이 아니라 보통 동기와집으로서 사이벽을 터쳐 통간으로 쓰는것이 여느 집과 다를뿐이였다.

아버지가 팔도구에 온 다음부터 그 례배당은 군중을 교양하는 장소, 국내혁명가들의 집합장소로 리용되였다. 아버지는 례배가 있는 날마다 포평에 건너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반일선전을 하였다. 때로는 풍금을 타면서 노래도 배워주었다.

아버지가 못가는 날은 어머니나 형권삼촌이 례배보려 오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반일교양을 하였다. 나도 철주를 데리고 그 례배당에 찾아가 아버지한테서 풍금타는 법을 배웠다.

포평거리에는 아버지가 사용하던 비밀련락장소들이 많았다.

포평주재소 청소부로 일하고있던 사람도 비밀사업을 하였다. 이 사람이 주재소의 비밀을 탐지하여 우편물위탁소에 알려주면 위탁소주인이 우리 아버지에게 전달하군 하였다.

나도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비밀련락을 자주 다녔다. 언제인가는 포평주재소에 갇힌 애국자들에게 옷과 음식을 차입해준적도 있다. 내가 제일 많이 다닌 집은 우편물위탁소였다. 아버지는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와 같은 신문, 잡지들을 비롯하여 조선에서 발간되는 출판물들을 그 집에서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때 아버지는 형권삼촌의 이름으로 《동아일보》지국을 맡아보았는데 수입은 따로 없었지만 신문은 거저 얻어볼수 있었다.

나는 한주일에 두번정도 그 위탁소에 건너가군 하였다. 강이 얼기 전에는 포평에 다녀오는것이 힘들었다.

그러나 강이 언 다음에는 이틀에 한번씩 갔다오기도 하였다. 내가 공부를 한창 할 때에는 형권삼촌도 다니였다. 아버지앞으로 우편물이 많이 올 때에는 나와 형권삼촌이 함께 건너가서 날라오기도 하였다. 우편물은 주로 소포와 잡지, 일본에서 출판한 의학서적들이였다.

우리는 포평으로 다닐 때 헌병보조원을 하던 홍종우의 방조를 많이 받았다. 그는 아버지의 영향밑에 혁명의 지지자, 방조자가 된 사람이였다. 물론 그 사람과의 관계가 처음부터 순조롭게 이루어진것은 아니다.

우리가 사는 팔도구도 포평헌병분견소의 관할구역이였다. 이 분견소에 주재소순사들도 복종하고 세관관리들도 복종하였다. 당시 국경지대에 있는 헌병기관들의 권한이 대단하였다.

아버지와 조직성원들은 늘 헌병감시소의 동향을 주시하였고 그들역시 우리 집에 대해 감시의 눈을 떼지 않았다.

홍종우가 헌병보조원옷을 입고 처음 우리 집 약방에 나타났을 때 나는 몹시 긴장되였고 아버지와 어머니도 여러모로 경계하였다.

홍종우는 서름서름한 표정으로 약방안을 한참동안이나 두리번거리다가 이렇게 말하였다.

《내 오늘 로형을 찾아온것은 다름이 아니라 안주에 있는 장순봉이라는 사람의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외다. 내가 국경쪽으로 전근되여올 때 그 사람이 나더러 후창에 가거들랑 김형직이라는 자기 친구가 있으니 수고스러운대로 찾아보라고 하였습니다. 내자신도 로형을 만나보고 한번 가르침을 받고싶은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헌병옷을 입은 사람의 언행치고는 매우 겸손하고 점잖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첫날 그에게 곁을 잘 주지 않았다.

《중강의 김득수오장하구는 그렇게도 허물없이 지내시던분이 오늘은 웬일이세요?》

홍종우가 돌아간 다음 어머니가 묻는 말이였다.

《홍씨의 헌병옷을 보니 평양감옥이 새삼스럽게 생각나더구만.》

아버지는 인사를 전하려고 모처럼 찾아온 사람한테 미안하게 되였다고 하면서 다음번에 홍종우씨가 오면 잘 대접하자고 말씀하였다.

홍종우는 그후에도 우리 집 출입을 계속하였다.

어느날 아버지는 어머니와 의논하다가 이런 말씀을 하였다.

《홍종우가 우리 집을 내탐하러 왔으면 나는 홍종우를 통해 헌병대를 내탐하겠소. 만일 여기서 실패하면 내 한몸이 위태한것으로 그치지만 그의 마음을 돌려세울수만 있다면 우리 일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소. 중강에는 김득수, 포평에는 홍종우라, 김형직이 가는곳 어디엔들 헌병이 없겠소.》

그날부터 아버지는 홍종우를 적극적으로 교양하였다.

헌병보조원을 대하던 딱딱한 인사치레는 집어치우고 한겨레로서 진심을 가지고 대하였으며 대접도 잘하였다.

차차 속마음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알고보니 그는 본래 민족적량심이 있는 사람이였다. 그의 고향은 평안남도 순천이였는데 고향에서 아무리 농사를 힘들게 지어도 살길이 열리지 않아 팔자를 고쳐보자고 헌병보조원시험을 쳤다는것이다. 그러나 3.1인민봉기때 시위군중을 야수적으로 탄압하는 헌병과 경찰의 치떨리는 만행을 목격하고는 헌병보조원시험에 응한것을 후회하고 다시 농사나 짓자고 하였다. 그런 때에 합격통지서가 오고 교련호출장이 왔다. 이렇게 되여 홍종우는 헌병보조원이 되였다.

일제는 《무단통치》를 《문화통치》로 개편하면서 《관제개혁》의 명목밑에 국내의 헌병기관들을 축소하고 경찰기관들을 대대적으로 신설확장하는 동시에 국경지방의 헌병기관들을 보강하였다. 조선인헌병보조원들은 거의나 경찰로 전환되거나 국경지대로 이동되였다. 그 사품에 홍종우도 후창으로 오게 되였다.

하루는 홍종우가 아버지한테 와서 헌병대의 무장을 탈취하여 독립운동에 나설 용의를 표명하였다.

아버지는 그가 그런 용단을 내린것을 높이 평가하였다.

《당신이 독립운동에 나서겠다는 결단을 내린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이요. 몸에 왜놈의 군복을 걸쳤다고 어떻게 넋까지야 더럽히겠소. 5천년 력사국을 자랑하는 우리가 왜놈의 노예살이를 앉아서 순순히 감수만 할수야 있겠소. 그러나 나는 당신이 현 직무에 그대로 있으면서 우리 일을 도와주는것이 더 유익하다고 생각하오. 헌병옷을 입고있으면 당신이 여러모로 독립운동을 지원할수가 있소.》

홍종우는 그후 아버지의 말씀대로 독립운동자들에 대한 후원을 잘해주었다.

홍종우는 자주 아버지를 찾아와 어느날 몇시부터 몇시까지는 자기가 도선장감시당번이므로 강을 건너갈분들이 있으면 그 시간에 보내라고 미리 통지해주기도 하였다. 이런 방법으로 홍종우는 여러차례나 혁명가들의 도강을 보장해주었다.

우리 아버지도 이 사람의 덕으로 아슬아슬한 고비를 여러번 넘기였다. 아버지에게 불길한 일이라도 생길 기미가 엿보이면 홍종우는 인차 팔도구에 건너와 《순사들이 건너올테니 주의하시우.》 하든가 어머니에게 《김선생이 집에 오시면 며칠간 더 촌에 나가있다가 돌아오라고 이르십시오.》 하고 귀띔해주군 하였다.

어느날 헌병분견소 소장으로부터 대안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자들과 조선사람들의 동태를 탐지할 과업을 받고 팔도구에 건너왔던 홍종우는 포평주재소의 순사가 아버지를 결박해가지고 나루터쪽으로 가는것을 보게 되였다.

홍종우는 그 순사의 앞을 막아서며 이렇게 호통쳤다.

《이 선생은 헌병대의 일을 보는 우리 사람인데 왜 우리도 모르게 함부로 체포하는가? 앞으로 김선생문제가 제기되면 너희들은 간섭말고 나에게 알려라.》

그 순사는 잘못했노라고 고개를 조아리면서 아버지의 팔에서 포승을 풀어놓았다.

이렇게 되여 아버지는 위험한 순간을 벗어날수 있었다.

한번은 순찰을 마치고 돌아온 헌병이 분견소 소장에게 팔도구의 김의사가 사상가라고 하는데 붙잡아서 문초를 해보지 않겠는가고 제기하였다.

홍종우는 《정보자료》를 기록한 헌병일지를 펼쳐보이면서 이 자료는 다 김의사를 통해 얻은 자료이다, 사상가들의 동태를 알려면 사상가로 가장해야 그들의 진짜속내막을 알수 있다, 김의사는 우리 사업에 공로가 큰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 《정보자료》라는것은 다 홍종우자신이 꾸며낸 허위자료였다.

1923년 5월 헌병보조원제도가 페지되자 홍종우는 자기도 가족을 데리고 중국에 건너와서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하였다. 그는 적기관에 복무할 생각이 더는 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아버지가 그날 그를 설복하느라고 무던히 애를 썼다. 아버지는 그에게 고향에 돌아가 경찰기관 같은데 들어가있으면서 종전처럼 계속 우리 사업을 도와달라, 그렇게 하는것이 독립군에 들어가 활동하는것보다 우리에게 더 큰 도움을 준다고 타일렀다. 그리고 고향에 가면 만경대에 찾아가서 나대신 우리 부모님들에게 인사나 전해달라고 부탁하였다.

홍종우는 고향에 돌아가자마자 만경대에 찾아가 우리 조부모님들에게 아버지가 보내는 문안인사를 전해드리였다. 그는 아버지가 시켜준대로 고향에서 순사로 일하다가 상부에 여러번 제기하여 1927년부터는 대평주재소 순사로 근무하기 시작하였는데 부임하자마자 주재소 심부름군에게 술과 돼지고기, 귤을 지워가지고 우리 만경대집으로 찾아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설인사를 드리였다. 만경대도 대평주재소의 관할구역이였다.

홍종우는 생전에 우리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조선민족의 량심을 잃지 않고 시종일관 우리 일가를 잘 보호해주었다. 그가 대평주재소로 자리를 옮긴 목적도 우리 만경대집을 보호해주자는데 있었다. 이 사람이 남리담당으로 있은동안은 우리 할아버지나 형록삼촌이 놈들의 성화를 덜 받았다. 주재소수석이 그에게 늘 김형직이네 일가는 과거부터 배일사상가들의 집안이니 철저히 경계하고 수시로 가택수색도 해야 한다고 훈계하였지만 홍종우는 매번 별것이 없다는 내용으로 어물쩍해 넘기군 하였다.

해방직후 인민들이 도처에서 친일파들을 붙들어다가 두들겨팰 때에도 홍종우만은 매를 맞지 않고 무사히 지냈다. 그가 고향에서 은급순사노릇을 했지만 사람들에게 악한짓을 하지 않고 일본법에 걸리는 행위를 보고서도 매번 눈을 감아주었기때문에 미움을 사지 않았다.

그는 과거경력때문에 오해를 받으면서도 자기가 한 일을 한번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어지간한 사람 같으면 오해를 풀기 위해서라도 나에게 편지를 썼겠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조국해방전쟁이 끝난 몇해후 나는 일군들에게 과업을 주어 순천에서 홍종우를 찾아냈다. 찾고보니 그는 벌써 환갑이 넘은 로인이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를 도간부학교에 보내여 공부시키였다.

홍종우는 도간부학교를 다닌 다음에도 자기의 천품대로 소박하고 조용하게 살았다. 그는 말년을 우리 아버지의 혁명사적을 발굴하는데 고스란히 바치였다.

홍종우처럼 나라와 민족을 위해 제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기로 결심한 사람한테는 순사옷이나 순사의 간판이 방해로 되지 않았다. 문제는 간판이나 복장에 있는것이 아니라 사람의 사상과 정신에 있는것이다.

후대교육은 팔도구시절에도 여전히 아버지가 관심하는 분야였다. 아버지는 교원의 간판을 의원의 간판으로 바꾼 후에도 교단에 서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후대교육사업에 많은 힘을 넣었다. 학교나 야학을 통하여 군중을 계몽시키고 쓸모있는 인재들을 많이 키워내야 나라도 찾을수 있고 부강한 독립국가도 세울수 있다는것이 아버지의 신념이였다. 1924년 여름에 삼원포에서는 조선소학교 교원들을 위한 여름강습이 진행되였는데 아버지는 그때 학생들에게 배워줄 교육내용과 노래곡목까지 구체적으로 짜주었다.

아버지의 노력에 의하여 팔도구골안에 조선인학교가 서게 되였다. 그 학교에서는 포평에 있는 청소년들까지 쌀을 지고와 자체로 밥을 지어먹으면서 조선글을 배웠다.

아버지는 어데 가서나 늘 이렇게 말씀하였다.

《후대교육은 나라의 독립과 건국의 기초이다.》

《사람이 글을 모르면 짐승과 다를바 없다. 글을 알아야 사람구실도 할수 있고 나라도 찾을수 있다.》

나는 아버지의 말씀을 명심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내가 다니는 팔도구소학교는 4년제중국인학교였는데 수업도 중국말로 하고 취급하는 과목도 중국의것이였다. 시내에는 조선학교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집으로 돌아오면 아버지로부터 개별교육을 받았다. 아버지는 나에게 우리 글과 지리, 조선력사를 배워주고 레닌, 손문, 워싱톤을 비롯하여 세계적으로 이름난 명인들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해주었으며 진보적인 소설이나 서적들가운데서 몇권을 지정해주고는 어김없이 읽고 감상을 발표하도록 체계적인 독서지도도 하였다. 그 덕으로 나는 그때 《조선지위인》, 《조선영웅전》, 《로국혁명사와 레닌》과 같은 좋은 책들과 신문, 잡지들을 많이 읽을수 있었다.

아버지는 공부에 대한 통제를 엄하게 하였다. 공부를 잘 안하면 나나 철주동생은 물론, 형권삼촌까지 붙들어세워놓고 종아리를 칠 때도 있었다.

어머니도 나의 공부를 많이 보살펴주었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와 산에 나무하러 가려고 하면 어머니는 《무슨 나무를 한다고 그러니. 어서 공부나 해라.》라고 하면서 많은 시간을 학습에 돌릴수 있도록 해주었다.

나는 어머니가 옷 한벌 제대로 입지 못하고 고생만 하면서도 나를 위해 그처럼 마음쓰는것을 보고 어떻게 하면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릴수 있을가 하고 늘 궁리하였다. 그러다가 운동화를 사신으라고 어머니가 준 돈으로 포평에 건너가서 고무신을 한컬레 사다드리였다.

그랬더니 어머니는 《네가 나이는 어려도 속은 깊구나. 나야 아무런 신을 신은들 뭐라니. 너희들이 공부를 잘하고 씩씩하게 자라면 어머니는 기쁜거란다.》라고 하였다.

어머니는 어떻게 하나 내가 밝은 마음을 가지고 명랑하게 자라나도록 정성을 다 기울이였다.

그래서 나는 마음속에 구김살을 내지 않고 락천적으로 자라날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어려서 장난을 제일 많이 한 때가 팔도구시절이였다고 생각된다. 어떤 날은 어른들이 혀를 찰 정도로 험한 장난을 할 때도 있었다. 장난이 없는 어린 시절을 어떻게 어린 시절이라고 할수 있겠는가.

압록강얼음판에 너비가 1m도 넘는 큼직한 구멍을 뚫어놓고 강변에 한줄로 늘어서서 그 구멍을 뛰여넘을 내기를 하던 팔도구시절의 겨울을 생각하면 지금도 70년전의 동심이 되살아나는것 같다. 우리는 그때 저 얼음구멍을 뛰여넘지 못하는 아이들은 커서 조선군대가 될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그 구멍을 날아넘었다. 아이들은 조선군대가 되지 못하는 수치를 면하려고 있는 힘을 다 내여 얼음구멍을 향해 달려가군 하였다.

보폭이 작거나 겁이 많은 아이들은 얼음구멍을 뛰여넘지 못하고 물속에 풍덩 빠지기도 하였다. 그런 날이면 물에 옷을 적신 아이들의 집에서는 화토불에 옷을 말리며 저 평양집 성주때문에 온 동네 아이들이 동태가 되겠다고 우는소리를 하였다. 성주가 팔도구대장이라는 소문이 돌았기때문에 동네어른들은 자기 자식들에 대한 푸념을 할 때마다 곧잘 내 이름을 거들군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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