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와 더불어 21-2. 중국인지주 류통사 > 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21-2. 중국인지주 류통사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8,611회 작성일 16-02-21 21:44

본문

2. 중국인지주 류통사


56CA91C23C77E4002A




해방후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팽진을 만나주신 일이 있다. 그이께서는 그날 조중량국 인민들과 공산주의자들이 항일의 구호를 높이 들고 무장투쟁을 벌리던 시절에 대해서 감회깊이 추억하시였다.

팽진은 민족해방을 위한 공동투쟁에서 조선인민과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발휘한 숭고한 계급적우의와 프로레타리아국제주의정신을 높이 평가한 다음 동북해방작전당시 많은 중국인지주들이 조선인민혁명군 사령관 김일성이라는 서명날인이 있는 확인서를 내보이면서 지난날 자기네가 항일련군을 도와준 사실에 대해 력설하더라는것을 여담삼아 말씀드리였다. 동북해방작전당시 팽진의 직함은 동북민주련군 정치위원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후 항일혁명투쟁사 연구자들이 그 확인서와 관련하여 제기한 질문에 대답을 주시면서 다음과 같은 회억의 말씀을 하시였다.


확인서이야기가 나오니 류통사가 생각납니다. 류통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원군확인서가 어떤것인지 잘 알수 있을것입니다.

류통사는 우리가 백두산동북부로 활동무대를 옮긴 다음 화룡현에서 만난 유명한 중국인부호입니다. 장백현에서 만났던 조선인애국지주 김정부에 못지 않게 우리와 깊은 인연을 맺었던 사람입니다.

그의 본명은 류의현입니다. 조선말을 모국어처럼 류창하게 하는 그는 중국사람들과 조선사람들사이에 의사를 소통하여야 할 일이 생기면 스스로 통역을 맡아나서군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류통사라고 불렀습니다. 통사란 지금말로 통역이라는 뜻입니다.

백두산동북부로 넘어가 올기강전투를 한 다음에 우리는 화룡과 국내 삼장 지구, 안도현일대를 한바퀴 돌고 올기강밀영에 머물러있으면서 정치군사활동을 맹렬히 벌리였습니다.

그 당시 기본부대는 다른곳에 가있었고 사령부에는 기관총소대와 경위중대 대원들이 있었는데 식량부족으로 큰 곤난을 겪고있었습니다. 밀영부근에 있는 조선사람들은 다 가난한 농민들이여서 우리를 도와주고싶어도 도와주기가 힘들었습니다.

공작원들의 말을 들어보면 우리 부대가 자기네 관할구역에 나타나자 화룡현의 적들은 혁명군이 와서 쌀을 빼앗아간다고 선전하면서 지정된 몇몇 장소에 식량을 다 모아놓고는 하루 한사람당 식량소비기준을 정해놓은 다음 부락에서 달구지를 가지고오는 대표들에게 이틀치씩 내준다는것이였습니다. 지어 적들은 현내 주민들에게 석유를 두병씩 구해놓게 하고 혁명군이 와서 식량을 요구할 때에 거기에다가 쏟아부으라고 강요한다고 했습니다.

나는 식량문제의 해결책을 찾으려고 고심하던중 어떤 마을에 들어가서 주민들과 담화를 하다가 그전날 소왕청유격구역에서 살다가 유격구가 해산될 때 화룡현으로 왔다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과 담화를 하는 과정에 중국인부호 류통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게 되였습니다.

류통사만 쟁취하면 반일애국력량을 장악하는데도 좋고 후방물자들도 해결할수 있을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주재일이나 강위룡과 같이 입대전에 화룡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에게 기대를 걸어서는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오히려 류통사가 한때 자위단장까지 한 지독한 반공분자이기때문에 징벌하자는 의견까지 제기하였습니다. 주재일과 강위룡은 류통사의 내막을 비교적 상세히 알고있는 사람들이였습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류통사네는 화룡현 소재지에서 약 30리가량 떨어진 우심산기슭에서 산다고 하였습니다. 그 마을을 룡담촌이라고 불렀던것 같습니다. 류통사네 집은 네귀에 포대를 박은 긴 토성안에 들어앉은 어마어마하게 큰 집이였습니다.

류통사의 형은 그때 이미 칠순이 넘은 늙은이로 앉아서 가문의 좌상대접만 받고있었고 둘째인 류통사자신은 가문의 기둥으로서 관청 같은데 드나들며 주로 바깥일을 맡아보았습니다. 셋째 류의청은 서사들을 거느리고 재산관리를 하였습니다.


항일혁명투사 리봉록과 박정숙의 말에 의하면 류통사네 집에서는 토지만 해도 100상이나 가지고있었다고 한다. 한상이 3,000평이니 100상이면 30만평, 즉 100정보나 되는 광대한 토지이다. 류통사네는 콩기름공장, 분탕공장, 양조장도 경영하고있었고 여러개의 상점들도 가지고있었다. 화룡시내에는 백화점, 음식점, 소금전매점 같은것을 두고 대리인을 시켜 운영하였다고 항일혁명투사들은 회상하고있다.


류통사네 집안은 재산이 많은것으로도 유명하였지만 반공을 하는데서도 이름이 높았습니다. 화룡출신의 유격대원들은 그 가문 사람들을 가리켜 악질중에서도 가장 나쁜놈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류통사의 아들이 화룡시내에서 위만경찰관노릇을 하는것만 보아도 그 집안이 어떤 집안인가 하는것을 알수 있지 않는가 하는것이였습니다. 류통사의 아들은 경찰관이라는 권세를 가지고 인부들이나 작인들을 총칼로 꼼짝달싹 못하게 하고 또 그 아비인 류통사는 공산당과 연줄이 있다고 짐작되는 집사람들을 아들네 경찰서에 알려 문초를 받게 하든가 소작권을 박탈하는 방법으로 살길을 끊어놓는다는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류통사네를 당장 징벌하고 그 가문재산을 강제로 수탈하자는 일부 사람들의 제기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김정부와의 관계에서 얻은 교훈이 있는데다가 어떤 사람들은 류통사에 대하여 달리 평가하고있기때문이였습니다. 그래서 류통사에 대하여 깊이 료해해보지도 않고 서뿔리 아무렇게나 처리할수 없었습니다.

내가 류통사에 대하여 달리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고 느끼게 된것은 그가 조선말을 잘한다는 사실과 군중들과 허물없이 어울린다는 점이였습니다.

또 일부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는 관청에서 조선인작인문제가 제기되면 스스로 통역을 서주면서 작인들의 역성까지 들어주는 일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도 좋으면 좋았지 나쁠것은 없었습니다.

그가 나라를 잃고 남의 땅에 와서 고달프게 살아가는 조선작인들을 불쌍하게 여기며 특별히 돌보아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우복동에 사는 류통사의 작은댁이 조선녀성이라는 말도 있었는데 그것도 흥미있는 소리였습니다.

이국살이를 하는 조선농민들을 동정하고 조선녀성을 작은 댁으로 두고있으며 조선 말과 풍습까지 좋아하는 사람이 왜 어떤 사람들로부터는 천하에 못된 악질지주라는 평을 받고있는가? 어째서 동정심이 많다는 류통사가 주재일이나 강위룡과 같은 가정들에 대해서는 경찰서걸음을 시키며 못살게 굴었는가?

나는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하여 우리 동무들을 룡담촌에 파견하였습니다. 그들이 룡담촌에 가서 류통사에 대한 자료를 많이 료해해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되여 류통사가 공산주의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척을 지게 된것이 바로 5.30폭동때문이였다는것이 비로소 밝혀졌습니다.

동무들도 잘 알고있는바와 같이 5.30폭동때 좌경모험주의자들이 얼마나 란동을 부렸습니까. 땅뙈기나 좀 가지고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친일이고 반일이고 가리지 않고 가차없이 한몽둥이로 후려치지 않았습니까. 그자들의 선동을 받은 폭동자들은 지주집대문을 두들겨패고 곡식창고에 불을 지르는 등 별별 망동을 다 부렸습니다. 그런 극좌적인 망동은 공산당에 대한 영상을 아주 흐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때로부터 류통사는 공산당을 불구대천의 원쑤로 생각하고 공산운동자가 있는것 같다는 집에 대해서는 인정사정없이 한사코 박해를 가한 반면에 지주들을 보호해주는 군벌들과는 더욱 가깝게 지냈습니다.

9.18사변후 간도지방에 유격근거지가 생겨나면서 공산당이 적색구역과 백색구역을 갈라놓고 백색구역사람들을 적대시한다는 말을 듣고 류통사는 더욱 반공으로 나갔습니다. 그는 만주땅에서 주인행세를 하는 일본사람들도 미워하였고 공산주의자들도 미워하였습니다.

《공산당은 나의 숙적이야.》

류통사는 늘 그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나는 그가 비록 일시적오해때문에 반공을 하고있지만 좋은 영향만 주면 그를 반공으로부터 련공애국의 길로 돌려세울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류통사는 일제가 만주를 강점한 다음 그들이 자기 집 가병들을 해산시키고 무기를 회수해간데 대해서 불만을 품고있었습니다. 나는 그의 이 반일감정에 특별히 류의하였습니다.

우리는 징벌이나 재산몰수가 아니라 류통사의 반공의식을 바로잡아주고 반일애국정신을 더욱 조장시켜 그를 우리 혁명의 지지자, 후원자로 교양개조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7련대의 오일남을 책임자로 하는 공작소조를 파견하였습니다.

오일남은 류통사를 만나자 김일성장군님께서 통사님과의 면담을 위해 자기를 파견하였는데 그 요청에 응할 생각이 없는가고 물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류통사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류창한 조선말로 잡아가겠으면 그저 잡아갈것이지 면담이라는 보자기는 왜 씌우는가, 공산군대장이 지주와의 면담을 요청한다는거야 잡아가겠다는 말을 하지 못해서 하는 소리겠는데 당신네가 화룡현지경안에 들어와 돌아친다는 소문이 나돌 때부터 이 류의현이 칼도마우에 오른 물고기신세가 되리라는것을 이미 각오하였다, 내 이미 죽음까지 각오한바이니 의논이고 뭐고 빙빙 에돌것없이 죽이겠으면 죽이고 끌어가겠으면 끌어가고 재물을 털어가겠으면 털어가고 마음대로 처리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아마 오일남이네 공작소조가 자기를 랍치하러 온줄로 알고 독을 썼던것 같습니다. 그 령감의 기상이 이만저만 도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류통사가 자기네를 얼마나 차겁게 대했던지 처음에 오일남은 이번 공작은 실패로구나 하는 생각까지 했다고 합니다. 류통사가 뻣뻣하게 나올수록 오일남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 령감을 후려서 사령부로 데려가야겠다는 결심을 더 굳게 하였습니다. 그는 조선인민혁명군은 5.30폭동때 친일, 반일을 가리지 않고 애국과 매국에 대한 구별도 없이 부자일반을 상대로 닥치는대로 두드려부시던 그런 사람들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진정한 공산주의자들의 집단으로서 조중인민의 민족적해방과 생명재산의 보호를 신성한 사명으로 삼고있는 군대라는것을 해설해준 다음 통사님이 우리 사령부의 요청에 정 응할수 없다면 조용히 그대로 물러가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오일남이 정작 물러가겠다는 말을 하자 류통사는 한참동안 입을 꾹 다물고 깊은 생각에 잠기였습니다. 그러다가 태도를 바꾸어 이왕이면 눌러앉아 시국이야기라도 하다가 갈것이지 그렇게 훌쩍 떠나갈바에야 무엇때문에 예까지 왔는가고 하면서 김사령이 나를 부르는것이 확실하다면 면담요청을 고려해보겠다고 했습니다. 아마 후환이 두려웠던 모양입니다. 그런데다가 오일남이란 사람이 처신을 점잖게 하지, 시국이야기도 구수하게 잘하지 하니 류통사도 좀 호기심이 동하고 노여움이 풀렸던것 같습니다.

《김사령부대가 쌈 잘하는 부대라는 말은 나도 많이 들었소. 그렇지만 김사령도 공산당이라는데 부자들을 밉게 보는 그 본색이야 어디 가겠소. 하긴 이야기를 좀 들은것도 있고 또 당신네의 말과 행동거지를 보면 다른 군대들과는 좀 다르기는 한데… 하여튼 김장군이 부른다니 가긴 가겠소.》

류통사는 이런 말을 하고나서 자기를 데려가겠거든 포승으로 묶어서 죄인 호송하듯이 데려가달라, 내스스로 김사령의 요청에 응하여 순순히 당신들을 따라갔다는것을 일본놈들이 눈치채게 되면 《토벌대》를 보내서 내 목을 칠수 있다, 우리 집안사람들도 무사치 못할것이다, 그러니 나를 랍치해가듯이 데려가달라고 하였습니다.

오일남은 류통사가 묘안을 내놓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망설이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그가 나한테서 받은 명령은 류통사를 점잖은 방법으로 데려오라는것이였지 붙잡아오라는것이 아니였습니다. 사령부의 승인이 없이 그를 포승으로 묶어 데려간다면 장백현에서 김주현소조가 김정부에게 무리한 행동을 했던것과 같은 사태가 빚어질수 있다고 그는 판단하였습니다. 오일남이 그런 판단을 한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였습니다.

보고를 들어보니 류통사가 내놓은 안이 묘한 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안을 지지해주려고 하였는데 일부 지휘관들이 류통사가 내놓은 안대로 하면 경찰관노릇을 하는 그의 아들이 소란을 피울수도 있고 수비대무력까지 떨쳐나서서 야단법석을 할수 있다고 했습니다. 룡담촌에서 총소리를 내면 화룡현 소재지에 있는 적들이 인차 증원을 올수 있었습니다.

류통사가 내놓은 안대로 하자면 무대를 넓게 잡고 판을 크게 벌려야 했습니다. 우리는 류통사의 집이 있는 룡담촌을 중심으로 3개 부락의 적을 동시에 치기로 하고 7련대, 8련대와 경위중대까지 다 데리고갔습니다.

나는 류통사네 사돈집이 있는 룡담촌 옆부락에 지휘부를 정하고 작전을 지휘했습니다.

작전에 앞서 우리는 처음계획과는 달리 집안의 대소사를 주관하는 류통사는 당분간 집에 있게 하고 그대신 류통사의 동생 류의청을 데려가기로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류통사의 아들과 군경들이 신경을 덜 쓰게 하면서도 류통사를 데려가는것과 같은 효과를 얻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때문입니다. 류의청이한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중국사람들은 예로부터 형제들중에서 자식이 없는 사람을 제일 사랑하는 고유한 풍습을 가지고있었기때문에 류씨집안사람들이 류의청을 빼내기 위한 교섭을 한다는것을 구실로 내걸고 우리와 련계를 맺어도 적들과 주변사람들이 별로 이상스럽게 여기지 않을수 있었습니다.

작전은 계획대로 성과적으로 수행되고 부대들도 3개 부락에서 일제히 철수하였습니다. 혁명군부대가 마을을 떠나갈 때 류통사는 형의 셋째아들을 불러내여 삼촌의 시중을 들어주라고 하면서 류의청을 따라가게 하였습니다. 류통사가 형의 아들을 산으로 보낸것은 류의청의 고독을 덜어주자는데 목적이 있었을것입니다.

밀영으로 돌아오는 길에 류의청이 자꾸만 주저앉으려고 해서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몸이 뚱뚱해서 잘 걷지 못하는데다가 아마 아편기운이 다 빠졌던 모양입니다. 그는 아편중독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를 담가에 태웠습니다. 혁명군이 아편쟁이를 담가에 태워가지고 수십리길을 걸어가다니… 상상이나 할수 있는 일입니까. 이런 사실은 아마 흔치 않을것입니다. 정말이지 그때 우리는 못해본 체험이 없습니다.

나는 경위중대장인 오백룡에게 과업을 주어 류통사의 동생과 조카를 잘 보호해주라고 하였습니다. 경위중대동무들은 손님들이 들 천막을 치고 그들을 잘 돌보아주었습니다. 식량곤난을 겪고있는 때였지만 그들에게만은 끼니마다 흰쌀밥을 해주고 고기국을 푸짐히 끓여주었습니다.

그러나 류의청은 음식을 얼마 먹지 않았습니다. 끼니때마다 진수성찬을 차리고 먹던 부호의 자식이니 입맛이 당기지 않아서 그러겠거니 하고 짐작했는데 까닭은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가 음식을 달게 들지 않는것은 아편생각이 나서 그러는것이였습니다. 류의청은 우리 경위대원들에게 밥은 못먹어도 좋으니 아편을 달라고 매일같이 성화를 먹이였습니다. 아편만 주면 값은 부르는대로 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동무들은 그 청을 들어주지 못하였습니다. 우리한테는 그 당시 군의처에서 마취제대용으로 쓰던 비상용아편이 얼마간 있었을뿐입니다. 아편때문에 발광이 난 류의청은 마침내 경위대원들에게 별별 험담과 욕설을 다 퍼부어대게 되였습니다.

지주집자식이 혁명군밀영에 와서 아편을 내라고 성화를 먹이니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나는 손님들을 사령부천막으로 데려오게 하였습니다. 그 사람정상이 말이 아니였습니다. 아편중독자가 아편을 못쓰게 되면 눈정기가 풀리고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게 됩니다.

나는 비상용을 다 털어서라도 류의청에게 매일 아편을 조금씩 공급하라고 군의처에 지시하였습니다. 류의청은 아편을 쓰자마자 눈에 생기를 띠고 벙글벙글 웃으며 들떠돌아갔습니다.

그는 평생 육신을 놀리는 일이라고는 해본 사람 같지 않았습니다. 지어는 잠자리도 거둘줄 몰라 조카가 거들어주군했습니다. 그야말로 일생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호의호식해온 무위도식자였습니다.

하루는 내가 이말저말 하던 끝에 사람이란 제힘에 맞게 오륙을 놀려 일을 해야 사는 멋도 있고 밥맛도 난다고 말해준적이 있습니다. 옛날 어떤 공주는 무슨 일이든 남만 시켜먹다나니 사과 한알 제손으로 깎지 못하는 병신이 되였다는데 남의 덕만 믿고 살아가게 되면 결국 그런 머저리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류의청은 그 말을 듣더니 자기도 그 공주와 다름없는 머저리지만 한가지 일만은 잘한다고 했습니다. 만두를 잘 빚는다는것이였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반가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페인이 다되였다고 단정한 사람한테 비록 굉장한 기술은 아니지만 만두빚는 재간이라도 있다는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나는 사령부작식대원을 시켜 만두감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류의청은 반죽한 밀가루를 얇고 고르롭게 밀어서는 속감을 다져넣고 만두를 빚어놓군했는데 그 솜씨가 정말 이만저만이 아니였습니다. 만두모양도 고왔지만 만두를 빚는 속도가 번개같이 빨랐습니다.

나는 우리 동무들과 함께 류의청이 빚은 만두를 먹으면서 그의 뛰여난 솜씨를 칭찬하였습니다.

다음날부터 류의청은 만두를 빚는 일만 생기면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작식대원들을 도와나섰습니다. 그런 날이면 그는 말수더구가 많아지군했습니다. 지어는 나와 롱까지 하였습니다. 어느날이였던지 그는 만두를 빚고 돌아와서 김사령님 말대로 일을 하니 사는 멋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였습니다.

그러나 만두를 빚는 일도 노상 있는것은 아니였습니다. 일감이 없는 날이면 류의청은 몸살이 날 지경으로 갑갑해하면서 약담배질을 더 많이 하였습니다. 나는 그에게 교훈이 될만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습니다. 아편전쟁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공자와 맹자에 이르기까지 안해준 이야기가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중국력사에 이름을 남긴 애국적인 자산가들에 대해서도 소개하였습니다. 그러다나니 장울화와 진한장과 같은 부호가문출신혁명가들의 이름도 자연히 화제에 오르게 되였습니다.

류의청은 내 이야기를 아주 흥미있게 들었습니다. 어느날 그는 붓과 종이를 청하였습니다. 장울화처럼 비록 혁명을 위해 자결은 하지 못하더라도 돈과 재물로 김사령을 돕고싶다면서 형 류의현앞으로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를 나에게 보여주기까지 하였습니다.

류의청의 편지내용을 보니 우리가 그동안 그를 인간답게 대해준것이 헛되지 않았다는것을 알수 있었습니다. 류의청은 먼저 자기자신과 조카의 안부를 썼습니다. 그는 나와 한천막에서 같이 지내며 만두도 같이 빚군한다는것과 혁명군대원들이 자기를 친형제를 대하듯이 성심성의로 보살펴준다는데 대하여 특별히 강조하면서 그동안 대접도 잘 받았으니 은공에 보답해야겠는데 형님이 쌀과 천, 신발 같은 물자들을 보내준다면 혁명군의 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게 될것이며 자기들도 인차 집으로 돌아가게 될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를 교양하고 계몽시킨 보람이 있었습니다.

동생과 조카를 산에 보내고 은근히 불안속에서 보내던 류통사는 동생의 편지를 받아보고 몹시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무아무날까지 당신네들한테 소용되는 물자를 마련해놓을테니 짐을 지고갈 사람들을 보내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리봉록에게 한개 소대가량의 대원들을 붙여주어 류통사가 준비해놓은 원군물자들을 받아가지고오게 하였습니다. 운반대가 지고온 물자들가운데는 수백벌의 군복을 지을수 있는 광목천과 지하족도 있었고 흰쌀, 밀가루, 전병 같은것도 있었으며 돼지고기와 콩기름도 있었습니다. 류통사는 우리 밀영에 그런 물자들을 세번씩이나 보내주었습니다.

우리 동무들과의 교제가 잦아지게 되자 그는 정식으로 나와의 면담을 요구하면서 자기를 밀영에 데려가달라고 하였습니다. 이왕 혁명군을 도와주는바치고는 사령을 만나 인사라도 나누고싶다는것이였습니다. 그래서 그를 밀영에 데려오도록 했습니다.

류통사가 밀영으로 올 때 경찰서에 다니는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행각을 반대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삼촌이 보낸 편지를 받고 아버지가 혁명군밀영으로 찾아갈 결심을 한것 같은데 심사숙고하는것이 좋겠다, 삼촌이 보낸 편지를 보면 삼촌과 사촌동생이 김일성장군과 한천막에서 숙식도 하고 만두도 같이 빚는다고 했는데 그것은 믿지 못할 소리다, 혁명군사령관이 어떻게 사민과 침식을 같이할수 있는가, 게다가 삼촌은 지주집자식이 아닌가, 공산당은 지주들을 타도대상으로 보고있다, 혁명군대장이 적대계급의 자식과 침식을 같이하고 려염집아낙네들처럼 만두를 빚는다니 그건 터무니없는 거짓이다, 김사령의 부하들중 누군가가 그렇게 편지를 쓰라고 강요했을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류통사는 아들에게 당치않은 소리는 하지 말라, 내가 요즈음 김사령부하들과 몇번 교제해보았는데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례절바르고 인정미가 있는 젊은이들이더라, 그래서 나는 김사령이 수하에 좋은 부하들을 두었다고 생각하였다, 나를 대하는 그 사람들의 행동거지만 보아도 김사령의 인격을 알수 있고 부대의 기강을 알수 있다, 이왕 혁명군과 인연을 맺은 이상 내 아무래도 산에 가서 김사령도 만나보고 너의 삼촌이 편지로 전해온것이 사실인가를 직접 확인해보고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나를 찾아올 때 고급천인 스크노직으로 지은 군복과 코트, 장화와 모자를 선물로 가지고왔습니다. 몇번 말을 나누어보니 인격상으로나 학식으로나 동생과는 대비도 되지 않는 범상치 않은 인물이였습니다. 점잖으면서도 언행이 도고하고 위엄이 있었습니다.

류통사는 나에게 조선말로 산에서 고생이 얼마나 많은가고 하면서 그동안 동생과 조카를 잘 보살펴주어 감사하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나대로 그사이 많은 원군물자를 보내주고 또 년로한 몸으로 우리를 찾아준데 대하여 사의를 표시하였습니다.

우리는 류통사를 위해 천막 하나를 따로 쳐주고 거기서 그가 동생과 조카를 만나보게 하였습니다.

류의청은 형에게 《공산군이 붉은 마귀라는게 무슨 소리요. 그건 다 헛나발이요. 세상에 이 사람들처럼 좋은 사람들은 없소. 김사령부대는 신사부대요.》라고 하면서 혁명군에 대한 칭찬을 입에 침이 마르게 하였습니다. 그는 지어 김사령덕에 자기가 개명했다고까지 말했습니다.

류의청이 우리에 대한 선전을 얼마나 많이 했던지 류통사는 동생을 만난 다음 나를 찾아와서 고맙다는 인사를 몇번이고 하였습니다.

내가 류통사를 만나보고 제일 놀랍게 생각한것은 그가 조선말과 조선의 풍습뿐아니라 조선의 력사와 문화에 대해서도 아주 잘 알고있다는 사실이였습니다. 그러다보니 그와는 아주 쉽게 언어가 통하였습니다.

류통사의 말가운데서 제일 감동적인것은 그가 나라를 잃고 고생스러운 이국살이를 하는 조선사람들을 볼 때마다 동정심을 금할수 없다고 한것이였습니다. 내가 중국사람들을 좋아하고 사랑하는것처럼 류통사도 조선사람들을 퍼그나 사랑하고있었습니다.

류통사는 나한테 불쑥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항간에서는 지금 김사령부대를 〈공비〉라고 부르고있습니다. 김사령이 공산당이라는게 사실입니까?》

《우리 부대를 〈공비〉라고 한것은 왜놈들이 지어낸 말이지만 내가 공산주의자라는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김사령은 지금껏 반공을 해온 나를 어떻게 보십니까?》

그가 나를 만나러 밀영에까지 찾아온것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받아가기 위한것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런것만큼 나는 심사숙고해서 대답해야 했습니다.

나는 항일무장투쟁을 시작한 초기부터 반공을 하는 사람들과 담판을 많이 하였습니다. 우사령도 반공을 하였고 오의성도 처음에는 반공을 하였습니다. 조선사람인 량세봉도 애국자였지만 공산주의자들을 적대시하다가 생애의 말년에야 련공으로 돌아섰습니다. 우사령이나 오사령, 량사령과의 담판에서는 통일전선을 위해 내가 매번 공산주의를 변호하고 련공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설득시키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련공이냐 반공이냐 하는 선택권은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항상 주동적인 자세에서 담판을 끌고나가면서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류통사와의 담화에서는 문제가 달랐습니다. 나는 그의 반공행위를 규탄할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류통사는 그 판결을 귀담아듣지 않을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진하여 자기의 반공행위에 대한 우리의 립장을 알아보려고 한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였습니다. 이러나저러나간에 그는 솔직하고 대범한 사람이였습니다.

나의 체험에 의하면 반공에는 두가지 부류가 있었습니다. 하나의 부류는 공산주의자들이 득세하면 자기들은 죽는다고 생각하기때문에 필사적으로 멸공에 매달리는 그런 사람들이 하는 의식적이고 적극적인 반공이요 다른 하나의 부류는 사이비공산주의자들의 비행을 보고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게 되였거나 제국주의자들의 악선전을 듣고 공산주의를 배척하고 경원시하게 된 그런 사람들이 하는 맹목적인 반공이였습니다. 류통사의 경우는 두번째 부류에 속한다고 말할수 있었습니다.

류통사를 반공으로부터 련공에로 돌려세우자면 그에게 우리의 립장을 솔직하게 말해줘야 했습니다. 원군물자나 받아먹자고 그의 비위에 맞는 말만 해도 안되였고 또 그가 반공을 해온 지주라고 해서 덮어놓고 몹쓸놈이라고 해도 안되였습니다. 문제는 그의 행적에서 좋은 점은 무엇이고 나쁜 점은 무엇인가 하는것을 똑똑히 밝혀주어 그로 하여금 반공대신 련공애국의 길을 택하도록 잘 유도하고 이끌어주는것이 중요했습니다.

《통사님이 반공을 해온데 대하여 나는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통사님을 징벌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것은 통사님이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잘 몰라서 반공을 했고 또 반공은 하면서도 중국을 사랑하고 중화민족을 사랑해온분이기때문입니다. 반공을 해도 망국은 원치 않고있으며 지주를 해도 나라가 있는 중국지주가 되기를 원하고있는 분이 바로 통사님입니다. 나는 이 점을 매우 중시합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은 련공의 길로 쉽게 돌아설수 있습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자 류통사는 눈물이 글썽해서 내손을 잡았습니다.

《김사령, 고맙소이다. 이 화룡판에 인총이 많고 입이 많아도 나에게 애국심이 있다는것을 인정해주신분은 김사령밖에 없습니다. 그 평정 하나면 나는 발편잠을 잘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지금까지 소갈머리가 좁아서 반공을 해왔는데 련공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련공이란 별것이 아니다, 반만항일을 하고 우리 혁명군을 후원해주는것도 다 련공이다, 통사님은 우리에게 동생과 조카를 보낸 그날부터 벌써 련공을 시작하였다, 진실로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결국 다 공산주의를 리해하게 되고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게 된다, 공산주의자들도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기때문이다, 조선지주들한테나 중국지주들한테나 련공항일은 첫째가는 애국대사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류통사는 김사령덕에 때늦게나마 자기의 금새를 알게 된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다음날부터 그는 별나게 말이 없는 사람이 되여버렸습니다. 어디 편치 않은데가 있는가고 물어도 그저 아니라고만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오백룡을 불러다가 그동안 경위중대에서 류통사를 돌보는 과정에 무슨 불미스러운 일이 없었는가고 물었습니다.

오백룡은 별다른 일은 없었으나 류통사가 밀영을 좀 돌아보게 해달라고 하기에 데리고다니면서 훈련모습도 보여주고 오락회도 구경시켰는데 그가 작식터를 돌아보는 과정에 수수쌀과 산나물을 반반씩 섞어 끓이는 죽가마를 보고 좀 언짢아하였다고 했습니다.

류통사는 자기가 수십석의 쌀을 보내주었는데 왜 밥은 해먹지 못하고 저런 음식을 해먹는가, 쌀을 아끼느라고 죽을 쒀먹는다면 물론 리해할만하다, 그렇지만 식량이 바르다고 사령관한테까지 죽을 대접한다는거야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고 하였습니다. 사령관이 부하들과 한가마밥을 먹는다는 사실이 아마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것 같습니다. 그는 군의처를 돌아보다가 거기서 환자치료에 쓰려고 비상용으로 아껴오던 아편을 자기 동생한테 써주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자 더 감격해마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는 오백룡의 말을 듣고나서 류통사네 일행을 집으로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류통사자신은 자기만 먼저 집으로 돌아가고 동생과 조카는 당분간 밀영에 더 머물러있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부대에 더 많은 물자를 들여보내고싶은데 그러자면 자기가 혁명군에 물자를 넘겨주지 않을수 없는 구실이 있어야 한다는것입니다. 동생과 조카가 밀영에 남아있게 되면 물자를 들여보내는것이 탄로되여도 왜놈들에게 둘러댈수 있는 구실이 생긴다는것이였습니다.

류통사가 없는 구실을 만들어내면서까지 우리를 더 도와주겠다고 자청해나선것은 아주 좋은 일이였습니다. 진실한 믿음을 받으면 그 믿음에 보답하려고 각방으로 애쓰는것이 인간의 본성인것 같습니다.

나는 류통사와의 작별을 앞두고 간단한 송별모임을 마련하였습니다. 류통사는 그 송별모임에서 자기가 공산주의자일반에 대해 적대시하고 우리 혁명군을 《비적》으로 오해하고있은데 대해 사죄하면서 앞으로 혁명군을 돕는 일이라면 돈이든 물건이든 아끼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우리와 헤여질 때 앞으로 8로군이 동북을 해방하는 경우 자기가 조선인민혁명군을 물질적으로 도와주었다는것을 인정할수 있게 확인서를 한장 써달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명주천에 한자로 류통사는 훌륭한 애국지사이다, 그는 항일련군을 물심량면으로 원호해주었다고 쓰고 그밑에 사령관 김일성이라고 쓴 다음 도장을 찍어주었습니다. 팽진이 보았다는 증서가 바로 이런 확인서였을것입니다.

그 당시 만주지방의 적지 않은 중국인지주들은 겉으로만 일본사람들과 협력하는체하였지 내막적으로는 가만가만 항일투쟁에 나선 사람들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들은 앞으로 일제가 망하고 괴뢰만주국이 다시 중국에 귀속될 날이 오리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있었습니다.

중국인지주들은 《쭈시강》이라고 하면서 인민혁명군을 도와주고는 반드시 확인서를 써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증서를 장백현의 지주들에게도 써주고 액목현과 돈화현의 지주들에게도 써주었습니다.

원래 중국말로 《쭈시강》이라는 말은 돼지 《저》자와 먹을 《식》자, 겨 《강》자의 중국식발음인데 돼지가 쌀겨를 먹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붉을 《주》자와 먹을 《식》자, 편안 《강》자로 쓰면 그것도 발음은 《쭈시강》으로 되지만 이때에는 주덕이 강덕을 먹는다는 뜻으로 되는것입니다. 그 당시 8로군을 주덕과 모택동의 성자를 따서 주모군이라고도 했습니다. 강덕은 일본사람들이 세운 만주국황제 부의의 년호입니다. 중국사람들은 8로군이 동북을 해방하게 된다는 의미의 은어로서 《쭈시강》이라고 하였습니다.

류통사가 우리한테 왔다가 돌아간 다음 올기강밀영으로는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원군물자가 들어왔습니다. 그는 각종 원군물자들을 자동차로 아낌없이 실어보냈습니다. 그 물자들은 우리가 그해 겨울나이준비를 하는데서 큰 도움으로 되였습니다.

류통사는 자기 동생이 우리 군의처의 비상용아편을 쓴 대가로 목침만한 아편덩이도 보내주었습니다.

우리는 그해 추석명절을 앞두고 류통사의 동생과 조카를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류의청은 우리와 작별하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면 아편부터 끊고 사람답게 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을 돌려보낸 다음 우리도 인차 올기강밀영을 떠났습니다. 그뒤에는 류통사형제와 두번 다시 련계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류통사를 잊지 않았으며 그가 량심적으로 살아가리라는것을 믿었습니다.

류통사의 친척들중에 조카벌이 되는 류진국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당력사연구소앞으로 써보낸 편지에 의하면 류통사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우리를 잊지 않고 자주 회상하였다고 합니다. 그가 밀영에서 돌아간 다음 자기의 항일의지도 명백히 표시하고 우리에 대한 선전도 많이 했던것 같습니다.

류통사는 눈을 감는 마지막순간까지 우리가 올기강밀영에서 써준 증서를 가보로 간수하고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사망한 다음에는 동생네 집에서 그 증서를 보관해두고있었다는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감회가 깊었습니다.

그때 밀영에서 만나 흉금을 터놓은것이 인연이 되여 나와 류통사는 일생을 두고 서로 잊지 못하는 벗이 되였습니다. 결국 우리는 서로 멀리 떨어져있으면서도 늘 가깝게 지낸셈입니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나라도 민족도 혈육도 안중에 없이 오로지 개인의 리익과 향락만을 추구하는 자산가들과는 뜻을 같이할수 없지만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량심적인 자산가들은 국적과 당파, 정견에 관계없이 우리의 동행자로 될수 있다는것을 말해주고있습니다. 리념의 차이나 재산의 유무는 인간을 평가하는데서 절대적기준으로 될수 없습니다. 가장 보편적인 사람평가의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조국애와 민족애, 인민애, 인간애일것입니다. 인간을 귀중히 여기는 사람이 민족을 사랑하며 민족애가 강한 사람이 조국을 사랑하게 된다는것은 하나의 법칙이며 그 누구도 부정할수 없는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무시하게 되면 사람과의 사업에서 좌우경을 범하게 됩니다. 한때 항일혁명투쟁력사를 소개선전하는 일부 글들에서 류통사를 악질적인 반공지주라고 규정한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정확한 평가라고 볼수 없습니다. 출신과 경력만을 보고 사람들을 함부로 평가하거나 그들의 운명을 경솔하게 다루게 되면 사람과의 사업에서 엄청난 과오를 범할수 있습니다. 애국자를 매국자로 볼수도 있고 혁명의 지지자를 반혁명분자로 몰아붙일수도 있으며 그와 반대로 매국자를 애국자로 보게 되고 반혁명분자를 혁명의 지지자로 잘못 보게 될수도 있습니다.


재미교포 손원태는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의 접견을 받는 자리에서 주석님, 남조선에는 자산가들이 많습니다, 이제 통일이 되면 그 많은 자산가들을 어찌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때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해주시였다.


외세에 붙어서 민족을 팔아먹는 극반동이 아닌 이상 그가 어떤 사람이든지 모두 손을 잡으려고 합니다.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은 우리의 이런 립장을 집대성한것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서비스이용약관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상단으로


Copyright © 2010 - 2023 www.hanseattle1.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