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와 더불어 20-5. 옥돌골에서의 단오명절 > 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20-5. 옥돌골에서의 단오명절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13,537회 작성일 16-02-16 23:52

본문

5. 옥돌골에서의 단오명절


56C417C137395D0024




대홍단전투를 치른 다음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는 활동무대를 백두산동북부로 옮기고 두만강연안을 류동하면서 군사정치활동을 맹렬하게 벌리였다. 그 시기의 군사활동에서 대표적인것은 올기강전투이며 대중정치사업에서 제일 이채로왔던것은 옥돌골에서의 단오명절놀이였다.

화룡현 옥돌골은 무산군 대안에 있는 두만강건너편의 산골마을이다.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대홍단지구를 현지지도하시던 나날들에 두만강가에서 무산지구전투후 백두산동북부에서 군사정치활동을 벌리시던 뜻깊은 사적내용에 대하여 감회깊이 추억하시였다.


옥돌골에서 1939년 단오날에 축구경기를 하던 생각이 납니다. 30여년세월이 흘렀지만 그때의 일들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유격전쟁을 하는 사람들이 축구경기를 했다고 하면 잘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유격전쟁을 한다고 해서 일년 사시절 퉁탕거리기만 하는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싸움을 하면서도 유격대의 특성에 맞게 문화정서생활을 했습니다. 1930년대 전반기에는 유격구에서 운동회도 자주 조직하였습니다. 왕청유격대에는 한다하는 축구선수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후에는 2차 북만원정을 앞두고 라자구에서 축구경기를 조직하고 옥돌골에서 조직하였는데 별재미였습니다. 간도지방의 조선사람들이 축구를 잘했습니다. 간도에서 축구를 제일 잘한것은 룡정사람들이였습니다.

대홍단전투를 마친 다음 우리는 예정대로 투쟁무대를 백두산동북부로 옮기였습니다. 그 일대를 우리 혁명의 전략적기지로 꾸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해 5월하순의 안도현 큰골군정간부회의에서 나는 백두산동북부에서 군사정치활동을 강화하여 이 일대에 또하나의 강력한 혁명의 보루를 축성할데 대한 방침을 내놓았습니다.

유격구가 해산된 이후 새로 창설한 우리 혁명의 근거지들은 대체로 서간도일대와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여 국내의 여러 지역에 꾸려져있었습니다. 이런 실정에서 백두산동북부와 두만강연안 북부조선일대에 새로운 혁명근거지를 꾸리게 되면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기지와 작전기지, 후방기지들을 전국적판도에로 넓혀갈수 있었고 그 근거지들에 의거하여 전반적조선혁명을 더욱 힘있게 추진시킬수 있었습니다.

혁명을 확대발전시킨다는것이 별것이 아닙니다. 혁명의 동력이 될수 있는 사람들의 대렬을 늘이는것이 기본이고 다른 하나는 활동거점을 늘이는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무장을 늘이는것입니다. 다시말하여 사람문제, 땅문제, 총문제를 객관적정세의 요구에 맞게 해결하고 부단히 확대해나가는것이 곧 혁명을 심화시켜나가는것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사람이 있고 령토가 있고 무장이 있으면 혁명을 얼마든지 고수할수 있고 확대발전시켜나갈수 있습니다.

근거지를 확보하자면 무엇보다도 적극적인 군사작전으로 적을 제압하고 해당 지역안의 인민들속에서 정치사업과 조직건설활동을 자유롭게 벌릴수 있는 유리한 환경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래야 적들이 혁명군의 활동을 훼방하지 못합니다. 대홍단전투후 우리는 두만강을 건느기 바쁘게 동경평전투, 휘풍동전투, 올기강전투, 청두촌전투, 청산리부근목재소습격전투를 비롯하여 많은 전투들을 련속적으로 벌리였는데 그 하나하나의 전투들은 모두가 적을 군사적으로 제압하고 인민혁명군의 활동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기 위한것이였습니다.

싸움을 한번씩 하고나서는 인민대중속에 깊이 들어가 정치사업도 하고 조직건설사업도 하였습니다. 옥돌골에서 군민이 한자리에 모여 단오명절을 즐겁게 쇤것은 우리가 벌린 특색있는 정치사업의 하나였습니다.

새로운 활동지역에 갈 때마다 실정에 맞게 다양한 형식과 방법으로 정치사업을 생동하게 벌려 대중의 혁명화를 적극적으로 다그치고 무장투쟁의 대중적지반을 튼튼히 다져나가는것은 우리의 전통적인 사업방법이였으며 일관한 활동방식이였습니다.

원래 옥돌골에서의 단오놀이는 우리가 사전에 계획했거나 준비한것은 아니였습니다. 적의 폭압이 심하고 정세가 삼엄해서 단오놀이 같은것은 감히 생각지 못할 때였습니다. 옥돌골에서의 단오놀이는 무산지구진공작전을 끝낸 다음 우리가 화룡땅에 건너가서 인민들을 만나는 과정에 결심하고 조직한것이였습니다.

어느고장에 가서나 느끼게 되는것이였지만 간도지방에서도 인민들은 그 당시 기를 펴지 못하고 몹시 위축되여있었습니다.

우리가 화룡땅에서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약담배에 중독된 젊은 농민형제였습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동북지방에는 아편중독자들이 씨글씨글했습니다. 아편이 화페와 같이 통용되는 때였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약담배라는것은 세상이 어지러울 때일수록 더 심하게 전파되는 법입니다. 농민형제는 조선에서 살다가 이민바람에 간도에까지 굴러들어와 사는 사람들이였습니다.

나는 신수가 멀끔한 젊은 사람들이 약담배에 재미를 붙이고있는것이 이상해서 농사를 짓자면 심신이 튼튼해야 하는데 어떻게 되여 당신들은 사람의 몸과 마음에서 기를 뽑는 그 몹쓸것에 맛을 들이게 되였는가고 물었습니다.

농민형제는 별로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아편도 안쓰면 고달픈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살고싶어 사는것이 아니라 죽지 못해 사는것이 우리네 인생인데 약담배라도 피워 세상만사를 잊어야지 다른 수가 있습니까, 처음에는 술로 달래보자고도 했지만 술이야 모여앉아 부어라 마셔라 하며 떠들썩하는 멋에 마시는건데 왜놈들이 명절날에 여럿이 모여앉아 노는것조차 불법으로 몰아 금지시키는 판이니 술이나마 마음대로 마실수 있습니까, 그래서 약담배로 넘어갔습지요라고 하였습니다.

그 농민형제는 이제 좀 있으면 오월단오인데 모여앉아 막걸리도 마시지 못하는 명절이 오면 무슨 소용인가, 그전에 고향에서 살적에는 단오날에 씨름도 하고 그네도 뛰고 쑥떡도 해먹으면서 재미나게 놀았지만 망국노가 되니 그런 명절놀이를 생각도 할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푸념을 듣고보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사람이 마음속에 꿈이라는것이 없으면 살아도 죽은 목숨과 다름없습니다. 사람은 사는 멋에 살지 밥이나 먹고 잠이나 자자고 사는것이 아닙니다. 사는 멋이라는것은 사는 보람을 의미합니다. 보람있게 산다는것은 사람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마음껏 행사하고 생활을 창조하면서 사람답게 산다는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아편에 중독된 그 젊은 형제에게는 이런 보람이 없었습니다. 성벽과 철조망에 갇혀 사는 인생이 무슨 인생이겠습니까. 그것은 생존이지 생활이 아닙니다. 생활을 떠난 생존이란 사실 아무런 가치도 없고 의의도 없습니다.

나는 원래 어려서부터 아편쟁이들을 곱지 않게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 농민형제에 대해서는 동정을 금할수 없었습니다.

나는 이런 말로 그들을 타일렀습니다.

민족의 존망을 다투는 이 위급한 시각에 약담배를 피우며 세월을 헛되게 보낸다는것은 조선청년으로서 씻을수 없는 죄를 짓는것으로 된다. 보라, 이 어린 전령병들과 녀대원들까지도 나라의 운명을 구원하려고 총을 메고 나섰는데 부끄럽지 않은가. 아편을 떼라.

형이란 사람은 내 말을 듣더니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아무 의욕도 없이 되는대로 살아가는것이 부끄럽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아편에 중독된 농민형제를 만나보고나서 인민들이 희망을 가지고 기를 펴고 살아갈수 있게 우리가 군사정치활동을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연설이나 하는 정치사업만으로는 인민들의 사기를 높여줄수 없었습니다. 인민들은 승리하는 혁명을 눈으로 보고 귀로 직접 듣고싶어했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수 있는 혁명이란 곧 싸움이였습니다. 닷말의 연설보다 한방의 총소리가 은을 더 크게 내던 시기가 1930년대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치사업과 함께 군사활동을 강화하였습니다. 우선 농민형제가 살고있다는 휘풍동이웃의 집단부락과 휘풍동의 적들부터 쳐갈기였습니다. 우리의 공격이 얼마나 드셌던지 적들은 총 한방 제대로 쏴보지 못하고 산으로 뿔뿔이 도망치고말았습니다. 휘풍동주민들은 그 광경을 보고 통쾌해서 어쩔줄을 몰라했습니다.

우리가 백두산동북부로 이동하여 두만강연안에 있는 10여개의 집단부락들을 련이어 습격하여 수백명의 적을 소멸하는 전과를 올리게 되자 일제는 우리 부대의 활동을 저지시켜보려고 필사적으로 발악하였습니다. 이때가 어떤 때인가 하면 관동군이 할힌골에서 국지전을 일으켰을 때입니다. 이 싸움이 터지자 수만명의 일본군병력이 전선으로 기동하였습니다. 적들로서는 그야말로 비상시국이라고 떠들어댈 때였습니다. 이런 때에 저들의 후방종심에서 혁명군의 총소리가 연방 울리게 되니 적들도 당황해지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화룡일대의 산판들에는 적들이 시누렇게 깔리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력량이 《토벌》에 동원되였던지 어느날 망원경으로 적정을 살피고 돌아온 참모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습니다. 그는 나에게 이이상 싸움을 더 계속하다가는 큰 랑패를 볼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적아를 따져보면 력량상 대비도 되지 않는다는것이였습니다.

나는 참모장에게 우리는 건군 첫날부터 력량상으로 수십배, 지어는 수백배 우세한 적과 싸웠지 렬세한 적과 싸우지 않았다, 력량이 딸린다고 이왕 시작한 작전을 포기한다는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이런 때일수록 묘한 전술을 써서 적을 숨돌릴 사이없이 답새겨야 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 시기 중국 화북전선에서 특출한 군공을 세워 천황의 표창까지 받은 일본군장교가 백일평에 도착하여 《토벌대》를 지휘한다는 정찰자료가 사령부에 들어왔습니다. 그 장교는 원래 무공덕에 일본본토로 표창휴가를 가던 길이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가 안도와 화룡 땅에 나타나 집단부락들을 쳐갈기며 돌아간다는 소문을 듣고 그따위 게릴라부대 하나를 당해내지 못해 계속 패전한다는것은 황군의 수치이자 일본국민의 수치다, 내가 김일성부대를 전멸시켜 이 수치를 씻겠다고 호언장담했다는것입니다. 그 장교도 허영심이 이만저만 강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화북전선에서 온 장교는 가슴팍에 《아수라》를 입묵해가지고 다니면서 무적용장의 행세를 했다고 합니다. 《아수라》는 불교에서 싸움귀신이라는 뜻으로 통합니다.

백일평에 나갔던 정찰조원들은 《아수라》에 대한 소식과 함께 화룡현에 있는 일본인경찰들이 우리에게 보낼 단오명절선물을 준비하고있다는 괴이한 정보까지 수집해가지고왔습니다. 한쪽에서는 천황의 표창까지 받고 고향으로 휴가를 가던 싸움귀신이 우리를 《토벌》하겠다고 자청해서 백일평에 왔다는데 다른쪽에서는 경찰들이 우리에게 보낼 명절선물이라는것을 준비한다니 이런 만화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정보가 틀림없는것이라면 적들이 마련하고있다는 선물놀음은 분명 동서고금에 없는 희극이였습니다. 그들이 명절을 진심으로 축하하려고 선물을 준비할리는 만무한것이였습니다.

나는 적들이 감히 명절선물을 준비하는것과 같은 경거망동을 하는것은 혁명군의 불을 설맞은탓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백일평의 적들을 올기강쪽으로 유인하여 일격에 섬멸할 전술을 짰습니다.

우리가 전투장소로 선택한 지대는 백일평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갈밭이였습니다. 그 갈밭 한가운데로 올기강이 흐르고 강한쪽 기슭을 따라 자동차길이 나있었습니다. 강과 길의 좌우쪽은 다 수림지대여서 매복에 유리하였습니다. 적들이 올기강기슭에 나타난것은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는 늦은 아침이였습니다. 중무장을 한 수백명의 적들이 여러정의 기관총을 앞세우고 기세좋게 행군해오고있었습니다.

적의 전대오가 우리의 매복권에 모조리 들어섰을 때 긴 칼을 찬 일본장교가 웬일인지 물도랑옆에 와서 걸음을 멈추더니 수상한 흔적이 있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적의 종대들은 일제히 행군을 멈추었습니다. 부하장교 몇이 달려와서 물도랑을 들여다보며 고개들을 기웃거렸습니다. 아마 우리 동무들중 누구인가 거기에 발자국을 냈던 모양입니다. 싸움을 끝내고 전장을 수색할 때 전사한 일본군장교들의 가슴을 헤쳐보았는데 물도랑옆에서 우리의 흔적을 맨처음으로 발견한 긴 칼을 찬 그 장교가 바로 《아수라》로 자처하는 《토벌대》대장이였습니다.

《아수라》가 물도랑옆에서 일어서는 순간에 나는 사격명령을 내리였습니다. 우리는 잠간사이에 200여명의 적을 살상포로하였습니다. 《아수라》는 칼집에서 군도를 절반도 뽑지 못한채 물도랑옆에 쓰러졌습니다. 우리 대원들은 고향에 가서 휴가나 곱게 보냈으면 목숨을 부지할수 있었을텐데 쓸데없는 객기를 부리다가 황천객이 되였다고 조소하였습니다.

그 전투가 바로 백일평전투라고도 불리우는 유명한 올기강전투입니다. 그 전투에 대해서 쓴 조명선의 회상기를 나도 보았습니다. 올기강전투에서 쓴맛을 본 다음부터 적들은 감히 그 골안에 얼씬거리지 못했습니다. 그때부터 인민들은 올기강류역의 마을들을 페문촌이라고 불렀습니다. 적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문이 닫긴 촌이라는 뜻입니다. 올기강류역에 페문촌들이 많이 생기다나니 우리도 마음놓고 정치사업을 할수 있었습니다.

옥돌골단오명절놀이는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이 올기강전투를 비롯하여 두만강연안의 여러 전투들에서 거둔 빛나는 승리를 경축하는 일종의 축제행사이기도 하였습니다.

두만강연안의 마을들은 해방의 날이라도 맞은듯이 흥성거렸습니다. 청장년들은 이번 단오날에는 마음놓고 놀아보자고 하면서 그네를 매고 씨름터를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올기강전투를 마치고 철수할 때 흥미있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농군 한사람이 담배와 술을 비롯한 여러가지 음식물들을 가지고 우리 부대를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처음에 그것을 인민들이 마련한 원호물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농군은 뜻밖에도 손을 내저으며 그것은 자기의 지성품이 아니고 화룡현 경찰우두머리가 김일성장군에게 보내는 명절음식이라는것이였습니다. 정찰조원들이 물어온 정보가 정확하였다는것이 증명된셈이였습니다.

적들이 보낸 선물보따리속에는 밀봉한 편지도 한통 들어있었습니다. 그 편지는 오백룡한테 보내온것이였습니다. 적들이 오백룡의 이름을 특별히 지명한것으로 보아 그가 나의 신임을 받고있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던것 같습니다. 편지는 일본제국과 10년 가까이 싸워보았으면 그 실력을 똑똑히 가늠하였을것이다, 단오도 가까와오는데 이 선물이나 받고 싸움을 그만하고 우리한테 년공이나 바치는것이 어떤가, 이 경고에 응하지 않으면 큰 봉변을 당하게 될것이라는 내용이였습니다.

후에 알고보니 이 경고편지는 일제가 화룡현일대에서 경찰《토벌대》를 도맡아 지휘하던 우나미를 시켜서 써보낸 편지였습니다. 우나미는 화룡현 경무과장을 겸하고있는 사람이였습니다. 그는 홍안의 나이에 일찌기 만주에 건너와서 공산주의자들과의 싸움에 한생을 바칠것을 맹약하고 령사관 경찰생활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처음으로 우나미와 맞다든것은 1932년 가을이였습니다. 남만원정을 마치고 돌아와 돈화현성을 습격했는데 우나미는 그때 현성안의 일본령사관 경찰서에서 우리에게 필사적으로 응전하였습니다. 죽지 않고 살아난 덕에 그가 상전한테서 표창까지 받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일본군대에는 전투의 승패에는 관계없이 죽으면 직급을 한등급씩 높여주고 크게 상금을 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상자에게도 상금을 주었습니다. 돈으로 모든것을 움직이는 자본주의군대이니 그런 방법으로 자극을 줄수밖에 없을것입니다. 리도선도 죽은 다음 별이 하나 더 올라갔습니다.

우나미는 동만의 여러곳을 다니며 경찰정보계통에서 립신출세하여 1939년경에는 수백명의 무력을 거느린 경찰《토벌대》의 우두머리가 되였습니다.

우나미는 후날 기자들에게 이 편지를 경고문이라고 표현하였지만 우리가 보건대는 경고문이 아니라 요청서 비슷한것이였습니다. 총칼로써는 안되니 애원을 해서라도 우리를 어떻게 해보려는것이였습니다.

경고문이 은을 내게 하자면 그것을 보내는 시기선택을 잘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상대가 피동에 빠져 갈팡질팡하든가 지칠대로 지쳐 싸울 의욕을 잃었을 때 보내야 좋은 효과를 낼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나미는 시기선택도 대상선정도 다 잘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그 당시 피동에 빠진것이 아니라 주동에 확고히 서있었습니다. 우리의 무장투쟁은 하강기가 아니라 상승기에 있었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력량도 전술도 다 강했습니다. 분명 우나미는 우리를 무서워하면서도 밑천이 딸리는 군대로 본것 같습니다.

우나미가 우리에게 경고문을 보낸것은 미나미조선총독의 지령에 따라 함경북도 경찰부장 쯔쯔이가 숱한 위문품을 마련해가지고 기자들까지 거느리고 무산군 삼장면일대에 내려가 우리한테 얻어맞은 군경들을 위로해주던 무렵이였습니다. 미나미는 보천보전투직후에도 그 뒤조사를 위해 사찰단이라는 이름을 달아주어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을 현지에 파견한바 있었습니다.

우나미가 경고문이라는데서 《큰 봉변》이니 뭐니 하고 을러댔지만 그것은 한갖 허장성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오백룡에게 회답편지를 한장 써보내주라고 하였습니다.

오백룡은 문장가가 아니였지만 편지를 그럴듯하게 썼습니다. 너희들이 우리를 《토벌》하느라고 7~8년세월을 고생했지만 얻은게 무엇이냐, 우리의 무기조달자, 식량수송대 노릇밖에 한것이 더 있느냐, 가련한것은 우리가 아니라 너희들이다, 이제는 그쯤하고 처자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는것이 어떤가, 며칠 있으면 단오명절인데 생과자를 준비해놓고 기다리라, 내가 손님으로 가서 너희들이 어떻게 할바를 가르쳐주겠다는 식으로 아주 강경한 투로 엮었습니다.

나는 단오날 옥돌골 30리골안에 사는 사람들을 다 운동회에 참가시키고 휘풍동을 비롯한 이웃마을들에서 올만한 사람들은 모두 오게 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옥돌골에는 몇정보 잘되는 넓은 등판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거기다 꼴문대를 세워놓고 축구경기를 하였습니다. 적들이 화룡일대에 숱한 《토벌》무력을 집중시키고있는 때에 그 한복판에서 우리가 여유작작하게 명절놀이를 하면서 축구경기까지 벌렸다는 소문이 퍼지면 몇번의 전투나 몇백마디의 연설로써도 얻을수 없는 효과를 거둘수 있었습니다. 적구에서의 축구경기는 또하나의 우리 식의 독특한 정치사업방법이였습니다.

혁명군과 마을청년들사이의 축구경기가 정말 볼만했습니다. 기술이라야 뻔한것이고 경기째임새라는것도 엉성하기 짝이 없었지만 량팀선수들이 번갈아 헛발질을 하고 풀밭에 미끄러져 나딩구는 바람에 장내에서는 폭소가 연방 터져올랐습니다.

늙은이들은 옥돌골에 마을이 생긴이래 사람들이 오늘처럼 만가지 시름을 다 잊고 태평스럽게 웃어보기는 처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경기는 승부없이 끝났습니다. 그렇지만 그 경기의 정치적득점은 만점이였습니다.

그네경기와 씨름경기도 대성황이였고 군민합동오락회와 연예공연도 재청, 삼청의 련발로 예정시간을 훨씬 초과하였습니다. 마을사람들은 단오놀이를 조직해준 혁명군에 감사를 표시했습니다.

그날 옥돌골에서는 수십명의 청년들이 참군을 탄원해나섰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정치사업이 마을사람들의 심금을 크게 울려주었다는것을 의미합니다. 체육경기와 오락도 정치사업의 한 형태라고 보아야 합니다.

우리 나라에는 수백수천개의 극장, 영화관, 회관들이 있습니다. 기관, 기업소들에 있는 회의실까지 합치면 수만개의 모임장소가 있는셈입니다. 그것은 정치사업과 군중문화사업을 마음대로 전개할수 있는 훌륭한 공간입니다. 그런데 일군들이 이 공간을 잘 리용하지 않고있습니다. 돈을 많이 들여 집을 지어놓았는데 중요한 행사나 회의를 할 때에만 몇번 쓰고는 노상 내버려두고있습니다. 이런 건물들에서 과학강연이나 정세강연같은것도 하고 웅변대회나 시랑송모임 같은것도 하고 이름난 과학자, 작가, 예술인, 체육명수, 영웅, 로력혁신자들과의 상봉모임 같은것도 자주 조직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이크도 없고 극장도 없고 방송국도 없는 빨찌산생활이였지만 우리는 모든 가능성을 다 동원하여 인민대중에 대한 정치사업을 끊임없이 벌리였습니다.

그후 옥돌골과 그 주변 인민들은 우리를 도와 투쟁을 잘하였습니다. 약담배를 피우던 휘풍동의 젊은 농민형제도 아편을 떼고 조직원이 되여 잘 싸웠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두만강연안의 마을들을 혁명화하기 위한 위대한 수령님의 활동은 화룡일각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국내혁명에도 깊은 관심을 두시였다. 그이께서는 단오명절을 며칠 앞두고 국사봉에 나오시여 지하혁명조직책임자 및 정치공작원회의를 소집하시였다. 국사봉은 두만강의 지류인 서두수연안에 있다.

국사봉회의를 준비하고 소집하는데서 주역을 담당한 사람은 정치공작소조책임자였던 리동걸이다. 국사봉회의가 화제에 오를 때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각별한 애정과 친근감을 가지고 리동걸을 회상하시였으며 그를 충실한 지휘관이라고 평가하군하시였다.


우리는 대홍단전투를 치르고 화룡땅에 건너가자 인차 사령부당회의를 열고 리동걸동무의 책벌을 해제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날로 그에게 국내정치공작의 책임적인 임무를 맡기였습니다.

국내혁명앞에는 할 일이 많았습니다. 국내혁명의 중심과제는 《혜산사건》때문에 파괴된 지하혁명조직들을 하루속히 복구확대하는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무산지구에 리동걸을 파견하여 거기에 전날의 리제순이나 박달이 꾸린것과 같은 강력한 지하조직망을 꾸리려고 하였습니다.

나는 리동걸에게 국내에 나가면 무산경내의 적당한 지점에서 국내지하조직책임자들과 정치공작원들의 회의를 가질 계획이니 그 준비를 하라고 일러두었습니다. 리동걸은 회의준비를 잘하였습니다. 그는 두만강가의 중국인마을들에 살고있는 조선사람들을 먼저 장악하고 그 줄을 타고 국내에 드나들면서 조직선도 찾고 회의준비도 착실하게 하였습니다.

그때 사령부와 리동걸사이에서 통신을 책임지고 보장하면서 적극 도와준 사람은 김정숙이였습니다. 우리는 그를 두만강연안의 국경마을에 내보내여 리동걸과 자주 련계를 가지게 하였습니다. 김정숙은 사령부와 리동걸의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면서 우리의 지령과 의사를 제때제때에 전달해주었습니다. 그 당시 무산군 삼장면일대에서 사는 농민들은 부침땅이 모자라 여름한철을 중국땅에 건너가 농사를 지으며 지내다가 가을철이 되면 곡식을 베여가지고 조선으로 돌아오군했습니다. 무산사람들은 이것을 《간도농사》라고 했습니다. 갑산지방 농민들가운데도 《간도농사》를 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김정숙은 먼저 《간도농사》를 지으러 온 사람들부터 장악하고 그들을 통하여 국내와의 련계를 보장하였습니다.

무산, 연사 지구를 혁명화하는데서는 리동걸과 김정숙이 주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리동걸은 공작임무를 받은지 스무날도 되나마나해서 벌써 회의준비를 끝냈습니다.

그날 나는 리동걸의 안내를 받으며 두만강 물동다리를 건너 회의장소로 내정된 국사봉에 올랐습니다. 국사봉회의에서는 지하혁명조직들을 확대하며 조선혁명을 계속 앙양시키기 위한 일련의 대책적문제들이 토의되였습니다.

리동걸은 회의를 마친 다음 나에게 두가지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하나의 문제는 자기가 꾸려놓은 삼장지구의 조직을 국사봉회의방침대로 연사일대에로 확대발전시켜 당조직의 본보기, 조국광복회 조직의 본보기로 만들어보겠다는것이였고 다른 하나는 국내조직책임자들에게 정치사업방법을 배워주기 위해 국사봉회의 참가자들을 다 옥돌골단오명절행사에 참가시키게 하면 좋겠다는것이였습니다.

나는 그 두가지 제기를 모두 승인해주었습니다.

리동걸은 회의가 끝난 다음 옥돌골에서 우리와 함께 단오명절을 쇠고 비밀아지트에 가서 조국광복회 조직들에 국사봉회의방침을 침투하는 한편 한 국내조직원과의 련계밑에 연사지구로 가기 위한 준비사업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 아지트에서 불의에 습격을 받고 총상을 당한 몸으로 적들에게 체포되였습니다.

리동걸이 체포된후 한 조직원이 그가 맡겨두었던 비밀수첩을 가지고 올기강밀영으로 찾아왔댔습니다. 그 수첩에는 안도현 큰골과 화룡현 옥돌골 그리고 국내 삼장, 연사 일대의 지하조직실태와 연사지구에서의 활동계획이 암호문으로 적혀있었습니다. 리동걸은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필요한 자료들을 수시로 적어서 조직원의 집에 맡겨두었던것 같습니다.

박달의 말을 들어보면 리동걸은 옥중에서도 감방벽을 두드려가며 혁명동지들과 의사소통을 하고 그들을 투쟁에로 불러일으켰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법정투쟁도 잘했습니다. 법정에 나설 때면 그가 노상 선참으로 《조선혁명 만세!》를 불러 공산주의자의 기개를 시위하였다고 합니다.

리동걸은 김주현처럼 사업과정에 엄중한 과오를 범한 사람이지만 혁명실천을 통해 그 과오를 씻고 인생의 마무리를 잘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기계가 아닌 이상 일을 하느라면 더러 과오도 범할수 있습니다. 범한 과오를 어떻게 고치는가 하는것은 사람의 사상과 수양에 달려있습니다. 리동걸은 자기비판도 잘했지만 련대정치위원의 자리에서 해임된후 사상단련도 잘했습니다. 그런 덕으로 동지들의 신임을 인차 회복할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진가는 처벌을 받았을 때 제일 잘 드러나기도 합니다. 조직에서 어떤 처벌을 주면 수양이 부족한 사람들은 그것을 성근하게 받아들일 대신 지나치다거니, 억울하다거니, 과장되였다거니 하면서 불평질을 합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형태로 비판을 한 사람들에 대하여 복수합니다. 그리고 동지들과는 담을 쌓고 살아갑니다. 한혁명초소에서 일하는 동지들끼리 서로 속을 주지 않고 지내서야 무슨 재미로 살아가겠습니까. 동지들에게 속을 주지 않으면 집단의 변두리밖으로 밀려나게 되며 종당에는 딴꿈을 꾸게 됩니다.

그러나 수양이 높은 사람들은 동지들이 아무리 가혹한 비판을 해도 그것을 항상 허심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혁명동지들이 자기에게 주는 비판을 보약으로 생각합니다. 김주현과 리동걸이 지휘관의 자리에서 떨어져나가는 무거운 책벌을 받은 다음에도 실망하거나 타락하지 않고 자기의 과오를 깨끗이 고칠수 있은것은 동지들의 비판을 보약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잘 소화하였기때문입니다.

동지들의 비판에 대한 소화능력을 보면 사람의 인격과 수양이 어느 정도인가를 가늠할수 있습니다. 리동걸은 인격과 수양에서 모범으로 내세울수 있는 공산주의자의 한사람이였습니다.

리동걸은 비록 희생되였으나 그가 바친 심혈은 두만강연안과 국내깊이에서 수십수백개의 불씨로 자라났습니다. 리동걸이 체포된후에는 김정숙이 그를 대신해서 연사지구에 나가 그고장 조직원들에게 선을 이어주고 그가 바라던대로 당조직과 조국광복회 조직을 꾸려놓았습니다. 그 조직들은 전민항쟁을 준비하는데서 큰 밑천으로 되였습니다.

두만강을 무심히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서비스이용약관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상단으로


Copyright © 2010 - 2023 www.hanseattle1.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