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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1-3. 독립만세의 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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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5,578회 작성일 15-03-04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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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독립만세의 메아리


아버지는 몹시 추운 날에 집을 떠났다.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봄을 기다리였다. 못먹고 못입는 우리들한테는 추위도 큰 원쑤였다.

날씨가 좀 따스해지자 할머니는 조금 있으면 증손이의 생일이 되겠구나 하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 생일때면 꽃이 피고 북쪽으로 간 아버지도 추운 고생을 덜하겠지만 춘궁기에 나의 생일을 어떻게 하면 섭섭치 않게 해줄것인가 하는데서 오는 걱정이였다.

우리 집에서는 농량이 떨어지는 봄철이지만 내 생일이면 흰쌀밥 한그릇과 백하를 두고 지진 닭알을 밥상에 놓아주군했다. 죽도 제대로 못먹는 우리 집 형편에서 닭알 한알이면 대단한 성찬이였다.

그러나 그해 봄에는 생일 같은데 별로 생각을 두게 되지 않았다. 아버지의 체포사건이 나를 놀래운데다가 멀리에 계시는 아버지에 대한 걱정이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집을 떠난지 얼마 안되여 3.1인민봉기가 터졌다. 3.1인민봉기는 일제의 10년간의 야만적인 《무단통치》하에서 모진 수모와 학대를 받으며 살아온 조선민족의 쌓이고쌓인 울분과 원한의 폭발이였다.

합병후 10년은 조선을 하나의 거대한 감옥으로 만들어버린 중세기적공포정치의 총검밑에서 우리 민족이 언론, 집회, 결사, 시위의 자유를 비롯한 모든 사회적권리와 재부를 강탈당하고 끝없는 고통속에서 신음해온 수난의 시대, 암흑의 시대, 기아의 시대였다.

합병후 비밀결사운동과 독립군운동, 애국문화계몽운동으로 부단히 힘을 축적하여온 우리 민족은 이 암흑의 시대, 수탈의 시대를 그대로 감수할수가 없어 분연히 궐기한것이다.

천도교, 기독교, 불교를 비롯한 종교계 인사들과 애국적인 교원, 학생들의 주도하에 3.1인민봉기는 면밀하게 계획되고 추진되였다. 갑신정변과 위정척사운동, 갑오농민전쟁, 애국문화계몽운동, 의병투쟁을 통하여 줄기차게 이어지고 승화되여온 우리 인민의 민족정신은 마침내 자주독립을 부르짖으며 화산처럼 분출하였다.

3월 1일 평양에서는 낮 12시에 종소리를 신호로 수천명의 청년학생들과 시민들이 장대재에 있는 숭덕녀학교 운동장에 모여들어 《독립선언서》를 랑독하고 조선이 독립국가라는것을 엄숙히 선포한 다음 《조선독립 만세!》, 《일본인과 일본군대는 물러가라!》는 구호를 웨치면서 격렬한 가두시위를 벌리였다. 시위대렬이 거리로 밀려나오자 수만명 군중이 이에 합세하였다.

만경대와 칠골인민들도 대렬을 지어 평양으로 밀려갔다. 우리는 이른새벽에 조반을 지어 먹고 온 집안식구가 독립만세시위에 나섰다. 떠날 때 수백명에 불과했던 시위대렬이 나중에는 수천명으로 불어났다. 군중은 북과 징을 울리고 《조선독립 만세!》를 웨치면서 보통문쪽으로 밀려갔다.

그때 여덟살이였던 나도 다 꿰진 신발을 신고 시위대렬에 끼여 만세를 부르면서 보통문앞에까지 갔다. 성안을 향해 노도와 같이 밀려가는 어른들의 걸음을 나로서는 미처 따라잡을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너덜거리는 신발짝이 거치장스러워 짚신을 벗어서 손에 들고 뜀박질로 대렬을 따라갔다. 어른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면 나도 함께 만세를 불렀다.

적들은 기마경찰대와 군대들까지 동원시켜 도처에서 군중에게 칼을 휘두르고 총탄을 마구 퍼부었다. 숱한 사람들이 희생되였다.

그러나 군중은 두려움을 모르고 원쑤들과 육탄으로 대항하였다. 보통문앞에서도 치렬한 육박전이 벌어졌다.

이날은 내가 나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것을 처음으로 본 날이며 우리 민족의 류혈을 처음으로 목격한 날이였다. 어린 나의 가슴도 분노로 끓어번졌다.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지자 마을사람들은 홰불을 들고 만경봉에 올라가 또다시 나팔을 불고 북을 치고 양철통까지 두드리면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런 투쟁이 여러날 계속되였다. 나도 형복고모와 함께 어머니를 따라 만경봉에 올라가 만세를 부르며 밤늦게까지 있다가 내려오군 하였다. 어머니는 군중들이 마실 물과 홰불로 쓸 겨릅대를 나르느라고 바쁘게 보내였다.

서울에서는 고종의 장례식을 보려고 지방에서 올라온 농민들까지 합세하여 수십만명의 군중이 결사적인 시위를 벌리였다.

총독 하세가와는 시위를 탄압하기 위해 룡산주둔 20사단무력까지 동원하였다. 놈들은 총으로 쏘고 칼로 찌르면서 시위군중을 야수적으로 학살하였다. 서울거리도 삽시간에 피바다가 되였다.

그러나 시위자들은 앞대렬이 쓰러지면 그 뒤대렬이, 뒤대렬이 쓰러지면 또 그다음 대렬이 앞장에 나서면서 전진하였다.

다른 지방의 인민들도 총칼로 시위군중을 탄압하는 적들의 만행에 굴하지 않고 피를 흘리면서 영웅적으로 싸웠다.

나어린 한 녀학생은 국기를 들었던 바른팔을 놈들의 칼에 잘리자 왼손에 국기를 바꿔쥐였고 왼팔마저 떨어져 더는 움직일수 없는 순간까지도 걸음을 멈추지 않고 《조선독립 만세!》를 불러 일제군경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서울과 평양의 시위를 발단으로 봉기는 3월중순에 이르러 전국의 13개 도를 모두 휩쓸고 만주와 상해, 연해주, 하와이 등 해외에 있는 조선동포들에게까지 파급되여 전민족적인 항쟁으로 번져갔다. 그때 당시 민족적량심을 가진 조선사람들은 직업, 신앙, 남녀로소의 구별이 없이 누구나 다 이 봉기에 참가하였다.

봉건도덕에 억눌려 문밖출입조차 삼가하던 려염집 아낙네들과 천민중 천민이라는 대접을 받던 기생들까지도 대오를 뭇고 시위에 떨쳐나섰다.

봉기가 일어난 후 한두달은 온 나라가 독립만세소리로 진동하였다. 그러다가 봄이 지나고 여름이 되면서부터 점차 기세가 수그러들기 시작하였다.

몇달동안 만세를 부르며 기세를 올리면 적들도 마음을 고쳐먹고 물러갈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있었는데 그것은 망상이였다. 그런 정도의 반항때문에 일제가 선뜻 조선을 내놓을리 만무하였다.

일본은 조선을 먹기 위해서 큰 전쟁만 하여도 세차례나 하였다.

벌써 400년전에 풍신수길의 부하들인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이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들어와 우리 나라 땅에 불을 질렀다. 그것을 《임진왜란》이라고 하였다.

19세기중엽에 이르러 이른바 《명치유신》으로써 개화의 길에 들어서자마자 일본지배층에서 맨먼저 들고나온것이 《정한론》이였다. 《정한론》은 일본의 번영과 천황국가의 위력을 위하여 무력으로 조선을 정복하여야 한다는 일본군국주의집단의 침략적주장이였다.

《정한론》은 일본정계와 군부내의 의견불일치로 그 당시는 실현되지 못하였지만 《정한론》자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국내전쟁을 반년이상이나 벌리였다.

이처럼 천황정부를 반대하여 대규모적인 반란을 일으킨 《정한론》자들의 우두머리 사이고 다까모리의 동상이 지금도 일본에 버젓이 서있다고 한다.

일본은 조선을 먹기 위하여 청나라와도 전쟁을 하고 로씨야와도 전쟁을 하였다. 미국과 영국이 이들을 뒤에서 받쳐주었다.

일본군벌이 얼마나 독한가 하는데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통해서도 알수 있다.

로일전쟁당시 려순전투를 지휘한것은 노기였다. 그가 203고지를 점령할 때 산꼭대기까지 시체로 사닥다리를 쌓고 올라갔다. 려순의 백옥산 사당에는 그때 죽은 사람들가운데서 일부만 묻었는데 무려 2만 5,000명이 넘는다고 한다.

많은 희생을 내고 전쟁을 이기기는 하였지만 다 먹는다던 씨비리도 만주도 먹지를 못했다. 애매하게 속아서 과부가 되고 고아로 된 일본사람들이 속이 좋지 않아서 노기가 돌아온다는 소문을 듣고 부두로 모여들었다. 행패라도 하자는 판이였다.

그런데 배에서 내리는 노기의 가슴우에 세개의 유골상자가 드리워있는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노기자신도 그 싸움에서 제 자식 셋을 다 죽였던것이다.

이 이야기가 어느 정도 사실인지는 알수 없으나 여기에서 일본강점자들이 조선을 호락호락 내놓지 않으리라는것만은 명백하게 알수 있다.

그런데 3.1운동을 지도한 상층인물들은 이와 같은 력사의 교훈을 망각하고 우리 인민의 앙양된 투쟁기세에 부합되지 않게 처음부터 운동의 성격을 비폭력적인것으로 규정하였으며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조선민족의 독립의지를 내외에 천명하는것으로 그치고말았다. 그들은 운동이 그이상 확대되여 민중이 주도하는 대중적투쟁으로 전환되는것을 바라지 않았다.

지어 민족운동의 일부 지도자들은 《청원》의 방법으로 조선의 독립을 해결해보려고 하였다. 윌슨의 《민족자결론》이 세상에 나오자 그들은 미국을 비롯한 협상국대표들에 의해 빠리강화회의에서 조선의 독립이 결정될수도 있다는 터무니없는 환상을 가지고 구차스런 청원운동을 벌리였다. 김규식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독립청원서》를 들고 렬강대표들의 숙소를 찾아다니면서 호소도 하고 애원도 하였다.

그러나 협상국의 대표들은 어떻게 하면 분배몫을 더 많이 찾아먹겠는가 하는데만 머리를 쓰면서 조선문제 같은것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원래 민족주의운동의 상층부가 윌슨의 《민족자결론》에 기대를 가진것부터가 오산이였다. 《민족자결론》은 미제가 사회주의10월혁명의 영향력을 막고 세계를 좌지우지하기 위해 내놓은 위선적구호였다. 미제국주의자들은 《민족자결》의 기만적인 구호밑에 다민족국가인 쏘련을 내부로부터 와해시키며 식민지약소국가 인민들이 독립을 위한 투쟁에서 단합하지 못하도록 서로 분리시키는 한편 전패국들을 희생시켜 그 령토를 차지해보려고 획책하였다.

20세기초엽에 벌써 《가쯔라ㅡ타프트협정》으로 일본의 조선침략을 《승인》한 미제가 조선의 독립을 지원할리는 만무하였다. 력사는 강대국들이 작은 나라를 동정하고 약한 나라 인민들에게 자유와 독립을 선사한 전례를 알지 못한다. 한 민족의 자주권은 오직 그 민족자체의 주체적인 노력과 불굴의 투쟁에 의해서만 보존하고 쟁취할수 있다. 이것은 여러 세기와 세대를 거쳐 이미 력사에 의해 검증된 진리이다.

고종황제는 이미 로일전쟁때와 포츠마스강화회담때에 미국에 밀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침략전쟁을 폭로하고 조선의 독립유지에 협조해줄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로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도록 여러가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전후처리문제를 토의하는 포츠마스강화회담에서는 회담결과가 일본에 유리해지도록 백방으로 도와주었다. 루즈벨트대통령은 공식문서가 아니라는 리유로 고종황제의 밀서를 외면하였다.

고종은 헤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다시 밀사들을 파견하여 《을사조약》의 비법성을 선포하고 세계의 정의와 인도주의에 호소하여 국권을 보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집요한 방해공작과 각국 대표들의 랭담한 반응으로 하여 회의앞으로 보내는 황제의 편지는 효력을 발생하지 못하였으며 렬강들의 동정을 호소하는 밀사들의 눈물겨운 노력은 걸음마다 좌절의 쓴맛을 보았다. 고종은 일제의 압력으로 밀사파견의 책임을 지고 순종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헤그밀사사건은 봉건통치배들의 뿌리깊은 사대의식을 잡아흔드는 하나의 힘있는 경종이였다. 만국평화회의장을 붉게 물들인 리준의 피는 후대들에게 세계의 그 어떤 강대국도 조선독립을 선사하지 않는다는것과 남의 덕으로는 나라의 독립을 성취할수 없다는것을 똑똑히 경고해주었다.

민족주의운동의 상층부가 이 교훈을 명심하지 않고 또다시 미국과 《민족자결론》에 기대를 건것은 그들의 머리에 숭미사대주의사상이 그만큼 뿌리깊이 남아있었기때문이였다. 무능한 봉건통치배들은 지난날 나라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큰 나라들을 쳐다보면서 그들의 힘을 빌어 국운을 타개해보려고 하였다. 이 버릇이 민족주의운동상층에도 그대로 이식되였다.

3.1인민봉기는 부르죠아민족주의자들이 더는 반일민족해방운동의 지도세력으로 될수 없다는것을 보여주었다.

3.1인민봉기를 주도한 지도자들의 계급적제한성은 그들이 일본의 식민지지배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데까지 도달하지 못했다는 점이였다. 그들은 일본의 통치질서를 인정하는 한도내에서 자기 계급의 리익을 보장할수 있는 약간의 양보를 받아 내자는데 운동의 목적을 두고있었다. 이것은 후날 그들중 적지 않은 사람들을 개량주의자로 굴러떨어지게 했거나 지어는 일제와 타협하면서 《자치》를 부르짖게까지 한 사상적바탕으로 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나라에는 개량주의를 타파할만한 선진사상이 없었으며 그런 선진사상을 자기 계급의 지도리념으로 삼고 투쟁할만한 산업프로레타리아트의 대군이 없었다. 청소한 우리 나라 로동계급은 아직 맑스ㅡ레닌주의를 새로운 시대사상으로 정립하고 그 기치밑에 광범한 근로대중을 묶어세울 사명을 지닌 자기의 당을 가지지 못하였다.

일제의 악정밑에서 신음하는 우리 나라의 인민대중이 참다운 투쟁의 진로를 찾고 자기의 리익을 진정으로 옹호하는 전위대를 가지려면 멀고도 험난한 길을 더 걸어야 하였다.

3.1인민봉기를 통하여 우리 인민은 강력한 지도력량이 없이는 어떤 운동이든지 승리할수 없다는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였다.

수백만군중이 나라를 찾으려는 공통된 지향을 안고 항쟁의 거리로 달려나왔지만 로동계급의 령도, 당의 령도를 받지 못하였기때문에 그들의 투쟁은 분산성과 자연발생성을 면할수 없었고 통일적인 강령과 전투계획에 따라 전개될수 없었다.

3.1인민봉기는 인민대중이 민족적독립과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승리를 이룩하자면 반드시 혁명적당의 령도밑에 옳바른 전략전술을 가지고 투쟁을 조직적으로 벌려나가야 하며 사대주의를 철저히 배격하고 자체의 혁명력량을 튼튼히 마련해야 한다는 심각한 교훈을 남기였다.

3.1인민봉기를 통하여 조선사람들은 우리 인민이 남의 노예로 살기를 원치 않는 자주정신이 강한 인민이며 나라를 찾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굴의 기개와 열렬한 애국정신을 가진 인민이라는것을 온 세상에 과시하였다.

이 봉기로 하여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일본강점자들은 조선인민의 반일감정을 무마하기 위하여 3.1인민봉기가 있은 후부터 형식상으로나마 《무단통치》를 《문화통치》로 바꾸지 않을수 없었다.

3.1인민봉기를 계기로 하여 우리 나라에서 부르죠아민족주의운동의 시기는 종말을 고하고 조선인민의 민족해방투쟁은 점차 새로운 단계에 들어서게 되였다.

비운의 조국강산을 뒤흔들며 세계만방에 울려가던 독립만세소리는 온 여름 내 귀전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 만세소리는 나로 하여금 나이보다 일찍 철들게 하였다. 시위군중과 무장경찰의 격투로 불꽃을 일으키던 보통문 앞거리에서 나의 세계관은 새로운 단계에로 도약하였다. 어른들의 틈바구니에서 발돋움을 하며 독립만세를 부르던 그 시각에 나의 유년시절은 벌써 끝났었다고 말할수 있다.

3.1인민봉기는 나를 인민의 대오속에 세워주고 나의 망막에 우리 민족의 참다운 영상을 새겨준 첫 계기였다. 내 마음속에 우뢰가 되여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던 독립만세의 메아리에 귀를 기울일 때마다 나는 우리 인민의 백절불굴의 투쟁정신과 영웅성을 두고 다함없는 자부심을 느끼군하였다.

그해 여름에 우리는 아버지의 편지를 받았다.

아버지는 편지와 함께 《금불환》이라는 중국 먹과 붓을 나에게 보내여왔다. 글씨공부를 잘하라고 나에게 특별히 보내준 선물이였다.

나는 벼루돌에 《금불환》을 걸죽하게 갈아 붓에 먹을 듬뿍 묻힌 다음 한지에 《아버지》라는 세 글자를 큼직하게 써놓았다.

우리 집 식구들은 밤에 등잔불밑에서 편지를 돌려가며 읽었다. 형록삼촌은 세번씩이나 읽었다. 성미가 덜렁덜렁한 삼촌이였지만 편지를 볼 때에는 늙은이들처럼 꼼꼼했다.

어머니는 대강 훑어보고 나에게 편지를 넘겨주면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들으실수 있게 큰소리로 읽어드리라고 하였다. 학령전이였지만 아버지가 집에서 조선어자모를 배워준 덕에 나는 글을 읽을줄 알았다.

내가 류창한 목소리로 편지를 읽어드리자 할머니는 물레질을 멈추고 《언제 온다는 소리는 없느냐?》하고 물었다. 그러고는 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혼자소리로 뇌이는것이였다.

《아라사에 갔는지 만주에 갔는지. …이번에는 퍼그나 오래두 객지생활을 하는구나.》

나는 어머니가 편지를 얼추 훑어본것이 마음에 걸려 잠자리에 든 다음 아버지의 편지를 뜬금으로 소곤소곤 외워드리였다. 어머니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는데서는 절대로 편지를 오래 들여다보는 법이 없었다. 그대신 저고리앞섶에 편지를 간수했다가 밭에 일을 나가서는 쉴참에 남몰래 읽군하였다.

내가 편지의 구절들을 뜬금으로 외워드리자 어머니는 《됐다. 이제는 자거라.》하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우리 아버지는 그해 초가을에야 가족들을 데려가려고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1년만에 아버지를 만나는셈이였다.

그동안 아버지는 의주, 창성, 벽동, 초산, 중강을 비롯한 평안북도일대와 만주지방에서 조선국민회조직을 복구하고 동지들을 획득하며 광범한 군중을 결속하기 위한 활동을 정력적으로 벌리였다.

아버지가 청수동회의(1918년 11월)를 소집한것도 그무렵이였다. 평안북도의 조선국민회조직대표들과 각 지역의 련락원들이 참가한 이 회의에서는 파괴된 국민회조직들을 시급히 복구하며 광범한 무산민중을 조직에 튼튼히 묶어세울데 대한 활동방침을 밝히였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만주소식과 함께 로씨야에 대한 이야기, 레닌에 대한 이야기, 10월혁명승리에 대한 이야기를 특별히 많이 하였다. 로씨야에서는 로동자, 농민을 비롯한 무산대중이 주인으로 된 새 세상이 왔다고 하면서 부러움을 감추지 않는가 하면 신생로씨야가 백파도당들과 14개국 무력간섭자들의 공격으로 하여 시련을 겪고있다고 하면서 못내 안타까와하기도 하였다.

그 이야기들이 모두 생동한 세부와 사실들로 엮어졌기때문에 나는 아버지가 그동안 연해주에 갔다온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였다.

만주와 마찬가지로 연해주도 조선독립운동의 한개 기지였고 중요한 집결지였다. 3.1운동당시 원동지방에 거주하고있던 조선인의 수는 수십만명 되였다. 이 지방에는 조선에서 망명해간 애국지사들과 독립운동자들이 많았다. 리준일행이 바로 여기를 거쳐 헤그로 갔고 류린석과 리상설도 여기(울라지보스또크)에서 13도 의병련합사령부를 결성하였다. 리동휘를 수위로 하는 한인사회당이 조선최초의 사회주의그루빠로서 맑스ㅡ레닌주의를 보급하기 시작한곳도 여기였고 대한국민의회라는 명칭을 가진 로령림시정부가 결성되여 내외에 그 존재를 선포한곳도 이 지방이였다. 홍범도와 안중근도 이 지역에 거점을 두고 군사활동을 하였다.

연해주지방에 망명해간 조선의 독립운동자들과 애국적인민들은 도처에서 자치단체들과 반일항쟁단체들을 뭇고 국권회복을 위한 맹렬한 활동을 벌리였다. 연해주에 기지를 두고있던 독립군부대들은 경원, 경흥을 비롯한 함경북도일대에 진출하여 일본군경들을 습격하고 적의 통치와 국경경비에 큰 혼란을 주었다. 한때는 여기에서 만주지방으로부터 이동해온 독립군들이 대부대를 편성하여가지고 붉은군대와 함께 쏘베트공화국을 옹호하여 싸웠다.

제국주의련합세력과 그에 추종하는 국내의 원쑤들이 사면팔방에서 갓 태여난 쏘베트정권을 교살하려고 악착스럽게 달려들고있을 때 수천명의 조선청년들은 혹은 빨찌산대오에서 혹은 붉은군대의 서렬에서 손에 무장을 잡고 인류가 리상으로 그려온 사회주의제도를 고수하기 위해 피와 생명을 아낌없이 바치였다. 공민전쟁의 영웅들을 추모하여 세운 원동지방의 기념비들에는 조선사람들의 이름도 크게 새겨져있다.

쏘련의 원동지방을 무대로 한동안 정열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해온 홍범도, 리동휘, 려운형 등은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지지를 얻기 위해 레닌과도 상봉하였다.

연해주지방에서 조선독립운동자들이 벌린 활동은 외부세력의 개입과 계파호상간의 대립으로 흑하사변과 같은 가슴아픈 참사도 빚어냈지만 우리 나라 민족해방운동선상에서 무시할수 없는 흔적을 남기였다고 말할수 있다.

동지들을 획득하기 위해 아버지가 연해주에 갔을것이라고 생각하는 나의 짐작은 무리가 아니였다.

아버지는 집안식구들에게 북부국경지대 인민들의 시위투쟁소식을 이야기해주었고 집안식구들은 아버지에게 3.1인민봉기때 고평면인민들이 용감하게 싸우던 모습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날 아버지가 하던 말씀중에서 이런 말씀은 오늘까지도 내 기억속에 똑똑히 남아있다.

《강도들이 집에 들어와 칼부림을 하는데 목숨을 살려달라고 아우성친다고 그 강도놈이 목숨을 살려줄리는 없다. 집밖에 있는놈도 역시 강도라면 아우성소리를 듣고 달려와 도와줄리는 없다. 제 목숨을 지키려면 제힘으로 강도놈들과 싸워야 한다. 칼든놈하고는 칼을 들고 싸워야 이길수 있다.》

아버지한테는 이미 독립운동을 위한 새로운 견해와 결심이 서있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3.1운동 당시와 이 운동을 전후한 시기 아버지는 북부국경일대와 남만지방에 활동의 거점을 잡고 국내외에서 벌어지는 사변들을 주의깊이 살펴보면서 민족해방의 진로를 끊임없이 모색하였다. 아버지는 우리 나라 사회계급관계의 변화과정에 대하여서도 깊은 주목을 돌리였다.

3.1운동의 교훈이 보여주는것처럼 시위나 하고 만세나 불러서는 침략자들이 물러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독립군의 싸움만으로 나라를 찾을수도 없다. 온 강산이 왜놈의 감옥으로 되고 총칼의 숲으로 덮이였으니 전국 방방곡곡에서 거족적인 힘으로 침략자들과 싸워야 한다. 그러자면 우리도 로씨야처럼 민중혁명을 해야 한다. 민중이 총칼을 들고 일어나 원쑤와 싸워 나라도 찾고 착취와 압박이 없는 새 세상도 세워야 한다.

우리 아버지가 고심하여 찾아낸 결론은 이러하였다. 이것은 다름아닌 무산혁명방침이였다.

무수한 피의 자국만을 남기면서 독립운동이 침체상태에서 헤여나지 못하고있을 때 우리 아버지는 그런 방식으로 해서는 안된다는것을 깨닫고 민중혁명을 주장하였다.

로씨야에서 사회주의10월혁명이 승리한 다음부터 아버지는 공산주의사상에 공감하기 시작하였으며 그후 3.1운동을 계기로 하여 자신의 사상을 정립하고 우리 나라 민족해방운동을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공산주의운동에로 방향전환시켜야 하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가지게 되였다.

아버지는 1919년 7월 청수동회의에서 무산혁명의 력사적필연성을 론증한데 기초하여 8월 중국 관전현 홍통구에서 조선국민회 각 구역장들과 련락원들, 독립운동단체 책임자들의 회의를 소집하고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을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공산주의운동에로 방향전환할데 대한 방침을 정식으로 선포하였으며 시대의 변화에 보조를 맞추어 민족자력으로 일본제국주의를 타승하고 무산민중의 권익을 보장하는 새 사회를 건설할데 대한 과업을 제기하였다.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공산주의운동에로 방향을 전환할데 대한 방침을 제시한것은 반일민족해방운동선상에서 아버지가 이룩한 또하나의 업적이다.

아버지는 무산혁명에 대한 자신의 리념을 늘 먹을것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쌀을 주고 입을것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옷을 주는 새 세상을 만드는것이라고 소박하게 표현하면서 실천활동을 통하여 로동자, 농민을 비롯한 근로민중을 선진사상으로 깨우쳐주었으며 각종 대중단체들을 뭇고 그 조직들을 확대하여 그들을 하나의 혁명력량으로 묶어나갔다.

아버지가 이룩한 업적가운데서 또 하나는 새로운 무장활동준비와 무장단들의 단합을 위한 투쟁에서 얻은 성과였다.

아버지는 《청원》이나 《외교》가 아니라 무장활동을 해야 나라를 찾을수 있다는 확신을 품고 새로운 무장활동준비를 다그치였다.

아버지의 구상은 무산계급출신의 애국적인 청년들을 선발하여 군사간부로 키우며 이미 있는 무장단체들의 지휘관들과 하층병사들을 사상적으로 개조하여 그 대오를 무산혁명을 감당할수 있는 로동자, 농민의 무장력으로 전환시키자는것이였다.

아버지는 이런 방침을 내놓고 독립군 각 부대들에 조선국민회원들을 파견하여 무장대안에서 선진사상을 보급하는 사업과 무기를 구입하는 사업, 군사간부를 양성하고 군대의 전투력을 높이는 사업을 여러 방면으로 지도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무장단들의 단합을 이룩하기 위한 사업에 큰 힘을 넣었다. 그 당시 아버지에게 가장 큰 고충으로 되였던것이 독립운동대렬의 단합문제였다.

그때 간도와 연해주지방에는 많은 독립군부대들과 독립운동단체들이 있었다. 밤을 자고나면 무슨 한족회요, 대한독립단이요, 태극단이요, 군비단이요 하는것들이 하나씩 생겨나던 때였다. 이런 독립운동단체들이 남만지방에만도 무려 20여개나 있었다. 서로 련합을 하고 손발을 잘 맞춰나갔더라면 이 단체들이 큰 힘을 냈을것이다. 그런데 분파쟁이들은 처음부터 다른 단체들을 배척하고 질시하면서 세력다툼만 하였다.

이러한 사태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독립운동대렬이 분렬되여 인민의 버림을 받거나 적들에게 각개격파될 우려가 있었으며 이미 결심한 방향전환의 대업도 추진시킬수 없었다.

이러한 형편에서 아버지는 대한독립청년단과 광제청년단의 알륵이 심해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관전으로 달려가 거기에 며칠동안 머물러있으면서 두 단체의 지도자들을 설복하여 통합을 이룩하게 하였다. 아버지의 노력에 의하여 흥업단과 군비단을 비롯한 압록강연안일대의 무장단체들이 국민단으로 통합되였다.

이미 있는 무장단들의 력량을 로동자, 농민의 출신들로 갱신하여 공산주의운동을 위한 무장활동의 길로 새롭게 출발하며 여러갈래의 무장단들을 통합하여 활동에서 분산성을 없애자는것이 바로 새로운 무장활동을 준비하면서 아버지가 품었던 지향이였다고 할수 있다.

아버지는 생애의 말년까지 방향전환의 방침을 실천하느라고 애를 태웠다. 그러다가 난치의 병을 얻었다.

관전회의에서 공산주의운동에로의 방향전환방침이 선포된 후 민족주의자들속에서는 사상적분해과정이 촉진되였다.

아버지가 병상에 계시던 때는 뜻을 같이하던 사람들가운데서 더러는 잡혀가고 더러는 변절하고 더러는 흩어지다나니 공산주의운동을 하겠다고 주먹을 부르쥐고 뛰여다닐 인물들도 얼마 남지 못했다.

민족주의자들중에서 보수적인 인물들은 여전히 고루한 틀에 얽매여 새것과 담을 쌓고있었지만 적지 않은 선진층 인물들은 새 길을 선택했으며 후날 우리와 손을 잡고 공산주의혁명을 하였다.

공산주의운동을 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사상은 나의 성장에서 큰 자양분으로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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