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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협상파의 공세와 반동파의 발악 (리우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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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5,974회 작성일 15-07-16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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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협상파의 공세와 반동파의 발악  (리우갑)

 

리승만매국반역도당은 미제의 후원밑에 《단선단정》을 끝내 조작해냈으나 이것으로 해서 저들이 더욱 불리한 처지에 몰려들게 되리라는것은 미처 모르고있었다. 그것은 저들이 원내와 원외에서 동시에 혹심한 렬세에 빠져들었던데서 나타났던것이다.

우선 원내에서의 그들의 렬세를 보자.

이른바 《제헌의회》라는 초대《국회》의 총 의석수는 200석으로 정해져있었는데 폭압과 부정협잡속에서 선거가 치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리승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협회》는 55석으로서 27. 5%에 지나지 않았다면 반리승만성향을 띤 무소속의 의석수는 93개로서 총 의석수의 46. 5%에 달하였다. 극우익정당인 《한국민주당》도 크게 패하여 29석밖에는 따지 못하였다.

그러면 리승만일당의 원외에서의 렬세는 어떻게 나타났는가.

남조선에서의 《단선단정》과 1948년 9월에 있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창건이후 그에 대한 림정의 태도에 따라 8. 15이래 남조선에 나타났던 각양각색의 정치세력은 마침내 우익반동보수세력과 새로 등장한 남북협상파세력 그리고 비합법혁명세력의 3대정치세력으로 재편성을 보게 되였다.

우익반동보수세력은 리승만, 김성수따위를 우두머리로 하는 친일친미파, 민족반역자, 예속자본가, 지주, 반동관료배들을 위주로 한 정당, 사회단체들로 어중이떠중이세력이였으며 남북협상파세력은 력사적인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하였던 김구의 한국독립당, 김규식의 민족자주련맹 그리고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하고 서울로 귀환한 후 조소앙이 한국독립당에서 탈당하여 새로 조직한 사회당이였다. 그리고 비합법혁명세력은 남로당계통의 좌익세력과 중간정당, 사회단체들을 망라하는 세력이였다. 이 세력은 박헌영, 리승엽반혁명도당의 책동으로 하여 적지 않은 피해를 입어 약화된 상태에 있었으나 역시 반괴뢰투쟁에서 무시할수 없는 세력으로 되고있었다.

이렇게 놓고볼 때 애국과 매국, 통일과 분렬, 혁명과 반혁명의 력량대비는 2대1로서 역시 리승만일당의 렬세를 뚜렷이 나타내고있었다.

사실 5. 10단선을 견결히 반대한 남북협상파세력은 그것을 보이코트하는 립장을 취하고있었다. 그런데 리승만일당은 그것을 저들을 위해 《다행스러운 일》로 생각하고있었다. 그 까닭은 그런 보이코트로 하여 《국회》에서 반대파를 두게 되는 시끄러운 일을 애초 없앨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데 있었다.

물론 이런 속셈은 오산으로 되였다.

이른바 《제헌의회》라는 초대《국회》에 리승만의 주요적수인 림정계민족주의자들은 들어가지 않았으나 후에 반동보수세력이 《소장파의원》이라고 이름붙인 신진정치인들이 대거 모여들었던것이다.

200석의 《국회》의석가운데 그것의 거의 50%에 달한 93석을 점거한 세칭 무소속의원들이 바로 그들이였다.

원래 《국회》소장파의원들은 5. 10단선을 지지해서 선거에 출마한것이 아니였다. 국회에 들어가 교두보를 확보하고 합법적으로 분렬매국세력과 싸우자는 나름의 신념을 안고 선거에 출마한것이 바로 그들이였던것이다.

그들이 《국회》안에서 조직된 력량으로 리승만도당에 맞서 나섰던것은 특별한 의의를 가진 사변으로 되였다.

이 사실은 소장파의원들을 골간으로 한 무소속의원들의 다수가 남북협상파세력에 합세해나섰다는것을 시사해주었다. 결국 남북협상파세력은 급격히 확대되고 그 위력이 크게 높아지게 되였다.

《국회》소장파의원들을 위시로 한 무소속구락부 의원들은 걸음걸음 리승만반동파의 준동에 제동을 걸면서 도전해나섰다.

《국회》안에서의 소장파의원들의 첫 도전은 리승만이 월남도주자이며 친일친미파인 리윤영이란자를 《국무총리》로 내신한것을 기각해버린데서 시작되였다.

소장파의원들은 1948년 10월 13일 의원 40여명의 이름으로 된 외국군대철수안을 《국회》에 제출함으로써 내외여론을 비등시키는데 큰 작용을 하였으며 1949년 2월 4일에는 70여명의 긴급동의로써 재차 미군철거와 평화통일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바로 이러한 때 남북협상파세력의 통일촉진협의회와 사회당은 《국회》밖에서 미군철수를 요구하는 반미구국투쟁을 더욱 힘있게 벌렸다. 결국 리승만의 반동파는 원내와 원외에서 통일애국세력의 협공을 받게 되였다.

통일애국세력의 협공은 미군철수문제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소장파의원들은 통일애국세력의 지지성원하에 리승만도당이 려수군인폭동을 계기로 벌린 《보안법》조작을 지연시켰을뿐아니라 《헌법》부칙 101조를 정면에 내세우고 리승만, 김성수도당의 사회정치적지반을 이룬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처벌을 목적한 《반민족행위처벌법》의 심의를 내밀어 1948년 9월 7일에 《국회》에서 그것을 통과시켰을뿐아니라 이어 반동파의 준동을 제압하고 11월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기관설치법안》을 통과시키고 1949년 정초에 《반민족행위처벌법》이 마침내 발동되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에 따라 림정계요인인 김상덕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되였고 그아래 특별검찰부, 특별재판부가 설치되였는가 하면 반민특위직속으로 무장한 특별경비대가 조직되고 수많은 소장파의원들이 반민특위 위원으로, 특별검찰관, 특별재판관으로 발탁되였다. 이어 민족반역자, 친일파들에 대한 대량검거가 1949년 2월부터 개시되여 온 남조선땅을 흔들어놓았다.

여기서 가장 큰 타격을 받은것은 리승만도당이였다.

리승만역도는 반일망명객이랍시고 해방직후 환국하였지만 그때 그가 의거할수 있는 한뽐의 지반도 없었으며 그 누구의 동정도 받을수 없었다.

그때 그가 등댈수 있는 대상은 미군정청밖에 없었으며 그가 발판으로 발붙일수 있는 대상은 일제때의 친일파, 민족반역자들밖에 없었다. 그러니 리승만은 당시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에 대한 숙청을 수수방관할수 없었다. 결국 리승만반동파들은 공공연한 역습으로써 제놈들의 친일파, 민족반역자 비호행위를 감행하였다.

1949년 6월 6일 경찰에 의한 반민특위본부에 대한 포위압살과 반민특위직속 특별경비대의 무장해제 그리고 이에 이은 1949년 9월 《국회》에서 감행된 《반민족행위처벌법》의 페기등이 바로 그것들이였다.

미제의 사촉하에 리승만도당은 이에 앞서 남로당《국회》프락찌야사건을 조작하고 황윤호, 김병희, 박윤원, 김옥주, 최태규, 배중혁, 김약수, 신성균, 강욱중, 리구수, 로일환, 리문원, 서용길 등 13명의 소장파의원의 핵심인물을 무리로 체포하여 서대문형무소에 구금하였다.

《북진통일》을 《국시》로 정한 리승만반역도당은 통일애국세력과 광범한 민중의 평화통일공세앞에서 궁지에 빠져들면 들수록 정세를 더욱더 긴장시키고 전쟁접경에로 더욱더 내달았다.

리승만일당이 북침열을 얼마나 올리고있었는가 하는것은 당시 38°선이 지나간 남쪽의 곳곳에 《여기는 전선이다. 북진하자!》, 《오늘은 38°선, 래일은 평양!》, 《아침은 해주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등과 같은 호전적인 표말들이 우뚝우뚝 서 전쟁분위기를 고취하고있었는가 하면 1949년 한해동안에 남조선괴뢰군이 38연선에서 북반부지역에 대하여 감행한 무장침습사건이 무려 2 617건에 달했던 사실에서도 뚜렷이 나타났다.

리승만역도는 이에 머무르지 않고 1949년 9월 어느날 인천항에 기항한 미국전함 《센트 폴》의 갑판우에서 《우리는 3일안으로 평양을 점령할수 있는 준비를 갖추었으며 워싱톤으로부터의 북진신호만 기다리고있다.》고 폭언하였다.

바로 이런 광란이 고조되는 때인 이해 6월 김구는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경교장에서 백주에 괴한이 날린 흉탄에 맞아 절명하였다.

이것은 가장 엄중한 도발이였다. 김구암살이 감행된 시기를 보면 그때 평양에서 남북조선의 71개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의 참가하에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결성대회가 진행되고있던 때였다.

대회에서는 남북조선의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을 하나로 통합하였으며 12개 조로 된 선언서를 채택발표하였다. 선언서는 나라의 통일문제를 조선인민자신의 힘으로 해결할데 대한 근본립장을 밝힘과 동시에 남조선에서의 미제침략군과 그의 침략도구인 유엔조선위원단의 즉시 철수, 어떤 외세의 간섭도 없이 민주주의적원칙에서 남과 북을 포함한 총선거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선언서는 이밖에 총선거를 통하여 수립되는 립법기관이 헌법을 채택하며 중앙정부를 조직할데 대한 문제 등 제반 대책을 제의하였다.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결성대회에는 한국독립당 위원장으로서 김구도 초대되였다는것은 두말할것도 없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는 리승만도당과 박헌영일당의 방해책동으로 대회에 출석할수 없었다.

리승만은 바로 평양에서 남북조선의 정당, 사회단체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결성대회를 진행하고있을 때 자객을 발동하여 김구를 서슴없이 사살하였다. 이것은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애국세력에 대한 로골적인 도전이였다.

1949년 6월 26일이였다. 한낮때가 되여 돌연히 군복차림을 한 안두희란 놈이 경교장 2층 백범의 사무실에 나타나 그에게 공산주의에 동조하지 말라고 떠벌였다.

이때 백범은 《네가 내게 반동하느냐? 나에게 반동하면 국가민족에 반동하는거다.》라고 추상같이 호령하였다.

안두희는 미국제권총을 뽑아들고 그에게 4발의 총탄을 쏘았다. 그는 얼굴과 목, 가슴과 배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져 잠시후 마지막숨을 거두었다.

백범을 살해한 범인은 법정에서 그가 《단독정부》반대, 평화통일이름아래 공산당과 제휴, 남북정치협상에 의한 련립정부수립기도, 미군철수주장, 미국경제원조반대, 북조선찬양 등 《불온선동》을 하였기에 암살하였다고 진술하였다. 여기에서도 알수 있듯이 김구선생은 민족앞에 서약한 련공애국의 길, 통일의 길에서 자기의 최후를 마친것이다.

그가 희생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누구보다 가슴아파하신분은 위대한 수령님이시였다. 그이께서는 이 비보를 들으시자 너무나도 가슴이 아프시여 한동안 아무 말씀도 못하시였다.

《어떻게 하나 련석회의결정을 실행하겠다고 하던분이 돌아가다니, 그렇게 바라던 통일의 날도 보지 못하고 가다니? …》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비감에 잠기시여 침통한 음성으로 말씀을 이으시였다.

《참 가슴아픈 일입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미국놈이 쏜것입니다. 김구는 우리와 언약을 하고 나가서 미국놈을 반대해서 싸웠습니다. 그는 비록 늦게나마 자기의 과거를 뉘우치고 애국의 길에 들어서서 련공을 지지한 량심적인 민족주의자입니다. 아까운 분을 잃었습니다.》

그이께서는 평양에서 열리고있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결성대회에서 고 김구에 대한 조의를 표시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위대한 태양의 품에 안기여 반공으로부터 련공의 길, 통일애국의 길로 방향전환을 한 백범 김구의 한생은 그대로 민족성원들에게 민족대단합의 화원이 어떻게 꽃펴나고 거대한 통일의 대하가 어떻게 마련되였는가를 가슴깊이 새겨주었다.

김구에 대한 리승만일당의 비렬한 암살책동은 광범한 민중을 각성시키고 그들을 통일애국투쟁에로 더욱 크게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는 1950년의 5월 30일 《국회》의원선거에서 뚜렷이 나타났다. 2년의 임기를 가진 이른바 《제헌의회》(초대 《국회》)가 막을 닫게 되였을 때 리승만일당은 김구도 이미 제거했고 소장파의원들의 핵심들도 감옥에 처넣었으니 이런 유리한 환경하에서 2대《국회》선거에서는 기어이 초대《국회》에서의 렬세를 만회하고 무조건 《대통령》선출권과 《헌법개정권》을 장악할수 있도록 최소한 《국회》의석의 3분의 2를 따내려고 발악하였다. 그러면서 더욱 광란적으로 폭압과 부정협잡에 매달렸다.

그러나 선거결과는 저들에게 너무도 비참한것으로 나타났다.

남북협상파의 통일애국세력은 5. 10단선때는 보이코트로 나갔으나 5. 30선거때에는 방법을 바꾸어 선거에 참가하는데로 나갔다. 그것은 앞서 소장파의원들처럼 《국회》에 뚫고들어가 교두보를 확보하고 연단을 점거하는 방법으로 통일투쟁을 벌리기위해서였다. 그들의 새로운 방법은 혁혁한 성과를 달성하였다.

발표된 5. 30선거결과에 의하면 남북협상파, 통일애국세력은 관권과 금권이 란무하는 속에서도 위대한 수령님께서 제시하신 평화통일방안에 대한 해설선전의 힘으로 유권자대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210개의 총 의석가운데서 《대통령》선출권과 《헌법개정권》선에 가까운 126석을 획득하였던것이다. 당선자들가운데는 림정계인물들을 비롯한 남북협상파의 주요인물들인 조소앙, 윤기섭, 오하영, 조봉암, 안재홍, 원세훈 등이 들어있어 리승만도당을 아연케 하였다.

이와 반면에 5. 30단독선거로 구성된 괴뢰국회에서 리승만패당이 차지한 의석은 총 의석수의 22%에 지나지 않는 47석밖에 되지 않았다. 리승만의 심복들인 윤치영, 리인, 조병옥, 김준연, 백남훈, 김동원 등이 무리로 락선의 고배를 마셨다. 총적으로 보아 1대《국회》에 비해 2대《국회》에서 남북협상파, 통일애국세력의 의석수가 20여석이나 늘어난 반면에 리승만패당의 의석수는 원래의 렬세에서보다도 절반이나 더 줄어들었다.

남조선에서의 사태발전은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 제시하신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방안이 남조선인민들의 가슴가슴을 얼마나 억세게 틀어잡고있었는가를 웅변으로 보여주고있었다.

리승만역도의 입에서는 《살아남을 희망은 북침을 다그치는 길밖에 없다.》는 비명이 새여나왔다.

바로 이러한 때 위대한 김일성주석의 높은 뜻을 받들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는 확대회의를 열고 전 조선적인 총선거의 실시와 통일적최고립법기관의 창설, 북과 남의 민주주의적정당, 사회단체 대표자협의회의 소집 등을 발기한 호소문을 채택하였다.

조국전선중앙위원회는 이 호소문을 남조선의 제 정당, 사회단체들과 개별적인사들 그리고 서울에 있는 유엔조선위원단에 넘겨주기 위하여 6월 10일 자기의 대표 2명과 수행기자 1명을 38°선에 위치하고있는 경기도 려현역지점으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미제와 리승만역도는 호소문을 접수할수 있게 필요한 인원들을 내보내지 않았을뿐아니라 그 반대로 카빈총과 《M-1》소총, 나아가서는 경기관총과 중기관총까지 동원하여 려현역지점에 당도한 평화의 사절들에게 집중사격을 가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하였다. 이날 낮 2시 45분부터 시작하여 근 3시간동안 계속된 집중사격에서는 1만여발의 총탄이 발사되였다. 반통일분자들은 이날 문자그대로 하나의 어마어마한 전쟁행위로 평화통일의 사절들을 영접하였던것이다.

그날 려현역일대에 산재되여 경비임무를 수행하고있던 조선인민경비대 장병들이 인내성있게 참고 사격에 응하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더라면 반통일분자들의 이런 불한당적행위로 하여 그대로 전쟁이 일어났을는지 모른다. 원쑤들은 이에 머무르지 않고 이튿날 6월 11일 어떻게 하나 호소문을 전달하기 위하여 결사의 각오를 안고 38°선을 돌파하고 남하한 3명의 평화의 사절을 체포하는 횡포를 감행하였다.

이런 사태발전은 남조선민중의 격분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속에서 6월 12일 조소앙을 위원장으로 하는 사회당본부에서는 남북협상파 평화통일세력지도급인사들의 련합회의가 열렸다. 회의에는 조소앙을 비롯하여 최동오, 안재홍, 최일천, 조봉암 등과 윤기섭을 비롯한 5. 30선거에서의 무소속당선자들이 참가하였다.

회의에서는 《남북협상을 지향하는 국회》로 전환시킬 문제들이 심중하게 론의되였다. 이에서 초점으로 모아졌던 문제는 제2대 《국회》의장, 부의장 선출문제였다. 그것은 남북협상파-통일애국세력이 《국회》에서 《대통령》선출권과 《헌법개정권》까지 틀어쥘수 있는 3분의 2에 가까운 의석을 차지하게 된 조건에서 그것을 원내투쟁에서 활용하기 위해서는 《국회》에서 의장, 부의장을 자기편에 끌어넣는것이 매우 중요하였기때문이였다.

남북협상파-통일애국세력은 이어서 초대《국회》에서 의장을 한 신익희에게 주목을 돌렸다. 그것은 신익희가 비록 우익보수정당인 민주국민당소속이지만 일제때 상해림정에도 관여한바 있던 민족주의자로서 일정하게 민족적량심을 지니고있다는 점과 그가 2대《국회》에서 23석밖에 가지지 못한 소수파로서 의장직에서 떨어지게 되리라는 위구심에 사로잡혀있을것이라는 점을 고려하였던것이다.

그런 조건에서 2대《국회》개원과 함께 있게 될 의장선거에서 평화통일세력의 무소속계의석에서 70표정도를 신익희에게 넘겨주어 그의 당선을 도모케 하고 그대신 《국회》의장이 된 신익희가 앞으로 남북협상파계의 의원들이 평화통일결의안을 제출할 경우 그것을 옳게 처리하도록 신익희와 제휴할 안을 채택하였다.

이에 따라 6월 19일에 열린 개원《국회》에서는 소수파에 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익희가 과반수의 찬성표를 얻어 《국회》 의장으로 재선되고 조봉암이 130여표의 압도적다수표로 부의장으로 당선되게 되였다.

이리하여 미제와 리승만역도가 저들의 침략 및 매국정책의 방편으로 써먹기 위해 그토록 기대를 걸고 조작했던 제2대 《국회》는 문자그대로 남북협상파-통일애국세력의 수중에 장악되고말았다.

이러한 시기인 1950년 6월 19일 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위대한 수령님의 높은 뜻을 받들고 최고인민회의와 남조선《국회》를 단일한 전 조선립법기관으로 련합하는 방법으로 조국의 평화적통일을 실현할것을 총적내용으로 하는 《평화적조국통일추진에 대하여》라는 결정을 채택하여 남조선 제2대 《국회》에 제의하였다.

이 제의는 《국회》를 장악한 남북협상파-평화통일세력을 크게 고무하였다. 2대《국회》에 들어가있는 평화통일세력의 핵심인물들은 곧 자리를 마주하고 대책을 강구하였다.

그들은 6월 19일부터 한주일간 진공적으로 공작을 벌려 남북협상파의 평화통일결의안을 지지찬동하는 의원의 수를 《국회》의원 과반수이상 확보하고 그에 기초하여 6월 26일 월요일에 《국회》가 속회될 때 긴급동의로 통과시킬데 대한 문제와 공화국 최고인민회의가 채택한 6월 19일부 결정 《평화적조국 통일추진에 대하여》를 전폭적으로 지지할데 대한 결의안도 긴급동의의 방법으로 전격통과시킬 방책을 세웠다.

당시 북으로 쏠리고있는 민심과 《국회》내의 력량관계를 놓고볼 때 남북협상파-통일애국세력이 제출하려던 2개의 상기 결의안들이 통과될 전망은 아주 확고한것으로 되여있었다. 그렇게만 되였다면 남조선인민들의 평화통일을 위한 투쟁에서는 획기적인 국면이 열려지게 되였을것이다.

그러나 미제는 리승만역적도당을 내몰아 그 하루전인 6월 25일 일요일에 침략전쟁을 일으키고 남조선인민들의 거족적인 통일을 위한 전진운동에 차단봉을 내렸다.

그리하여 남북협상파-통일애국세력이 《국회》에서 벌리려던 일대 공세는 한순간에 무산되고말았다. 그들은 미제와 그 주구 리승만도당에게 증오와 저주를 보내면서 가슴들을 쳤다.

남조선인민들의 통일운동에 차단봉을 내린 미제의 죄행이 어찌 이것이 처음이고 또한 마지막이였겠는가.

그 실례를 들자면 끝이 없을것이다.

한 실례만을 여기서 더 들어본다.

전후 남조선인민들의 통일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계기를 열어놓았던것은 1960년의 4. 19인민항쟁이였다. 리승만《정권》을 타도한 영웅적남조선청년학생들과 인민들은 통일운동을 계속 확대발전시켜 1년만인 1961년 5월에 이르러서는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격동적인 구호를 들고나와 삼천리강산을 진감시켰다. 북의 청년학생들도 곧 큰 대오를 뭇고 막 남하하려 하고있었다. 그때 온 세상 사람들의 시선이 판문점에 집중되고있었다. 만약 그때 남북학생들의 판문점만남이 이루어졌다면 분렬의 장벽은 금시에 무너질 판이였다.

그런데 한끝에서 북상의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다른쪽에서 남하의 거보를 떼려는 순간 남조선에서 력사의 반동이 일어났다. 그것이 세칭 5. 16군사정변이라는 력사의 반동현상이였다. 그것으로 해서 남북청년학생들의 판문점만남은 무산되고 남조선은 단숨에 반통일의 복마전으로 변하고말았다. 이런 사태를 빚어낸 범죄의 원흉이 미제였다는것을 까밝히는데는 구태여 많은 자료를 동원할 필요도 없다. 다만 여기서 2개의 자료만 인용해본다.

5. 16군사정변당시 미중앙정보국장직에 있던 덜레스는 1964년 5월 3일 영국의 BBC방송에 출연하여 늘어놓은 넉두리에서 이렇게 실토하였다.

《내가 재임중 미중앙정보국의 해외활동에서 가장 성공한것이 바로 남조선의 5. 16쿠데타였다. 만일 그때 미국이 속수무책으로 방관만 하고있었더라면 민중은 통일을 요구하는 폭도들을 지원하였을는지 모른다.》

한편 5. 16군사정변이 있은 때로부터 40여년이 지난 2002년 1월 25일 《KBS》는 5. 16정변의 일익을 담당하였던 김종필이 정객들을 위한 오찬회석상에서 1961년 5월 당시 미국측이 장면 《정권》으로는 《북한》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판단아래 그 《정권》을 끝장내려는 계획을 추진하고있었다고 하면서 그 계획에 따른것이 바로 5. 16군사정변이였다는것을 실토하였다고 보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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