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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봉의 영령들은 말한다 (리우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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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11,790회 작성일 15-07-23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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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칠성봉의 영령들은 말한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10대강령》에서 다음과 같이 천명하시였다.

《10. 민족대단결과 조국통일위업에 공헌한 사람들을 높이 평가하여야 한다.

민족대단결과 조국통일을 위하여 공을 세운 사람들, 애국렬사들과 그 후대들에게 특혜를 베풀어야 한다. 지난날 민족을 배반하였던 사람들도 과거를 뉘우치고 애국의 길에 나서면 관용으로 대하며 조국통일에 이바지한 공로에 따라 공정하게 평가하여야 한다.》

달이 가고 해가 가는것은 막을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다.

이 법칙에 따르는 세월의 흐름속에서 어버이수령님의 높은 뜻을 받들고 조국통일성업에 헌신분투해오던 재북인사들도 로쇠하여 하나둘 세상을 하직하게 된것은 어쩔수 없는 일이였다. 조국해방전쟁시기 전략적인 일시적후퇴를 맞아 북행길에 오를 때 그들의 나이가 이미 평균 50살에 이르고있었으니 20세기가 저물고 21세기가 밝아오는 사이에 그들이 더 늙어 인생의 종지부를 찍게 된것은 필연일수밖에 없는 일이였다.

그러나 위대한 수령님의 품속에서, 조국과 민족앞에서 인생을 잘 마무리한 그들은 죽어서도 영생의 언덕에 올라 겨레의 추억속에 영원히 사는 사람들로 되였다.

평양시교외의 룡성구역에 위치한 룡연산 칠성봉에는 재북인사들의 묘역이 있다.

여기에 지금(2014년현재) 60여명의 재북인사들이 고이 잠들고있다.

그들의 이름을 여기서 유골안치의 순서에 따라 줄별로 좌에서 우로 가면서 한번 외워본다.

첫줄; 배중혁(초대《국회》의원), 리문원(초대《국회》의원), 김병희(초대《국회》의원), 황윤호(초대《국회》의원), 정인보(국학대학 학장, 초대감찰위원장), 김경배(초대, 2대《국회》의원), 안재홍(미군정청 민정장관, 2대《국회》의원), 송호성(국방경비대 총사령관), 박윤원(초대《국회》의원), 김옥주(초대《국회》의원), 리구수(초대《국회》의원), 강욱중(초대《국회》의원)

둘째 줄; 원세훈(2대《국회》의원), 김효석(내무부 장관, 초대《국회》의원), 박렬(《재일한국인거류민단장》), 김약수(초대 《국회》부의장), 박보렴(《녀자국민당》 부위원장), 백상규(《대한적십자사》 부총재, 2대《국회》의원), 조헌영(초대, 2대《국회》의원), 김칠성(2대《국회》의원), 현상윤(고려대학교 초대총장), 백관수(초대법제사법위원장), 허영호(초대《국회》의원), 리춘호(서울대학교 총장)

셋째 줄; 신성균(초대《국회》의원), 구덕환(2대《국회》의원), 김종원(《대한로총》 조사부장), 명제세(심계원 원장), 박승호(《대한부인회》 회장), 량재하(2대《국회》의원), 리만근(초대《국회》의원), 조종승(초대, 2대《국회》의원), 신석빈(2대《국회》의원), 박철규(2대《국회》의원), 류기수(2대《국회》의원)

넷째 줄; 신상봉(리재민협회 리사), 설민호(조흥자동차주식회사 사장), 권태희(초대《국회》의원), 김용무(2대《국회》의원), 김상덕(초대《국회》의원, 《국회》반민특위 위원장), 리광수(작가, 《동아일보》 편집국장), 리상경(2대《국회》의원), 백승일(서울두산정미소 경영주), 박영래(2대《국회》의원), 김장렬 (초대《국회》의원)

다섯째 줄; 로일환(초대《국회》의원), 리종성(2대《국회》의원), 김동원(초대《국회》부의장), 김종선(초대《국회》의원), 장현식(전라북도 지사, 조국광복회 회원), 김의한(한독당 상무위원), 장련송(2대《국회》의원), 김헌식(2대《국회》의원), 오정방(조선청년당 최고위원)

여섯째 줄; 정인식(2대《국회》의원), 김려식(신진당 중앙위원), 정구홍(농림부 차관), 리순택(《정부》기획처장), 김한규 (서울시 조흥은행장), 고명우(세브란스병원 원장), 신용훈(2대《국회》의원), 박성우(2대《국회》의원)

일곱째 줄; 최태규(초대《국회》의원), 윤성식(4월혁명연구소 소장), 김흥곤(3균주의청년동맹 조직부장)

앞의 장, 절들에서 이미 언급된바와 같이 여기 재북인사들의 묘역에서 잠들고있는 사람들은 복잡다단한 인생행로를 거쳐온 사람들이였으며 어버이수령님의 품속에서 삶을 갱신하여 애국의 길에서 인생을 깨끗하고 값있게 총화한 사람들이였다.

참으로 그들에게 베풀어주셨던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사랑은 끝이 없는것이였다. 그들이 사후에 이런 묘역에 안치된 사실 하나만 놓고도 그것을 똑똑히 알수 있다.

재북인사들의 묘역이 들어앉은 칠성봉은 문자그대로 높지도 낮지도 않은 아주 아늑하고 목가적인 봉우리이다. 이런데 정해진 묘역에 묻히면 진짜 안식을 찾을수 있겠다는것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느낌이라는것을 강조하고싶다.

재북인사들이 별세할 때마다 제일로 가슴아파하신분은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이시였다.

입북전 《대한적십자사》 부총재였던 백상규선생이 1957년 12월 26일 78살을 일기로 별세하였을 때였다.

그가 불치의 병으로 정부병원에 입원해있을 때 병원 원장에게 그의 치료에 최선을 다하도록 여러차례나 이르시고 해당 일군들에게 그 선생이 고령에 침상에 누워있으니 얼마나 가족이 그립겠는가, 선생의 가족들이 와서 간호하게 하라고 남조선적십자사에 통지하도록 하는 조치까지 취해주시였던 우리 수령님이시였다.

그런데 그가 끝내 사망했다는 비보를 접하시고는 매우 비통해하시며 그의 사망과 관련한 부고를 평양방송으로 내보내도록 하시는 한편 장례식의 전후시기를 막론하고 유족들이 고인의 유해를 판문점을 통해 운장해나갈수 있도록 배려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조치가 반동들의 방해책동으로 실현될수 없게 되자 선생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크게 치르게 해주시는 한편 고인의 장지를 평양시교외의 풍치좋은 곳에 정하게 해주시고 친히 화환까지 보내주시였다.

한명 또 한명의 재북인사들을 떠나보낼 때마다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심중을 더 아프게 한것은 전쟁이 끝난지 수십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아직 평양으로 묘를 이설해오지 못한 인사들도 있고 또한 똑똑한 묘도 없이 초야에 묻힌채 무주고혼으로 남아있는이들도 있다는 사실이였다.

사실 전쟁의 와중에 남조선의 명망있는 인사들속에서는 이런저런 기회에 뜻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개별적으로 몇몇씩 서로 팔을 겯고 수령님의 품을 찾아 북상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던중 간고한 행군길에서 뜻하지 않게 병으로 죽고 미제공중비적들의 폭격으로 생명을 잃고 반동들의 마수에 걸려 희생당한 사람들이 속출되였다. 그때 형세가 급한 때였으므로 묘를 제대로 쓸 경황이 없었다. 그리하여 여러 인사들이 초야에 묻혀 오랜 세월 무주고혼이 되고말았다.

그때로부터 세월이 많이 흐르다보니 고인들의 지우들은 물론 북에 들어온 고인들의 가족, 친척들조차 그들에 대한 기억이 삭막해지고 지어 그들에 대한 슬픈 추억마저 희미해져가고있었다.

하지만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만은 그들을 잊지 않으시고 계속 마음을 쓰고계시였다.

1978년 1월의 어느날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새해벽두에 설계해야 할 국사로 몹시 분망한 속에서도 관계부문 일군들에게 재북인사들가운데서 평양에 묘지를 두지 못하고있는 사람들을 모두 장악하여 그들의 유골을 다 찾아다가 평양교외의 풍치좋은 곳에 안장할데 대하여 교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에 접한 일군들은 감동에 젖어 모두 눈물을 머금었다. 그런데 정작 집행하자고 하니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세월이 하도 많이 흐르다보니 흩어져있는 고인들의 묘지들을 어떻게 찾겠는지 좀처럼 안이 서지 않았던것이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일군들의 이러한 어려움을 깊이 헤아리시고 수령님의 교시가 있은 때로부터 얼마후인 이해 3월 31일 친히 유골발굴문제와 묘지이설문제와 관련한 명확한 방향과 방도를 밝혀주시였으며 해당 기관에 온갖 조건을 다 보장해줄데 대한 지시를 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지시에 따라 유골발굴과 묘이설사업에 사회안전성(당시)까지 발동되게 되였으며 평양석재공장에서는 즉시 새 묘지들에 쓸 비석과 상석제작사업에 달라붙게 되였다.

이 일이 본격적인 단계에 들어섰을 때 일군들은 또 하나의 격동적인 사실에 접하게 되였다.

그것은 위대한 장군님께서 묘지이설 및 유골발굴대상자명단을 보아주시면서 거기에 올라있지 않는 리광수와 김동원의 이름까지 친히 써놓아주시였던것이다.

리광수로 말하면 우리 나라의 신소설문학의 개척자이며 작가활동초기에는 좋은 작품도 내놓았고 한때는 조선독립을 절규하면서 상해림정에도 관여하고 림정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주필도 한 사람이였다.

그러나 후에 급격히 전향하여 일제가 강요한 《창씨개명》때 왜왕이 즉위한 고장의 산이름인 《가야마》를 본따서 선참으로 자기 이름을 《가야마》로 고치고 친일매국행위를 한 사람이였다.

그리고 김동원으로 말하면 일제때 조선사람으로서 일본의 중의원 의원자리에까지 앉았던 사람이며 8. 15후에는 극우익분자로서 온갖 못된짓을 다하던 끝에 리승만의 초대《국회》에서 부의장까지 했었다.

리광수, 김동원의 이름에서 혐오를 느낀 일군들은 이런 사람들을 애국인사들의 신성한 이름과 나란히 하며 묘를 써주는것을 고려할데 대한 의견을 제기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에 대한 보고를 받으시고 우리가 그들이 지은 죄를 몰라서 그러는것이 아니다, 그들이 인생말년에나마 북행을 했다는것은 우리를 따르려 했다는것을 말하는것이다, 어제까지 죄를 지었어도 오늘 개심하면 용서하고 안아주는것이 우리 수령님의 품이며 우리 공산주의자들의 도량이다, 그런 도량이 없이는 통일을 못한다, 그러니 그들의 묘들도 다른 인사들의 묘와 꼭같이 해주어야 하겠다는 말씀을 주시였다.

그리하여 일군들은 뜨거운 감격속에 묘지이설 및 유골발굴을 위한 사업에 본격적으로 달라붙었다.

유골발굴작업은 간단한 일이 아니였지만 일군들은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숭고한 뜻을 가슴에 새기고 전국의 방방곡곡에서 한구, 두구의 유골을 발굴이송하여 평양교외의 장지들에 정히 안치하였다.

그런데 묻힌 장소가 묘연하여 종시 찾을 길이 없는 대상들이 있었다. 그속에는 우리 나라의 관록있는 한학자인 정인보선생과 리광수 같은 사람들이 들어있었다.

사실 하도 오랜 세월이 흐르다보니 사망당시 그들과 동행한 사람을 찾아내는 일도 쉽지 않았고 찾아낸 경우에도 그들이 전쟁의 복새통속에서 묻은 자리를 쉽게 기억해낼수 없었다. 그럴수밖에 없었으니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동행했던 사람들도 그만큼 늙어 기억력상실을 피할수 없었던것이다.

일군들은 하는수없이 유해를 찾을수 없는 대상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위대한 장군님께 보고드리였다.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힘이 들더라도 마지막 한사람까지 다 찾아내야 한다고 하시면서 우리 나라는 동방례의지국이니 사람들이 주인없는 묘라고 해서 함부로 인멸해버리지는 않을것이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사회안전성(당시)에서 당시 고인들과 동행했던 사람들을 어떻게 해서나 찾아내도록 할데 대한 조치를 거듭 취해주시였다.

일군들은 위대한 장군님의 뜨거운 인간애에 고무되여 사회안전성의 방조밑에 끝내 정인보선생과 리광수의 유골을 발굴해냈다.

이 유골발굴작업과 관련한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전설과도 같은것이였다.

리광수는 원래 페결핵환자였다. 북행길에 있을 때 그 병이 심해져 1950년 10월 25일 그는 급히 만포병원으로 실려가던중 그만 달리는 차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때 그와 동행했던 사람들이 그를 길가의 언덕진 곳에 안장하였다.

일군들이 어렵게 찾아낸 당시의 동행자의 안내하에 그곳에 당도해보니 그곳은 그사이 농촌문화주택구역으로 전변되였고 묘지자리로 고증된데는 한채의 문화주택이 우뚝 서있었다. 워낙 봉분을 크게 세우지 못한데다가 폭격으로 그 일대가 평지로 되고말았으니 묘지가 집밑에 깔리게 되였던것이다. 그러니 유골을 발굴하자면 집을 헐어야 하였다.

이 사실을 보고받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꼭같은 문화주택을 다른 장소에 지어놓고 주인들을 이사시킨 다음 유골을 찾을데 대한 은정깊은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리광수의 유골은 이렇게 발굴되고 이송되여 평양시교외의 풍치좋은 자리에 다시 안장되게 되였던것이다.

정인보선생의 유골발굴과 관련한 이야기도 감동없이는 전할수 없는 그런 가슴뜨거운 이야기이다.

선생이 전쟁의 와중에 북행길에서 희생된 장소는 당시의 황해도 신막(현재의 황해북도 서흥)지방이였다. 역시 어렵게 찾아낸 사망당시의 동행자의 안내로 선생이 묻힌 곳을 찾았을 때 거기에는 일망무제한 강냉이밭이 펼쳐져있었다. 그곳 협동농장의 로인들에게 알아보니 미제공중비적들의 폭격만행으로 하여 전쟁후에 지금의 강냉이밭일대에서는 그 어떤 묘지의 흔적도 찾아볼수 없었다는것이였다.

결국 유골을 발굴하자면 그 넓은 면적의 강냉이밭을 다 뚜져야만 하였다. 그때는 수확계절전이여서 강냉이대들마다에는 팔뚝만 한 강냉이이삭들이 뿌직뿌직 소리를 내며 커가고있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와 관련한 보고를 받으시고 가을걷이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유골을 발굴할데 대하여 가르쳐주시였다.

일군들은 강냉이가을이 끝난 다음 넓고넓은 강냉이밭을 샅샅이 뚜져 마침내 정인보선생의 유골도 찾아내고야말았다.

그러면 정인보선생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였으며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께서 어찌하여 그에 대해 그토록 뜨겁게 마음을 쓰시였던가.

정인보선생은 우리 나라의 관록있는 한학자였으며 남조선국학대학 학장직까지도 가지고있었던 사람이였다. 그리고 공화국의 초대내각 부수상 홍명희선생과 사돈관계에 있는 사람이기도 하였다.

그와 홍명희선생은 일제시기부터 막역한 친우인 동시에 민족주의운동계렬에서 가장 가까운 동지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8. 15후 두 선생사이에는 정견과 리념에서 차이가 생겨 홍명희선생이 입북할 때 정인보선생은 서울에 그냥 남아있게 되였다. 그리고 《단선단정》후 리승만이 권유한 내무부의 감찰위원장 벼슬자리를 수락함으로써 그 착오를 확대시키는 결과를 빚어내고말았다.

물론 정인보선생이 초대감찰위원장자리에 앉은것은 리승만《정권》에 복무하기 위해서가 아니였다. 그 반대로 《범을 잡으려면 범의 굴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나름의 신념대로 사회적부조리와 싸우려는 결심에서였다.

다시말하면 리승만역도는 그런 명망있는 인사를 낚아내는것이 필요하여 그 벼슬자리를 주었던것이고 정인보선생은 그것을 역리용하면 자기의 뜻을 이룰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벼슬자리에 앉았던것이다.

그러나 량자는 곧 자기들 서로가 다 오산하고있었다는것을 깨달았다. 리승만은 정인보가 휘두르는 감찰의 칼끝이 오직 자기 측근만을 목표로 하고있다는것을 알아차렸으며 정인보선생은 또한 자기의 칼끝이 사회적부조리에 가닿을 때마다 자기가 리승만의 빈축을 산다는것을 감지하였다. 그들 량자의 모순은 이렇듯 불상용적인것이였다.

정인보선생은 이대로 나가는것은 무의미한노릇이며 결국에 가서 자기도 반민특위인사들과 같은 운명을 면치 못하게 되리라는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리승만《정권》에서의 탈퇴와 은둔생활로써 몸에 묻은 때를 씻어내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하였다.

그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런 속에서 조국해방전쟁이 발발하고 6. 28서울해방이 도래하였다. 하지만 이 해방은 정인보선생에게 정신적안정을 가져다주지 못하였다. 온 서울시민들이 공화국기를 흔들며 거리거리에서 인민군대를 열광적으로 환영하는 광경을 보았을 때 그는 자기에게 있어서 이 해방이 5년전의 8. 15해방과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는것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과연 이제 무슨 면목으로 평양으로 간 사돈 벽초와 재회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할수록 그의 고민과 괴로움은 더욱더 커갔다.

거기에다가 박헌영, 리승엽의 검은 마수가 암암리에 자기에게도 뻗쳐지고있는 사실이 감지되였을 때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반동파》, 《민족반역자》로 처단되게 될 생각을 하니 너무나도 기가 막혔다.

사실 그때 박헌영, 리승엽일당은 한사람이라도 위대한 수령님과 당의 두리에서 떼여내지 못해 모지름을 쓰면서 그 무슨 《토지조사위원회》라는 테로단체까지 뭇고 초혁명적구호밑에 이런 대상, 저런 대상에게 마구잡이로 칼부림을 하고있었다.

그자들은 《평화통일》, 《미군철수》를 절규하며 《국회》안에서 미제와 리승만도당을 반대하여 싸운것으로 해서 서대문형무소에서 령어의 몸이 되였다가 방금 풀려나온 김병회, 황윤호 같은 《국회》소장파의원들까지 련행하여 취조하고있었으니 정인보선생도 결코 례외로 될수는 없을것이였다.

지금에 와서 필자에게 생각키우는것은 모름지기 홍명희선생을 위대한 수령님의 품에서 떼여내지 못해 안달이 나 했던 놈들이 리승만《정권》에 일시 참여했던 그의 사돈의 《죄》를 선생을 모해하는 수단으로 리용하려 했을수도 있었다는 그것이다.

시시각각으로 압박감을 느끼면서 서울바닥에서 한동안 쫓기고 숨고 하면서 고통스럽게 지내던 정인보선생은 후퇴가 시작되기도 전에 마침내 서울에서 탈출하여 여러 뜻있는 동료들과 함께 북행길에 올랐다. 평양에 가서 부수상을 하는 사돈도 만나고 위대한 수령님앞에서 속죄하여 인생전환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북상중 복잡한 전란속에서 별세하여 초야에 묻힌채 오랜 세월 무주고혼의 신세가 되고말았다.

그간 부수상을 했던 사돈도 딸도 사위도 수두룩한 외손자들도 그의 유골을 찾아 다시 묻어주고 안식을 찾을수 있게 해줄 생각을 하지 못하고있었다. 오히려 딸도 손자들도 비록 일시적이나마 리승만《정권》에 참여한 그를 은근히 원망하고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와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런 정인보선생을 끝내 찾아주시고 그가 별세한지 근 30년이 되는 때에 그가 그토록 오고싶어했던 평양에서 안식을 찾을수 있게 해주시였던것이다.

여기서 묘지의 사돈과 대화를 나눈 홍명희부수상에 대한 이야기를 적으려고 한다.

정인보선생의 유해를 평양교외의 특설묘지에 이장한지 얼마 지나서 홍명희부수상이 묘소를 찾아왔다.

사돈님의 묘지를 한번 보고싶어서 나왔다는 그의 말에 한 일군이 정인보선생의 유해를 찾던 과정을 자상히 말해주었다.

그러자 홍명희부수상은 우리 수령님, 우리 김정일장군님 같으신분이 아니고서야 어찌 생각이나 할수 있는 일인가고 감탄을 금치 못해하면서 잘 다듬어세운 비석과 상석을 쓸어만지며 이렇게 말하였다.

《여보게 인보, 남쪽에 있었더라면 어찌 이런 훌륭한 명당자리에 누워있겠나. 서울에서는 날더러 공산주의자를 따라간다고 못마땅하게 여기던 자네도 내가 온 길을 따라왔으니 오래 못산것은 미국놈탓이고 인생의 마무리야 잘한셈이지. 암 잘한셈이야.》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2007년 9월 6일 정인보선생의 57회제사날에 그가 조국통일상을 수여받도록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그때 그의 유족들의 감격을 무엇이라 형언할수 있으랴.

사실 정인보선생이 북행길에서 변고가 없었다면 후날에 있은 《조선봉건왕조실록》번역을 위한 준비사업에서와 《조선봉건왕조실록》번역진을 키우는 사업에서 큰 공헌을 하였으리라는것은 의심할바 없다. 《조선봉건왕조실록》번역사업을 주도한 홍기문선생도 실은 정인보선생의 제자였으며 일찌기 그에게서 한문을 터득했던 사람이였던것이다.

재북인사들에게 돌려주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사랑과 은정은 무한대의 우주마냥 끝이 없는것이였다.

애국렬사릉이 건립되고 거기에 있는 모든 비석들에 새로 개발된 기술로 제작된 돌사진까지 부착되게 되자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또다시 재북인사들의 묘를 두고 마음을 쓰시였다.

그때까지 재북인사들의 묘는 1978년 1월에 있은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와 이해 3월에 있은 위대한 장군님의 지시에 따라 평양시교외의 삼석구역 원신리와 형제산구역 신미리, 룡성구역 룡추동 세곳의 풍치수려한 장소에 꾸려져있었다.

높다란 봉분, 큼직한 상석에 요란하게 세운 비석들은 옛날 량반고관대작들의 비석들에 못지 않는것이였다.

그러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2003년 6월 18일 재북인사들의 묘를 다시 잘 건설할데 대하여 해당 일군들에게 과업을 주시고 묘의 위치와 규모에 대해서는 물론 비석에 애국렬사릉에서 한것과 같이 돌사진까지 붙일데 대하여 일일이 가르쳐주시였다.

이렇게 되여 2004년에 룡성구역 룡연산 칠성봉에 바로 오늘과 같은 재북인사들의 묘역이 건설되였던것이다.

그리하여 이미전에 애국렬사릉에 안장된 김규식, 조완구, 조소앙, 오하영, 최동오, 류동열, 엄항섭, 윤기섭선생을 제외한 60여명의 재북인사들이 이곳에서 재회하여 함께 안식을 찾게 되였다.

나는 지금도 때때로 이곳 재북인사들의 묘역을 찾군 한다. 그리고는 재북인사들의 묘들도 돌아보고 내가 수년간에 걸쳐 각곳에서 떠다가 심어놓은 수종이 좋은 나무들도 가꾸어주고있다. 그러느라면 각이한 인생길을 걷다가 위대한 태양의 품에 안겨 영생의 삶을 누리고있는 이들이 마치 살아숨쉬는 군상처럼 나에게 안겨와 가슴뜨거워옴을 금할수 없다.

참으로 재북인사들의 묘는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께서 펴신 광폭정치, 인덕정치의 높은 봉우리이다.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광폭정치, 인덕정치는 남녘동포들에게 커다란 감명을 주고있으며 그들을 통일위업수행에로 크게 고무추동하고있다.

그렇다. 그저 민족이 있고 민족이 딛고선 땅덩어리가 있다고 해서 조국인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야 여기 재북인사들의 묘역에서 잠들고있는 인사들이 제나름의 신념을 안고 오랜 세월 여기저기에서 애타게 《조국》, 《조국》을 부르짖으면서도 그 조국을 찾지 못해 헤매였으랴.

일제강점 40여년간에도 백의동포들로 일컬어진 조선민족이 살아숨쉬고있었으며 그들이 발딛고 선 땅, 동북아시아 일각에 북쪽에서 남쪽으로 쭉 뻗은 삼천리강토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여기 룡연산 칠성봉에 누워있는 재북인사들은 그토록 절규하며 찾은 조국의 품에 그때에는 안기지 못하였다.

그들은 1950년 6월 28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조국의 품에 안길수 있었다. 그 품이란 바로 위대한 수령님의 품이였다. 그 품이야말로 그들이 끝모르는 수난속에서 그토록 애타게 찾던 조국의 품이였다.

그 품에 안겼기에 그들은 죽어서도 이 칠성봉에 있는 영생의 언덕에서 계속 살아숨쉬면서 찾아오는 혈육들과 동포들을 통일애국투쟁에로 고무하고있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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