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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3-5. 단결의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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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352회 작성일 15-03-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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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단결의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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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이 꾸려지고 늘어나는데 따라 우리는 실천투쟁에 들어갔다.

그 서막으로 된것이 1928년 여름에 있은 길림육문중학교 동맹휴학이였다.


그때까지 육문중학교에서는 식당과 재정관리, 도서관운영에 이르기까지 학교관리운영에서 제기되는 여러가지 문제들을 진보적인 교원들과 학생들의 민주주의적의사에 따라 순조롭게 풀어나가고있었다. 교내에서의 우리의 활동도 큰 구속을 받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게 진행되였다. 이것은 육문중학교 학생들이 학교교무위원회와의 협동밑에 투쟁을 통하여 쟁취한 열매였다.


그런데 군벌들의 조종을 받고있던 반동교원들은 교직원, 학생들의 공동의 노력에 의하여 정착된 이 민주주의적질서를 조금도 달가와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이 질서를 파괴하고 학교운영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를 자기들의 의사대로 좌지우지하려고 하였다.

교육청이 파견한 육문중학교 교원들가운데는 후각이 예민한 군벌의 앞잡이들이 있었다. 교무주임, 훈육주임, 체육주임과 같은 반동교원들은 모두 적의 특무기관에 매수된자들이였다. 그들은 군벌정권을 추종하는 지주, 관료출신의 보수적인 학생들과 불량청년들을 내세워 학생들의 사상동향과 혁명조직들의 움직임을 무시로 내탐하였다.


1928년 여름에 우리는 교내에서 일제의 강도적인 제2차 산동출병과 제남에서의 학살만행을 규탄하는 대중적인 항의운동을 매일과 같이 벌리였다.

산동출병은 다나까의 대중국외교의 시금석으로 불리우고있는 주요한 사건이다.

일본이 산동지방에 처음으로 출병한것은 1927년 5월 다나까 기이찌내각이 성립된 직후였다. 그때 장개석의 국민혁명군은 장작림의 봉천군을 추격하여 산동반도일대에 진출하고있었다. 다나까내각은 북벌군의 진격으로부터 자기들의 손때를 묻혀가며 길들인 장작림군벌을 옹호하기 위하여 일본인의 생명, 재산을 보호한다는 구실밑에 려순주둔군 2,000명을 청도에 파견하였으며 그후 다시 본토에서 2,000명의 증원군을 뽑아 산동지방에 파병하였다.


1차 출병으로 북벌이 정지되고 장개석이 산동지방 일본거류민들의 생명재산의 안전을 담보했기때문에 일본군은 그해 가을에 산동에서 철병하였다.

그러나 1928년 봄에 북벌혁명이 재개되자 파쑈적인 다나까내각은 2차로 출병을 결정하고 천진주둔군과 본토의 구마모도사단 5,000명을 동원하여 산동반도의 철도연선들을 차지하고 청도와 제남을 점령하였다. 때를 같이하여 장개석의 국민혁명군도 제남에 입성하였다. 두 나라 군대사이에는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일본점령군은 제남에서 수많은 중국인들을 야수적으로 학살하였다. 국민당정부의 외교관도 일본군에 의하여 살해되였다.


3차에 걸치는 일제의 파렴치한 산동출병은 조중인민들속에서 배일감정을 폭발적으로 야기시키였다. 일본국내에서도 강력한 반대운동이 일어났으며 다나까외교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일본이 산동에 군대를 파견한 최종적인 목적은 만주와 화북지방을 중국에서 떼내여 저들의 식민지로 만들려는데 있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지탱점이 필요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장작림이였다. 장작림을 잘 길들이고 후원하면 만주를 쉽게 정복할수 있다는것이 일본사람들의 타산이였다. 제남에서 울린 총소리는 후날 중국땅에서 수천수만명의 인명을 앗아가게 될 야수적인 대도살을 예고하는 위험신호였다. 일제가 출병의 구실을 얻기 위해 자기들의 거류민까지 서슴없이 학살할 때 중화민족은 그들이 장차 자기들에게 어떤 재난을 강요하리라는것을 예감하였다.


우리는 일제의 침략정책과 국민당의 반역행위를 폭로하는 강연회, 웅변대회, 성토대회를 련이어 열고 학생들의 기세를 돋구었다.

반동교원들은 그것을 공산주의선전이라고 하면서 탄압의 구실로 삼았다. 그들은 도서관을 불의에 습격하여 진보적인 도서들을 회수해가지고 가서는 마치 큰 단서라도 잡아쥔것처럼 조선학생들을 다 퇴학시키라고 리광한교장에게 압력을 가하였다. 조선학생들은 공산주의주동분자가 아니면 《일본간첩》들이고 중국교원들을 적대시하기때문에 그들을 그냥 두고서는 소란스러워 수업을 계속할수 없다는것이였다. 우파계렬의 학생들은 이에 장단을 맞추어 학교에 세워진 민주주의적질서를 제멋대로 위반하면서 진보적학생들을 모욕하고 교장과 선진적인 교원들을 비방중상하였다.


상월선생도 그자들의 첫째가는 공격대상이 되였다.

반동교원들과 그들의 조종을 받는 학생들의 무례한 행위를 그대로 내버려두고서는 학문연구도 청년운동도 마음놓고 할수 없었다. 우리는 조직된 력량으로 반동교원들을 몰아내고 교내에 세워진 민주주의적질서를 지키기 위하여 공청과 반제청년동맹원들을 발동하여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우리가 내놓은 요구조건은 다음과 같은것들이였다.

첫째, 학생들에 대한 대우를 개선할것.

둘째, 학생들이 요구하는 학과목들에 대한 수업을 보장할것.

셋째, 진보적교원들과 교장에게 압력을 가하지 말것.

진보적인 교원들도 학생들의 요구조건을 해결해주지 않으면 사회적힘을 개입시키겠다고 성공서에 압력을 가하였다. 반동교원들을 쫓아내라는 삐라와 격문들이 시내도처에 나붙었다. 그런 선전물들은 반동교원들의 숙소와 성공서에도 날아들었다.

육문중학교안에서 동맹휴학이 고조되자 시내의 다른 학교들에서도 이에 호응할 태세를 보이며 성공서에 압력을 가하였다.

성공서에서는 동맹휴학이 온 시내에 파급될 기미가 보이자 하는수없이 훈육주임을 비롯한 반동교원들을 파면시키고 우리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이였다.

이것은 우리가 대중투쟁에서 얻은 첫 승리였다.


이 과정에 우리는 과녁을 똑바로 정하고 군중을 잘 조직동원하면 투쟁에서 승리할수 있다는 신심을 얻었다.

동맹휴학에서 첫 승리를 얻고나니 경험도 생기고 단련도 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청년학생들이 우리를 더욱 믿고 따르게 되였다.

우리는 동맹휴학에서 얻은 성과를 총화하고 앙양된 청년학생들의 기세를 보다 큰 규모의 적극적인 반일투쟁에로 조직동원할 준비를 하였다.


오래전부터 만주침략의 준비를 서두르던 일제의 책동은 이 시기에 와서 더욱 로골화되였다.

1928년 5월에 일본관동군 사령관 무라오까는 중국관내에서의 정세변화에 대처한다는 구실밑에 혼성 제40려단을 봉천(오늘의 심양)에 진출시키고 자기네 군사령부를 그곳에 옮길것을 획책하였다. 련이어 베이징으로부터 봉천으로 돌아오는 장작림을 봉천입구의 남만철도와 경봉철도가 교차되는 철교에서 렬차폭파사건을 조작하여 살해하였다. 이것은 다 만주침공의 구실을 얻기 위한 고의적이고 계획적인 예비작업이였다.


일제가 만주를 먹게 되면 중국 동북지방을 투쟁무대로 삼고있는 우리의 활동에는 커다란 장애가 조성될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만주가 중국땅이기때문에 일제가 조선의 공산주의자들과 독립운동자들을 마음대로 어쩌지 못하였지만 만주가 강점되는 날에는 문제가 달랐다.

세차례에 걸치는 산동출병으로 장개석을 제압하고 중국대륙에 촉수를 깊숙이 뻗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만주침략을 위한 군사적준비를 착착 진척시키는 한편 그 준비작업의 한 고리로서 오래전부터 추진시켜온 길회선철도부설공사를 완공하려고 서둘렀다. 길회선이란 만주의 성소재지 길림과 조선의 북부국경도시 회령사이를 련결하는 철도를 말한다.


일본이 길림ㅡ회령사이에 철도를 강제로라도 부설하여야겠다는 야심을 품은것은 명치시대부터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이 철도에 거대한 전략적의의를 부여하고있었다.

다나까내각은 이른바 《동방회의》라는것을 한 다음 천황에게 낸 《상주서》에서 길회선철도부설을 비롯한 만몽철도의 의의를 두고 일본의 대륙정책의 열쇠라고 지적하였다.


구라파에서 처음으로 세계제패론을 고창한 히틀러의 《나의 투쟁》과 같이 세계제패의 야욕과 망상으로 일관된 악명높은 이 《상주서》에서 제기된 일차적인 국책이 만몽을 침략하는것이며 이 침략을 보장하는 선결적인 공간이 다름아닌 길회선철도를 포함한 만몽5철도부설에 있었다는것은 세상이 다 알고있는 사실이다.

이 《상주서》에서 다나까는 만약 길림ㅡ회령철도를 비롯한 만몽5철도가 완성된다면 전만주와 조선을 련결하는 대우회선을 얻게 되고 북만주로 통하는 직통선을 얻게 되므로 병력과 필요한 전략물자들을 아무데나 다 보낼수 있고 조선의 민족해방운동까지도 탄압할수 있다고 시사하였다.


일본의 영악한 두뇌들은 길회선이 완공되여 군대와 화물을 쯔루가ㅡ청진ㅡ회령ㅡ길림으로 수송하게 되면 로정도 줄일수 있고 군대와 물자의 기동시간도 훨씬 단축할수 있다고 보았다.

일제가 길회선철도건설을 국책으로 선포하고 온갖 우여곡절을 다 겪으면서도 무려 26년이라는 막대한 시간을 들여 그것을 끝끝내 완공한 리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중국의 광범한 인민들과 청년학생들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부패무능한 청조말기의 관리들과 맺은 부당한 조약을 구실로 삼아 만주땅에서 철도부설권을 제멋대로 행사하는것을 중화민족에 대한 침해로 받아들이였으며 외자차입에 의한 철도부설협약을 결사적으로 반대하면서 그것을 철회시키기 위하여 대중적으로 궐기하였다.


그러나 반동군벌들은 인민들의 정당한 요구에 귀를 기울일 대신 돈도선건설을 강행하려고 책동하는 한편 1928년 11월 1일로 예정된 길돈선철도개통식을 성대히 하여 국민의 환심을 사려고 하였다.


길회선철도부설공사를 저지시키기 위해서는 과감한 실력투쟁이 필요하였다. 이런 투쟁은 적들에게는 조중인민이 만주강점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경종으로 될것이며 광범한 대중에게는 일제의 만주침공을 반대하는 항쟁의 신호로 될것이였다.

우리는 길회선철도부설공사를 반대하는 대중적인 반일투쟁을 조직하기 위하여 1928년 10월상순 북산공원의 약왕묘 지하실에서 공청과 반제청년동맹 조직책임자들의 회의를 하였다.

그 회의에서는 투쟁과정에 내들어야 할 구호와 투쟁방법, 행동방향을 토의하고 구체적인 분공조직도 하였다.

시위에 들고나갈 프랑카드와 성토문, 삐라에 담을 내용도 상세하게 토론하였다.


우리는 길회선철도부설을 반대하는 투쟁이 반드시 조중인민의 공동투쟁으로 되여야 한다는 립장으로부터 삐라, 성토문, 프랑카드를 비롯한 모든 선전물들을 조선글로도 쓰고 중국글로도 쓰기로 하였다. 거리에서 하는 선동연설도 두 나라 말로 하기로 하였다.

회의에서는 투쟁기간 시내 각 학교들에 조직되여있는 학생자치회와 류길학우회, 소년회와 같은 합법적조직들을 많이 발동시키고 공청이나 반제청년동맹과 같은 비합법적조직들은 될수록 표면에 나서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북산에서 회의를 한 후 우리는 시위준비를 위해 밤잠을 잊고 뛰여다니였다.

그때 선전대에 있은 한영애가 수고를 많이 하였다.

한영애는 류길학우회 성원으로 있을 때 연예공연과 독서발표모임을 통해 우리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여 공청원으로 성장한 길림녀자중학교 학생이였다. 온순하고 말수더구가 적어 보통때에는 어디에 있는지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처녀였다.

하지만 한영애는 혁명에 도움을 주는 일이라면 천한 일, 어려운 일을 가리지 않았다. 연예공연때에는 남들이 담당하기 싫어하는 역을 자진하여 맡아나섰고 독서회에서 교재가 필요할 때에는 수백페지나 되는 책을 자발적으로 등사하여 동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한영애는 시위투쟁준비를 위하여 밤잠을 거의 자지 않았다. 그는 남의 집 허청간에 등사기를 옮겨다놓고 몇명의 소년회원들과 함께 격문과 삐라를 수만매나 찍어냈다. 가두에서는 수백명의 청중들을 앞에 놓고 조선말과 중국말로 열화같은 연설을 하여 녀성웅변가로 유명해졌다.


내가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책임자로서 중국의 청년학생들한테까지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은것은 우리가 길림에서 일찍부터 공산주의운동의 기치를 들었기때문이였다. 우리가 공산주의운동을 시작하던 그때로 말하면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조차 생기지 않았을 때였으며 길림시내에 공청원이 얼마 없을 때였다.


나는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의 사업을 하면서 중국계통으로도 공청사업을 하였다. 공청조직에서 우리가 책임적인 역할을 하다나니 많은 중국청년들이 우리를 따랐다. 길림사범학교 공청소조책임자였던 조아범이나 돈화지구에서 공청사업을 맡아하던 진한장도 우리와의 련계밑에 공청활동을 하던 사람들이였다.


시위준비를 다그치던 우리는 철도당국자들이 1928년 11월 1일 길돈선철도개통식을 하기로 하였다는 정보를 얻게 되였다.

우리는 시위시작날자를 본래 계획했던것보다 며칠 앞당기였다. 그것은 길회선철도부설반대의 봉화를 올리면서 동시에 길돈선철도개통식도 파탄시키자는것이였다.


1928년 10월 26일 새벽 선전대는 날이 새기 전에 길림의 거리들에 삐라를 뿌리고 격문을 붙이였다. 2~3명으로 무어진 소년회의 감시조들도 날이 밝자 지정된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날 아침 각 학교의 학생들은 약속된 시간에 일제히 교정에서 모임을 가지고 길회선철도부설을 반대하는 성토문을 발표한 다음 가두시위에 들어갔다. 거리는 삽시간에 수천명의 학생들로 차고넘치였다. 그들은 《일제침략자들을 타도하자!》, 《일제의 길회선철도부설공사를 반대하여 투쟁하자!》는 조선글로 된 프랑카드와 《타도 일제》, 《타도 매국노》, 《회수길회선》이라고 중국글로 쓴 프랑카드들을 들고 거리를 누비면서 신개문밖에 있는 성의회마당으로 모여들었다.


수백명의 군대와 경찰이 대렬의 앞길을 가로막아나섰다.

군경들과 맞다든 대렬은 구호만 웨치면서 우리의 지시를 기다리고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지 시위대렬을 앞으로 전진시켜야 했다.

우리는 시위군중을 보위하기 위하여 로동자들과 시주변의 농민들, 학생들로 조직된 규찰대를 발동시키였다.

대렬은 규찰대를 선두로 어깨를 겯고 군경들의 총검을 헤치면서 앞으로 나갔다. 성의회마당에서는 군중대회가 진행되였다. 나는 광장에 모인 수천명 군중들에게 조중청년학생들은 단결하여 일제의 길회선철도부설을 반대하여 견결히 싸우자고 호소하였다.


모임을 끝낸 군중은 더욱 기세충천하여 일본령사관이 자리잡고있는 신시가쪽으로 행진해갔다. 평시에는 령사관경찰의 행패가 심해서 좀처럼 발길을 돌리지 않던곳이였다. 일본령사관앞에서 반일구호를 힘있게 부르며 기세를 올린 시위군중은 대마로, 북경로, 중경로, 상의가 등 길림의 여러 거리를 뒤덮으며 시위를 계속하였다.


길림의 시위투쟁에서 타격을 받은 일제의 철도회사는 길돈선철도개통식을 무기한 연기하였다. 일본장사군들은 상점을 버리고 자기들의 령사관으로 도망쳐들어갔다. 남만철도회사에서 운영하는 동양병원의 유리창도 박산났다.

시위투쟁은 날이 갈수록 더욱 고조되였다.

학생들은 여러개조로 나뉘여 시내 십여개소에 연단을 설치하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길회선철도부설을 반대하는 가두연설을 하였다.


길림에서 시작된 반일투쟁은 만주전지역에 번져갔다. 장춘의 청년학생들과 시민들은 우리의 투쟁에 호응하여 타도제국주의와 6대철도반대 구호를 들고 치렬한 투쟁을 벌리였다. 그들은 길장철도국장의 집도 습격하였다.

할빈과 천진에서도 수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결사적인 련대투쟁을 벌리였다.

연길지방 조선동포들도 떨쳐나섰다. 국내의 신문들도 우리의 투쟁을 련일 보도하였다.


시위가 점점 더 큰 규모로 확대되였을 때 우리는 일본상품배척투쟁을 힘있게 밀고나갔다. 군중은 일본인상점들에서 일본상표가 붙은 상품들을 거리에 끌어내다가 모조리 불태워버리였다. 어떤 상품들은 송화강에 무데기로 쓸어넣었다.


길회선철도부설을 반대하는 투쟁이 일본상품배척투쟁과 결합되여 전면적인 반일투쟁에로 점점 더 크게 번져가는데 당황한 일제는 반동군벌을 사촉하여 시위군중에게 총을 마구 쏘아대는 야수적만행을 감행하게 하였다.


그때까지 우리는 반동군벌들을 견제하는 립장에 서있었다. 그러나 군벌당국이 일제의 편을 들어 우리를 탄압해나서는만큼 우리도 그들을 견제하는 립장에만 서있을수 없었다. 우리는 《일제와 결탁한 반동군벌타도》의 구호를 들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장례식과 결합된 보다 대규모적인 시위로 넘어갔다. 이날의 시위는 많은 시민들까지 합세하여 최대의 규모를 이루었다.

투쟁은 무려 40여일동안이나 계속되였다.


일제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봉천에 체류중이던 장작상을 다급히 불러들이였으나 길림독군서의 회유무마책으로써는 대중의 고조된 투쟁기세를 꺾을수 없었다.

길회선철도부설반대투쟁으로 하여 일제가 받은 타격은 컸다. 그가운데서도 그들을 놀라게 한것은 조중인민이 단결하여 일제의 만주강점에 항거해나선것이였다.

민족주의자들과 일제의 침략에 겁을 먹고 도망칠 궁리만 하던 사람들도 길회선철도부설을 반대하는 우리의 투쟁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까지 민족주의자들은 우리 청년학생들을 대수롭지 않게 보아왔었다. 그런데 10대, 20대의 청년학생들이 자기들로써는 엄두도 낼수 없는 큰일을 해제끼는것을 목격하고는 우리를 다른 눈으로 보게 되였다. 그때부터 그들은 민족해방투쟁무대에 기성세대와는 전혀 다른 새 세대의 참신한 세력이 등장하였다는것을 인정하고 우리를 소홀히 대하지 않았다.


우리는 길회선철도부설반대투쟁을 통하여 대중의 힘은 무궁무진하다는것을 다시금 똑똑히 깨닫게 되였으며 대중을 옳게 조직하면 그 어떤 총칼로도 꺾을수 없는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는것을 더욱 확신하게 되였다.

대중의 힘에 대한 나의 신념은 더욱 확고해졌다. 대중에 대한 우리의 령도방법도 이 투쟁을 통해 더욱 세련되였다. 실천투쟁속에서 나도 단련되고 조직도 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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