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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비핵화의 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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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이엘
댓글 0건 조회 3,301회 작성일 10-09-01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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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비핵화의 종언
정권교체 노린 오바마 정부의 대북 압력정책과 북한의 중국 의존전략

(통일뉴스 / 박선원 / 2010-09-01)


글을 시작하며

한반도 비핵화, 그것은 1980년대 말 동구권과 소련의 붕괴 이후 대북 정책의 가장 큰 목표였다. 물론 일시적인 혼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 시절 북한 붕괴와 흡수통일 추진은 실패로 끝났다. 김일성 주석 사후 16년이 지난 오늘 대북정책의 ‘표면적 목표(declared policy goal)’는 여전히 비핵화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미국 오바마 행정부의 고위당국자들은 비핵화 전략을 자못 확신에 찬 어조로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라고 말한다. 협상이니 대화니 이런 걸 말하지 않는다. 과거 부시 정부 말기와 달리 대화를 구걸하지 않고 압력을 가해 북한이 스스로 핵 포기 협상에 나오면 미국이 우위에 서서 비핵화를 가속화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워싱턴의 대다수 한반도정책 전문가들은 이것밖에 없다고 찬동한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 내부에서는 자신감 못지않게 초조함도 서서히 스며 나온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대북정책 주무부서가 아닌 정책기획국에 ‘새로운 옵션(fresh option)’을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동해에서 한미 연합훈련을 마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8월 초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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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을 당시 김영남 상임위원장과 대화하는 모습

대부분의 워싱턴 내 한반도문제 전문가들은 8월 25일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억류 중인 아이잘론 곰즈를 데리고 오기 위해 평양에 갔을 때 ‘결국 북한이 대화에 나오기 위한 체면치레 수준으로 카터를 불러들이는 것이긴 하지만, 두 번이나 전직 미국 대통령이 평양에 들어가는 건 김정일을 잘못 길들이는 것’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그러나 김정일 위원장은 카터 대통령 만찬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8월 26일 이른 새벽 북한 만포에서 중국 집안을 잇는 철도를 이용, 중국에 들어갔다. 압박만이 비핵화로 이끌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라는 ‘전략적 인내’ 전략에 대한 북한의 대답이다.

왜 김정일 위원장은 카터 방북을 미국과의 대화를 다시 시작하기 위한 징검다리로 활용하지 않고, 등을 돌려 중국으로 가야 했는가? 한반도 장래에 어떤 함의를 던지고 있는가? 이에 대답하기 위해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되짚어봐야 한다.

아래에서 필자는 다섯 가지 주장을 할 것이다. 첫째, 현재 오바마의 대북정책은 정권 출범 초기 북한의 오판으로 인한 로켓/미사일 발사 실험과 제2차 핵실험, 2명의 미국 여기자 억류사건으로 적극적인 협상에서 정권교체로 선회하게 되었다. 둘째, 정권교체를 우선시하되 부수적으로 핵협상 가능성을 열어두는 현재의 정책 목표를 달성하는 방식은 북한의 한정된 자원을 급속히 고갈시켜 정권기반을 붕괴하려는 2003년 럼스펠드의 ‘작전계획 5030’과 매우 유사하다. 셋째, 오바마 정권은 워싱턴에서 북한 다루기에 성공했다는 평가가 나오기 전까지 쉽게 이 노선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평가의 기준은 북한의 굴복, 체제의 동요, 혹은 비가역적 비핵화 조치의 선행이 될 것이다. 넷째, 이명박 정권의 대북강경 정책은 오바마 정권의 입장 선회에 중요한 촉매작용을 하였다. 다섯째, 김정일은 살기 위해 중국에 기대는 것 이외의 길은 없게 되었다.

이상의 결론을 통해 피하고 싶은 한반도 장래를 미리 목격하게 된다. 즉, 한반도에서 불안정 국면은 계속될 수밖에 없으며, 비핵화는 이제 목표로서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주장의 결론으로서 필자는 한반도 장래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한국에 어떤 세력이 정권을 잡고 어떠한 전략과 비전을 펼치느냐에 달려있다는 점을 새삼 강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오바마 정권의 짧았던 대북 협상 제스쳐

지난 1년 반 동안 오바마 정권의 대북정책을 분석하면 세 차례의 굴절이 있었다. 오바마 행정부 취임 직후부터 2009년 5월 26일 제2차 핵실험 직전까지 북한과 적극적인 대화 시도 기간이 있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1월 17일 취임연설에서 미국이 이제 손을 내밀겠으니, 지금까지 적대세력도 움켜쥔 주먹을 펴라고 호소하였다. 2009년 2월부터 부각된 미사일 발사 움직임에 대해서도 어떻게든 대화로 풀어보고자 했다. 스티븐 보즈워스 특별대표를 평양에 보낼 준비가 되어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히면서 두 번이나 동북아 순방에 나서게 했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물론 오바마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서 북한이 마지막 순간에라도 입장을 바꿔서 미사일 발사 움직임을 중단하고 대화에 나설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이때 백악관 고위담당자들은 이미 김정일 위원장에 대해 희망을 포기하고 있었다. 현재 백악관에서 비확산정책의 키는 게리 세이무어 (Gary Samore)가 쥐고 있었다. 그는 2008년 대통령 선거기간 중 부시 행정부가 얻어낸 영변 핵 활동 중단과 핵시설 불능화가 언제든 돌이킬 수 있는 것이므로 검증을 강력하게 보장받을 수 있는 문서를 확보해야 한다고 했었다.

또 다른 한반도문제 책임자인 NSC 제퍼리 베이더(Jaffery Bader) 선임보좌관은 오바마 대통령 취임 직전에 있었던 북한 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의 대남 전면대결태세 성명과 그 이후 미사일 발사에 대해 가장 감정이 많이 상한 인물이다. 베이더 선임보좌관의 대북정책 설명에는 늘 “오바마 정부 취임 첫날(Day-1)부터 우리를 시험하려던 게 김정일”이며, “절대 우리는 같은 것을 세 번 다시 사지 않겠다”는 거다. 제네바합의 이래 불능화까지 두 번 갔었고 그때마다 중유를 제공했지만 앞으론 그런 건 없을 거라는 의미이다.


2009년 여름, ‘대화와 압력 병행전략’ 완성

2009년 5월 하순 북한의 제2차 핵실험을 보는 오바마 안보참모들의 심경은 상당히 복잡하고 양면적이었다. 분노와 허탈,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도발할 게 없으니 대화에 나올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하는 기대감 같은 게 혼재되어 있었다. 김정일 위원장이 4월 최고인민회의에서 국방위원장으로 다시 추대되어 국내문제도 어느 정도 정리되었을 수 있다는 것도 대화 재개에 무게를 싣게 한 요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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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역시 중점은 대화가 아닌 제재에 놓여 있었다. 북한이 연달아 도발을 일삼고 있으며, 여기자 두 명까지 억류하고 있는 상황에서 최대한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라는 다자틀과 2005년 BDA와 같은 독자적인 금융제재 모두를 실행에 옮겨보자는 것이었다. 보즈워스 특별대표는 뒷전에 물러나 있고 유엔 미국대표부 수잔 라이스 대사, 커트 캠벨 국무부 아태담당차관보와 대북제재 유엔 안보리결의 1874호 이행조정관(Coordinator for Implementation of UNSC Resolution 1874 on North Korea) 필립 골드버그가 전면에 나섰다.

과거에는 북한과 불법적인 거래가 문제였다. 이때부터 북한과 거래가 합법임을 사전에 설명하지 않은 모든 거래는 불법으로 간주한다는 새로운 원칙을 내놓았다. 초기 수개월간 적극적인 대북 접촉 외교에서 압력을 통한 대화유도로 바뀌었다. 이를 공식확인한 게 2009년 7월 아세안지역안보포럼에서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의 연설이었다. 워싱턴의 핵심당국자들만이 아니라 외곽의 전문가들이 광범위하게 참여해서 심사숙고 끝에 정리한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 기본 방침이라고 하는 이 연설에서 경제지원, 관계정상화, 한반도 평화체제 등 미국이 제시할 수 있는 당근은 모두 제시되었다. 서울의 일부 전문가들이 이제야 비로소 오바마 행정부가 대화를 강조하는 정돈된 방침을 내놓았다고 관측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부를 속속들이 잘 아는 인사들에 의하면 이때 이미 김정일 정권과 협상은 불가능하며, 정권교체를 기다리는 편이 나으며, 아마도 가까운 장래에 경제난과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문제가 겹쳐 급변사태가 발생할 거라는 전망이 전제되어 있었다. 오히려 누구든 김정일 차기 권력자가 되려면 이 같은 거래명세서를 미리 알고 있어라 하는 메시지 같은 것이라는 힌트와 실제 김정일 정권에 대한 직접적인 압박이 모두 깔려 있었다.

8월 4일 두 명의 아시아계 미국인 여기자 억류 해제를 카드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을 평양으로 불러들인 김정일 위원장의 제스쳐에 냉소적이었다. 김정일이 클린턴과 모든 문제를 충분히 논의했다는 북측 주장에 냉담했다. 보즈워스 특별대표의 방북이 클린턴-김정일 회동 이후 넉 달도 더 지난 12월 8일에야 이뤄졌다. 보즈워스의 김정일 위원장 면담은 없었다. 유력하게 점쳐지던 강석주의 미국 답방이나 제2차 보즈워스-강석주 회담도 이뤄지지 않았다. 그 대신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중국이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3단계 회담이니 6자회담 준비접촉-6자회담 본회담이라는 2단계 방식은 모두 중국 다이빙궈 국무위원(2009년 9월)과 웬자바오 총리(2009년 10월)의 평양 방문과 김정일 위원장의 2010년 3월 답방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구체화된 것이다. 중국이 6자회담을 재개하기 위해 북한과 오랜 기간 동안 축적해온 외교자산을 총동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2010년 2월 하순부터는 어떤 식으로든 회담이 열리긴 열릴 것 같은 분위기였다. 3월 중순 이제 택일만 남았었다. 3월 26일 천안함 침몰사건이 발생하자 ‘정말 거의 다 된 판’이었다는 탄식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천안함 사건, 이명박 정권의 대북 강경노선과 오바마 정권의 ‘작계 5030’ 중첩?

천안함 침몰사건의 영향은 이미 늘어질 대로 늘어진 6자회담 국면을 한 번 더 늦추는 데 그치지 않았다. 일단 남북 양측간 일촉즉발의 군사적 충돌 압력을 제거한 미국 오바마 행정부가 갑자기 강성으로 나왔다.

이에 대한 분석은 약간 갈린다. 4월 중순 이명박 정부의 천안함 대응 지원 요청을 받아들인 결과라는 설과 4월 하순부터 오히려 오바마 정부 인사들이 이명박 정부 못지않게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강경하게 입장이 바뀌었다는 설이 바로 그것이다. 어쨌든 두 가지 설은 대북제재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하나의 방향을 향해 움직였다.

이명박 정권이 6월 2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대북 강경드라이브를 걸면 걸수록 유리해진다는 판단을 했다면 오바마 정권은 어차피 이길 선거라면 확실히 도와주고 확실히 챙기자는 근시안적인 수지타산이 작용했을 수 있다. 만약 그런 거였다면 6.2지방선거가 끝난 뒤에는 압력을 가하면서도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두기 위한 일종의 숨 고르기에 들어가야 했다. 동해에서 벌어진 대규모 한미합동해상군사훈련, 서해 상에서 한국 해군의 독자훈련, 하루가 멀다고 쏟아지는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 전방위 독자제재는 뭔가 다른 전략이 작동되고 있다는 판단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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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함 침몰사고 후속대책 논의를 위해 방한한 힐러리 클린턴 美 국무장관이 26일 오후 서울 정부중앙청사 별관에서 외교통상부 유명환 장관과 함께 내외신 기자회견을 마친 후 악수를 하고 있다.

국제안보전문 인터넷매체인 글로벌 시큐리티는 2003년 7월 21일 <US News & World Report> 기자인 브루스 워스터(Bruse Auster)와 케빈 화이틀로우(Kevin Whitelaw)의 보도를 인용하여 ‘작계 5030’의 존재 가능성을 언급한다. 즉, 2003년 5월 부시 행정부 국방장관이던 도날드 럼스펠드의 지시에 의해 개발된 전략으로 북한군의 부족한 재원을 고갈시켜 김정일 반대 쿠데타를 촉발하려는 평화와 전쟁 중간 지대의 작전이라는 거다.

2008년 김정일의 와병설 대두 이후 워싱턴과 서울에 광범위하게 퍼진 북한 조기급변사태설은 양국 정부 당국자들이 중국 측 카운터파트를 접촉할 때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의제 가운데 하나가 된다. 2009년 오바마 행정부 출범 이후 첫 번째 미·중 전략 및 경제대화(S&E)에서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중국 측에 북한 급변사태를 정식으로 논의해보자고 했으나 실패했다는 보도가 나왔었다. 한국에서는 이미 급변사태 연구로 정부용역을 받지 않으면 북한 및 안보 연구자가 아니라고 할 정도로 유행이 되었다.

중국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김정일 정권과 대화하느니 김정일 사후 새로운 정권의 등장을 기다리는 게 낫다는 한·미 양국 정부의 판단이 마침내 조기붕괴유도론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의문은 ‘작계 5030’ 보도를 떠오르게 한다.

지난 2005년 BDA 사건을 주도했던 데니 글레이져 재무부 부차관보는 이미 북한의 돈줄을 죌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강구했으며, 시작하라는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전언이다. 국무부와 재무부는 8월 들어 열심히 새로운 발표를 내놓고 있다. 7월 동해 상에서 한미합동군사훈련이 끝나자마자 앞으로 매월 1회 이상 군사훈련을 실시하겠다고 한다. 이제 확실히 대화와 압력 병행에서 압력위주의 대북정책으로 바뀌었다.

그 최종지점에 김정일 정권의 종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2010년 7월 오바마 정부 국방부의 우주정책담당부차관보 게오르기 슐테 (Georgy L. Schulte)는 <Foreign Affairs>에 “확산이 시작되기 전에 막는 길”(Stopping Proliferation Before It Starts)라는 글을 기고했다. 이 글에서 슐테 부차관보는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

“북한과 이란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력은 대화의 장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조건을 만들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간 전례를 보면 각 국가의 지도자들의 본성이 핵 포기 여부에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었으며, 그들이 외부 세계와 어떤 관계를 갖고자 하는 데 달려있었다. 간단히 말하면 협상의 복원은 결국 정권교체를 필수적으로 요구할 것이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추구하는 외교와 그들이 부과하는 제재는 내부로부터의 정치적 변화를 촉진하는 데 맞춰져야 한다. 왜냐하면 북한과 이란에서 권력을 잡고 있는 오늘의 지도자들이 핵 야망을 포기할 것이라고 확신하기엔 아마 너무 늦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을 향한 워싱턴의 전략도 현재의 핵 외교에 고정된 데서 이탈해야 한다.”

이심전심으로 확인된 이 기조는 좀처럼 바뀌지 않을 것이다. 미국외교협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는 2010년 6월 작성하여 7월에 발표한 보고서,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에서 4가지 시나리오를 그려보았다. 북한 핵보유국 지위 묵인과 정권교체, 두 가지 시나리오는 배제했다. 핵물질 외부반출 차단을 강화한 채 상황관리에 집중하는 것도 배제하였다. 해답은 채찍과 당근을 결합해서 대화로 나오게 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과거 보고서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압력의 수준이 과거와 전혀 다르게 설정되어 있다. 북한 붕괴로 인해 한반도와 동북아의 안정이 일시적으로 불안에 빠지는 걸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데 필자의 시선이 끌렸다. 여기서 중국은 6자회담 의장국이 아닌 대북압력을 두려워해선 안 되는 훈계의 대상이 되고 있다. 미국의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라는 것도 이러한 불안정까지 견뎌내면서 압력을 가하자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김정일이 결코 핵을 협상을 통해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미국 오바마 행정부와 이 같은 입장을 계속해서 강화하는 데 주력해온 이명박 정권이 입장 변경의 인센티브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워싱턴에는 절대로 크리스토퍼 힐처럼 행동해선 안 되는 게 하나의 묵계처럼 굳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시의 정권교체 노선보다 힐의 과도한 협상의지가 잘못이었다’는 정서가 만연해 있다. 다시 말하면 비핵화를 실현 가능한 목표로 설정하지 않고 있다.

6자회담은 포기했느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라고 한다. 이명박 정부 당국자들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핵포기와 같은 역사적인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현재의 한·미 양 정부 당국자들의 자포자기성 확신, ‘신포도라서 높이 뛰어올라 따먹으려 할 필요가 없다’는 이솝 우화 같은 관념은 북핵 문제를 영구미제로 남길 뿐만 아니라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상시적 불안상태에 빠뜨리게 될 것이다. 전쟁도 평화도 아닌 긴장과 갈등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는 게 쉽지 않을 공산이다.


결론: 김정일 위원장의 중국 방문과 한반도 비핵화의 종언

김정일 위원장은 이미 2009년 7월 미·중 전략/경제대화(S&ED)에서 미국이 북한 급변사태를 공동으로 연구하자는 미국 측 제안이 있었음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2009년 9월 다이빙궈 국무위원이 북한에 가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고 온 직후 일군의 미국 학자들이 베이징을 찾아 북한 급변사태 논의를 촉구했다. 중국 측 반응은 북한에 급변사태가 없을 것이라는 거였다.

한 달 뒤 웬자바오 총리가 평양을 갔다 온 뒤에 다시 베이징을 찾은 인사들에게 중국 측 카운터파트들은 “북한에서 급변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중국이 도울 것”이라는 자못 공격적인 반응을 접해야 했다. 그리고 위에서 소개한 슐테 부차관보의 기고문과 외교협회 보고서는 거의 실시간으로 강석주 제1부상이 김정일 위원장과 국방위원회에 보고했을 것이다.

이미 2009년 북한 핵실험 직후부터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지구 상에서 가장 강력한 제재를 부과하고 있다’고 누차 공개적으로 발언하였다. 지난 1년 동안의 제재를 김정일 위원장은 과연 얼마나 힘들게 느꼈을까? 지난여름 클린턴 방북 직후 대화에 나서려던 오바마 행정부에 대해 ‘제재를 부과하면 적어도 6개월은 지나야 효과가 나타난다. 핵실험을 했는데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회담에 나가선 안 된다’며 발목을 잡았던 이명박 정부의 고위인사들은 김정일의 중국 방문이 거의 목숨을 연명할 마지막 기회로 삼았을 것이라고 판단할 지도 모른다.

필자가 8월 10일에 만난 러시아의 외교부 출신 친구에 의하면 ‘불편하지만 견딜 수 있는 정도’라면서 ‘실제 어려움은 미국과 한국의 제재보다는 지난 12월 초 단행한 화폐교환조치였다. 저축한 돈을 국가에 내놓아야 했던 주민들의 심리적 저항이 없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은 비록 인플레 현상이 계속되고 있지만 장마당에서 쌀 거래가 이뤄질 정도로 안정을 되찾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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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일(왼쪽) 북한 국방위원장이 지난 27일 중국 지린성의 수도 창춘에 위치한 난후호텔에서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 정상회담에 들어가기에 앞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 ⓒ창춘로이터연합뉴스

필자에겐 김정일과 그 주변인물들이 느낄 제재의 고통을 측정하여 한두 달 후에 손들고 나올 것이라고 판단할 능력은 없다. 하지만 과거 북한에게 비료와 쌀 지원 중단 혹은 지연 같은 조치가 북측 지도부에 상당한 부담이 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경제 제재 때문에 미국에게 손들고 나가 핵무기를 내놓기보다는 중국에 가서 지원을 요청하고 그 대신 6자회담에서 중국의 조언을 비교적 충실히 존중해주는 모습을 보이는 게 현재의 어려움을 넘길 수 있는 길이라고 김정일 위원장이 판단해서 중국에 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인 분석일 것이다.

6자회담 북측 수석대표 김계관 부상은 BDA 제재가 시작된 뒤 몇 달이 지난 2006년 초 미국 부시 행정부는 자신들이 내린 전략적 결정, 즉 비핵화의 기회를 저버렸다고 말한 바 있다. 김정일 위원장이 오바마 행정부의 기대를 저버렸기 때문에 상황은 다르지만 앉아서 정권교체를 당하느니 차라리 중국에 의존하여 핵무장을 완성하여 김일성-김정일 정권의 영속화를 위한 안보수단, 핵 억제력을 쥐고 있는 것이 더 우선이라고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중국을 건너갈 때 혹시 있을지 모르는 정밀타격을 회피하기 위해 카터 전 대통령을 인간방패로 불러놓고 중국으로 들어간 것은 그만큼 장고 끝에 나온 중대결정으로 볼 수밖에 없다.

누구의 계산이 맞을지 두고 볼 일이다. 그러나 대외정책이란 본시 불확실성을 극복하기 위해 서로 모호성을 유지하면서 상대방을 다루어 가는 ‘셰도우(shadow) 복싱’과도 같다. 이걸 다 걷어버리고 거친 맨주먹을 그대로 내보이고 흔드는 것은 외교정책이 아니다.

그래서 다시 생각한다. 한반도 장래는 누가 설계하는지에 대해. 2008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오바마 후보가 승리하자 이명박 정권도 결국 대북정책을 바꾸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필자도 한반도 장래를 향해 새로운 이니셔티브를 내놓을 수 있는 쪽은 이명박 정권이 아니라 오바마 행정부일 것이라는 기대에 사로잡혔었다. 그러나 유사 이래 강대국이 자국의 이익보다도 주변국의 장래를 더 염려한 사례가 있었던가? 클린턴이 북폭 가능성을 검토할 때 카터를 평양에 보낸 분이 바로 당시 야당 총재 김대중 전 대통령 아니었던가? 노무현 대통령이 없었다면 북한과 한자리에 앉기조차 싫다던 부시를 9.19 공동성명까지 끌고 갈 수 있었을까? 누구도 남의 꿈을 대신 꿔주지 않는다.

김정일의 특별열차가 만포를 지나 압록강을 건널 때 한반도 비핵화의 비전도 물 건너 갔다. 그러나 마지막 하나의 질문에 매달리고 싶다. 정녕 영원히 물 건너 갔을까? 한반도에 새로운 지도자가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경우 가능성은 다시 열리지 않을까? 한반도 비핵화의 종언을 주장하는 이 글에서 또다시 그 꿈을 꿔야 하는 모순에 사로잡혀 있다.

 

박선원 /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초빙연구원


출처 :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9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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