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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1-6. 나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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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380회 작성일 15-03-08 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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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나의 어머니


내가 팔도구거리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문뒤였다. 천리를 걸으면서 내내 불안에 조이던 마음이 집앞에 다닫자 몹시 긴장되였다.

그런데 어머니의 표정은 뜻밖에도 퍼그나 여유가 있고 침착하였다. 어머니는 두손으로 나를 꼭 부둥켜안고 나는 한번도 그렇게 못해봤는데 너는 혼자서 천리길을 갔다 돌아왔구나, 사내가 다르긴 다르다고 하면서 반가와하였다.

나는 고향소식을 간단히 말씀드리고나서 아버지는 어떻게 되였는가고 물었다. 어머니는 목소리를 낮추어 무사하다고 대답하였다. 다른 말씀은 없었다.

나는 어머니의 기색을 보아 아버지가 급한 고비는 모면하였지만 여전히 위험이 뒤따르며 그 때문에 주변의 눈과 귀를 몹시 조심한다는것을 눈치챘다.

나는 만경대에서 떠날 때 받은 로자를 아껴 사가지고 온 과자를 동생들한테 안겨주고는 온밤 가족들과 함께 쌓이고쌓인 회포를 풀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어머니는 저녁밥을 한상 차려주고는 나보고 여기는 놈들의 감시가 심하니 인차 집을 떠나라고 하였다. 아버지가 있는곳도 안대주고 아버지는 무사히 갔는데 너도 가야겠다고 하였다. 평소에 그렇게도 부드럽고 인자하던 어머니가 그때만은 내 의향이나 심정 같은것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엄동설한에 천리길을 걸어온, 그것도 2년만에 만나보는 자식을 하루밤도 재우지 않고 그날밤으로 또 떠나라고 하는것이였다. 나는 기가 막혀 아무 말도 못하고 덤덤히 서있었다. 동생들까지 데리고 떠나라는 말씀에 겨우 어머니는 어떻게 하겠는가고 물었다.


《나는 신파에 간 삼촌을 기다린다. 삼촌이 돌아오면 여기 세간들을 정리하고 뒤처리를 해야겠다. 너희들이나 빨리 떠나가거라.》

어머니의 말씀이였다.

어머니는 림강 로경두네 집에 가되 아무도 몰래 조용히 떠나야 한다고 당부하고나서 송십장에게 발구부탁을 하였다.

송십장은 부탁을 선선히 들어주었다. 본명은 송병철이였는데 십장들처럼 우쭐렁거리는 버릇이 있다고 하여 팔도구사람들은 이름대신 그를 송십장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이 송십장의 도움으로 발구를 타고 팔도구를 떠나 림강으로 가게 되였다.


내가 일평생 혁명을 하면서 리별도 수많이 해보고 상봉도 수없이 겪어보았지만 이런 특이한 경우는 단 한번밖에 체험해보지 못하였다.

만경대에서부터 근 보름동안이나 걸어와 려장을 풀어보지 못한채 그날밤으로 다시 길을 떠나면서 나는 어머니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였다.

우리 어머니는 성격이 부드럽고 온화하였다. 아버지는 혁명하는 사람으로서 성격이 강의하고 엄한분이였으므로 따뜻한 사랑은 내가 어머니에게서 더 많이 받았다.

내가 2년전에 조국으로 공부를 떠나게 됐을 때 그리도 나를 떼놓기 힘들어하던 인정많은 어머니였다.


만경대의 할머니가 우리 아버지를 범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라고 말씀하였지만 그런 아버지가 옆에 있으니 어떻게 하지 못했으나 실상 그때 나는 말없는 어머니의 눈물을 느끼였다.

성품으로 보아 내가 아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열네살 나는 아이가 천리길을 걸어 집앞에서 날이 저물었다면 억지로라도 끌어들여 따뜻이 먹여주고 재워줄 어머니였다.


어느해 봄날 강건너 후창땅에서 왼다리와 목덜미에 종처가 생겨서 중태에 빠진 아이가 자기 큰아버지 등에 업혀 우리 집으로 온적이 있었다. 부모들이 가정불화로 리혼을 하였기때문에 큰아버지네 집에 얹혀사는 불쌍한 아이였다.


아버지가 진찰을 끝내고 어머니에게 이 아이는 다리를 수술하게 되면 걸어다니지 못하겠는데 치료기간 우리 집에 있게 해야겠다고 말씀하자 어머니는 더 이를데가 있겠느냐고 하면서 한마디로 응하였다. 수술후 매일 한번씩 꿀에다 밀가루와 중조를 반죽하여 아이의 종처에 붙이군 하였는데 그때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도와 약을 붙이는 시중을 하였으며 어지러운 상처를 다루면서도 얼굴색 한번 달리하지 않았다.


이렇게 여러날 지성을 다한 끝에 병이 나아서 아이는 집으로 돌아가게 되였다.

그때 아이를 데리러 왔던 그의 큰아버지가 1원짜리 돈 한장을 아버지에게 드리면서 《치료비를 계산한다면 몇백냥을 드려도 아깝지 않겠습니다만 없는 살림이라 마음뿐입니다. 그저 치료비라고 생각하시고 선생님, 이 돈으로 약주나…》하고는 말끝을 맺지 못하였다.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어머니는 《없이 사는분들에게 치료비라니요. 그건 당치않은 말씀이웨다. 나는 앓는 애를 더 잘 먹이지 못한게 오히려 마음 한구석에서 내려가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도 아이의 큰아버지는 막무가내로 그 돈을 받아달라고 간청하였다. 잘 사는 사람이 그런 청을 한다면 몰라도 산에 가서 솔검불 같은것이나 긁어다 팔아가지고 치료비를 마련할수밖에 없는 사람이 돈1원을 가지고 와서 받아달라고 하니 우리 부모님들도 난처해지지 않을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돌아보며 정녕 우리가 받지 않으면 남의 성의를 무시하는것이니 어떻게 하겠느냐고 하면서 딱해하자 어머니는 《진정이야 받아야지요.》하고는 그 걸음으로 거리에 나가 당목 다섯자를 끊어가지고 돌아와 그 아이에게 주면서 단오도 멀지 않았는데 집에 가거들랑 옷을 해입으라고 말씀하였다. 그때 당목 한자에 35전씩이였으니 결국 환자가 내놓은 1원에 75전을 더 보태여 옷감을 끊어온것이였다.


우리 어머니는 원래 어렵게 살면서도 돈에 대한 타산과 욕심이 없었다.

《사람이 돈이 없어서 못사는것이 아니라 명이 모자라서 못산다.》, 《돈이라는건 있다가 없어지기도 하고 없다가 생기기도 한다.》

이것이 우리 어머니의 철학이였다.

우리 어머니는 이처럼 마음씨가 곱고 온후한분이였다.


간혹 아버지가 언짢은 일이 있어 꾸중이라도 할 때면 《잘못했습니다.》, 《다음에 고칩시다.》라는 식으로 사과를 할뿐 말대답은 하지 않았다. 우리들이 장난을 심하게 하여 옷을 어리럽히거나 물건을 마스거나 집안을 소란스럽게 할 때에도 할머니가 왜 아이들보고 욕을 한마디도 하지 않는가고 나무라면 《거 뭐 잘못한걸 가지고 또 욕을 해서는 뭘하겠어요.》하는 정도의 말씀밖에 안했다.


혁명을 하는 남편을 섬기니 그렇지 사실 순수한 녀성의 각도에서 보면 어머니의 일생은 힘에 부친 고생살이의 련속이였다. 어머니는 아버지하고 단란한 생활을 얼마 해보지 못하였다.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느라고 늘 객지에 나가있으니 자연히 그렇게 되였다. 아버지가 교원생활을 할 때 강동에 가서 한 1년간 좀 재미나는 생할을 하였다고 할가. 그리고 팔도구에 와서 한 1~2년 가정생활을 해보았겠는지.


아버지가 감옥에 들어가고, 감옥에서 나와서는 앓고,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이곳저곳 떠돌아다니고, 아버지가 돌아간 다음에는 나까지 혁명을 하느라고 늘 객지생활을 하다나니 어머니는 단란한 생활을 못해보고 그냥 마음고생을 하면서 일생을 보내였다.


만경대에 있을 때에도 어머니는 열두식구나 되는 큰 집안의 장손며느리로서 늘 바삐 지냈다. 남편의 뒤바라지에 시부모공대는 말할것도 없거니와 집안팎을 거두고 설겆이를 하고 빨래를 하고 길쌈을 하느라고 허리를 펼 사이가 없는데다가 낮에는 농사일로 진종일 밭에 나가있다나니 머리를 들고 해를 쳐다볼 경황도 없었다. 봉건이 심하고 례의범절이 까다로운 그때 큰집의 맏며느리구실을 한다는것이 간단치 않은 일이였다. 어쩌다가 밥을 하였을 때에도 어머니한테만은 가마치가 차례졌고 죽을 쑨 날에는 제일 멀건것을 잡숫군 하였다.


일이 정 고달플 때면 어머니는 삼촌어머니와 함께 례배당으로 가군 하였다. 송산이라면 지금의 군사대학이 있는곳인데 거기에 장로교계통의 례배당이 하나 있었다. 남리와 그 주변에는 기독교를 믿는 신자들이 적지 않았다. 살아서 사람다운 생활을 못하니 예수의 가르침을 잘 따르다가 죽어서 《천당》에라도 가보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다.


어른들이 례배당에 갈 때면 아이들도 따라가서 례배를 보군 하였다. 신자의 대렬을 늘이려고 례배당측에서는 이따금씩 아이들에게 사탕도 주고 공책도 주었다. 아이들은 그것을 받아보는멋에 일요일만 되면 패를 지어 송산으로 밀려가군 하였다.

나도 처음에는 호기심이 나서 동무들과 함께 가끔 송산으로 다니였다. 그러나 동심에 맞지 않는 엄숙한 종교의식과 목사의 단조로운 설교에 싫증을 느낀 다음부터는 례배당에 잘 다니지 않았다.


어느 일요일날 나는 할머니가 달여준 콩엿을 먹으면서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오늘은 례배당에 안갈래요. 례배를 구경하는게 재미없어요.》

아버지는 아직 철부지라고 할수밖에 없는 나어린 나를 앉혀놓고 이런 말씀을 하였다.

《가고 안가는거야 네 마음대로지. 사실상 례배당이라는데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안가도 좋다. 너는 예수보다도 자기 나라를 더 믿고 자기 나라 사람들을 더 믿어야 한다. 그리구 나라를 위해서 큰일을 할 생각을 해야 한다.》


이런 말씀을 들은 다음부터 나는 례배당에 잘 다니지 않았다. 칠골에서 학교를 다닐 때에도 례배당에 다니지 않는 학생들을 통제하였지만 한번도 가지 않았다. 나는 예수의 복음이 우리 인민이 겪고있는 비극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였다. 예수의 교리가운데 인도주의적인것도 많았으나 민족의 운명을 두고 깊은 고뇌에 빠져있던 나에게는 구국에로 부르는 력사의 웨침소리가 그보다 더 절박하게 들리였다.


사상으로 보면 아버지도 무신론자였다. 그러나 신학을 가르치던 숭실중학교 출신이였기때문에 아버지의 주위에는 교인들이 많았고 따라서 나도 교인들과의 접촉을 많이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성장과정에 기독교적인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는가고 묻는데 나는 종교적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기독교신자들에게서 인간적으로 도움은 많이 받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상적영향도 주었다.


온 세상 사람들이 평화롭고 화목하게 살기를 바라는 기독교정신과 인간의 자주적인 삶을 주장하는 나의 사상은 모순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어머니가 례배당에 갈 때에만 송산으로 다니였다.

어머니는 례배당에 다니였지만 예수를 믿지 않았다.

어느날 나는 어머니에게 슬그머니 물어보았다.

《어머니, 어머니는 〈하느님〉이 정말 있어서 례배당에 다니시나요?》

어머니는 웃으면서 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무엇이 있어서 다니는건 아니다. 죽은 후에 〈천당〉가서는 뭘하겠니. 사실은 너무 피곤해서 좀 쉬자고 간다.》


그 말씀을 들으니 어머니가 불쌍하고 더 정이 들었다. 어머니는 례배당에서 기도를 드리다가도 피곤에 못이겨 졸군 하였다. 그러다가 목사가 뭐라고 한 후 모두가 《아멘》하고 일어날 때에야 잠에서 깨여났다. 《아멘》소리가 난 뒤에도 잠에 몰려 깨여나지 못하면 내가 슬그머니 흔들어서 어머니에게 기도가 끝났다는것을 알려드리군 하였다.


어느날 저녁 나는 아이들과 같이 만경대뒤고개에 있는 상구막앞을 지나게 되였다. 동리에서 장례를 지낼 때 쓰는 상구를 보관해두는 막이였다. 우리들은 어렸을 때 그 상구막을 몹시 무서워하였다.

우리가 그 막앞을 지날 때 한 아이가 《야, 저기서 귀신이 나온다.》하고 소리쳤다. 그바람에 우리는 막에서 정말 무엇이 나오는것 같아서 신발이 벗겨지는줄도 모르고 냅다 뛰였다.


그날저녁에는 모두 무서워서 집에도 돌아못가고 동무네 집에서 자다가 새벽녘에야 집에 돌아오면서 신들을 얻어가지고 갔다.

집에 돌아와서 그 사연을 이야기했더니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는것이였다.

《그런곳을 지날 때에는 노래를 불러라. 노래를 부르면 무엇이든지 무서워 못나온단다.》

노래를 부르면 무서운 기운이 없어지리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가르쳐주었을것이다. 그

후부터 나는 노래를 부르며 그 상구막앞을 지나다니군 하였다.


평시에는 이처럼 온순하고 무던한 어머니였지만 적들앞에서는 기상이 도도하고.

봉화리에서 아버지를 체포해간 일제경찰들이 몇시간후 우리 집에 달려들어 수색을 할 때였다. 그들이 비밀문건을 찾아내려고 집안을 뒤지기 시작하자 어머니는 성이 나서 《볼테면 보라!》하고 자신의 손으로 옷가지들을 막 내던지고 찢어내치면서 무서운 기상으로 맞섰다. 그러자 놈들은 기가 죽어서 어쩌지 못하고 돌아가버렸다.

우리 어머니는 이런 어머니였다.


그날밤따라 압록강가에서는 눈보라가 몹시 세차게 일었다.

수림을 통채로 쓸어버릴것 같은 사나운 바람소리와 맹수의 울음소리로 가득찬 심야의 어둠은 내 마음속에 자리잡고있던 망국의 상처를 더 아프게 건드려놓았다.

나는 무서워 떠는 동생들을 꼭 껴안고 어두운 두 나라 지경의 얼음우로 발구를 타고가면서 참으로 혁명의 길은 간단치 않고 어머니의 사랑 또한 쉽지 않은것이구나 하는것을 느끼였다.


우리는 셋이 다 추워서 이불을 들쓰고 우들우들 떨었다. 캄캄한 밤이였으므로 동생들은 그냥 무섭다고 하면서 내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오구비라는 조선쪽 기슭에서 하루밤을 자고 다음날 림강에 도착하였다.

알고보니 로경두라는 사람은 전에 우리가 림강에서 살 때 집을 주선해주고 아버지한테 자주 찾아와 국운을 운운하군 하던 구면의 객주집주인이였다. 그는 우리 형제들을 큰 손님처럼 따뜻이 맞이해주고 환대해주었다.


그 집은 7칸짜리 량통집이였는데 우리는 제일 조용한 두번째 건너방에 있었다. 부엌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는 객방이 세개나 있었다. 그 방들은 늘 손님들로 붐비였다. 만주에서 림강을 거쳐 조선으로 나가는 사람들이나 조선에서 림강을 거쳐 만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 객주집에 들렸다가 떠나군 하였다. 로경두의 집은 독립운동자들의 숙박소나 다름없었다.


로경두는 반일사상이 강한 민족주의자로서 성격이 온화하면서도 고집이 세고 강의하였다. 그는 객주업을 하면서 거기서 나오는 수입금의 일부로 독립운동자들을 지원하고있었다. 밥장사나 하면서 그날그날을 근근히 살아가는 형편이였으므로 그것도 한개 로동이라고 말할수 있었다. 그가 어떻게 되여 림강에 자리를 잡게 되였는지 그 내막은 나도 똑똑히 알수 없다. 그때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로경두는 독립운동자금을 뽑으려고 중석광을 실어내가는 어떤 사건에 관련되여 한동안 단동지방에 숨어살다가 사건이 가라앉은 다음에 더 안전한 피신처를 찾아 림강에 이주했다는것이였다.


그의 본적지는 대동군 고평면 하리였다. 하리는 순화강을 사이에 두고 우리 고향 남리와 맞닿아있는 동네이다. 로경두는 원래 착실한 농사군이였던것이 우리 아버지를 알게 된 다음부터 집에는 얼마 있지 않고 내내 독립운동을 한다고 하면서 나돌아다녔다고 한다. 그래서 농사도 안하고 장돌뱅이노릇을 한다고 온 집안의 미움을 샀다는것이다. 그는 썰물이 지면 순화강을 건너 남리에 와서 우리 아버지를 만나군 하였다. 이런 연고가 있어서 그런지 로경두는 우리를 잘 먹여주고 잘 보호해주었다.


나와 우리 가정에 있어서 로경두는 큰 은인이였다. 한달 가까이 객주집에 있는동안 그는 자기 집의것을 다 퍼내여 우리들의 시중을 들어주면서도 다른 기색을 전혀 나타내지 않고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우리를 대해주었다. 한번은 자기 돈을 내여 무송에 계시는 아버지에게 장거리전화까지 걸도록 해주었다. 그 덕에 나는 난생 처음 전화를 해보았다. 그때 아버지가 아이들의 목소리를 다 듣고싶다고 하는바람에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와 함께 한번씩 다 전화를 해보았다.


어머니는 약속한 날자에 형권삼촌을 데리고 림강에 왔다. 오자마자 시가지구경을 하자고 하면서 우리를 데리고 중국료리집으로 갔다. 우리들에게 교즈 한그릇씩 사주고는 이것저것 물었다.


처음에는 한달 가까이 남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해온 자식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푸짐히 먹이고싶어 그러는가보다고 심상하게 따라들어갔는데 실상은 음식보다도 그동안 우리가 지내온 경위를 듣고싶어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사이 객주집에 수상한 사람들이 나타나서 너희들을 찾는 일이 없었느냐, 누구네 집에 놀러갔다가 온 일은 없었느냐, 너희들이 로경두네 집에 와있다는것을 아는 사람들이 몇이나 되느냐, 이렇게 일일이 묻고나서 어머니는 우리에게 어데 나가서 김형직의 아들이라는 말을 절대로 입밖에 내지 말라는것과 새고장으로 떠나갈 때까지 매사에 단단히 주의해야 한다는것을 곱씹어 당부하였다.


림강에 와서도 어머니는 역시 우리들때문에 발편잠을 자지 못하였다. 깊은 밤 밖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잠자리에서 일어나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군 하였다.

자식들에게 무슨 화라도 미칠가보아 한시도 마음을 못놓는 저런 어머니가 림강으로 우리를 떠밀어보내던 그날은 어쩌면 그렇게도 단호한 태도를 취할수 있었을가?!


생각하면 그것은 참된 어머니의 사랑, 혁명적인 사랑이였다.

이 세상에서 어머니의 사랑처럼 따뜻하고 진실하고 변함없는 사랑은 없을것이다. 꾸짖어도 매질을 해도 아프지 않은것이 어머니의 사랑이며 자식을 위해서라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오는것이 어머니의 사랑이다. 그 사랑은 대가를 모른다.

그 시절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이따금씩 내 꿈에 나타나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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